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및 북미 대화의 배경
오늘, 이 뜻깊은 히로시마 평화집회에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안보나 외교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정치학도도, 사회학도도 아닙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릴 이야기는 소위 전문가의 소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의 일개 평범한 시민―지식인의 아마추어적인 소견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한반도는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 전야의 분위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연두교시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을 했습니다. 즉 7차에 걸친 핵실험과 대륙간 장거리 미사일 개발의 성공을 통해서 북한은 핵무력을 완성했고, 이제부터는 경제건설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 발언을 전해 듣고, 이제 북한이 남한과의 접촉 재개를 시도할 것이고, 남한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고 국제연합(UN)이 결의한 강력한 경제제재의 압력을 북한이 더이상 버틴다는 것도 어렵지만, 끝없이 핵무기와 미사일의 성능을 높여가 봤자 더 갈 데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래에 북한의 사회경제 상황은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백만의 평양시민들이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고, 북한 전역에는 500여 개의 장마당 경제가 활기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동안 격심했던 기아상황을 국가의 도움 없이 거의 자력으로 극복해온 인민들의 생활향상 욕구를 북한 당국이 더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북한 당국이 이제부터는 남북 간, 그리고 북미 간의 관계개선을 적극 모색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때맞춰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의 의미를 재빨리 알아챈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도록 적극 권유했고, 이에 북한은 기꺼이 호응했습니다. 그리하여 남북한의 교류가 근 10년 만에 재개되고, 이를 통해 마침내 4월 27일에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판문점회담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의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감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남북 정상회담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문점회담은 질적으로 좀 달랐습니다. 즉, 판문점에서 만난 두 정상의 모습에는 평화의 길로 가고자 하는 진정 어린 열망이 공통적으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화에 나선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과 용기를 거듭 찬양했고, 북한의 젊은 지도자는 남쪽 지도자의 말을 겸허히 경청하고, 시종일관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물론 이런 행동은 가식적인 연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상 독재자에게는 어울릴 법하지 않은 그러한 연기를 하면서까지 한반도의 긴장관계를 끝내고 싶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고자 했다면, 그것은 평화에 대한 그의 열망이 매우 크고, 진정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번 판문점회담의 특별한 점은 또 있습니다. 즉, 이번에는 한반도를 에워싼 냉전구조가 정말로 붕괴되고, 새로운 차원의 남북관계 및 국제관계가 형성될 조짐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평화체제가 수립되는 데에는 여러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 점에서 지금은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해왔던 가장 큰 요인은 핵심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 그리고 남한의 국가권력이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행스럽게도 지금은 북한과 남한은 물론, 미국의 트럼프 정권도 북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실제로 원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정치적으로 큰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줄곧 보여준 난폭한 언행과 비이성적인 일련의 정책들의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견 거침없어 보이지만, 트럼프도 필경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올가을의 중간선거의 승리와 내후년의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될 것을 꿈꾸는 인간입니다. 그런 그가 역대 대통령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 즉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매우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최근의 한반도 정세는 관련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운 좋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조성될 수 없는 매우 드문 상황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동안 미국이 취해온 한반도 정책은 언제나 ‘현상 유지’ 정책이었습니다. 북한과 미국은 때때로 험악한 말을 주고받으며 전쟁에 돌입이라도 할 것 같은 태세를 연출해왔지만, 북한은 실제로 미국을 공격할 능력도,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 역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피아간에 엄청난 손상을 초래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은 결국 협박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지속돼야만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세력, 즉 ‘군산복합체’가 계속 이득을 취하는 구조가 유지됩니다. 동아시아에서 냉전구조가 이토록 장기적으로 지속되어온 이유는 결국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정부가 어째서 금년 들어 태도를 바꾸었을까요? 정확히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중요한 이유를 들 수는 있습니다. 즉, 트럼프 대통령은 군산복합체와 별다른 인연이 없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여타의 미국 엘리트 정치가들과 다른 점이 없지만, 부동산업으로 부를 쌓은 부호로서 주류 기득권층으로부터의 지원 없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따라서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이유가 없는 예외적인 정치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 요인은, 북미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간곡히 설명하고, 드디어 설득하는 데 성공한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입니다.
