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혁명’으로 10년 만에 다시 들어선 민주정부가 임기 중반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위기를 맞았음을 알리는 신호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러다가 또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기 힘들다. 4·19 때도, 6월항쟁 뒤에도 그랬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성립한 김대중 정부도,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도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의 희생과 투쟁, 그리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활동을 통해서 어렵사리 수립된 민주정권들이 번번이 이렇다 할 결실 하나도 맺지 못하고, 마침내는 민주주의를 망치고 반동세력의 재등장을 허용하는 악몽 같은 역사를 또다시 반복할 것인가?
물론, 민주정권들이 실패한 원인은 각기 그 배경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보면, 결국은 무능함과 ‘생각 없음’, 그로 인한 정치적 신뢰의 상실이 근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정권만 해도 그렇다. 선거법 개정에 대한 자세 하나만 보더라도 현 집권당은 신뢰성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오늘날 대부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한국 정치의 개혁과제 1순위일 뿐 아니라, 원래 민주당 자신의 핵심 공약의 하나였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대해서 최근의 민주당이 보여주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면, 그들이 정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집단인지 극히 의심스러워진다.
물론, 출범 이후 문재인 정부는 북핵문제의 해결과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큰 공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구축 프로세스가 기대한 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게 되면서 최근에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도 현저히 하락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매우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정부는 이런저런 정책들, 특히 경제 회생을 위한다면서 구태의연한 정책들을 서둘러 내놓고 있다. 그런데 그 실효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이러한 정책들의 배후에 과연 어떠한 철학과 비전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기는 출범 당시부터 ‘일자리 만들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공언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였다. 오늘의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저성장을 넘어서 성장 자체가 멈춘 상황인데도, 그렇게 성장이 멈춘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그냥 ‘혁신성장’이라는 구호 하나만으로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겠다는 것은, 의도적인 거짓말은 아닐지라도, 결국은 헛말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경제에 임하는 기본자세는 앞선 정권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경제라는 것은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하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과 서비스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좋은 경제란 합리적인 경제, 특히 지속가능한 경제라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과 같이 초부유층 1%에게 부가 집중되고 나머지는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극심한 불평등 구조가 먼저 혁파되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경제의 민주화가 관건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개념으로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 정책은 시행 과정이 너무도 서툴고 미숙했던 결과로 정부의 신용만 실추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서툰 실수이기만 했을까? 경제민주화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단호한 의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견실한 사고력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역시 시대착오적인 사고습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제는 경제성장 시대는 끝났고, 따라서 계속 빵을 더 크게 만들어가는 것으로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수십 년간 되풀이해온 익숙한 도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기초적인 인식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 정부가 ‘혁신성장’을 운위하고, 인공지능 관련 산업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를 갖는 것을 보면, 이 정부 역시 종래와 같은 방식의 경제성장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의 성장도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성장시대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로써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일이다.
지금은 낡은 방식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시급한 때이다. 물론 이것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최우선적으로 겨냥하는 방향전환이어야 한다는 것은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모든 국가정책도 이 기준에 따르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한심한 뉴스는, 12월 18일 세계적 농민단체 ‘비아캄페시나’가 작성한 〈농민 및 농촌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유엔총회에서 결의·선포될 때 한국이 ‘기권’표를 던졌다는 소식이다. 이는 한국정부가 농민과 농촌, 농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징표이다. 한심한 것은 정부뿐만 아니다. 국회에서 통과된 새해 국가예산 편성을 보면, 전체적으로 전년 대비 평균 9.7%가 증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중 농업 관계 예산 증액은 겨우 1.1%에 그치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합심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20년 동안 사실상 동결되어온 쌀값을 이제는 좀 올려달라고, 밥 한 그릇이 최소한 300원어치는 되게 해달라고, 농민들이 피눈물로 호소하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하기는 이것은 정치가들에게 국한된 행태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대부분의 학자, 지식인, 언론인도 농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지에 갇혀 있는 게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라는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불과 몇 인치이지만 그것 없이는 지상의 모든 생명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흙(토양)이 지금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2차대전 후 지금까지 전 세계 표토의 절반이 사라졌다는 연구도 있다. 우리는 흙의 대량 소실이라는 이 현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깊게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흙이 잘 보존되고 가꾸어진다면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의 대응은 가능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갖가지 유독성 화학물질들과 기계류의 대대적 동원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적 영농이 확산된 결과로, 오늘날 농촌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지고, 토지를 비롯한 자연생태계는 철저히 오염되고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농민들과 농촌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뒤늦게나마 그들을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단지 식량생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이야말로 정성스럽게 흙을 보살필 수 있는 지혜와 기술을 보존해온 오래된 농민문화를 계승하고, 실천하는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지금 인류사회는 인공지능이나 생명과학기술을 비롯한 소위 첨단 기술의 발달로 조만간 종래에 우리가 ‘인간’이라고 호명해왔던 존재들이 소멸할지 모르는 실로 기막힌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이제는 철저히 상혼(商魂)에 감염돼버린 과학연구자들이 탐욕스러운 자본과 근시안적인 국익논리와 결탁함으로써 빚어진 상황이지만, 이 끔찍한 상황은 인간존재를 뿌리로부터 뒤흔드는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생명윤리위원회 구성 따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인간다운 감수성이 살아 있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다운 감수성은 결국 ‘농경적 감수성’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자연의 ‘선물’로서 태어난 인간이 온전한 인간성을 유지하고 삶을 누리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즉, 인간이 제 손으로 바꿀 수도 없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되는 숙명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연 앞에서 언제나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의료나 농업을 막론하고, 생명조작기술이 이러한 한계를 간단히 무시하고 자연과 생명의 질서를 맘대로 요리하고 뜯어고치려고 하는 실로 불경스러운 시대가 열리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를 온전한 인간성을 잃지 않고 견뎌내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질문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오랜 세월 인간성을 형성시켜온 근원적 토양, 즉 농경적 감수성에서 나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농경적 삶 자체가 쇠퇴하면 그 감수성도 자연히 쇠퇴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더이상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된다.[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