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야간 풍경을 촬영한 사진에 대해서 미국인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을 나는 수도 없이 들었다. 남한이나 일본 지역이 밝은 빛을 뿜고 있는 것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한반도 북쪽 지역이 캄캄한 어둠에 쌓여 있는 모습은 북한이 얼마나 고립되고, 억압적이며 가련할 정도로 낙후된 경제 상태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그들이 말하려는 뜻은 명확하다. 즉 밝게 빛나고 있는 남한이야말로 진보와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진보와 민주주의를 나타내는 ‘빛’, 그리고 독재와 무지를 표상하는 ‘어둠’. 이 극히 대조적인 모습은 이를 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학적으로 완벽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어서 누구든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오늘날 남한에서는 그 어떤 언론, 학자, 정치인도 위와 같은 메시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진보파 정치인들은, 북한 사람들이 고용기회를 얻고, 남한 사람들도 북한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천연자원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북한과 협력하여 개성공단과 같은 프로젝트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파들은 북한은 독재체제로서 남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북한이 우선 국제 시장에 완전히 문호를 개방하고, 모든 핵 설비에 대한 완전한 검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한의 진보파나 보수파의 주장이 가정하고 있는 것은 상호 간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의 생각은 남한이 더 선진적인 사회이며, 장래의 북한은 가급적 남한처럼 되어, 예컨대 인민들이 훨씬 더 큰 국민소득(GDP)을 누리고, 자동차를 몰며,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을 가지고 널찍한 주택에 살면서, 온 세계에 ‘케이팝’이라는 상품을 팔아먹을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물론 북한이 타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 북한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억압적인 지배체제는 신화가 아니다. 그러나 남한에서 12년 동안 살아본 사람으로서, 나는 이곳 남한도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은 자살률, 오염된 공기, 학교에서의 무자비한 경쟁, 젊은이들이 느끼는 깊은 소외감, 수입된 식량과 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 엄청난 수의 빈곤 노인 등등, 남한 전역을 통해서 깊고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흔히 남북한에 관한 공식적인 이야기의 그늘에 가려 있는 두 개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남북한을 볼 때, 높은 상공이 아니라 땅바닥에서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많은 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즉, 그들이 북한의 작은 채소시장을 지나갈 때, 혹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는 호텔의 소박한 장식을 보거나, 평양시민들의 꾸미지 않은 거동에 마주쳤을 때, 거기에는 남한이 잃어버린 매우 중요한 것들이 남아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말을 하는 나의 남한 친구들은, 북한 여성들은 남한의 사치품들을 갖고 있지는 않을지 몰라도, 화장을 하거나 다른 여성들과 소비경쟁을 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했다. 브랜드 의류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것이다.
남한 사람들은 평양 거리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에서 품위를 느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서 한국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상기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남한에는 가족 간에, 그리고 공동체 성원들 간에 지금보다 훨씬 더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자동차도 없고, 휴대전화에 중독된 젊은이들도 없으며, 필요하지 않은데도 이윤을 위해서 물건들을 사라고 부추기는 끊임없는 광고도 없는 사회―이러한 북한의 모습은 이제는 잃어버린 한국문화의 진면목의 일부를 환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한의 언론이나 우리가 흔히 북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완전히 잊고 있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남한의 언론에 등장하는 북한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경제성장, GDP, 생활수준, 생산과 소비에 관련된 문제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북한은 선진국, 특히 남한에 비해 구제불능일 정도로 너무도 낙후된 사회이다. 여기에는 남한이 ‘큰형’이 될 수 있고, 북한 사람들에게 ‘선진적’이고 ‘현대적’인 사회가 될 방법을 가르칠 수 있다는 자세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주관적이고,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남한 사람들은 낭비적인 자원소비가 좋은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즉 좀더 크고, 과도하게 난방이 된 주택에 살면서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 게 ‘진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마치 달을 향하여 기도를 하면 비가 내릴 거라거나 거머리로 피를 빨아내게 하면 병이 나을 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 따르면, 소비에 초점을 둔 행동은 깊은 소외감을 일으키고, 자살률을 증가시키며, 물질의 남용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깊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의 앞날에 대한 그러한 가정, 그리고 남한이 그런 식으로 성공해왔다는 가정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즉 근거 없는 가정과 ‘현대성’이라는 신화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 결과, 남한 사람들은 가족 간에도 심한 스트레스와 좌절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믿고 있다.