실은, 저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해온 자세와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북한을 대화에 나오도록 권유하고,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은 평화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 때문이었지만, 또한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그의 매우 건실하고 현실적인 비전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공식 석상에서 발언한 바 있습니다. 이 말에는 그동안 보수우익 정권들이 별 근거도 없이 막연히 기대해왔던 이른바 ‘북한붕괴론’이나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론’ 등을 일절 배격하는 입장이 표명되어 있습니다. 추측건대, 문재인 대통령의 이 발언은 북한이 대화노선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그러한 발언은, 쓸데없이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되풀이해 봤자 그것은 현실적으로 상황을 더 어렵게 할 뿐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결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분단체제와 냉전구조를 실제로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이 간절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간절함은 지난 70년간 분단체제가 한반도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멍에이고 족쇄인지를 매일매일 뼈아프게 느끼며 고통스럽게 살아온 당사자가가 아니면 실감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의 정전체제 속에서는 포성은 멎었지만,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적대관계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험악한 상황이 계속돼왔습니다. 그리하여 남북한은 긴 세월 동안 사실상 비상체제로서 유지돼왔던 것입니다. 비상체제에서는 인간다운 자유로운 삶이 원천적으로 부정됩니다. 1인 지배체제의 세습화를 굳혀온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에서도 오랫동안 독재정치와 군사정권에 의한 폭압정치가 되풀이되었고, 시민적 권리와 인권이 원천적으로 억압되어왔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지금까지 한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려온 것은 헌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이었습니다. 이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은 사상, 언론, 표현, 결사의 자유를 억압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제 시기의 치안유지법을 계승한 악법입니다. 물론 그것은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차단하기 위한 법입니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북한)에 대한 유형무형의 협력은 물론, 여하한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인 의견 표명도 금지하고, 위반 시는 중형에 처했습니다.
그 결과, 역대 독재정권들은 이 법을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는 데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양심적인 지식인, 학생, 노동자, 시민, 해외동포들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무자비하게 인권을 유린해왔던 것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멋대로 사람들을 잡아가고, 고문하고, 살해하더라도 이 모든 국가적 폭력과 악행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결국 노예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분단이라고 하면, 그냥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분단된 한반도의 주민들에게는 그것은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억압과 공포, 그리고 극단적으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삶을 체계적으로 강요하는 시스템이 되어왔습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새 정부의 수반인 문재인은 원래 인권 변호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법률의 개폐가 시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그 국가보안법의 근본적인 존립근거, 즉 적대적 남북관계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곧장 마주친 북핵위기 상황에서도 그가 이전의 보수파 정권들처럼 안보체제의 강화를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고,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서줄 것을 되풀이해서 호소한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그러한 대화 원칙의 천명은,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공포뿐만 아니라 노예적인 삶을 강요하는 ‘안보논리’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다수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모처럼 한반도에 감돌기 시작한 해빙기류는 결국 시민들 다수가 촛불을 켜고 광장에 모여들어 민주주의를 외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까지 계속된 한국의 대규모 촛불시위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아가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끝장내고 평화체제를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즉, 시민들이 합심하여 능동적으로 행동할 때 민주주의가 살아나고, 그 결과로 그들 자신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진리를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한반도 냉전구조의 종식이 뜻하는 것
냉전구조가 청산된다면, 그리하여 사람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옥죄는 안보논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는, 비록 통일은 먼 훗날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인간다운 삶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실험이 자유롭게 전개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이것은 한반도 주민들에게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한반도의 얼어붙은 긴장상태가 해소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세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냉전지역의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온 안보논리가 현저히 약화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평화로운 공생의 사상과 그 실천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공생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해는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냉전적 사고, 그리고 그것과 짝을 이루는 안보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한반도의 냉전구조의 종식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지난 70년간 미국이 세계를 패권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최대의 승자가 된 다음에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고, 그 적에 대항하기 위한 안보체제를 집중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보체제의 강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이 종결된 상황에서 미국의 정부와 지배층은 국민들에게 새삼스럽게 거액의 안보 및 국방 관계 예산이 왜 필요한지를 납득시킬 뚜렷한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때마침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은, 당시의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말한 것처럼,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오늘날 미국의 안보체제를 구성하는 핵심 기구들, 즉 국가안보회의(NSC), 중앙정보국(CIA), 펜타곤 등을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데 중요한 빌미가 되었고, 나아가서 이후 미국과 세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되는 ‘숨은 지배자’, 즉 군산복합체의 형성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국전쟁이 종결되지 않고 오랫동안 정전상태가 계속돼온 것은, 미국의 패권적 세계지배와 군산복합체의 온존과 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사회주의권이 붕괴함에 따라 급작스럽게 ‘적’을 잃어버린 군산복합체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긴장상태와 중동지역에서의 불안한 정세가 변경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어야 했습니다. 