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화된 무책임의 체제 속에서
김종철 두번째 사상강좌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강좌의 취지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수많은 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가 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 더 세계사회와 긴밀한 연관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을 우리가 민감하게 바라보면서,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창조적인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는 너무나도 완강한 기득권층의 무지와 무관심과 무책임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학문, 교육, 언론 할것없이 이 사회를 지금 지도하고 이끌어간다고 하는 지도층들을 한마디로 묘사한다면 ‘조직화된 무책임의 집단’이라고 해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조직화된 무책임’이라는 말은 제가 만든 말이 아니고 여러 철학자들이 써온 말이기는 합니다만, 현대사회에 이 엘리트들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적인 질서가 근본적으로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제 위에 있다는 얘깁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이 한국사회가 조직화된 무책임의 사회로서 아마도 대표적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지금 우리가 꾸려나가고 있는 이런 경제생활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장기적으로 도저히 지탱이 불가능한 체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인 토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회가 바로 우리사회입니다.
그 단적인 본보기가 농업에 대한 전적인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이 나라 엘리트들의 무책임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번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국의 농민이 자결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단지 에피소드 식으로 넘겨 처리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탐구해나가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이 지금 대학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능아 집단들로 구성된 사회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대학생 인구를 거느리고 있는 사회치고 말입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역사도 가르치지 않고, 문화의 본질도 가르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라는 본질적인 의문을 학생들로 하여금 추구하도록 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젊은 세대들은 거의 전부가 전자매체를 통해 찰나적인 만족을 구하는 영상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빠져 있도록 소비문화가 촉구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금년에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략전쟁이라는 사태가 벌어지고 국내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상황을 맞이해서, 우리가 어느정도 이 사회의 진로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는데, 그 기대마저 지금 이라크 파병에 관한 사회적 논의에서 보듯이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럴 때에야말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취지로, 저희들이 몇사람 안되지만 힘을 모아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를 기획하게 되었고, 오늘 그 두번째 강좌를 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볼프강 작스 선생을 초대했는데, 이분이 아주 귀한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어제〈문화일보〉를 보니까 며칠 전에 서울 모대학 예술학부에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연극배우 박정자 씨를 초대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초청한 측에서는 박정자 씨가, 기성세대의 생각으로 아주 유명한 분이니까, 강당이 미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400명 넘게 들어가는 큰 강당을 특강교실로 정했다고 해요. 그런데 박정자 씨가 두시 정각에 약속된 장소에 가보니까 학생이 아무도 없더라는 거예요. 15분 후에 한 학생이 나타났고, 30분 후에 네사람의 학생이 나타나서 겨우 다섯사람 앞에서 한시간 반 동안 특강을 하고 나와서 울었다는 기사가 실렸더라고요.
제가 어제 볼프강 작스 선생한테 이 기사 이야기를 먼저 했습니다.(웃음) 이게 아마 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영상매체 이외에 이런 오프라인에서 진지한 얘기에 귀기울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 그러니까 작스 선생이 염려 말라고, 적어도 내일 강당에는 다섯사람(사상강좌 운영위원)은 있을 것 아니냐, 그랬습니다.(웃음) 그런데 오늘 다섯사람이 아니라, 예상 외로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작스 선생님에 대해서 좀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제가 이 사상강좌를 구상하면서 맨 처음에 염두에 둔 사람 가운데 한분입니다.《녹색평론》독자들은 알고는 있겠지만, 한국사회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인데요. 신문기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해달라고 전화가 계속 왔는데, 사회 전체가 속물적이라서 그런지, 이분이 독일 그린피스 의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하고 소개하면 다 귀를 기울여요.
지금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독일이 미래를 준비하는 나라로서는 세계 최선두에 있는 나라죠. 우리나라가 부안 핵폐기장 때문에 나라 전체가 골치가 아픕니다만, 독일은 핵발전소를 향후 15년 안에 완전히 폐기하기로 결정을 내린 나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재생가능한 에너지 시대, 태양에너지 시대로 들어가겠다고 국가적인 합의를 본 나라입니다. 그리고 녹색적인 가치를 이념으로 하고 있는 정당이 현실정치에서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나라이지요. 아무튼 독일이 세계에서 모범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작스 선생은 말하자면 거기에 사상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식인입니다.
