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 터클 지음, 황소연 옮김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민음사, 2018년)
소로의 오두막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나머지 하나는 친교를 위한 것이었다.
눈을 맞추지 못하는 아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줄 모르는 학생, 전화 걸기를 불편해하는 신입사원, 회의시간에 이메일을 확인하는 중간 간부, 결별 선언을 한 줄 문자로 하는 연인, 칭얼대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는 부모….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낯익은 낯선’ 사람들이다.
낯익은 낯선, 아니 ‘낯설면서도 낯익은’ 사람들이 집, 학교, 기업을 점령하고 있다. 거리, 카페, 시장, 광장에도 신인류가 빼곡하다. 뒤돌아보면, 신인류는 언제나 출몰했다. 지난 세기말, 세기 초에도 X세대, Y세대, 오렌지족, 노마드족 등등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신인류는 뭔가 다르다.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이 세대는 전 지구적으로 분포하고, 기성세대까지 빨아들이며 영토를 확장한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는 ‘접속 강박’이 신종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디지털 원주민은 기성(디지털 이주민) 세대와 다르다. 우선, 혼자 있지 않으려 한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멀티태스킹에 능하지만 집중력은 떨어진다. 공감능력이 부족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대화를 불편해한다. 부모와 자녀, 친구, 선배와 후배, 교사와 학생 사이를 이어주던 ‘면대면 관계’가 끊어지고 있다. 호모사피엔스 탄생 이래 이 같은 단절은 없었다.
원인은 무엇일까. 왜 접속하되 결속하지 않고, 검색하되 사색하지 않을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접속하면서도 오프라인에서는 왜 모이지 않는 것일까. 면대면 대화의 결핍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접속 과잉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 고립감, 무력감에 시달리는 신인류가 ‘온라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이루는 길은 없는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생생한 보고서가 나왔다. 미국 MIT 교수인 셰리 터클의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 저자는 사회학, 임상심리학, 교육학을 기반으로 대화를 연구하는 실천적 학자다. 이 책을 굳이 ‘보고서’라고 말하는 까닭은 어린이, 학생, 교사, 회사원, 경영자 등을 직접 인터뷰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각도에서 분석했기 때문이다.
터클 교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세 개의 의자’를 뼈대로 삼아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 다시 말해 대화가 사라진 가정, 학교, 기업을 관찰한다. 널리 알려졌듯이, 소로의 세 의자는 각각 고독, 우정, 친교(사교)를 위한 것이다. 터클 교수는 첫 번째 의자(2부)에서 고독과 자아성찰, 두 번째 의자(3부)에서는 가족, 우정, 로맨스, 세 번째 의자(4부)에서는 교육 및 일과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격한 변화’를 상세하게 보고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소로의 세 의자를 회복하자는 프로젝트다.
첫 번째 ‘부서진 의자’―고독과 자기성찰
월든 호숫가의 작은 오두막에 있던 세 개의 의자가 제대로 전수됐다면, 소로의 저 의자가 20세기에 널리 퍼졌다면 인간과 사회, 인류와 천지자연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가 이토록 빨리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인류세의 개막 시점이 이렇게 암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소로의 의자는 폭주하는 산업문명에 깔려 망가지고 말았다. 소로의 첫 번째 의자가 부서진 자리에 고독이 아니라 ‘고립’이 서성거리고 있다.
“나는 공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터넷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고독을 추방하고 있다. 고독은 고립이나 외로움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기본 능력이다. 터클 교수는 고독이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고독한 몽상에 빠질 때 우리 뇌의 생산력이 왕성해지기 때문이다. 책에 인용됐듯이 창조적 인간은 고독을 예찬한다. 모차르트는 “오롯이 나 자신일 때, 완전히 혼자일 때 최고의 생각이 솟아난다”고 했으며 카프카는 “가만히 고독해지는 법을 배우면 된다”고, 피카소는 “깊은 고독 없이 진지한 일은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수행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휴식을 고독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독일의 과학 저널리스트 울리히 슈나벨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내 시간의 주인이 되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라고 휴식이라고 정의한다. 차분하게 자아를 돌아보며 무엇을 해서는 안되고 무엇을 해도 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휴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깊은 자기성찰의 시간, 즉 소로의 첫 번째 의자를 되찾는 것이 ‘빼앗긴 대화’를 되찾아오는 첫걸음이다.
