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역의 생태운동가들은 근래의 심각한 지구환경문제를 고려할 때 더 많은 나라에서 녹색당을 건립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어떠한 진지한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바로 몇주 전에 나는 ‘RED’로부터 독일 녹색당에 대한 나의 연구와 경험에 근거하여 이 논의에 기여할 글을 집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래는 거기에 부응하기 위한 내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론 부족과 강령의 모순
나는 한 사람의 녹색운동가로서, 또 녹색당 당원으로서 활동한 첫해(1982년)에 이미 동료 활동가들과 다수의 당원 및 그 지도자들이 녹색당이라는 정당을 오늘날 세계가 왜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지, 그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논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성장에는 한계가 있고, 그럼에도 기성 정당들은 전혀 이 사실에 주의하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녹색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들 중 다수가 이 주제에 관한 기본적인 문헌조차―예를 들면, 도넬라 메도스 등이 쓴 《성장의 한계》, 헤르베르트 그룰의 《행성이 약탈당하고 있다》, 오토 울리히의 《세계 수준―산업체제의 막다른 골목에서》, 볼프강 하리히의 《성장 없는 공산주의》 등―읽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책들은 이미 1970년대에 출간되었고, 많이 팔리기도 했다.
독일 녹색당은 1980년에 창설되었다. 초기의 구성원들은 그로부터 2년에 걸쳐 합류했다. 그러나 그들이 동참했던 이유는 성장의 한계를 깨달아서가 아니었다. 초창기 구성원의 과반수는 주로 기성 정당에서 활동하다가 불만을 갖게 된 사람들과 소규모 공산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그들이 불만을 품었던 주된 이유는, 첫째 원자력 반대운동이 실패―그들 중 다수가 나중에 독일정부가 원자력 포기 선언을 하도록 설득하는 운동에 매우 활발히 참여했다―하고, 둘째 구소련을 겨냥한 신형 중거리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는 평화운동도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원자력을 반대한 것은 그에 수반되는 위험 때문이었다. (녹색당) 창립자들과 초기 구성원 중에는 진정한 생태주의자도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파였다.
이는 체르노빌 참사(1986년) 이전의 일이다. 체르노빌은 녹색당과 원자력 반대운동 진영이 우려했던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그 결과 녹색당 동조자들과 함께 독일 인구의 약 50%가 모든 원전의 폐기를 격렬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요구에 대해 집권 정당들이 “전깃불이 나가도 좋으냐?”고 응수했을 때, 녹색당은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사이에 그들은 이산화탄소로 인한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갈탄 채광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녹색당은 석탄이 아니라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하는 천연가스를 쓰면 (독일의) 모든 원전을 없앨 수 있으며, 천연가스는 구소련으로부터 수입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집권 정당들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나는 그 제안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원자력은 위험하다. 구소련을 포함해서 어디에서나 그렇다. 그러므로 어떻게 소련 사람들이 천연가스를 자국의 원전 대체용으로 쓰지 않고 독일로 수출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 모든 논의 과정에서, 독일인들이 무엇보다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녹색당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비슷한 상황이 2011년 후쿠시마 재앙 이후 다시금 펼쳐졌다. 이번에는 원자력을 대체할 것으로 이른바 ‘청정’에너지 및 ‘재생가능’에너지 기술의 급속한 확대가 주창되었다. 독일정부는 그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태양열 및 풍력 에너지 기술들의 유용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의구심이 남아 있다. 제임스 러브록이나 니컬러스 제오르제스쿠―뢰겐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과 경제전문가들이 이런 회의를 표명해왔다. 이런 의문이 무시될 수 있다면, 물론 모든 일이 예전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시될 수 있는가?
녹색당의 멜론 같은 속성
녹색당이 ‘멜론당’이라고 종종 조롱을 받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때로 녹색당은 토마토로도 묘사되었다. 처음에는 녹색이지만 나중에 적색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녹색당의 전신의 하나인 ‘미래를 위한 녹색행동’은 그들의 행동계획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장이라는, 옹호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는 와해되고 있는 중이다.…무리하게 경제성장을 달성하려고 하는 현재의 노력들은 이 위기를 악화시키고 더욱 큰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1)
이는 반(反)물질주의적인 급진적 생태주의 행동계획이었다. 그런데 한편 이것은 실업을 초래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원자력 반대운동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노동자계급 사이에 많은 반감을 자아냈다. 한편, 녹색당의 전신인 좌익 단체들 중 하나인 함부르크의 ‘분테리스테’는 자신들이 주로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그들이 이미 성취한 번영을 옹호·촉진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들의 운동방침에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인다.