만일 두 지역에서의 전쟁 혹은 준전시 상황이 종식된다면, 군산복합체의 존립근거가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지난 수개월간 한반도의 해빙기류에 대해 세계의 주요 언론이 보여준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이었습니다. 보수, 진보파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세계적인 미디어가 그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언론은 특이했습니다.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최근의 한반도 정세 변화가 얼마나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것인가를 외면한 채 거의 예외 없이 ‘납치자’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습니다. 제가 볼 때, 일본 언론의 이러한 태도는 한심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한가롭고 우둔한 짓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언론들은 대체 왜 이럴까요? 그들은 그동안 북핵문제의 해결이 실패한 것은 북한 측의 속임수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이번에도 북한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술책’이라는 논조를 폈습니다. 그런데 이는 언론의 기본적 책무인 ‘사실 확인’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단순한 주장일 뿐입니다. 이 점을 여기서 길게 설명할 여유는 없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북핵문제를 실무적으로 다뤄온 존 메릴 전(前) 미국 국무성 정보조사국 동북아 실장의 말을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지난 5월 2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북핵문제의 해결이 난항을 겪었던 책임은 북한 측에도 있지만, 미국과 남한 측에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했습니다. 즉, 미국과 남한도 북한 못지않게 끊임없이 약속을 위반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세계의 주류 미디어는 북한을 일방적으로 사기꾼으로 몰아붙이면서 모처럼의 대화와 협상 노력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그들이 종래의 안보논리에 토대를 둔 세계질서의 변경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한반도의 주민들이 느끼는 평화에 대한 절박감이나 간절한 염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한반도에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에게는 결국 ‘남의 일’이며, 기껏해야 강 건너의 불일 테니까요.
세계의 유력한 언론들이 기존 질서의 변경을 원치 않는 이유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 큰 영향력을 가진 언론들은 거의 예외 없이 상업적 논리에 충실한 이른바 기업미디어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이해관계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군산복합체와 직접·간접으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산복합체의 현저한 약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한반도 냉전구조의 종식을 그들이 달가워할 리는 없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의 가능성
그러나 기득권세력들에 의한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찾아온 최근의 한반도 해빙기류는 끝내 역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관련된 핵심 당사자들, 즉 현재의 미국·북한·남한 정부가 모두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그것을 강력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한에도 평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기득권세력이 엄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70년 동안이나 한반도의 분단과 안보체제를 이용하여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사적 이익을 취득해온 집단입니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통해서 그들의 힘은 이제 현저히 약화되었습니다. 그 점은 지난 6월의 지방선거에서 확연히 입증되었습니다. 수구세력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자유한국당’은 당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정도로 선거에서 완패한 것입니다.
지금 가장 우려되는 것은 미국의 기성 엘리트층의 동향입니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게이트’로 큰 정치적 곤경에 처해 있고, 대외적으로도 전통적인 우방 혹은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매우 순탄치 않습니다. 그 와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오랫동안 서방 언론에 의해 악마처럼 묘사되어온 북한 정권과 대화를 하고 협상을 진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정치적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기 때문에 그가 역대 대통령이 해내지 못한 일을 성취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트럼프에게는 미국이 세계를 지도해야 한다거나 세계의 경찰노릇을 해야 할 책임이 미국에 있다거나 하는 관념은 결여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지, 어떠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 사상, 신조 따위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그는 기성의 엘리트 정치가들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인 동맹인 유럽연합 국가들을 여타의 ‘외국’과 별로 다르지 않게 대하고, 서유럽을 방위하는 데 왜 미국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느냐고, 일견 난폭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매우 정당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현대사에 정통한 미국인 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트럼프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고정관념으로 세계를 보지 않고, 마치 철부지 같은 맨눈(innocent eyes)으로 오늘의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기성의 이해관계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그러한 ‘맨눈’의 시각이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는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주류성 혹은 이단적인 성격 때문에 오히려 세계변혁에 기여하는 인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이 인류를 희망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변혁이냐, 아니면 혼돈과 절망으로 빠트리는 변혁이냐 하는 것일 텐데, 기후변화를 무시한다거나 난민이나 이민자를 다루는 트럼프의 난폭한 방식을 보면, 앞날은 그리 낙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6월 12일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북한 쪽에서 보면 매우 위협적이다”라는 뜻밖의 역지사지(易地思之)에 입각한 발언을 하고, 그 훈련의 잠정적 중단을 선언하는 모습 등을 보면, 트럼프가 북핵문제의 해결만은 꼭 성사시키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드문 기회를 잘 활용하여 이번에야말로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평화공존 체제를 꼭 실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에서 냉전구조가 깨지고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그것은 곧 동아시아 전역의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역지사지의 공감력으로 상대방의 생존권을 인정한다면, 개인이나 국가가 상호 적대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세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상호 적대 내지는 상호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망한 목표 아래에서 동아시아 전역을 엄청난 재난에 빠트린 일본이 전후 70년의 시간이 경과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사죄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 데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이와 같은 행태는 오로지 미국과의 관계만이 중요할 뿐, 아시아인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매우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심리가 작용해온 탓일 것입니다. 