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식·강국진 지음
《선을 넘어 생각한다―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 (부키, 2018년)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명예교수가 《선을 넘어 생각한다》에서 피력한 남북 및 남·북·미 관계와 한반도 통일에 관한 생각들은, 이런 문제에 관한 일반인 다수의 상식 또는 고정관념과 충돌한다. 박 교수 생각대로라면,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진보/보수, 자본/반자본, 통일/반통일, 민족/반민족, 종교/반종교, 친북/반북, 친미/반미 식의 단순 갈등 구도는 잘못 맞춰진 대립쌍일 수 있다. 그는 그런 잘못된 관념을 벗어던져야 비로소 해법이 보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가 던진 질문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이유가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입니까? 주한미군은 한국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까, 아니면 미국의 국익을 위해 투자와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까?”
그리고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저는 1970년대 당시나 지금이나 주한미군은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한미군이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로서 역할을 하느냐의 여부 이전에, 주한미군이라는 존재 자체가 한반도에서 안보접근법을 유지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기능한다는 근본적인 고민 때문입니다.”
이 ‘안보접근법’이 그와 대치되는 ‘평화접근법’과 함께 《선을 넘어 생각한다》의 키워드다. 바꿔 말하면, 안보접근법을 파기하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추구해온 ‘한반도 운전자’론과 북의 체제 보장을 토대로 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및 평화 공존, 북미관계 정상화 추진 움직임과도 깊이 맥이 닿아 있다. 또한 이는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 접근방식에 반대하거나 거부감을 지닌 개인이나 세력의 남북관 내지 통일관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결국 《선을 넘어 생각한다》는 우리가 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남북관계 개선 또는 통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들을 둘러싸고 두고 극한적 대결까지 불사해온 한국 및 주변 관련국 간의 갈등과 대립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요 대안적 해법 제시라 할 수 있다.
안보접근법과 평화접근법
박 교수는 1939년 중국 지린(吉林)성 푸위(扶餘)현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인 1945년에 귀국했고 196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71년부터 2015년 정년 때까지 45년간 국제관계학을 가르쳤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그의 주지사 시절부터 깊은 인연을 맺었고, 또 그 덕에 카터의 대통령 재임시절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하얼빈에 남았던 고모 등 친척들을 36년 만에 만났다. 이후 수십 년간 50여 차례 평양을 찾아갔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를 비롯해 카터,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한 사람이 바로 박 교수였다. 수십 년간 남·북·미 3자 간 비공식 대화채널 ‘3자 간 2트랙(민간 전문가 참여) 대화’를 이끌며 한반도 평화문제를 고민했다.
미국에서 거의 반세기를 살아온 그가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얘기를 먼저 하고 넘어가자.
“미국은 일방적으로 삼팔선을 그어 한반도 분단을 초래했지만 빈말이라도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제네바 합의(1994년 제1차 북핵 관련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9·19 공동성명(2005년 북핵 관련 합의)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놓고도 유감 표명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삼팔선을 획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1945년 8월 11일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 대령(나중에 주한미군사령관 역임)과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 중령(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삼팔선을, 일설에 따르면 단 10초 만에 그은 뒤 그것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다. 그것이 천만 이산가족을 낳고 수백만의 삶을 파괴한 분단체제의 시작이었다.
박 교수는 바로 그 딘 러스크와 함께 남북 이산가족을 연결해주는 비영리법인 ‘유나이팅 패밀리즈 인코퍼레이티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는데, 삼팔선을 그은 장본인이기도 한 그 러스크가 박 교수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남북 분단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특히 가장 가슴 아픈 게 이산가족 문제다.”
《선을 넘어 생각한다》는 2015년 말 그를 처음 찾아간 〈서울신문〉 강국진 기자와의 인터뷰들을 토대로 북과 남, 미국, 통일 문제에 관한 12가지 화두에 대해 강 기자가 질문을 던지고 박 교수가 답하는 형식으로 짜여 있다. 그 핵심 키워드는 앞서 얘기했듯이 ‘안보접근법’과 ‘평화접근법’이다. 박 교수는 문맥에 따라 안보 패러다임, 평화 패러다임으로도 표기되는 이 상반돼 보이는 사고 및 실천 방식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곧 분단문제를 푸는 해법이라고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변증법적 통일이란, 남북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을 수용하고 그 이질성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더 높은 단계로 통합돼가게 만드는 공존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안보접근법은 분단과 전쟁 이래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안보접근법은 힘을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기 때문에 군비경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누가 더 좋은 무기를 얼마나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 경쟁합니다. 군비경쟁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포’에 의존합니다. 결국 안보접근법이란 언제나 무기와 공포를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것은 언제나 안보접근법이 횡행할 때였습니다.”