독일의 뮌헨대학, 튀빙겐대학, 미국 버클리대학 등에서 신학, 역사학, 사회학을 공부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독일의 ‘부퍼탈 기후, 에너지, 환경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한때 이탈리아에서《개발(Development)》이라는 잡지 편집자로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90년대 초에《녹색평론》편집을 시작하면서 이분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녹색평론》을 시작한 여러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외국에서 부쳐오는 중요한 저널들을 보다가 이것을 나 혼자만 그냥 보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이것을 소개하는 잡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보던 저널 가운데《뉴인터내셔널리스트》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 잡지 한 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분의 글로만 채워져 있는 특집호가 있었어요. ‘개발(발전)의 고고학’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특집호였습니다. 그때 제가 이분의 이름을 처음 접하고 그 특집호를 면밀하게 보면서 제가 어떻게 생각의 방향을 잡아야 할지 아주 많은 암시를 받았습니다. 그후에 계속해서 이분이 써낸 책을 찾아서 읽고 공부를 해왔습니다. 뭐 그다지 충실한 공부는 못했습니다만. 참고로, 이분의 저서로는《개발사전》,《글로벌 에콜로지》,《’북’의 녹색화》,《지구 변증법》등이 있습니다.
지금 작스 선생은 단순히 환경운동이라기보다는 환경과 빈곤문제, 이것이 동시에 해결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그런 입장에 서서 ‘정의의 에콜로지’, ‘공정한 에콜로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저작활동과 실천적인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지난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지구정상회담’ 직전에, 작스 선생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지식인들이 모여서 그 정상회담에서 어떤 의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될 것인가에 관해 의견을 모아서 중요한 문건을 낸 게 있습니다. 바로《요하네스버그 비망록 ― 한 연약한 행성에서의 공평성》이라는 것인데요. 오늘 이 모임의 준비로서 저희 사상강좌 운영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여 소책자로 발간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들고 계신 것이 그것입니다.(이 자료의 전문은 녹색평론사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음.) 앞으로 이것을 조금더 다듬어서 정식으로 출간도 할 예정입니다. 오늘 작스 선생께서 아마도 그 문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만, 무슨 이야기를 할 거냐고 미리 물어봤더니 여기 와서 청중들 분위기를 봐가면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해요. 이 양반 일하는 스타일이 저하고 좀 비슷해서 계획 없이 강연을 하는 분인 것 같아요.(웃음)
《요하네스버그 비망록》의 골자라고 할까요, 제 나름대로 그 핵심을 살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앞으로 얼마 있지 않아서 이 지구상의 인구가 지금보다도 두배 이상으로 늘어나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생존의 자연적인 토대를 훼손하지 않고 그 많은 인구에게 우리가 이웃한 인간으로서, 이웃사람으로서 어떻게 친절을 베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얘기죠. 같은 이야기라도 표현을 이렇게 하면 좀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우리 서로서로가 이 빡빡한 지구 속에서 인성을 파괴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웃사람으로서 서로서로를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 인류의 과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분이 단순히 딱딱한 사회과학적 개념만 가지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닌 것입니다. 신학도 공부를 하셨다고 하니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평등’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도,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어떻게 친절하게 대할 것인가, 어떻게 환대를 베풀 것인가, 이런 각도에서 오늘 말씀하실 것 같아요. 제가 어제 이분을 만나서 오늘 점심때까지 몇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만, 뭐라고 할까요, 그 바탕에 윤리적인 감각이 깊게 깔려있는 에콜로지스트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작스 선생님의 강연을 듣도록 하겠습니다.(박수)
강연 ― 세계화 시대의 에콜로지와 정의
작스 안녕하십니까? 친절하고 관대한 소개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한국말을 못해 죄송하며, 여러분의 인내심을 부탁드립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모든 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강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통역해주시는 박혜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특별한 여행에 초대하고자 합니다. 아까 김종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반대로 저는 계획이 있습니다.(웃음) 저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번째는 ‘연어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모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잇따른 세 부분은 좀더 이론적인 이야기가 될 텐데, 세번째는 ‘한계의 부상(浮上)’, 네번째는 ‘부자들의 생태적 발자취’, 다섯번째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권’이라는 제목을 붙이겠습니다. 마지막 여섯번째는 결론 부분으로서 “지속가능성 없이는 지구적 공평성(global equity)도 없다”입니다. 이것이 저의 오늘 강연계획입니다.
