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왜 이럴까. 아무리 다급하다고 하더라도, 양심적인 정부라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최근 정부가 ‘예비타당성조사’를 생략해도 좋은 국가적 사업 목록을 발표하면서 거기에 대규모 토건사업들을 쭉 나열한 것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4대강 공사를 강행하면서 예비타당성조사를 생략해버렸던 이명박 정부의 행태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정부는 국토의 균형적 발전과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따라서 4대강 공사라는 터무니없는 프로젝트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궁색한 설명을 하고 있으나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원래 대규모 국가사업을 시행할 때는 예비타당성조사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법으로 명시돼 있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듯이, 이 나라의 주요 공공사업들은 오래전부터 국가예산의 막대한 낭비와 난개발과 환경파괴로 귀결되는 게 다반사였다. 4대강 공사는 가장 악명 높은 경우지만, 본질적으로 그와 유사한 터무니없는 공사는 오랫동안 전국 어디서든 끊임없이 반복돼왔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늘 공익을 내세우면서도 실은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된 부패하고 무책임한 정치가, 관료, 업계, 학계(소위 전문가들), 그리고 언론 사이의 결탁과 공모 때문인 것이다. 이 뿌리 깊은 부패와 무책임의 구조를 척결하고, 국가예산의 낭비를 막으면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만들어진 것이 예비타당성조사나 환경영향평가 같은 제도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제발 상식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나라, 양심의 정치가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대 속에서 탄생한 정부가 스스로 이 제도를 허물고, 억지 논리로써 자기를 합리화하는 한국정치의 오래된 악습으로 회귀하려 하고 있다.
모처럼 등장한 ‘민주정부’가 이런 식으로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경제 살리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부의 다급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이 어떤 상황, 어떤 시대라고 이런 식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인가. 전국 각지에 대형 인프라 공사를 벌이고, 새로이 고속철도를 건설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은 왜 이다지도 끈질기게 지속되는가.
문재인 정부가 출발할 때부터,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남북 간의 적대관계를 늘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만 이용할 뿐인 수구세력과는 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체제를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할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세계경제의 전반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정부도 조만간 경제문제, 그중에서도 특히 고용문제라는 난관에 직면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런데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과정이 기대보다 다소 느려지면서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내려가자, 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것저것 상투적인 대책들을 서둘러 내놓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에서 마침내 ‘예비타당성조사’를 생략한 대규모 건설공사를 결행하기로 결정해버린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이런 쫓기듯 서두르는 모습에 대하여, 이 정부가 ‘인수위원회’도 꾸릴 새도 없이 출범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정당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국회의 의석에 비례하여 거액의 국가예산이 지급되고 있고, 그 예산의 상당부분은 주요 정당에 딸린 정책연구소들을 지원하도록 편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정책연구소들은 평소에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막대한 예산을 쓰는 그러한 정책연구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이 새삼스럽게 새로운 정책을 마련한다고 소란을 피우는 풍경도 이상하지만,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집권 후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시나리오가 평소에 그 큰 정당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신기하다면 너무도 신기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은 경제성장시대가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다는 객관적인 세계경제 정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는 여러 논자들이 이미 많이 이야기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지난 30여 년 동안 저성장 내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온 일본의 경우는 특기할 만하다. 오늘날 일본의 지식사회에서는 ‘축소균형의 시대’라는 개념이 별로 낯선 게 아니다. 일본에서는 꽤 여러 해 전부터 재야의 지식인은 물론, 공직자들 중에도 성장시대는 더이상 재현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증가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용어의 창시자는 시모무라 오사무(下村治)라는 저명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원래 1960년대에는 고위직 관료로서 소득배증론(所得倍增論)을 제창했던 성장론자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서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고 난 뒤에는 ‘축소균형’이 다가오는 시대의 불가피한 추세가 될 것임을 누구보다 앞서서 내다보았던 선지자였다.
