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부가 있는데, 그들에게는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하나 있다. 그 아이는 희귀한 유전적인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상 증세 없이 잘 지내고 있지만, 그러나 18세쯤 되면 그 질환이 발현되어 점점 심각한 고통과 여러가지 부작용들을 겪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그의 일생은 단명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유전적인 질병이 실제로 발현되는 것을 미리 차단할 수 있는 의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100% 차단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지금이라도 지체하지 않고 당장 시술을 한다면 그 아이가 커서 당할 고통을 상당한 정도로 경감해줄 의술이 개발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아직 실험적인 의술이어서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꽤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그 비용을 감당하자면, 이 부부는 예를 들면 자기들 소유의 승용차를 처분하고 앞으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로 한다든지, 휴가 때면 으레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취미생활을 포기한다든지 등등, 오래된 생활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하면, 아이가 커서 겪게 될 고통이 반드시 참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것이 될지 어떨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다. 그런 불확실한 전망 때문에 그들이 익숙해져 있는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한다는 게 과연 옳을까, 그것은 지나친 자기희생이 아닐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이 부부는 아예 미래에 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냥 관성에 의지하여 종전대로 살아가는 편을 택하기로 한다. 뭔가 마음 한구석에는 꺼림칙한 느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위의 에피소드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최근호에 실린 “아이들의 분노는 아직 충분치 않다”라는 논설에 나오는 가상의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기후변화라는 파국적 재앙이 임박해 있는데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미온적이거나 소극적인 반응을 리얼하게 풍자하고 있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슈피겔〉의 필자는, 이 가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부모가 자신들의 자식이 나중에 성장하여 실제로 큰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혹시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자식이 겪을지 모르는 미래의 고통에 대한 대비보다도 자동차 운전이나 해외여행에 의한 쾌적함이나 즐거움이 그들에게 더 중요했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물론, 〈슈피겔〉에 이런 글이 실린 것은 금년 3월 15일을 기점으로 세계 전역에서 금요일마다 10대 청소년들이 주요 도시들의 광장으로 집결하여 데모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학교수업을 거부하고 광장으로 나와 시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어른들을 향하여, 청소년들은 자기네의 시위가 통상적인 시위처럼 주말에 행해진다면 누가 자신들에게 주목을 할 것이냐고 항변하면서, “우리들의 미래를 뺏지 말고, 제발 책임 있게 행동해주세요”라고 절규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이토록 절절한 목소리를 내며 가두로 나선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작년 여름 이후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계속해온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에게 열렬히 공감하고, 그와 행동을 같이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 두세 차례 국제 회의장에서 행한 감동적인 연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툰베리의 메시지는 지금까지 있어온 어떠한 환경운동가의 그것보다 더 간결·명료하면서도 듣는 사람의 심금을 강력히 울리는 힘을 갖고 있다. 겨우 여덟 살 때부터 이 세상에 ‘환경위기’라는 엄청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이대로 가면 자기 또래들에게는 아예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 어린 나이에 우울증을 앓고 자폐증까지 갖게 되었다는 이 소녀의 이야기를 한번이라도 들으면, 양심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면, 우리들 중 마음이 아프지 않고, 깊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은 더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지구사회는 곳곳에서 갈수록 빈발하는, 그리고 갈수록 혹심해지는 가뭄과 홍수, 태풍과 폭풍, 대규모 산불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데다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벌과 나비 등 곤충들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수많은 종들의 멸종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남북극의 빙하 외에 히말라야와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그리고 안데스산맥의 봉우리에서도 만년설이 급속히 녹아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빙하와 만년설을 발원지로 하는 주요 하천들에서 언제 물이 마를지 모르고, 따라서 그러한 하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세계 인구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의 운명이 갈수록 위태로워져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기막힌 사태인데, 과학자들 중에는 이보다 더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늘에서 꽤 오래전부터 뭉게구름을 보기가 어려워졌지만, 그 하늘에서 아예 구름 한 점도 볼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는 단지 온난화를 초래할 뿐만이 아니라, 기류의 순환, 해류의 순환, 물의 순환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기는 지금 세계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 중의 하나로 등장한 대량 난민 현상만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중동지역의 불안한 정치 정세와 전쟁이 그 원인이라고 믿고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혹심한 가뭄에 따른 대규모 기아 사태가 핵심적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이들 지역에서 혹독한 가뭄이 장기화되고 있는가? 