전홍기혜 ― 〈프레시안〉 기자. 공저 《한국의 워킹푸어》, 《아이들 파는 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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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사 H. 오 지음, 이은진 옮김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뿌리의집, 2019년)
2017년 5월 21일, 40대 초반의 한 남성이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 1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미국으로 입양된 지 27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정신병원과 감옥 등을 전전하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던 필립 클레이 씨였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2019년 현재까지 어릴 때 국제입양됐다가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귀환한 입양인 세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얼마나 많은 입양인들이 성인이 된 후 한국에 돌아와 장·단기로 거주하거나 추방된 상태로 머물고 있는지, 공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이제 30~40대에 이른, 1970~1980년대에 외국으로 대거 입양된 한국 출신 일부 입양인들이 극단적 비극으로 내몰리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할 뿐이다. 이는 입양 당시는 물론 입양 이후의 삶이 결코 평탄치 않았음을, 그럼에도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생존해온 입양인들 중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와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절망하게 됐음을 방증한다. 이들의 죽음은 국제입양이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응답해야 할 지금 당장의 중요한 인권문제임을 깨우쳐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혼혈이거나 비혼모의 자녀라고, 장애가 있거나 부모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1953년 이후 한국은 약 20만 명의 아이를 해외입양 보냈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어선 2019년 현재까지도 한국은 자국 아동의 일부를 키울 형편이 되지 못한다며 미국 등으로 입양 보내고 있다(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8년 303명의 아동이 해외로 입양됐다).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입양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면서까지 던지고 있는 질문들을 외면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입양된 나라에서 장관이 된 입양인,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된 입양인 등 ‘성공’한 입양인들의 이야기에 환호하거나, 수십 년 만에 한국의 친생 가족을 찾은 입양인에 대한 뉴스를 보며 감격스러워한다. 하지만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양부모의 잘못으로 미국 국적을 획득하지 못해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양부모의 학대로 인해 사망한 입양인, 정체성 혼란의 문제 때문에 입양 보내진 나라에서 자살한 입양인 등 국제입양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대다수의 한국 언론은 입양은 원가족의 해체, 즉 가족의 이별에 기반한 일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감정적인 소재로만 국제입양을 바라보고 있다.
독일과 일본 대 한국
필자는 2017년 5월 필립 클레이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썼고, 그 기사를 보고 서울대학교에서 국제입양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경은 박사(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가 전화를 했다. 그는 내게 한국의 국제입양에 대해 좀더 심층적으로 취재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했다. 필자와 이경은 박사,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화해를위한해외입양인모임(TRACK)’ 대표, 이렇게 셋이 6개월 넘게 한국의 국제입양에 대한 심층 기획기사를 취재, 보도했다. 또 이 내용을 바탕으로 《아이들 파는 나라》(오월의봄, 2019)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필자가 직면한 ‘사실’은, 현재와 같은 형태의 국제입양은 사실상 아동 송출국 한국과 수용국 미국이 합작해 만들어낸 제도라는 것이다.
그 역사적 근원을 파헤친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가 바로 그 책이다. 《아이들 파는 나라》가 어떤 사회적 동력이 작용해 한국이 최대의 아동송출국이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책은 최대 수용국 미국사회에 방점이 찍힌 책이다.
인종 간의 해외입양은 점령군이었던 미군의 장기 주둔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군사정책에 의해 이뤄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이 주둔했던 독일과 일본은 각각 1974년과 1972년까지 미국에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보낸 5대 국가 중 하나였다.
이 책의 저자 아라사 H. 오는 미국 보스턴칼리지 역사학과 부교수로 인종, 성별, 혈연에 기반한 미국의 이민사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그의 책은 타인의 자녀를 품는 가장 이타주의적 행위로 여겨지는 해외입양이 실은 그것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전쟁, 경제개발,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 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에서도 미군 병사와 현지 여성들 사이에서 ‘GI베이비’들이 태어났다. 독일과 일본에서 전쟁의 패배와 굴욕을 상징하는 ‘GI베이비’들의 존재에 대해 두 나라는 처음에는 미국인들이 나서서 ‘자기네 동족’을 입양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생모들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반대여론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외입양이 중단됐다.
일본정부는 이 아동들을 인정하는 차별금지 정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일본에서 혼혈아를 키우는 미혼모들이 한국에서 혼혈아를 키우는 미혼모들보다 정부와 비정부기구로부터 사회적·재정적 지원을 더 많이 받았다.