우리는 원자력 반대운동과 과도한 노동합리화를 통해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더 많은 돈이 쓰이기를 원한다.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학교, 놀이터, 유치원, 청소년센터, 직업훈련 기회를 원한다.2)
이러한 두 그룹의 입장 간의 극명한 모순은 녹색당이 창설될 때 얼버무려진 채 넘어갔다. 양쪽 다 정당을 세우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일한 통합체 없이는 급진적 생태주의자들도, 급진 좌파들도, 선거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절충된 시스템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태양열 및 풍력 에너지 기술을 포함한 새로운 기술들의 출현으로 더욱 용이해졌다.
녹색당은 첫 번째 강령에서 경제성장이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모든 ‘양적’ 성장에 반대한다.…그러나 ‘질적’ 성장에는 찬성한다. [즉] 지금과 같거나 더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지금과 같거나 더 적은 원자재를 사용하여 성장이 가능하다면 찬성한다.3)
이런 의미의 질적 성장이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이 독일인들의 소득과 생활수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은 편리하게도 논의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태양열 및 풍력 에너지를 옹호하는 논리의 ‘경제적 견실성’ 역시 검토되지 않았다. 그런데 ‘분테리스테’가 올바르게 단언한바, 태양열 및 풍력 에너지는 “원자력보다 8배나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강령의 통합도 가능했을 것이다
강령과 정책에서의 이런 식의 얼버무리기는 급진적 생태주의 세력과 급진 좌파 세력의 동거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녹색당이 창설되고 이내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당내에서 자신들이 전혀 영향력이 없고, 당 위원회들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급진 좌파들이 자신들의 근본적 입장―다음 인용문에 표현된―을 체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은 그만하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런 약속들은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물질주의의 습관을 강화하기만 할 뿐이다. 한정되어 있고 이미 너무 붐비는 지구에서 그러한 요구들은 충족될 수 없다. 이쪽 사람들, 저쪽 사람들에게 차례로 계속해서 최대치를 약속하는 일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인간 자체, 행정기관, 기술, 교통 등이 더욱 단순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강박적인 소비를 덜 하고 성과에 대한 공포를 덜 갖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 신경증 등의 고통이 줄어들 것이다.4)
이러한 근본적인 입장은 노동계급 및 노동조합을 완전히 믿고 그들에게 충성하는 맑스주의적 급진 좌파의 입장과 명백히 모순되었다. 그리고 이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갈등들을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당원 다수의 결정을 더이상 수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맑스주의 철학에 의거한다면 이러한 갈등은 해소될 수 있었다. 녹색당 내의 반목하는 두 계파의 지도자들이 각자의 입장을 깊이 숙고했더라면, 생산력 발전의 필요성이라는 옛 사회주의의 테제와 환경을 망치지 않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급진 생태주의의 안티테제로부터 변증법적 종합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녹색당이 창립되던 당시 독립적인 이론적 지도자 루돌프 바로가 이미 선언했듯이 말이다. “적색과 녹색, 녹색과 적색은 함께 잘 어울린다.”5)
그러한 변증법적 종합의 이론적 씨앗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문헌들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리히의 책 《성장 없는 공산주의》는 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또 다음의 두 인용문에 제시되고 있는 울리히의 새로운 ‘사회주의’ 개념은 변증법적 종합으로 가는 길에 가로놓여 있던 구(舊)사상의 잔해를 치웠다. 울리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는 사회의 체질, 사람들 상호 간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맑스주의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생산도구의 최소한의 기술적·조직적 발전과 이 문제를 연결시키는 일은 필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치명적이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의 수준이 너무 낮아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높을 때에는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다다른 산업화의 수준은 인간들 간의 사회주의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6)
맑스주의 정치철학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위의 두 인용문을 풀어 쓰면 이렇다. 첫째, 사회주의는 기술적·구조적으로 ‘저개발’된 사회에서도 가능하다. 둘째,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들에서는 생산·분배의 과정이 너무나 복잡해서 인간들 간의 관계가 사회주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녹색당은 길을 잃었다
변증법적 종합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맑스주의 좌파 진영의 지도자들 중에서 적어도 몇 명은 하리히와 울리히의 책을 읽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리히와 울리히가 사실상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 즉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의 근본적 교리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 거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첫째, 태양열 및 풍력 에너지, 재생기술 등의 신기술이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는 전망은 그들에게도(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경제와 생태계 사이의 충돌은 결국에는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을지 모른다. 이 기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1979~1980년 당시에는 잘 알 수 없었다. 비록 제오르제스쿠―뢰겐이 이미 1971년에 그 점에 대한 의문을 공표했고 그리고 엔트로피 법칙에 관한 제러미 리프킨의 책도 독일어로 번역됨으로써 독일의 독서대중 사이에는 변경할 수 없는 엔트로피 법칙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여기에 강력한 역할을 한 두 번째 요인은 일반 대중에게서 나타나는 타성적인 사고였다. 나는 그것을 다수의 녹색당원들과 녹색운동가들 중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생태주의와 지금과 같은 경제방식 사이의 해소될 수 없는 모순에 대해 회피하거나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저항감은 가령 다음과 같은 단순한 주장으로 표현되었다. “과학 및 기술이 인간을 달에 데려갈 정도로 발전되었는데, 이 모순이라고 왜 해결하지 못하겠는가?” 나는 워크숍을 열어 이 질문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겨우 워크숍이 시작된 지 둘째 날에 한 참가자가 “이론이 너무 복잡해요. 우리에게는 행동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지만 잘못된 이론과 분석으로는 잘못된 행동을 취하게 될지 모릅니다”라고 응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워크숍은 중단되었다.