위성사진에 찍힌 야간의 한반도 이미지를 좀더 과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이미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빛과 어둠의 관계는 오히려 반대되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
이데올로기나 이익 관념, 혹은 모호한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적 분석에 근거한 전문가들의 압도적인 의견에 따르면, 지금 인간은 지구온난화라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속도로 간다면, 인간이라는 종(種)이 절멸을 가까스로 면할 수 있다면 다행일 거라는 것이다. 지구의 기후에 파국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그에 따른 종의 절멸 현상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수많은 보고서와 책들이 나와 있다. 우리는 서울에서도 이미 모기들이 12월을 넘어서 생존하고 있고, 꽃들이 1월에 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빠르게 일어날 생명위협적인 변화의 시초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상황을 이런 식으로 내버려둔다면, 바다는 더워지는 것과 동시에 점점 산성화되어 어류는 절멸할 것이며, 대부분의 육지는 생물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먹을거리는 수입에 의존하면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제품들의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남한은 완전히 궤멸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남한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명확하다. 남한은 에너지 소비와 검약한 생활방식이라는 면에서 북한을 닮을 필요가 있다. 남한은 에너지 낭비를 멈추고 밤중에는,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래왔듯이,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한다. 남한의 모든 아파트 건물에는 쓸데없는 빛이 사라져야 하고, 상업건축물의 네온사인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과잉 난방을 극적으로 줄이고, 대부분의 건물에서 보이는 높은 천정과 콘크리트와 유리와 강철 외장으로 구성된 낭비적인 디자인을 끝장내야 한다. 남한은 한반도의 역사 대부분을 통해서 특징적인 삶의 형태였던 검소함과 소박함의 전통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한의 밤은 어두워져야 한다. 시민들은 도시의 휘황찬란한 야경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입된 연료가 태워지고, 화석연료로 가동되는 발전소 때문에 대기가 얼마나 끔찍하게 오염되고, 우리의 아이들의 미래를 파괴하는 지구온난화가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를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좀더 깊은, 숨겨져 있는 비밀이 하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개발도상국’들의 누추한 대중과는 달리 현대적인 선진사회의 시민으로서, 그리하여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살기 위해서는 한국이 계속해서 성장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갈수록 더 많이 소비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신화에 세뇌돼왔다. ‘현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온 삶의 목표였다. 그러나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자연자원을 낭비함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고 우리의 아이들의 운명을 망쳐 놓는다면, 그 현대성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북한은 물론 수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남한은 끝없이 소비를 늘리고 고속도로와 값비싸고 낭비적인 아파트들을 지을 계획을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북한의 저에너지 소비 생활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말을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남한의 현대성과 높은 소비수준은 하나의 영예의 표지, 즉 선진국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지로 비칠 것임이 분명하다. 소비는 경제 상태를 측량하는 주된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사람들이 소비를 적게 한다면(그리고 에너지를 적게 쓴다면), 성장률은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후변화 때문에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면, 오늘날 언론들이 말하고 있는 ‘소비’ 따위에 대해 대체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우리는 화석연료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즉각 중지해야 한다. 밤 내내 남한을 휘황찬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빛들이 문화적 진보의 표시로 간주돼서는 안된다. 그 빛들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희생시키고, 우리가 오직 순간을 위해서만 사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어둡고 위험한 게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마다의 사슬에서 풀려나
가족과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책을 읽고, 편지와 에세이를 쓰고, 숲길을 걷거나 연극이나 음악공연을 하는 것으로써 우리는 무한한 의미와 깊이를 가진, 영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다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수많은 스마트폰도, 훤히 불이 밝혀진 ‘스타벅스’ 카페도, 혹은 일회용 플라스틱 장난감도, 컵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소모적인 행위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준다.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른바 현대적이라거나 선진적이라거나 하는 개념이 최우선적인 목표가 되는 차원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인간다움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어떻게 하면 보람 있고, 자기실현적인 삶을 살면서 사회에 공헌할 것인가?
나는 북한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더 자유롭게 살고, 좀더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오늘날 남한 전역을 뒤덮고 있는―그리하여 한때 시민들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던 가족 소유 가게들을 파괴하고 있는―편의점에는 자양분이 풍부한 식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남한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정신없이 소비하도록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사슬들에서 풀려나기를 바란다. 소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끝없는 경쟁이라는 야만적인 문화 때문에 친구들과 가족으로부터 점점 더 깊이 소외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인 사슬들로부터 말이다.
통일을 위한 운동은 북한과 남한 사람들 모두의 ‘자유’를 목표로 해야 한다. 자유로워져야 할 존재들이 북한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일 것이다.(김정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