실제로 근대 초기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 즉 아시아 멸시와 서양 숭배 사상은 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일본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 심리적 콤플렉스야말로 일본이 이웃 나라들과 진정으로 열린 마음으로 사귀는 것을 어렵게 하는 근원적인 요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일본 사회나 문화의 저류에는 매우 훌륭한 평화사상, 공생사상이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메이지유신 직후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이 귀국한 이후에 싹이 튼 다음 1920~1930년대의 평화주의자 저널리스트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에게로 계승된 ‘소일본주의’ 사상은 그 대표적인 흐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일본주의 사상전통은 전전(戰前) 혹은 전후(戰後)의 많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사상의 핵심 부분을 구성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 사상적 전통이 보통 시민들의 기본적인 교양이 되고, 나아가서 정치·경제·사회적 성격을 규정짓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일찍이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前) 일본 총리(2009~2010년 재임)가 설파한 ‘우애에 기초한 동아시아 공동체’도 단순히 몽상에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하토야마 총리가 제창한 ‘우애에 기초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개념은 21세기 초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등장한 정치철학 중에서 아마도 가장 신선하고 값진 정치철학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토야마 총리의 고매한 이상이 실현되기에는 당시의 동아시아 주변 정세가 너무도 살벌했고, 무엇보다 그것은 미국 지배층의 이해관계와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하토야마 총리의 구상에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점에다가 재임기간마저 너무 짧았기 때문에 오늘날 하토야마 총리의 정치철학을 기억하는 동아시아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공생의 동아시아 체제’와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우애의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명칭이야 무엇이든, 이러한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 우리가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협력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에게는 미래가 열리지 않을 게 확실합니다.
작년 10월, 19차 중국 공산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펼쳐 보인 중국의 미래상도 결국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샤오캉(小康)사회를 지향하면서 세계가 공통하게 직면한 난제를 풀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긴밀히 협력할 것을 약속하고, 유달리 미려(美麗)사회와 생태문명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시진핑 주석의 이 발언은 견실한 현실적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다기보다는 아직까지는 정치적 수사(修辭)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가의 수사적 발언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시진핑 주석이 단순히 부강한 사회에 관해 말하지 않고, 굳이 샤오캉사회, 아름다운 사회, 생태문명사회를 지향하겠다고 말한 것은 그냥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요컨대,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지금 동아시아에는, 일본의 우익세력과 아베 정부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암묵적으로나마 공통적인 인식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공통적인 인식은 앞으로 북한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지에 대한 중요한 참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북한은 상당 기간 동안은 기초적인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발한 산업개발과 인프라 구축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 자본주의시스템에 불가피하게 편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다른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그러했듯이, 공동체의 붕괴와 난개발, 극심한 환경파괴, 그리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또 하나의 괴물사회가 출현한다면, 그 여파는 북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큰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개발·발전이 생태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얼마나 건전하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북한사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 중요성을 가진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동아시아는 지금 전면적인 붕괴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가고 있는 서구적 자본주의―산업주의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의 평화로운 공생이 가능한 진정한 생태문명을 구축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지금 동아시아인들은 서로 반목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분쟁에 휘둘려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입만 열면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인종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채질하는 기득권세력에 우리는 더이상 농락돼서는 안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세계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태적으로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인들이 서로 적대하고 갈등을 겪으며 쓸데없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난센스입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최근의 정세 변화는 단순한 지정학적 변화에 그치는 사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자폐적인 틀을 깨고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구축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드물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시민들 간의 활발한 대화와 긴밀한 협력이 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2018년 8월 5일, 히로시마의 평화운동단체 ‘8·6히로시마 평화모임 2018’이 주관한 집회에서 행한 강연 기록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