우리 호모사피엔스가 수만 년 이어온 대화를 앗아간 주범이 인터넷이다. 그런데 인터넷의 무엇이 면대면 대화를 기피하도록 하는 것일까. 터클 교수는 인터넷이 ‘우정을 요구하지 않는 교제’, ‘친밀감을 요구하지 않는 우정’이라는 환상을 퍼뜨렸다고 지적한다. 이 환상이 거의 모든 대인관계로 번져 전화 통화까지 꺼린다. 인간의 목소리(육성)가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또다른 이유가 있다. 젊은이들이 상대방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때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다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소셜미디어다. 상대방에게 전할 메시지를 사전에 편집해, ‘최상의 콘텐츠’를 전송한다. 매사에 ‘올바름’을 추구하는 미국 젊은이들의 새로운 태도가 대화를 배제시킨다. 저자는 이와 같은 태도를 ‘마찰 제로(friction―free)’라고 명명한다. 소통과정에서 긴장과 갈등을 줄이기 위해 마찰의 여지를 없애는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무엇보다 고독, 즉 소로의 의자 하나를 방해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잠시라도 홀로 남겨져 생각에 잠기는 것을 불편해한다. 사람들을 15분 동안 가만히, 전화기나 책 없이 앉아 있게 하는 실험이 진행된 적이 있다. 실험 초반부에 사람들은 지루해지면 전기충격이라도 받겠느냐는 질문에 만장일치로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어떤 경우에도 전기충격은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혼자 보낸 시간이 6분 정도 됐을 때 상당수가 전기충격을 받겠다고 했다.
위 대목을 접했을 때 믿기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전기충격을 받겠다고 자청하다니. 위 연구결과를 뒷받침하는 또다른 조사결과가 있다. 미국 성인들이 평균 6분 30초마다 한 번씩 스마트폰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 급격히 퇴화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충만한 고독’이 홀로서기의 대전제다. 홀로 서야 함께 설 수 있다.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은 타인과 함께 서지 못한다.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의 희로애락을 자기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이입할 줄 모른다. ‘사이코패스’와 다름없는 사람들이 거대도시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접속 과잉으로 ‘신경화학적 흥분상태’에 있는 사이코패스들의 공동체라니.
두 번째 ‘부서진 의자’―가정과 우정
고독을 낯설고 불편해하는 디지털 원주민을 양산하는 장소가 가정이다. 갓난아기가 말을 가족한테서 배우지 않고 기계한테 배운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 초유의 사태다. 우리나라의 경우, 갓난아이가 생후 8개월이면 디지털 단말기에 노출된다는 보고가 있다(좌담 〈스마트폰과 아이들, 이대로 괜찮은가〉, 《녹색평론》 2015년 1―2월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유구한 유대(전승)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어린아이는 부모, 특히 엄마와 눈을 맞추면서 자기애와 사회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채 첫돌을 맞기도 전에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TV와 눈을 맞추고 말을 배운다.
충격은 계속된다. 나는 스마트폰에 중독된 자녀 때문에 부모와 자녀 간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젊은 부모들에게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데 부모들이 온라인에 접속하느라 아이들의 간절한 요구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마찬가지. 상담하러 온 학생에게 “내가 바쁘거든. 다음에 오거라, 다음에 꼭!”이라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터클 교수는 아이들보다 부모 세대가 스마트폰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스마트폰이 때로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평소 가족 사이에 대화가 없다가도 가족 중 누군가 여행을 떠났을 경우, 온라인을 통해 가족들이 갑자기 가까워진다. 가족은 있되 가정은 없다. 가족들은 집을 떠나야 서로 연결된다. “멀리 있어야 가까워진다.” 미국 아이들은 “나는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모는 각자 자기의 스마트폰 속으로 사라지고 친구들 또한 가까이에 살지 않는다. 친구 대부분이 온라인상에서만 친구다.
친구 사이도 예전과 같지 않다. 미국 청소년들에게 우정은 더이상 소중한 가치가 아니다. 미국 중학생들에게 ‘친구에게 바라는 것 세 가지’를 답하라고 했더니 대다수가 ‘웃게 해주는 사람,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신뢰, 애정, 친절, 연민이라는 답은 극소수였다. 이들에게 우정은 “경청이 아니라 선전(방송)이고, 내키지 않으면 ‘꺼버릴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소셜네트워크를 애용하던 한 여대생은 “어느 날 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된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페이스북’에 콘텐츠를 올리는 ‘나’는 언제나 ‘연기하는 자아’이므로 매번 자신의 장점을 과대 포장한다. 타인의 ‘탁월성 경연’을 지켜보는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결국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탈억제 현상’이다. 온라인상에서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타인을 공격한다. 익명성에 숨어 저속한 표현도 남발한다. 이들 대부분은 오프라인에서 남을 괴롭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이런 현상이 증폭된다. 독일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는 이들이 ‘수동적 동일시’에 휩쓸린다고 지적한다. “이들 집단을 결속하는 것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지, 사명이나 이상에 대한 자각적이고 능동적인 동일시 감정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부서진 의자’―학교와 기업
최근 《성적 없는 성적표》(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18)를 펴낸 미국 버지니아대 류태호 교수는 요즘 학생들의 집중력을 금붕어와 비교한다. 산만하기로 유명한 금붕어가 집중하는 시간은 평균 9초. 그렇다면 요즘 미국의 학생들의 집중력은? 놀랍게도 금붕어만도 못하다. 평균 8초다. 인터넷 환경이 청소년의 집중력을 이렇게 추락시켰다. 터클 교수는 학생들의 집중력을 회복시키는 일이 관건이라고 강조한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2주 정도 노력하면 주의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뇌가 뛰어난 가소성(plasticity)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2012년을 무크(MOOC, 대규모 온라인 공개강좌)의 해라고 선포했다. 온라인 교육이 교육혁신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온라인 교육의 허와 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책에 인용됐듯이 미국 컬럼비아대의 비교연구 결과, 온라인 학습의 성공은 대인관계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무크의 선두주자인 온라인대학 코세라의 공동 설립자도 팀워크, 윤리, 불안 조절 능력을 배울 수 없으므로 오프라인 교실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학생들도 강의실의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교실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배운다.”