이는 기후변화를 떠나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한반도의 미세먼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한반도는 남북의 화해·협력,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 그보다 더 긴급한 것은, 이 땅에서 더이상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극심해진 미세먼지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끔찍한 환경적 재앙이 발생한 데에는 서해안에 밀집돼 있는 화력발전소들과 온 국토를 꽉 채우고 밤낮없이 매연을 뿜어내는 차량들, 그리고 ‘중국’이라는 요인도 있지만, 기후변화에 의한 대기 정체 현상도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요인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토록 중대한 의미를 가진 기후변화인데도, 왜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일까. 물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능한 한, 물자를 절약하고,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생활을 위해서 다양한 궁리를 하고 몸소 실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개인 혹은 소집단에 의한 선의의 노력은 그 자체 찬양받을 만한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이러한 개별적·분산적 노력만으로는 너무도 엄중한 국면에 처한 오늘의 생태적 위기상황을 극복해나갈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하다. 지금 세계의 여러 곳에서, 현재 지구의 환경적 위기는 제2차 대전 때보다 더 심각한 비상사태로 간주해야 할 상황이며, 따라서 전쟁 상황에서 국가가 취하는 수준 이상의 비상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도 시민들의 생태적 감수성과 의식이 먼저 깨어나고, 그와 더불어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의 변화가 동시적으로 병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려진 《문명의 붕괴》(2005)라는 책에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어떤 사회나 공동체가 붕괴하는 데에는 꼭 그렇게 돼야 할 필연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존적 위협에 직면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의 결여”가 그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여러 역사적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뻔히 알면서 고의적으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는 왜 멸망의 길을 택하고, 끝내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던가. 그에 대한 가장 쉽고 간단한 대답은, 타성적인 습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해외여행을 즐기는 것 그 자체는 나무랄 데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생활스타일이 필연적으로 화석연료 소비의 증가를 초래하고, 대기를 더럽히며, 기후변화를 멈추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것을 전혀 모르지 않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마설마하면서 오래된 습관을 고치지도, 포기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습관을 변경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흔히 새로운 기술에 기대를 걸고, 이를 위해 더 많은 돈과 에너지를 투입하려 한다. 즉,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온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원인이 되는 요소를 더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근대가 발흥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배해온 핵심적인 가치, 즉 성장논리야말로 결국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실존적 위협’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은 자연자원이 고갈되어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도 계속적인 성장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무리를 감행하여 성장을 계속 추구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전면적인 생태적 파국과 전쟁 등등, 나락일 뿐임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올바른 선택’을 하자면, 우리는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것이‘풍요로운 삶’인가를 판별하는 새로운 척도, 즉 우리가 섬겨야 할 ‘핵심적 가치’를 근원적으로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비록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최악의 비극을 막으려면, 이제부터 우리는 경제성장이라는 주술(呪術)을 깨끗이 청산하고, 모든 생활물자를 고르게 나눈다는 ‘도덕적 경제’를 새로운 삶의 원리, 사회의 핵심 가치로 섬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도덕적 경제란 따지고 보면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근대 이전의 민초들의 공동체에서는 어디서든 견고한 삶의 원리가 되어 있었다. 원래 도덕적 경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원초적인 정의의 감각이었다. 즉, 공평·공정하지 못한 경제의 운용과 분배야말로 도덕적 경제의 원리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악이었던 것이다.
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해왔듯이, 기후변화는 단지 화석연료 채굴과 사용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화석연료를 무분별하게 채굴하고 소비하도록 강요하는 시스템, 즉 전체 인구 중 1%(혹은 10%)의 극소수 부유층이 전제적(專制的)으로 지배하고 있는 체제하에서 끝없는 성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구조를 혁파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위기이다. 따라서 기후변화라는 것은 단순한 환경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경제적 불의 및 부조리와 맞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근본적인 ‘변혁’에 적대적인 기득권세력과의 격렬한 정치적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미래세대들이 지금 우리들에게 보내는 신호는, 그러한 싸움에 우리가 결연히 임함으로써 하루빨리 이 절망적인 시간을 희망의 시간으로 바꿔달라는 간절한 호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