앞의 두 이야기, 즉 ‘연어 이야기’와 ‘모기 이야기’는 세계화와 생태주의 그리고 정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먼저 ‘연어 이야기’부터 해봅시다.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독일사람들은 연어를 먹지 않았습니다. 연어로 된 요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연어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슈퍼마켓에는 날연어와 훈제연어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연간 1천9백만kg의 연어가 소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는 자연산 연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연어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프랑스인을 다 먹일 만큼 충분히 연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먹는 연어는 해안을 따라 만든 어장에서 대량 양식된 연어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연어들의 먹이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겁니다.
나는 여러분을 침보테라는 곳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침보테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라틴아메리카의 작은 도시로서 페루의 서쪽 해안 한중간에 있습니다. 침보테 시에 도착하여 항구에 다가가기 시작하면 냄새가 진동합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적갈색을 띤 두개의 강이 흐르고 있고, 항구 근처에 공장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고깃배가 들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작은 물고기를 잡아 공장에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공장은 이 작은 물고기들을 생선먹이로 만들어 스코틀랜드나 노르웨이로 운반합니다. 이 생선먹이가 결국 양식연어를 기르게 되는데, 연어 1kg당 5kg의 생선먹이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독일인들은 점심으로 연어를 먹습니다. 저칼로리의 신선하고 맛있는 생선으로, 말하자면 포스트모던한 식사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그 배후에는 남아메리카의 물과 공기의 오염, 해안선을 따라 감소하는 물고기들, 지역 어업의 쇠퇴 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무, 새우, 면화, 땅에 대해서도 똑같은 얘기를 들려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계적 상품사슬에도 전형적으로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세계화의 과정에서, 다른 많은 물자들과 마찬가지로 확장된 거대한 상품사슬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많은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상품사슬이 지리적으로 확장되어 퍼져나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전지구적 경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익과 불이익이 새로운 방식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슬의 한쪽에는 존엄함, 이윤, 깨끗함이 집중되고 다른 한쪽에는 환경파괴, 경제적 쇠퇴, 무력(無力)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제 두번째 이야기, ‘모기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여러분이 지구온난화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어떤 특별한 이미지는 버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구온난화라는 말을 들으면 ‘대재앙’을 떠올리게끔 배워왔습니다. 예를 들어 몇년 전에 지구온난화가 독일에서 이슈가 되었을 때, 독일의〈슈피겔〉지는 북해의 바닷물이 쾰른 대성당을 무너뜨리는 이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떨쳐버려야 할 지구온난화의 대재앙의 이미지입니다. 왜냐하면 지구온난화의 진짜 위험은, 조용하고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온난화를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데 모기, 특히 말라리아 모기가 그렇습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하면, 지구상의 어떤 지역, 특히 적도 부근 지역에서는 말라리아 모기의 발생률이 증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라리아 모기들이 지리적으로도 퍼져나갈 뿐만 아니라 더 높은 고도로도 이동하여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고지대에서는 전에 없던 말라리아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 수백만,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구온난화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지구온난화는 특정 지역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킬 것이며 농업, 토지의 비옥도, 기온, 강우량, 계절의 패턴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 지역의 거주적합성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즉 한편에는 대기가 과포화 상태가 될 때까지 다량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여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경제·문화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는 이러한 변화에 따르는 잔인한 결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영향들로 인해 이들의 거주지가 살기 어려운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보호받는 사람들이며,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무고한 사람들입니다. 기후변화의 잔인한 결과를 먼저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은 미국인도, 독일인도, 심지어 한국인도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세네갈 해안선에 사는 어부들이고 라자흐스탄의 농부들이며, 에티오피아 고지대의 목동들입니다. 요컨대 기후변화의 첫번째 희생자는 전세계 인구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읽은 적이 있겠지만 오늘날 인도, 방글라데시 등에서 발생하는 폭풍, 허리케인, 홍수들은 기후변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예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태주의와 정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이제 좀더 이론적인 세가지 이야기 ― 앞의 두가지 이야기를 반영하는 ― 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한계의 부상’이라고 이름붙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의 현대경제는 몇개의 숨겨진 가정 하에 움직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이 영원히 관대하고, 영원히 이용가능하며, 영원히 풍부할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현대경제가 자연을 대단한 정도까지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생태계를 마치 그것이 땅, 물, 목재, 석유들을 캐내는 광산인 것처럼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산화탄소, 공기오염, 소음 등을 버리는 쓰레기 처리장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는 자연과 생태계도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항상 이용가능하다는 가정은 잘못된 가정입니다.
