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우리들 수천명은 전세계에서부터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 모여 “또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고 되풀이하여 선포하였습니다.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북쪽으로 수천마일 떨어진 워싱턴에서 당시 조지 부시와 그의 참모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세계사회포럼이었고, 그들의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던 계획을 구체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몇년 전이라면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귀엣말로만 속삭였을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에서도 지금은 공공연하게 제국주의의 이점과 무질서한 세계를 단속할 강력한 제국의 필요성에 대해 떠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절단들은 정의를 팔아 질서를, 존엄을 팔아 규율을, 그리고 나아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패권을 얻고자 합니다. 때때로 우리들 중의 누군가는 다국적 미디어가 마련한 소위 중립적이라는 토론장에서 이런 이슈에 대해 논쟁하도록 초대되기도 합니다. 제국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마치 강간에 대해 찬반토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진정 그리워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어쨌든 신제국주의가 이미 우리에게 닥쳤습니다. 신제국주의는 과거 우리가 알던 제국주의의 최신식 모델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반나절이면 전세계를 쓸어버릴 수 있는 무기로 무장한 한 제국이 단극적인 경제적·군사적 헤게모니를 완성하였습니다. 그 제국은 각기 다른 시장의 문을 쳐부수기 위해 다른 무기들을 사용합니다. 신이 돌보는 이 지구상에서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수표장이라는 두 십자망에 걸리지 않는 국가는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포스터를 돌리는 전단팔이 소년이 되고 싶으면 아르헨티나가 그 모델이 될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망나니가 되고자 한다면 이라크가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지정학적·전략적 가치가 있거나, 어떠한 규모건 시장이 존재하거나, 또는 사유화할 기간시설이 있거나, 혹은 설마 싶지만 석유, 금광, 다이아몬드, 코발트, 그리고 석탄과 같은 값어치가 나가는 자연자원이 있는 가난한 나라는 어느 나라든지 제국이 시키는 대로 하든가 아니면 제국의 군사적 목표물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자원 매장량이 풍부한 나라들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들이 자국의 천연자원을 기꺼이 기업기계들에게 내놓지 않는 한 사회불안정이 조성되거나 아니면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가 아닌 이런 새로운 제국의 시대에서는 관련 기업의 경영자들이 외교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되고 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공공 청렴 센터’에 따르면 적어도 부시 행정부 내 ‘국방정책위원회’ 위원 30명 가운데 아홉명이 2001년에서 2002년 사이에 760억달러에 달하는 군 관련 계약이라는 선물을 받은 대기업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이라크 해방위원회’의 의장이었습니다. 또한 슐츠는 벡텔그룹의 중역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슐츠는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해관계의 상충’에 대해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벡텔이 특별히 어떤 이익을 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무슨 할 일이 있다면 나는 벡텔이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기업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서 뭔가 이익을 얻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벡텔은 2003년 4월 이라크 재건사업을 위한 6억8천만달러짜리 계약에 서명하였습니다.
이런 식의 야만적인 청사진이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과 동아시아에서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목숨이 그 대가로 치러집니다. 제국이 일으킨 전쟁은 항상 정의를 위한 전쟁이 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기업화한 미디어의 역할 덕분입니다. 기업화된 미디어들이 그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정도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 자체가 바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며, 매스미디어가 작용하는 경제원리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입니다.
적절하게도, 대부분의 국가는 끔찍한 내부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종 미디어가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것을 강조하고 어떤 것을 제쳐둘지 편집만 잘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인도가 정의를 위한 전쟁의 목표물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1989년 이래 인도 방위대가 대부분이 회교도였던 약 8만명의 사람들을 카슈미르 지역에서 살해한 사실이 있습니다(평균적으로 일년에 약 6천명씩 죽인 것이지요). 또 2002년 2월과 3월에는 2천명이 넘는 회교도들이 구자라트 거리에서 살해되었고, 여성들은 윤간을 당했으며, 아이들은 산 채로 화형되었고, 그리고 경찰과 행정당국이 지켜보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약 15만명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범죄에 대해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이것을 지켜본 정부가 다시 재선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전쟁을 부추기려는 국제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완벽한 기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으로 크루즈 미사일이 우리의 도시를 겨냥할 것이고, 가시철망이 우리 마을을 둘러싸고, 미군 병사들이 우리의 거리를 순찰하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렌드라 모디, 프라빈 토가디아, 혹은 우리의 또다른 고집쟁이들도 사담 후세인처럼 미국에 의해 감금되어, 머리에 이가 있는지 없는지, 이빨을 때웠는지 어떤지 체크당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에 방영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장이 열려있는 한, 그래서 엔론, 벡텔, 할리버튼, 아서 앤더슨과 같은 다국적기업들이 우리의 기간시설을 마음대로 차지하고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갈 수 있는 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우리 지도자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민주주의와 다수결주의, 그리고 파시즘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습니다.