박 교수에 따르면, 남쪽에선 1990년 전후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이 안보접근법이 횡행했고, 냉전 이후 크게 두 갈래로 분화했으나 그 위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 한 갈래가 평화접근법이다. 김대중―노무현의 ‘햇볕정책’은 박 교수의 분류에서 평화접근법에 가깝다.
이 책이 각 장별로 던진 질문들, 예컨대 ‘북한은 과연 붕괴할까?’, ‘미치광이 독재자 혼자 북을 지배한다는 게 사실인가?’, ‘대북 지원이 북 핵개발을 도왔나?’ 등에 대한 박 교수의 대답은, 어차피 안보접근법은 실현될 수 없는 망상에 가까운 것임을 거듭 확인한다.
‘북방외교’, 평화 패러다임으로의 첫발
이처럼 냉전 이후 남의 대북정책은 안보접근법과 평화접근법으로 크게 나뉘어 전개되는데 하나는 노태우―김대중―노무현의 길, 또 하나는 김영삼―이명박―박근혜의 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태우 정권에 대한 평가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더불어 군사정권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데, 박 교수는 그를 안보접근법의 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처음으로 크게 틀었던, 평화접근법 계보의 첫 주자로 평가한다. 대신 노태우·전두환을 법정에 세워 처벌한 김영삼을 안보접근법의 상속자군에 넣었다.
이는 또한 함께 ‘현대’라는 거대 자본의 운영자였지만 평화접근법으로 간 정주영과 안보접근법으로 간 이명박의 엇갈린 행보에 대한 평가와도 겹친다. 박 교수는 정주영과 이명박 노선을 명시적으로 대립시키진 않았지만, 500마리의 소떼를 끌고 북으로 간 정주영과 그가 길을 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건설을 평화접근법의 중대한 실천행위로 평가하는 반면, 집권 뒤 그 모든 길을 철저히 차단하고 안보접근법으로 되돌아가버린 이명박을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의 평화접근법 성과를 일거에 뭉개버린 당사자로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박근혜 정권의 개성공단 폐쇄는 남북의 화해와 상생 도정에 만회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박 교수가 노태우를 평화접근법 계보에 넣는 것은 그가 집권 때 추진한 ‘북방외교’ 때문이다. 그 북방외교를 통해 한국은 “미국 꽁무니만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외교다운 외교를 수행했다”고 박 교수는 평가한다. “남북관계만 놓고 본다면 한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저평가된 대통령이 노태우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에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에서 “자주·평화·민주·복지의 원칙에 입각해 민족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사회·문화·정치·경제 공동체를 이룩함으로써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가자고 제안했다. 1989년 1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북한 방문을 적극 지원한 것도 노태우였다. 이는 10년 뒤 그의 소떼 방북과 이후 대규모 경협사업으로 이어진다.
노태우 재임시절인 1991년에 남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그해 12월 냉전해체라는 시대 변화를 주도적으로 헤쳐가면서 남북관계를 재정립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다. 88올림픽 때문에라도 대북정책 조정이 필요했던 노태우의 북방정책이 처음부터 평화접근법에 관한 명확한 구상을 갖고 추진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또 집권 후반기엔 내부의 대북 강경파들의 저항으로 추진력이 떨어져버렸지만, 바로 뒤 김영삼 정권의 좌충우돌 무대책의 대북정책과는 명백히 구분된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김영삼은 집권 초기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며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북으로 보내는 등의 대북 화해 제스처로 큰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그 뒤 대북 강경 자세로 돌아서서, 북핵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북의 국제원자력기구 사찰과 한미 팀스피릿 훈련 중지를 맞바꾸는 포괄적 접근을 꾀하던 당시 클린턴 정부와도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여러 기회들을 놓쳐버렸고 이른바 ‘통미봉남’을 자초했다는 것이 박 교수의 평가다.
정주영 회장이 1998년 6월 소떼 500마리에 이어 그해 10월에 또 501마리의 소를 몰고 북에 간 날 박 교수도 평양에 있었다. 그날 밤 정 회장을 숙소로 찾아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금강산 관광선 운항, 서해유전 개발, 자동차 조립 생산, 경의선 철도 복선화, 평양화력발전소 건설 등 다양한 경협 사안을 논의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직후 정 회장이 방북했을 때 두 사람은 원산에서 다시 만났고 거기서 김 국방위원장이 산업공단 후보로 개성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김 위원장과 정 회장은 개성공단을 구상할 때부터 개성공단을 장차 통일의 시발지로, 나아가 장래 통일의 도읍지로 만든다는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2002년에 현대아산과 북쪽이 합의한 당초 계획은 개성공단을 1단계로 100만 평, 2단계로 250만 평, 3단계로 2,000만 평까지 확장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라면 2011년에는 인구 100만 명 정도(울산광역시 인구에 맞먹는)가 거주하는 1,200만 평 규모의 신도시와 800만 평의 산업단지가 새로 생기게 돼 있었다. 남의 자본과 기술, 북의 땅과 노동력이 창출해낸, 통일로 가는 거대 ‘평화시’다. 이를 위해 김 위원장은 군사 요충지인 그곳 군부대를 10~15km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파격적인 조처까지 취했다.