사실 지난 50년간을 전지구적으로 되돌아보면, 경작지의 3분의 1이 황폐해졌고, 열대림의 3분의 1이 사라졌으며, 마실 물의 4분의 1이 사라졌고, 어장의 4분의 1에서 더이상 생산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멸종된 식물이나, 과부하 대기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부자국가 및 한국 같은 몇몇 개발도상국을 포함하는 전세계 인구의 20-25%인 소수만이 생태계의 한계에 도달한 경제적 진보의 열매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매년 자연이 재생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연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인류는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였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이 새로운 단계란 우리의 생태적 과소비가 인류역사에서 눈에 띄는 한 점으로 등장하는 단계입니다. 매년 우리는 생물권이 재생산할 수 있는 것보다 30% 이상을 더 소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년 지구의 적재능력보다 약 30% 이상을 과소비하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계산만으로도 지금과 같은 경제발전은 전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구는 매년 130억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나무, 채소, 바다 등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현재 연간 일인당 평균 이산화탄소 방출량은 11.8톤입니다. 이 11.8톤을 전세계 인구 60억으로 곱하면 대략 680억톤의 이산화탄소가 됩니다. 이것은 지구가 흡수할 수 있는 양의 5배나 되는 이산화탄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세계 모든 국가가 독일의 선례를 따른다면 우리는 이산화탄소의 흡수를 위해서 다섯개의 지구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에게는 오직 하나의 지구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접근방식은 모든 재앙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아는 발전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습니다. 증가하는 세계인구가 모두 지금과 같은 발전방식을 따르면서 지금과 같은 서구식 생활수준을 누릴 수 없다는 결론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생태계의 적재능력을 이해하게 되면 무한한 경제성장에 대한 믿음이 허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가난한 나라들은 과거에 부자나라, 부자경제가 취한 길을 따라가서는 안되며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제 제 여행의 네번째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방금 ‘한계의 부상’에 대해서 말했고, 이제 ‘부자들의 생태적 발자취’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자연의 재산, 즉 모든 바다, 숲, 물고기, 곡식들은 지구적 생태공간이며 각 국가는 이 지구적 생태공간의 단지 일부만을 취할 권리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특정 국가와 특별한 사회계급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생태계는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인구의 20%가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세계인구의 20%가 45%의 고기와 생선을 소비하고 68%의 전기를, 84%의 종이를, 87%의 자동차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산업화된 국가들은 이런 자원을 자신들의 영토에서만 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타국의 땅과 자원을 사용하면서 이 지구상에 점점더 많은 생태적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 네덜란드, 일본, 그리고 한국도 마찬가지로 자기 영토를 넘어 다른 나라의 자원을 이용하여 살고 있습니다. 결국 세계화는 어떤 면에서 이 20%의 인구를 25% 또는 30%로 증가시키는 것, 즉 고(高)자원소비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계화의 과정에서 자원착취의 최전선, 즉 채굴·벌목의 전선들은 자원을 향한 허기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구의 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글뿐 아니라 심해(深海)에서도 석유가 채굴되고, 파타고니아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에서도 벌목이 행해지고 있으며, 바다뿐만 아니라 북극지대와 심지어 남극에도 해상 생선공장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세계 소비계층은 자원의 흐름이 마치 거미줄처럼 전지구상에 펼쳐져 있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거미줄을 통해 구매능력이라는 중력을 이용하여 그들 쪽으로 자원을 끌어당기려 합니다. 그들의 더욱 높은 구매능력은 가장 귀중한 자원들을 끌어당기게 합니다. 그리하여 현재 세계인구의 20%가 ― 대개가 OECD 국가들인데 ― 생물학적으로 생산적인 지구표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은 화석연료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화석연료 자원을 생물학적 자원으로 전환하여 보면, 세계 인구의 단지 4분의 1이 전지구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제 강연의 다섯번째 부분,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앞서 자원에 굶주린 고(高)소비계급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자원이란 것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원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 즉 자원에 굶주린 고소비그룹이 가난한 사람들의 자급권·생계권과 충돌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 위해 필리핀의 ‘민데나우’라는 작은 섬으로 여행을 떠나봅시다. 자신들의 소비자들을 위해 슈퍼마켓을 가득 채우려는 농업대기업들은 땅에 굶주려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가령 ‘돌(Dole)’이나 ‘델몬트’ 등은 땅에 굶주려 있어서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필리핀에도 옵니다. 한편 가난한 ‘남(南)’의 국가들은 외환확보에 굶주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농업대기업들이 이곳 필리핀의 민데나우에도 오게 됩니다.