내가 때때로 들었던 또 하나의 주장은 특히 좌파들의 주장인데, 로마클럽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로마클럽 회장인 아우렐리오 페체이가 자본주의자여서 그렇다고 했다. 비슷한 식으로 그들은 급진적 생태주의자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 중 다수―예를 들면, 헤르베르트 그룰, 볼더 스프링만―가 보수적 출신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루돌프 바로도 싫어했다. 그러나 바로는 급진적 생태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저명한 공산주의자였고, 전통적 공산주의를 개혁하려고 하다가 조국인 동독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이다. 녹색당 바깥의 더욱 급진적인 좌파 인사들은 후일 바로를 우파로 낙인찍고, 그가 집회에서 발언을 할 때면 야유를 퍼부었다.
세 번째로, 일부 좌파 지도자들이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수용했더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교조주의적 추종자들과 동지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어떤 리더십도 거부하는 문화가 운동진영과 당내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치를 고수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그들대로 융통성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절충안에 합의하여 녹색당을 세운 좌파들의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와 조금도 이념적 타협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아마 오늘의 독자들은 그 두 진영이 사실은 서로 적대하면서 왜 녹색당을 세우려고 손을 잡았는지 의아할 것이다. 사실 그것은 큰 실수였다. 만약 내가 당시에 거기에 있었다면, 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헤르베르트 그룰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을 것이다.
당신은 급진적 생태주의의 목표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면, 그때에는 당신은 생태주의의 목표들은 계획경제에 따른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궁극의 이상적인 사회로 가는 과도기로서 말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했는지, 그리고 그룰이 거기에 대해서 검토를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그룰의 대답을 담고 있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큰 실수’는 어느 정도 다 알고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그렇게 했던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독일의 비례대표 선거제도에는 이른바 ‘5% 조항’이라는 것이 예전부터 있다. 그것은 최소한 전체 유권자의 5% 표를 얻는 정당 혹은 후보자만 의회의 의석을 얻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79~1980년 동안 어떤 좌파 정당이나 좌파 정당연합체도 이 장애물을 넘지 못했다.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는 급진 생태주의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많은 녹색당원들은 오로지 이 ‘5% 조항’ 때문에 녹색당이 탄생했다고 꽤 솔직하게 말했다.
수개월 동안 언쟁을 벌인 뒤에, 독일 연방 집행위원회―좌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에게 당을 스스로 떠나든지 아니면 당적을 박탈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최후통첩을 했고, 이로써 녹색당의 이 장(章)은 막을 내렸다.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당을 떠났다. 녹색과 적색의 이론적 통합은 결국에는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훨씬 뒤에, 그리고 녹색당 바깥에서 일어났다. 여기서는 더 상술하지 않는다.7)
기회주의자들이 탈취하다
1983년 하원 선거에서 녹색당은 창립된 지 고작 3년 만에 5.5% 표를 얻고 27개 의석을 확보했다. 당원들은 승리에 환호했지만, 이로부터 녹색당은 생태주의 정당으로서 종식을 고했다.
서로 전혀 다른 강령을 가진 이질적인 그룹들의 편의적인 연합은 당의 빠른 부상은 가능하게 했지만, 또한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기성 정당에서 힘들게 노력해서 차근차근 올라가지 않고 그저 빨리 정치적 지위를 획득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우세한 쪽에 편승하는 사람들이었다. 독일에서는 연방이나 주 의회 의원이 되면 높은 연봉과 많은 특전이 주어지고, 따라서 사람들이 탐내는 자리라는 사실을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더욱이 하원의원이 되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것은 미래의 경력에도 매우 유용하다.