한참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한국에서도 성장시대의 종언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경제전문서가 최근에 나왔다. 한 증권분석 전문가가 쓴 《수축사회》라는 책이 그것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성장시대의 종언이 한국에서도 더이상 낯선 현상일 수 없는 이유를 자세히 논증하고 있다. 그는 성장시대가 끝나고 ‘수축사회’가 시작된 주요 요인으로 인구감소, 공급과잉, 상환 불가능한 규모로 커진 부채 등을 들면서, 이로 인한 수축경제 상황은 앞으로 대략 50년은 더 계속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왜 50년인지,
그 이후는 어째서 경제가 다시 성장궤도를 그릴 것이라고 예견하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어쨌든 50년이라면 현재의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수축사회’란 거의 영구적인 생존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수축사회》의 저자가 제시하는 좁은 의미의 경제학적 요인들을 떠나서도, 무엇보다 지구의 생물물리학적 한계 때문에 경제성장이 사실상 불가능한 날이 곧 올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생태적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온갖 무리를 무릅쓰고 자본주의시스템이 멈추지 않고 경제성장이 계속돼옴으로써 자연생태계는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훼손되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문명적 삶, 아니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존속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곧 도래할지 모르는 기막힌 시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따져보면, 지금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전역에 걸친 온갖 재앙과 고통과 비극은 근본적으로 정치가, 관료, 언론, 학자, 그리고 소위 경제전문가들이 성장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민초들의 환호 속에서 태어난 문재인 정부가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의 이야기는 경청하려 하지 않고, 고용문제에 대한 해법이랍시고 감옥에 있어야 할 재벌들을 청와대로 초대하여 환대를 베풀거나, 시대착오적인 토건사업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생략하면서까지 대규모 토건사업을 벌여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정부가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의 계획이 실현되어 온 국토가 공장화되고, 비행장이 되고, 쇼핑센터가 된다면, 장차 이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미 닥쳤거나 혹은 곧 닥쳐올 전면적 축소경제 상황에서, 그 공장들에서 만든 제품들은 어디로 가서 팔아먹을 것이며, 드나드는 승객도 없는 비행장은 어떻게 할 것이며, 텅텅 빈 대형 쇼핑센터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무용지물의 공장과 비행장과 쇼핑센터 때문에 아까운 경작지들이 대폭 소멸된다면, 우리는 어디서 먹을 것을 기를 것인가. 지금도 식량자급률은 (수입된 석유에 의존해서) 겨우 25% 정도밖에 안되는데, 비상 상황이 닥치면 급작스럽게 식량자급률을 높일 수 있는 무슨 묘수가 있다는 것인가.
재벌기업들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지금 취하고 있는 자세도, 물론 고용문제라는 난제를 풀어보려는 간절한 심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기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영상의 철저한 이해타산에 의거해서 투자나 고용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지, 정치지도자의 간청 때문에 목표를 정하거나 수정하는 게 아니다. 또한, 지금은 국내외로 점점 좁아져가는 시장 속에서 갈수록 더 격렬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기업들은 너나없이 로봇이나 인공지능 등 최첨단 기술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기왕의 고용 인원마저 최대한 감축하려고 부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의 의미를 냉정히 헤아려보는 노력 대신에 지난 수십 년 동안 모든 정권이 그냥 손쉽게 의지해왔던 구태의연한 경기부양책을 다시 꺼내 위기를 모면해보겠다는 것은, 설령 그게 일시적으로는 성공한다 할지라도, 경제와 사회에 미칠 장기적인 악영향을 생각한다면, 모처럼 등장한 민주정부가 결코 택해서는 안될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라는 괴상한 명칭으로 대다수 시민들의 시급한 필요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업, 즉 광화문광장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려고 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우도 그 시대착오적인 행태에 있어서는 전혀 다를 게 없다고 할 수 있다(전임 오세훈 시장에 의해 광화문광장이 이상
하게 변형되기는 하였으나, 현재의 이 광장은 시민생활에 큰 불편을 끼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2016~2017년의 겨울과 봄 사이에 계속되었던 위대한 ‘촛불혁명’의 현장이다. 그 역사적인 현장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소위 ‘광화문 재구조화’라는 사업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박원순 시장은 시민운
동가 시절과 서울시장 취임 초기에는 전시성 토건사업에 대해서 누구보다 비판적이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뭔가에 쫓기듯이 대규모 토건사업에 대한 의욕을 계속적으로 표출하고, 그것도 자신의 재임 중에 공사를 완료하겠다는 복안을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국가와 사회의 장기적인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다분히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 앞서 있는 듯이 보이는 이런 모습은 그와 그가 속한 정당을 지지해온 시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는 정도를 넘어서 심한 불쾌감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온갖 정황으로 봐서, 이제는 갈수록 경제규모와 소비생활이 축소되어 갈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적 과제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축소경제’를 균형 있게, 지혜롭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문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도 모자랄 판에, 지금 정부의 책임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난개발, 과잉개발 때문에 온 국토가 난도질을 당하여 신음하고 있는데도, 신도시 개발이니 지역경제 활성화니 하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또다시 토건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 뒷감당은 누가 어떻게 하라고 이러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끊임없는 팽창을 겨냥하는 오늘날의 성장경제는 자연세계를 파괴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단 하루도 돌아가지 못하는 극히 야만적인 시스템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문재인 정부가 ‘민주정부’다운 책임을 이행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이 파괴와 희생, 그리고 근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에 맞서서 여하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자연생태계를 얼마나 보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점을 문재인 정부가 전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익한 헛발질을 계속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본의 탐욕에 포섭되어, 결과적으로 한 정권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이 나라 민초들의 삶을 회생불능의 절망에 빠뜨려 놓을지도 모른다. 마치 1994년 인종주의 정권을 종식시키고 온 세상의 축복 속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민주정부를 구성했던 넬슨 만델라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글로벌자본과 ‘주류 경제학자들’에 포위됨으로써 끝내는 흑인민중의 삶을 더욱 가혹한 절망으로 빠뜨리고 만 것처럼 말이다.