파인애플을 예로 들어봅시다. 캘리포니아의 두 거대 농업대기업인 ‘돌’과 ‘델몬트’는 지난 15년간 민데나우 섬에서의 파인애플 생산을 네배로 늘렸습니다. 민데나우에는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나 키 큰 파인애플 나무들의 긴 대열이 보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슈퍼마켓을 채우기 위해서 살충제와 농기계 투자자들도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날 민데나우 섬은 경작지의 약 50%가 파인애플, 커피, 목재, 코코넛을 재배하는 외국회사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습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땅에는 농부들이 먼 곳에 있는 소비자들을 위한 식품이 아닌 자신들의 자립을 위해 먹을거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환금작물이 자급용 작물을 밀어낸 것이며, 소농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먹을거리를 생산하던 땅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로써 지역주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한 자원을 구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작물을 기를 수도, 사냥을 할 수도,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영역이 이제 먼 곳의 소비자를 위한 환금작물 수출을 위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농작물수출 추진을 위해 통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단작(單作)이 진행되고, 단작은 많은 살충제를 필요로 하며, 많은 양의 물을 소비하고, 당연히 땅을 요구합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물과 땅과 숲은 지금까지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의 자급용으로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세계시장을 위해 지역주민들을 땅에서 몰아내고 물을 고갈시키며 생물다양성을 사라지게 합니다. 이리하여 필리핀의 작은 섬 민데나우는, 요컨대 한쪽에서는 더 많은 번영과 돈, 부(富)를 누리게 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세계인구의 3분의 1이 자연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슈퍼마켓에 가서 쌀이나 토마토를 사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땅을 경작하고, 숲에서 먹을 것을 채집하고, 물고기를 잡습니다. 따라서 이 3분의 1의 사람들에게 생태계의 기능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숲, 식물, 경작지, 호수, 바다 등의 생태계는 생산을 위한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상당수는 먼 곳의 소비자·기업의 자원에 대한 요구가 지역주민의 생계권 요구와 충돌하는 것과 상당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점에서는 더 잘사는 사람들의 자원에 대한 갈망이, 자연에 직접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세계인구의 3분의 1의 삶의 조건을 격하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인애플의 경우와 똑같은 갈등의 이야기를 대형댐, 전기, 광산, 벌목, 대규모 농업의 자본화, 유전공학적 농업 등에 대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으며 갈등의 패턴은 매우 비슷합니다. 먼 곳의 소비자·기업의 요구와 지역주민들의 요구는 각각 충돌합니다. 따라서 종종 발전이라고 하는 것이 부자들의 ‘필요’를 넘어서 더 얻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자원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앞서 네개 부분에서 저는 생태주의, 정의, 그리고 세계화의 전체적 패턴을 예증해 보여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이제 여기에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제목은 “지속가능성 없이는 지구적 공평성도 없다”입니다. 우선 저는 여러분께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환기시키려 합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사람들은 환경이란 항상 ‘더러움’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환경보호라는 것은 오염되지 않도록 물, 땅, 공기를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산업화 시스템으로 인해 더러워진 냇물을 정화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새로운 기술, 즉 여과기술, 정화기술, 쓰레기처리 기술 등을 개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기술과 관련한 국제적 기구들이 많은데 이들은 모두 아마도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환경정책이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깨끗한 사회’의 창조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속가능성이란 이런 것이 아니라 훨씬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저는 ‘깨끗한 사회’의 추구라고 하는 환경정책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사회라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과도한 벌목을 할 수 있고 물고기를 남획할 수 있고, 땅의 비옥도와 주위경관을 격하시킬 수 있으며, 이산화탄소를 과다 방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깨끗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른 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속가능성은 잘사는 이들의 자원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는 좀더 아카데믹하게 말한다면 지속가능성이란 물론 사회가 깨끗하기도 해야겠지만, 동시에 경제에서 자원 흐름의 양과 전체 자원소비의 양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적은 석유, 더 적은 목재, 더 적은 물고기를 소비할 수 있는 사회,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보다 자원에 덜 의존하면서 부를 창조하는 사회체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토피아라고 하는 것은 깨끗한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가벼운 사회, 저(低)자원소비 경제입니다. 평균적으로 독일인들은 매년 80톤의 물자를 소비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한편 중국인들의 평균 물자 사용량은 35톤입니다. 이것은 독일인의 평균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자연이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수치입니다. 이것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지속가능성이란 어떻게 독일인들이 훨씬더 적은 자원을 소비하고도 잘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자원소비 경제를 창조해야 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생태적 이유가 그 하나이고 그와 똑같이 중요하게 공평성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결국, 만약 고소비자들이 자신들의 자원소비를 감소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동등한 권리와 기회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년간 개발 전문가들은 공평성을 이야기할 때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해왔습니다. 