인도정부가 비동맹이라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겁에 질려 기꺼이 버리고,?완벽한 동맹국 되기’의 줄에서(최신 유행어로는 이것을 ‘타고난 동맹’이라고 하고, 인도,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을 ‘타고난 동맹국’이라 부르는데) 서둘러 선두를 차지하려 함으로써, 인도정부는 그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고도 억압적인 정권이 되었습니다.
정부의 희생자는 정부에 의해 죽거나 투옥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쫓겨나고 박탈당하고 평생에 걸친 기아와 궁핍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그 숫자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개발 프로젝트로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었습니다. 과거 55년간 대형댐 공사만으로도 인도에서는 3천3백만에서 5천5백만명이 자신의 삶터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이들에게는 정의에 호소할 방책이 없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인도 경찰이, 대부분 아디바시(토착민, 빈민)와 달리트(불가촉천민)로 된 평화로운 시위군중에게 총을 쏜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특히 달리트와 아디바시 공동체에 관해 말한다면, 이들은 숲을 침입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고, 또 댐, 광산, 철강공장, 그리고 다른 개발 프로젝트로 인한 훼손으로부터 숲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정부는 경찰의 총기발사에 대해, 발포가 폭력행위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말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총을 맞은 사람들은 즉시 무장폭도라고 불려졌습니다.
인도 전역에 걸쳐 광부를 포함한 수천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테러방지’라는 이름 아래 체포되었고, 재판 없이 무기한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대테러 전쟁의 시대에는 빈곤이 교활한 방식으로 테러리즘과 연결됩니다.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가난이 범죄가 됩니다. 빈곤이 심화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 바로 테러리즘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대법원은 파업에 돌입하는 것도 범죄라고 말합니다. 물론 법원을 비판하는 것도 범죄입니다. 그들은 출구를 봉해버렸습니다.
과거의 제국주의처럼 새로운 제국주의의 성공도 제국에 봉사하는 부패한 현지 엘리트들의 네트워크에 달려있습니다. 인도 엔론사의 더러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마하라쉬트라 주정부가 인도 전체 농촌개발 예산의 60퍼센트에 달하는 이익을 엔론사에게 제공하는 전력 구매 약정에 서명하였습니다. 단 한개의 미국기업이 약 5억 인구를 위한 기간시설 개발비에 맞먹는 이익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과거와 달리 새로운 제국주의자들은 말라리아나 설사, 혹은 조기사망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도를 걸어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제국주의자들은 전자메일로 임무를 수행합니다. 옛날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인종주의는 구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제국주의의 초석은 새로운 인종주의입니다.
새로운 인종주의에 관한 가장 좋은 우화가 바로 미국의 ‘칠면조 사면(赦免)’이라는 전통입니다. 1947년 이래 매년 ‘전미(全美) 칠면조 연맹’이 추수감사절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칠면조 한마리를 선물합니다. 매년 관대한 예식을 펼치며 대통령은 이 특정 새를 살려줍니다(즉, 다른 놈을 먹습니다). 대통령의 사면을 받은 뒤에 이 선택된 새는 버지니아에 있는 프라잉팬 공원에서 천수를 다하도록 이송됩니다. 추수감사절을 위해 사육된 나머지 5천만마리의 칠면조는 추수감사절날 잡아먹습니다. 대통령 사면용 칠면조 계약을 따낸 콘아그라 식품회사는 그 행운의 새가 고관들이나 학생들, 그리고 언론인들과 얌전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훈련도 시킨다고 말했습니다(조만간 이 새들은 영어로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다국적기업 시대에 새로운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여러 나라의 현지 엘리트들, 부유한 이민자 사회, 투자은행가들, 가끔씩은 콜린 파월이나 곤돌리자 라이스 같은 사람들, 일부 가수들, 혹은 나와 같은 일부 작가들처럼 조심스레 사육된 소수의 칠면조들만이 사면을 받고 프라잉팬 공원입장권을 얻는 것입니다. 나머지 수백만명은 일자리를 잃고, 자신의 집에서 추방되며, 단수와 단전을 당하고 에이즈로 죽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요리용 칠면조인 것입니다. 그러나 프라잉팬 공원의 운좋은 새들은 잘 지냅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무역기구(WTO)를 위해 일합니다. 따라서 이들 중 누가 이 기구들을 반(反)칠면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일부는 칠면조 선발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 중 누가 칠면조들은 추수감사절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누가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기업 주도의 세계화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프라잉팬 공원으로 들어가려고 모두 필사적으로 경쟁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 가는 도중에 죽는다 해도 어쩌겠습니까?