그때까지 소수 정당이었던 녹색당 쪽에서도 당원을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 가입 신청서에 서명만 하면 누구나 당원이 될 수 있었다. 신청자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당의) 강령을 읽어보았는지 여부도 따지지 않았다. 그 결과 정치적 기회주의자들,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동조자들을 포함해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당원이 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동조자들로 말할 것 같으면 많은 경우 그것은 취미활동이었다. 생태주의 정당이자 좌파 정당이라고 알려져 있는 신진 우승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위신을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환경을 보호하고 싶다고8) 혹은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단지 서류상의 이름으로 남았을 뿐이다. 또 한편, 특정한 관심사를 갖고 정치적 무대에서의 자리를 찾고 있던 그룹들―동성애자, 페미니스트, 기독교도, 무신론자, 전문가 그룹, 외국인 그룹 등도 녹색당에 집단적으로 가입했다. 이와 같이 새로운 구성원들로 인해 급진 좌파세력은 점차 당 위원회들에서 수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자칭 ‘현실주의자들(Realos)’인 기회주의자들은 스스로 ‘권력 요소’가 된다는―즉 거대 기성 정당 중 하나와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집권 정당이 된다는―그들의 정책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985년 헤센주에서 처음으로 성공했다. 바로 이것이 녹색당의 유턴 지점이었다. 녹색당 창립 지도자의 한 명이었던 페트라 켈리는 1980년대 초반에 녹색당은 새로운 종류의 정당, 즉 ‘반(反)정당의 정당’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지도자들은 ‘의회 내의 반(反)―기성체제 운동 진영’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1985년 이후 녹색당은 여느 당과 다름없이 권력분배를 두고 경쟁하는 보통의 정당이 되었다. 1987년에는 녹색당은 산업사회에 대한 반대를 포기하는 새로운 강령을 통과시켰다. 이후로 녹색당은 단지 산업사회의 ‘재구성’을 원하는 정당이 되었다.
10년 뒤 1997년에 녹색당은 사회민주당과의 연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연립정부의 일원으로서 녹색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제휴하여 1999년에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였다. 급진 좌파들은 이미 그 전에 당을 떠났지만, 이제 진지한 평화운동가들도 녹색당을 버렸다. 심지어 녹색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이 운동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2004년, 연정의 파트너인 사회민주당(SPD)과 함께 녹색당은 하르츠 법안(Hartz IV)으로 알려진 반(反)노동법을 성립시켰다. 현재 녹색당은 생태적이지도 않고(녹색당은 독일 자동차산업의 든든한 협력자이다), 좌익도 아니고, 시민운동의 정당도 아닌, 특징 없는 보통의 정당이 돼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게 조언을 하라고 한다면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현재 세계 어디에서나 생태적·사회적 붕괴가 임박했거나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지만, 내게 조언을 하라고 한다면,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생태적·사회적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녹색당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서둘러 창립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렇다. 우선은 기초작업, 즉 우리의 개인적인 호불호나 사사로운 이익, 근거 없는 믿음과 희망적 관측과 상관없이 세계 전반의 상황에 대한 철저하고 객관적이며 성실한 분석을 먼저 해야 한다. 오직 그런 뒤에야 우리는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좋은 사회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가짜 유토피아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내가 보건대 지금까지는 이 기초공사를 한 활동가가 별로 없다.
더구나 그런 분석을 기초로 할 때만 우리는 무엇을, 언제, 어떤 순서로 실행해야 할지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나 활동가들이 자신의 활동영역을 너무나 자의적으로 선정하는 것을 목격한다. 마치 무엇이든 모두 좋고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들에게는 초점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중요하다면 실은 아무것도 정말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올바른 전략을 짜는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적어도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 어떤 함정을 피해야 할 것인지 다소나마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면 한다.(김정현 옮김)
1) Saral Sarkar, Green―Alternative Politics in West Germany, Vol. II: The Greens, Tokyo and New Delhi: UNU Press, and Promilla, 1994.
2) 같은 책.
3) 같은 책.
4) 같은 책.
5) 같은 책 28쪽에서 재인용.
6) Saral Sarkar, Eco―Socialism or Eco―Capitalism?: A Critical Analysis of Humanity’s Fundamental Choices, London and New Delhi: Zed Books & Orient Longman, 1999, 2000, p. 203에서 재인용.
7) 나는 내 책(Eco―Socialism or Eco―Capitalism?)에서 바로 이 통합을 제시했다. 관련하여 생태사회주의의 여러 분파에 대해 논한 조너선 러더퍼드의 논문(http://simplicityinstitute.org/wp-content/uploads/2018/03/Varieties-of-Eco-Socialism-Simplicity-Institute-1.pdf)을 참고하라.
8) 이 맥락에서, 나는 ‘환경보호자’(환경운동가)와 ‘생태주의자’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르베르트 그룰 같은 사람들은 진정한 생태주의자이다. 예를 들어서, 단지 나무 몇 그루를 보호하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환경보호자’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오늘날의 탈성장 운동은 생태주의 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글의 출처는 인터넷미디어 ‘RED’(Radical Ecological Democracy, 2018년 4월 19일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