더 많은 공평성을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고, 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반면 어느 누구도 부자들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생태적 한계 앞에서 우리가 더 많은 정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자들에게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와 같은 부(富)의 형식은 더 많은 공평성를 획득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임이 분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난 80여년간 서구사회가 엄청난 부를 창조해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류역사에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식의 부의 축적은 뚜렷이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체제가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의 형식은 민주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계로 확산될 수 없습니다. 모든 나라에 도입될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지구라는 행성이 주는 환대(hospitality)를 그 대가로 지불하고서야 모든 나라와 사람들에게 도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독일인과 같은 삶을 산다면, 우리는 심각한 환경적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여기서 말하는 부의 형태라는 것은 자동차 사회 같은 것입니다. 전세계를 자동차 사회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는 산업화된 농업을 예로 들어봐도 전세계의 식료품 생산을 산업화된 농업으로 전환할 수는 없습니다. 육류 중심의 식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토지를 유럽인들이 요구하는 것만큼의 육류를 생산하기 위해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산될 수 없는, 오직 현재 인류의 20-25%의 인구만을 위해서 작동하는 부의 형태를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저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만, 만약 전세계 국가들이 한국과 같이 석유와 식료품을 수입한다면 석유와 식료품이 각 나라에 고르게 분배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석유와 식료품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입하는 나라가 있으면 수출하는 나라가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중국이 한국의 선례를 따른다면 ― 지금 따르고 있습니다만 ― 중국은 조만간 엄청난 양의 석유와 식료품을 수입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세계시장을 쥐어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하는 부가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특히 부자경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부를 재창조하는 것이며,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있는 부, 세계 모든 이들이 도입할 수 있는 부, 즉 저자원소비의 부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을 포함한 유럽, 그리고 한국 앞에 놓여있는 과제입니다.
저자원의 부를 창조하기 위해 간단히 말씀드려 기본적으로 세가지 길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더 큰 효율성’의 길입니다. 즉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좀더 현명하고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술적인 과제입니다. 두번째는 ‘만족’의 길로서, 좀더 적은 재화로 행복해지는 기술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의 가치관과 행위에 관련된 길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여러분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길은 ‘더 큰 조화’의 길입니다. 즉 자원의 흐름을 자연의 흐름과 양립 가능하도록 재구성하는 길로서 이 또한 기술적인 과제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건축 기술 같은 것인데, 태양건축은 석유가 아니라 태양광선에서 열을 얻는 것이므로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생태주의자들은 자주 유기농업, 태양건축, 재활용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고귀한 목표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생태주의는 자연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입니다. 생태주의는 단지 나비나 고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시민권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콜로지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이 행성에서 다같이 잘살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에콜로지 없이는 공평성도 시민권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날의 정의는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더 적은 것을 취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박수)
[질의 / 응답]
생태주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존심의 문제
질문 선생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생태주의자가 되셨는지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작스 제가 16살 때로 기억합니다만, 어느날 한 광장 앞을 지나가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비어 가든’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마을사람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곤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곳이 주차장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잘못되었다, 만약 이것이 진보라면 나는 진보가 싫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보’라는 사고가 ‘비어 가든’을 주차장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전혀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모욕감을 느꼈고, 그 사건으로 저는 통상 ‘경제적 진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는 생태주의야말로 깊이있는 느낌이나 감각,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사고,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관한 ‘자존심’과 관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하면 이것은 공평성과도 연관된 문제지만, 우선은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질문 어떻게 해야 국가(정부)가 에콜로지와 정의를 위한 ‘방향의 전환’을 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한국의 현실로 볼 때 그것은 매우 요원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듭니다만.