새로운 인종주의 프로젝트의 한부분으로 새로운 인종학살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새로운 경제적 상호의존의 시대에는 경제제재 조치를 통해 새로운 인종학살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종학살이란 실제로 나서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도 대량죽음을 가져올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1997년과 1998년 사이에 이라크 담당 유엔복지조정관이었던 데니스 할리데이는(이후 그는 환멸을 느껴 사임하였습니다) 이라크에 가해진 경제제재 조치를 묘사하는 데 인종학살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이 조치가 50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저지른 어떠한 범죄행위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과 같은 공식적인 정책은 낡은 것이자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국제무역과 금융 기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느 경우에도 ‘반투스탄'(남아공의 반(半) 자치 흑인구역)을 벗어날 수 없도록 다자간 무역 규칙과 금융협약으로 된 복합적 시스템을 감독합니다. 그 전체 목표는 불공정을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미국이 영국산 의류보다 방글라데시에서 제조된 의류에 20배가 넘는 세금을 부과하는 것일까요? 왜 아이보리코스트나 가나처럼 코코아 열매를 재배하는 국가들이 이것으로 초콜릿을 만들려고 하면 중과세하여 시장에서 쫓아내려 할까요? 왜 전세계 코코아 열매의 90퍼센트 이상을 재배하는 국가들이 세계 초콜릿 생산량의 5퍼센트만 겨우 생산할까요? 왜 자국의 농부들에게는 보조금으로 하루 10억 이상을 쓰는 부유한 국가들이 인도처럼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는, 전력사용에 대한 보조금을 포함하여 모든 농업 보조금을 철회하라고 요구할까요? 왜 반세기 이상 식민지배 정권에 의한 약탈을 겪은 뒤에도 예전의 식민지들이 같은 종주국에 대해 여전히 빚더미에 빠진 상태이며, 이들에게 일년에 3천8백2십억에 달하는 돈을 지불해야 할까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칸쿤에서의 무역협정이 무산된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 정부가 그 공로를 차지하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벌인 투쟁의 나날들이 낳은 결과라는 것을 압니다. 칸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실제로 손상을 입히고 급진적인 변화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지역적 저항운동이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칸쿤으로부터 우리는 저항의 세계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습니다.
어떤 개별국가도 기업 세계화 프로젝트에 단독으로 맞설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부딪치면 갑자기 난장이가 되고 마는 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보아왔습니다. 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비범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거물급 인물들이 권력을 잡아 국가의 우두머리가 되면, 세계무대에서 무기력해져버립니다. 나는 지금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룰라는 지난해 세계사회포럼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그는 국제통화기금의 지침에 따라 연금혜택을 줄이고, 노동당의 급진파들을 숙청하느라고 분주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도 마찬가집니다. 1994년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이후 2년 내에 만델라 정부는 ‘시장의 신(神)’에게 거의 경고 한번 보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만델라 정부는 광범위한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단행하였고, 그로 인해 수백만명이 집도, 일자리도, 전기도, 수도도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가슴을 치고 배신감을 느껴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룰라와 만델라는, 어느 쪽으로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야당에서 정부 쪽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을 넘는 순간, 갖가지 위협, 특히 그중에서도 어떤 정부건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위협, 즉 ‘자본이탈’이라는 위협의 볼모가 됩니다. 지도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나 화려한 투쟁경력이 기업카르텔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급진적인 변화는 정부에 의해 수행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민중의 힘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을 뿐입니다.
