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산업자원부 장관이 물러났다. 5개월여에 걸친 부안주민들의 핵폐기장 반대운동 앞에서 그토록 고압적이던 정부도 고개를 숙이고 만 것이다. 언젠가 텔레비전 토론에서 정부 관계자가 환경단체가 책임지라고 압박하면서 “우리는 잘못이 있으면 장관이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진다”는 의미의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 된 셈이다. 부안에서 큰 사고가 나서 정권이 흔들리더라도 상관없다는 대통령의 ‘오기’도 전세계를 향해 매일 한마음으로 반원자력의 불을 밝힌 수천개의 촛불 앞에서 결국 꺾이고 말았다. 이제 그는 이런저런 자리에서 환경운동의 힘을 얕보았다거나 그래도 주민투표 3원칙을 지켜야 한다거나 하면서 자기 변명에 급급할 뿐이다.
부안의 승리는 세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자칫 커다란 피해를 초래할지도 모를 핵폐기장 건설 시도를 막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핵폐기물과 원자력발전 문제를 전국민에게 알리고, 이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정권 담당자나 일반 국민에게 원자력발전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에너지 정책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15년 가까이 원전 반대운동이 이어져왔고 1990년과 1994년 두차례에 걸쳐 대규모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있었지만, 이번과 같이 원자력과 핵폐기물이 전국민의 문제로 부각된 적은 없었고, 이번처럼 에너지 정책과 원자력의 대안에 대한 관심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낸 적도 없었다. 원전 반대와 대안운동이 함께 발을 맞추어야 궁극적으로 원자력을 몰아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우리나라의 원전 반대운동은 이제 바야흐로 시작인 셈이다. 그리고 부안주민은 수천, 수만개의 촛불로써 이 운동에 불을 붙인 것이다.
정부나 원자력 관계자들은 핵폐기장 건설이 무산된 것이 부안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운동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원망할지 모른다. 이번으로 안면도, 굴업도에 이어 세번째 시도까지 실패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분하랴! 그러나 이번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정부에서 아무리 강하게 밀어붙인다고 해도 성공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이번의 접근방식이 그 전과 거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두번의 실패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조금 달랐던 점은 지자체의 자발적인 유치신청이라는 장치를 도입해서 주민을 분열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인데, 오히려 주민들이 더 뭉치는 결과를 낳았으니 정부는 크게 오판을 한 셈이다. 초기(7월 22일)에 강하게 진압해서 반대운동의 싹을 꺾어버리겠다는 전술도 조금 다른 것이었는데, 이것도 주민의 반대의지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결과만 가져왔다.
정부에서는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할지 벌써부터 고민에 들어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한다 해도 핵폐기장 건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정부에서 원자력발전을 확대하려는 방침을 조금도 바꾸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건설하려 하는 한 핵폐기물은 지금보다 훨씬더 많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로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핵폐기물 처분문제로 조급해질 수밖에 없고, 핵폐기장을 어떻게든 건설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어떻게든 건설해보겠다는 자세는 실패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자세는 생리적으로 얕은 꾀를 동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긴 시간표 속에서 다양한 의견을 참조하는 가운데 최선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딴 곳, 주민이 많지 않은 곳을 찾아 그곳 주민들을 여러 방법으로 구워삶아서 일을 성사시키려는 꾀를 부리면, 결국 자기 꾀에 빠져서 실패하게 마련이다. 1990년 안면도에서는 제2원자력연구소를 세운다고 주민들을 속였다가 실패했고, 1994-5년 굴업도에서는 10명도 안되는 주민만 설득하고 보상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가 덕적도와 인천 주민들의 저항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이번에는 수억원의 현금보상설까지 흘려서 위도 주민들이 핵폐기장 유치찬성을 하게 만들었다가 부안군민들의 대대적인 반대 앞에서 두손을 든 것이 그간의 실패의 역사이다. 그동안 해외시찰과 향응 등을 통해서 기자들과 지역유지들을 꾸준히 길들이는 작업을 해왔어도, 그래서 주민들의 저항을 주류언론이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오히려 비난하게 만들었어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은 얕은 꾀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정부나 원자력 관계자들은 핵폐기장 건설을 시도할 때마다 “외국에서는 다 잘 하고 있는데 …”라는 이유를 대면서 한국도 어서 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원자력발전을 하는 나라 중에서 한국과 몇 나라만 빼고는 모두 핵폐기장을 운영한다는 것이 그들이 핵폐기장 건설의 절박함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 또는 사람들에게 직접 스웨덴, 일본, 영국, 프랑스 등의 핵폐기장을 보여주면서 핵폐기장이 안전하고 지역에도 도움을 준다는 선전을 해왔다. 그런데 그들이 주로 보여준 것은 핵폐기장 시설과 그곳의 책임자들이었다. 시설은 모두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고, 책임자는 안전하게 잘 돌아간다는 말만 했기에, 보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괜찮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란, 그곳의 핵폐기장 건설이 어떻게 성사되었느냐는 과정과 관련된 것이다. 정부나 원자력 관계자들은 그 과정에 대해서는 한번도 알린 적이 없었고, 스스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부의 주장과 달리 전세계에서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핵폐기장은 소수에 불과한데, 이 중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된다고 하는 스웨덴의 포스마크 핵폐기장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부, 의회, 원자력산업계 그리고 국민이 오랜 기간 동안 의논하고 협상하고 타협한 결과의 산물이다. 그것도 원자력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국민적인 합의라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했다. 독일은 25년 가까이 모든 핵폐기물을 처분할 수 있는 핵폐기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끝에 원자력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러고 나서야 핵폐기장 건설을 원점에서 다시 시도하고 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조급하게 시도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자 스웨덴처럼 긴 시간표와 민주적인 절차를 가장 중시하게 되었고, 원자력도 더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은 사실상 원자력을 확대하지 않고 있지만, 아직까지 원자력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고 핵폐기장 건설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성공전략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 민주적인 절차나 토론 또는 합의와 관련해서 미국보다도 못한 것 같다. 주민의사를 물어서 유치신청을 받겠다는 것은 이번에 극히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부의 전략은 어떻든 밀어붙인다는 것이고, 그것이 실패를 낳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핵폐기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원자력발전을 계속하려 한다. 주민투표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이번에는 주민투표를 통해서 핵폐기장 유치신청을 하는 지역을 찾아내서 건설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주민투표를 진정으로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지 않을 것이다. 주민투표가 요식행위로 그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럴 경우 주민투표에서 다수가 찬성한다 해도 프랑스의 경우와 같이 반대하는 소수가 끝내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이로 인해 핵폐기장 건설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주민투표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 자체로는 바람직한 일이다. 원자력문제에 접근하는 정부의 방식에 약간의 진전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투표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진정으로 의미있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이번 특집에서 우리는 바로 이와 관련해서 외국의 사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핵폐기장과 관련해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객원편집자 이필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