이를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 때 합의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서해특별지대) 구상과 연결하면, 중·장기적으로 분단과 대결의 최전선을 화해와 공생, 통합의 교두보 내지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구상이 된다. 서해특별지대는 해주 특구를 개발해 인천과 해주를 잇는 항로를 열고 분쟁의 최전선이던 서해를 공동 어로, 자유항행 해역으로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박 교수는, 그렇게 되면 장차 개성공단과 해주 특구, 인천을 잇는 삼각 경계지대를 일종의 통일 특구, 통일특별자치구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두만강 유역의 북·중·러 경계 지역 나선(나진·선봉)특별시, 신의주 쪽 압록강 하구 황금평과 비단섬 특구와 더불어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도했던 선전()·상하이 특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본다. 또 그렇게 되면 한반도 남북이 온전히 동·서남 아시아와 유럽 끝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육로로 연결되면서 동서남북이 바다와 분단의 장벽으로 에워싸인 고립된 섬인 남쪽과 한반도 전체의 지정학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된다.
신뢰는 대화를 통해 쌓아나가는 것
2016년 2월 박근혜 정권이 개성공단을 전격 폐쇄할 당시 개성공단은 100만 평 규모로, 여전히 원래 구상의 1단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쯤 70만 노동자 고용을 목표로 했던 북의 계획에도 턱없이 못 미쳤다. 그럼에도 개성공단은 나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입주 기업은 2005년 18개사에서 2015년 125개사로, 북 고용 노동자는 같은 기간 6,013명에서 5만 4,988명으로 늘었고, 생산액도 1,491만 달러에서 5억 6,330만 달러로 증가했다. 2015년 기준 개성공단사업 관련 남북 교역액은 27억 달러로 당시 남북 교역 및 상업적 거래 총액의 99% 이상을 차지했다. 북도 큰 이익을 얻었지만 남쪽은 더 큰 이익을 얻었다. 존폐 기로에 서 있던 한계기업들이 개성공단에서 활로를 찾았고 더 큰 가능성을 봤다. 남북의 그 ‘통합·통일 연습’은 문제도 많았고 늘 순조롭지만은 않았으나 구체적 성과와 함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했다. 박 교수는 하루빨리 그 가능성들을 되살려야 한다고 얘기한다.
안보접근법 집착이 부른 남북 대결과 전쟁위기는 결과적으로 북의 핵개발까지 조장했고, 그것은 미국 군산복합체를 번성케 할 마중물이 된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78억 달러(9조 1,299억 원)에 이르는 한국의 무기 구매액 중 70억 달러가 미국산 무기 구매에 쓰였다. 한국은 2010~2014년에 미국이 수출한 무기의 9%를 사들여 미국산 무기 수입 세계 1위국이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이런 미국의 신무기들을 선보여 구매를 촉진하는 세계 최대의 전시장이라고 박 교수는 얘기한다.
박 교수가 보기엔, 한국을 곤경에 빠뜨린 사드배치 사태를 야기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추진도 북 핵·미사일 개발을 주요 명분의 하나로 삼고 있지만, 미국은 북의 핵·미사일을 실질적 위협으로 여기진 않는다고 그는 본다. “미국으로서는 북한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이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위한 정치적 정당성이 된다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박 교수는 6·15 남북정상회담 뒤 북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에 가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아간 2000년의 북미 간의 접근이 좀더 빨리 일어났고 또 그 뒤의 조지 부시 공화당 정권 등장으로 무산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2007년의 10·4합의가 이행됐다면, 지금쯤 우리는 평양 또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으로 가는 휴가여행 기차표나 멀리 파리, 런던, 마드리드행 기차표까지 서울역이나 광주역, 부산역에서 끊어 타고 가는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막대할 거라던 통일비용도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북의 자원 및 인프라에 대한 투자 개념으로 바뀌어 남북이 상생하는 블루오션이 되고 남쪽 기업들의 출구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클린턴 정권과 노무현 정권 말기에야 성사된 합의들은실현되기엔 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박 교수는 북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의 ‘덩샤오핑’이 되고자 한다”고 봤다. “‘북한은 믿을 수 없다’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뢰’가 있어야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신뢰라는 것은 대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대화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박 교수의 시선으로 본다면 문재인 정권은 노태우―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평화접근법 계보의 상속자다. 북도 미국도 바뀌고 있고, 집권 초기여서 타이밍도 좋다. 그야말로 평화접근법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촛불혁명의 결실인 문재인 정권의 평화접근법 실현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테러리즘 공포와 군사적 긴장으로 신음하는 세계에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