전세계의 최고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닥친 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 세계사회포럼에 함께 모였습니다. 이런 대화는 우리가 싸워 얻으려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훼손되어선 안될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실제 정치적 행동은 취하지 않은 채 이런 과정에만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면, 지금껏 세계적 정의를 위한 운동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세계사회포럼이 오히려 우리 적들의 자산이 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논의해야 할 것은 ‘저항의 전략’입니다. 우리는 진짜 목표물에 초점을 맞추어 진짜 투쟁을 벌여, 실제로 타격을 가해야 합니다. 간디의 소금행진은 단순히 정치적인 쇼만은 아니었습니다. 수천만의 인도인들이 바닷가까지 걸어가서 직접 소금을 만드는 단순한 저항의 행위를 통해 소금법을 박살낸 것입니다. 그것은 대영제국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의 운동이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반면에, 비폭력 저항이 효과는 없고 느낌만 좋은 정치적 쇼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갈고 닦고 새로이 거듭나야 하는 매우 소중한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매스미디어를 위한 멋진 장관이나 사진찍기용 기회로 전락되어서는 안됩니다.
작년 2월 15일 전세계 대륙에서 모인 천만명의 사람들이 이라크전쟁에 반대하여 행진한 것은 공공의 도덕성을 보여준 훌륭한 장관이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2월 15일은 주말이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근무일을 빼먹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말 데모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조지 부시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압도적인 여론을 무시하는 부시의 자신감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이 그랬던 것처럼, 티베트가 그랬던 것처럼, 체첸이 지금 그런 것처럼, 한때 동티모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여전히 팔레스타인이 그런 것처럼, 이라크도 점령되고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시는 자기가 그저 가만히 앉아, 위기를 먹고사는 미디어들이 이 위기를 집어들어 뼈까지 훑다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그 시체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떨어져나올 것이고, 격분한 우리들도 곧 흥미를 잃을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부시는 바라겠지요.
우리의 이런 운동은 세계적인 메이저급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그저 옳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결심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이겨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뭔가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무엇인가는 반드시 우리의 분파적이고 논쟁적인 자아(自我)들을 거기에 강제로 꿰맞춰야 하는 어떤 미리 정해진 이데올로기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형태를 배제한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저항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최소한의 의제이기만 하면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맞서고자 한다면, 눈을 돌려 이라크를 봅시다. 이라크는 이 두가지 프로젝트의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많은 반전활동가들이 사담 후세인이 체포된 이후 혼란을 느끼며 물러났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없으면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들은 소심하게 묻습니다.
한번 이 문제를 똑바로 들여다봅시다. 미군이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다고 박수를 치고, 그래서 추후적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보스턴 살인교살자'(1960년대부터 체포 직전까지 13명의 백인 여성들을 모두 잔인하게 목졸라 죽인 유명한 연쇄살인범 앨버트 드 살보를 지칭 ― 역주)의 내장을 난도질했다고 ‘난자범 잭'(1888년 이후 주로 런던 이스트엔드의 창녀들을 무자비하게 난자하며 다섯번 연속 살해하였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던 영국의 연쇄살인범 ― 역주)을 우상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지난 사반세기 동안 저 교살자와 난자범은 동업자였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집안 싸움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거래를 놓고 다툰 사업 파트너입니다. 잭이 최고경영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고,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동시에 이 전쟁으로 이라크 사람들에게 가한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데 동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저항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봅시다. 중요한 것은, 미군점령을 반대하는 이라크 내 저항을 지원하거나 혹은 저항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누구인가(그들은 과거의 살인자 바트당원들인가, 아니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가)에 관해 토의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미군점령에 반대하는 범세계적인 저항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군인은 전투를 거부해야 하고, 예비군은 복무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노동자는 무기를 배나 항공기에 선적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미국의 뒤치다꺼리를 위해 인도나 파키스탄 병사들을 이라크에 파병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을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국가에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의미합니다.
저는 이라크를 파괴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주요 대기업 두개를 우리가 고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이 관계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의 목록을 작성합시다. 우리는 전세계에 걸쳐 모든 나라와 모든 도시에서 이 기업들의 사무소 위치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무소들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폐쇄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집단적인 지혜와 투쟁경험을 활용하여 하나의 목표물에 겨냥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이기고자 하는 욕망의 문제일 뿐입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 그게 종말론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 불평등을 영속화하고, 미국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세계사회포럼은 정의와 생존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금 전쟁중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박혜영 옮김)
이 글은 2004년 1월 16일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제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행한 기조연설문을 옮긴 것인데, 출전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The Nation) 2월 9일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