전쟁 직후 독일과 일본에서 발생했다가 사회적 안정을 되찾은 뒤 중단된 해외입양이 한국에서는 왜 2019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부분적으로 답하자면, 오리건주 출신의 벌목꾼이자 농부였던 해리 홀트 같은 지도자가 한국에만 있었기 때문이다.…한국정부는 입양과 이민 관련 법을 개정하고 입양기관을 설립하여 홀트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는 곧 한국 아동 입양사업을 좌우했고, 지금은 세계 유수의 국제입양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어떤 의미에서 해리 홀트는 해외입양산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위대함을 알리는 수단, 해외입양
한 불쌍한 생모는 사무실에서 발작을 일으켰다오. 아이 엄마는 아이가 미국으로 간 뒤에도 만날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인연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말에 절망했다오.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지요. 아기는 아직 젖도 못 뗀 상태인데 그 어린 것을 단념해야 한다는 생각에 울고 또 울었소.
―《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 홀트아동복지회, 2005
해리 홀트가 부인인 버사 홀트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이다. 홀트는 ‘대리 입양’(입양 부모들이 아동의 출신국을 찾아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입양기관 등 대리인이 입양 절차를 대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입양)과 ‘전세 비행기’(100명이 넘는 입양 아동을 한번에 이동시키기 위해 동원됐다)를 고안해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엽기적이기까지 한 홀트의 구상이 현실이 된 것은 이승만 정부가 정부정책으로 홀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 아동 입양은 곧 해외입양을 의미하게 되었고, 이 관행이 전 세계 다른 송출국과 수령국에 퍼지면서 오늘날 수십억 달러 규모의 세계적 산업이 탄생했다.
하지만 입양은 상품을 돈과 맞바꾸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입양을 추동하는 힘은 돈만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는 현재 해외입양은 서로 연결된 구조와 이념의 집합, 즉 ‘해외입양복합체’로 이뤄져 있다고 지적한다. 입양기관, 이민 법률, 사회복지 절차 등은 구조에 속한다. 해외입양복합체의 ‘이념’에는 인종 논리에 기반한 민족주의, 인도주의, 반공주의, 종교적 신념 등이 담겨 있다. 저자는 “기독교 이념을 신봉하는 미국인들에게 해외입양은 인종차별과 공산주의를 박멸하고 미국의 위대함을 널리 알릴 기회였다”고 지적했다. “한국 아동 입양 이야기는 어떻게 냉전의 국제정치가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국내 문제이자 집안 문제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과 미국 간의 국제입양을 통해 만들어진 ‘모델’은 1970년대에 베트남과 중남미, 1980년대에 인도, 1990년대에 루마니아, 러시아, 중국으로 퍼졌다.
한국에서 해외입양은 국가가 주도한 산업이었다
박정희의 군사독재 아래서 한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 중 하나로 부상했고, 그와 동시에 해외입양은 국가산업이자 한국 아동복지 정책의 영구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혼혈 아동의 탈출구로 출발했던 입양사업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장애 아동, 가난한 집 자식, 미혼모 자식 등 한국이 돌볼 수 없거나 돌볼 생각이 없는 아동을 외국으로 치우는 통로로 바뀌었다.…해외입양 산업은 한국의 ‘경제 기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외화를 벌어들였고, 힘 있는 서구 동맹들과의 우호를 증진했고,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안전밸브 기능을 했고, 토착 사회복지 기관들을 개발해야 하는 정부 부담을 상당부분 덜어주었다.
한국은 해외입양을 통해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해외입양을 강력하게 추동시킨 힘은 가부장적 민족주의였다. 전쟁 직후 혼혈 아동은 ‘아버지의 나라’로 돌려보낸다는 명분으로 내보내졌다. 입양은 미혼모와 그 자녀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이었다. “국가와 사회가 미혼모와 그들의 자녀를 지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해외입양이 그 틈을 메웠다.” 2019년 현재도 입양 아동의 90% 이상이 미혼모 자녀다. 한국에서는 미혼모와 그 자녀에 대한 차별이 사법제도, 사회제도, 문화체계 내에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한다.
1960년대부터 한국 입양산업은 대규모 근대화 사업과 더불어 효율적인 사업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에는 투명성, 속도, 전문성 덕분에 해외입양의 최적 표준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 기적이 사실은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이뤄졌듯이, 높은 평가를 받은 해외입양산업 역시 가장 취약한 사회구성원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결과였다. 이는 가난한 가정, 미혼모, 외국에 입양된 아동들 얘기다.
해외입양은 한국전쟁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이 어떤 ‘국가’인가를 되돌아봄에 있어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어서고도 자국의 아동을 다 품지 못하고 해외입양을 보낼 만큼 ‘가난한 나라’라는 이 서글픈 자기인식에서 한국, 한국인은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