성장시대가 끝난 상황에서는 고용문제와 복지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경제·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응 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연금제도, 의료보험제도 등등,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는 복지시스템도 결국은 지금보다 많거나 지금과 같은 정도의 인구와 생산·소비 체제가 중단 없이 지속된다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어 운영되고 있는 시스템이다.
따져보면, 복지시스템뿐만 아니라 현대 경제 자체가 거대한 ‘폰지’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폰지’ 시스템이란 기업이나 개인이 어떤 생산적인 투자를 한 결과로 이익을 취득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뒤따라 들어오는 투자자(혹은 투기꾼)의 돈으로 앞선 투자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시스템, 즉 실물이 없이 돈만 돌고 도는, 본질적으로 사기성이 농후한 시스템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금융통화제도, 보험제도 등을 비롯해서 현대 경제의 축은 기본적으로 ‘폰지’ 시스템에 의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경제성장이 안되면, 이 ‘폰지’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하고 말 것임은 불문가지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파국적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기 때문에, 지금 어디서나 정치가, 관료, 언론, 경제학자들은 기를 쓰고 경제성장에 집착하고, 성장률의 제고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의 객관적인 현실은 더이상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점을 냉정하게 포착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성장시대가 끝난 상황에서 우리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즐겁게 수용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실제로, 성장시대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빵’이 커져가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어떻든 부스러기나마 얻어먹을 수 있었고, 그런대로 사회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면 불평등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는 미끼도 수단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불평등, 차별, 불공정은 극심한 반발과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칫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상태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한국사회도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제한된 빵을 가지고 공정하게, 민주적으로 나누는 법을 익히고, 검약한 생활에서 만족을 느끼는 정신적 기술을 터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이 지상에서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한 시대로 우리는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더욱 절실해지는 것은, 불평등의 해소와 고르게 나누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혼란 없이 시민적 합의하에서 진행해나갈 수 있는 민주정치의 공고화이다. 만일 이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혼돈상태에 빠져들 것이며, 결국은 파시즘적 강권통치가 등장하는 악몽을 겪게 될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불행하게도 지금 세계 도처에서는 그러한 움직임과 조짐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촛불혁명을 통해서 ‘민주정권’을 세운 것은 그냥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지금 문재인 정부가 나침반을 잃고 헤매는 모습은 너무나 안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정부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성장’논리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무엇보다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살리는 방향으로 급진적인 방향전환을 하는 일이다. 지역이라는 것은 어차피 대다수 민초들의 삶의 궁극적 근거지이다(말할 것도 없지만, 문재인 정
부가 추진하려는 국토의 균형적 발전도 궁극적으로는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살림으로써만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대규모 토건공사를 선택한 문재인 정부의 방식은 정부기관과 대형 공영업체들을 대거 지방으로 이전함으로써 ‘균형발전’을 시도했던 노무현 정부의 방식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노무현 정부처럼 문재인 정부도 지역경제와 문화의 근원적 토대가 어디까지나 농사와 농경문화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무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참으로 답답한 것은 지난 수십 년간 역대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 역시 에너지와 식량 자급이 갖는 사활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해외로부터 석유와 원자재를 수입하여 그것을 가공·수출함으로써 경제를 유지해온 종래의 방식이 언제까지나 유효할 것이라는―성장시대를 통해서 굳어진―사고습관 때문일 것이다).
경제성장이 멈춘 세상에서 우리의 인간다운 삶은 자급적 삶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고, 상부상조의 생활방식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데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더라도, 피폐일로에 있는 농민과 농촌을 살리고, 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분산적 방법으로 에너지 자급능력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것이야말로 현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래의 상투적인 정책과는 전혀 다른 이러한 방향으로 전환하려면, 직업 정치가들이나 소위 전문가들의 판단과 결정에 맡겨 놓을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정신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활발하게 논의하여 공정하고 숙고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진실로 민주적인 정치시스템이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대한민국 국회가 하루라도 빨리 진정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이 나라의 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 자신의 소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 만일 계속해서 지금과 같이 국회 그 자체가 백해무익한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면, 우리는 국회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고려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틀, 예컨대 ‘시민의회’를 제도화하기 위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