일터에서도 ‘낯선 장면’이 펼쳐진다. 다른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사례인데 ‘3분, 23분 법칙’이 있다. 미국의 일반적 직장에서 사원들이 3분 동안 업무에 집중하고 다시 업무에 복귀하는 데 23분이 걸린다는 것이다. 사원들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이 인터넷이다. 더 놀라운 통계가 있다. 기업에서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포춘〉 선정 100대 기업의 85%가 거래하는 세계 최대의 콘퍼런스콜 사업자에 의하면, 회의는 코미디에 가깝다. 회의 중 65%가 딴짓을 하고, 63%는 이메일을 보내며, 55%는 음식을 먹거나 만들고, 47%는 화장실에 가고, 6%는 다른 전화를 받는다.
당연하게도 과잉 접속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회의에 스마트폰 휴대를 금지하는 회사가 생겨나고 있다. ‘야후’ 같은 기업은 재택근무를 없애고 있다. ‘구글’은 식당을 중심으로 사원들의 즉흥적인 대화를 유도한다. ‘스타벅스’는 재정위기에 직면했을 때 카운터 높이를 낮춰 직원과 고객 간 대화를 강조하면서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면 대화가 사원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마주할 때마다 매번 분노가 치미는 대목이 이 책에도 소개돼 있다. 스티브 잡스 이야기다. 잡스는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 가족 모두 디지털 단말기를 멀리하게 하고 대화를 이어간다고 한다. 빌 게이츠도 다르지 않다. 빌 게이츠는 책을 한 보따리 싸들고 여름휴가를 떠난다. 게임 개발자들도 자기 자녀들에게 자신이 만든 게임을 권하지 않는다. 내게는 이들이 불량식품 제조업자처럼 보인다. 자기 자녀들에게 자기가 만든 불량식품을 먹이는 ‘윤리적인 사장’이 과연 몇이나 될까. 터클 교수도 인터넷을 불량식품으로 인식하자고 말한다. 아이들의 뇌가 먹는 불량식품!
‘네 번째 의자’―우리에겐 ‘서로’가 있다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소로의 세 의자를 우리 내면에, 우리 삶의 한가운데 갖다 놓기 위해 고민한다. 한 가지 전제가 있다. 터클 교수는 자신이 내놓는 대안이 단순한 해결책이 아니고 대화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제안하는 첫걸음은 먼저, 스마트폰이 갖고 있는 위력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얻은 것뿐 아니라 잃어버린 것도 유념해야 한다”는 경구가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새로 얻은(구입한) 것보다 새것 때문에 잃어버린(빼앗긴)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둘째는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해 창의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터클 교수는 “우리에게는 뛰어난 회복력이 있다. 닷새간 전자기기가 금지된 캠핑에 참여한 아이들이 공감능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연구결과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성소(聖所)’를 가정과 학교, 일터로 확대시켜 대화 공간을 늘려나가야 한다. 터클 교수는 17세기 영국에서 공론화의 거점 역할을 해낸 커피하우스를 주목한다. ‘나’를 위한 고독과 ‘우리’를 위한 우정을 위한 자연스럽게 낯선 이들과 친교하는 ‘네 번째 의자’로 옮겨 간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또다른 낯선 대화 상대가 있다. 말하는 기계, 인간에게 반응하는 로봇이다. 터클 교수는 로봇으로 대표되는 지능을 가진 기계가 ‘네 번째 의자’에 마주 앉을 새로운 상대라고 말한다. 우리가 로봇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근본 이유는 ‘마찰 제로’를 원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터클 교수는, 현재 우리는 “테크놀로지에게는 다가오라고 하면서 사람에게는 물러서라고 요구하는” 곤혹스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접속을 위한 비접속’이란 슬로건으로 마무리된다. 끊어야 다시 이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나’로 돌아가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타인과 새로, 다시 만날 수 있다. 내가 너를 만나 우리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우리가 그들을 만나 ‘지금과 다른 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 안에 있는 각각의 ‘나’를 존중하면서. 이것이 ‘소로의 세 의자’에 담겨 있는 크고 깊은 메타포일 것이다. 터클 교수가 제안했듯이 ‘세 의자’를 되찾는 것과 동시에 ‘네 번째 의자’를 함께 만들어내는 과정이 곧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문명전환일 것이다. 인간과 사회를 넘어 인간과 기계,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다급한 시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의 한마디를 공유하는 것이 전환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