작스 제가 앞에서 세가지의 길, 즉 효율성, 만족감, 조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공공정책이라는 것이 어쨌든 이 세가지에 모두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비록 효율성 정책의 측면에서는 이미 관련되어 있고, 만족감의 측면에서는 좀 덜 관련되어 있으며, 새로운 기술을 창조하기 위한 자연과의 조화 측면에서는 더더욱 덜 관련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정부의 행동은 부족하지만 항상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앞으로 더 큰 행동을 취해야 하며 정부의 적극적 행동 없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부의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효율적인 행동은 시민들이 어떤 해결책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조만간 핵에너지로부터 벗어날 계획인데, 그 이유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국가 곳곳에서 반핵운동이 일어났고, 시민들이 핵발전소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도 알다시피 핵발전소 건설은 너무나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듭니다. 이제 산업계조차 고비용과 시민들의 거센 반대운동 때문에 더 이상 핵발전소 건설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독일의 고속도로 건설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시민들의 반대가 정부로 하여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차선의 정치적 행동은 정부가 딜레마에 처해있는 문제에 공적 토론을 통해 간섭하는 것입니다. 가령 한국의 경우, 석유수입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것은 정부로서도 딜레마일 것입니다. 정부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석유생산이 2010년에서 2012년이 되면 최고치에 달했다가 그후로는 감소하리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 석유값이 오를 것이고 한국경제는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심지어 가장 보수적인 정부라 하더라도 이 문제에 답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토론의 장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핵에너지를 고려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핵에너지는 너무 비싸고 핵발전소 건설에는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며 그리고 핵폐기장을 어디에 건설해야 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핵기술이 없는 나라의 경우 핵기술이 있는 나라에 의존하게 됩니다. 핵에너지 사용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공적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에너지 효율성을 강화하고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지향하며 ‘부드러운 에너지 사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정부가 이러한 공적 토론을 통해 딜레마에 빠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반대론자들, 혹은 대안론자들로서는 새로운 전략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에너지정책, 농업정책, 교통정책 등의 분야에서 나온 새로운 제안들이 지금까지 유럽의 ‘녹색화’에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요컨대, 정부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는 ‘직접적 항의’와 ‘제안’이라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산업화는 빈곤을 해결할 수 없다
질문 ‘남’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이제는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들은 서구식 개발의 선례를 따르지 말고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하나의 희생과 빈곤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작스 정말로 이것은 딜레마입니다. 그러나 저는 산업화가 빈곤을 없애준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가장 부자국가라고 하는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전체 인구의 15%가 절대가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강도가 센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미국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산업화를 빈곤퇴치와 동일시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독일이나 한국이 산업화를 통해 빈곤을 감소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파괴라는 대가를 통해서였습니다. 유럽의 복지국가는 자연파괴를 그 대가로 치르고 획득한 복지입니다.
비산업화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흔히 가난한 나라라고 불리는 이 나라들의 경우 산업화란, 소수는 부자가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은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산업화가 빈곤을 생산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자연에 의존하여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직 땅을 보호하고 생태계를 번성케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산업화는 생태계의 번성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조심스러운 성장, 조심스러운 산업화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질문 얼마전에 한국인 농촌지도자 이경해 씨가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작스 앞의 질문과 연결지어 말해보면, 저는 그 농부의 자살이 “산업화가 빈곤을 퇴치해주지 못한다”는 하나의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자결은 산업화를 위해 농업을 퇴출시키는 것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독일 언론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되었습니다만, 그의 행동은 WTO체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WTO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자결에 크게 슬퍼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고무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비극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비극이었습니다.
질문 지금 한국에서는 많은 농민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스 한국의 농업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좀더 일반적으로 농업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농업은 식량주권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경제를 창조해내는 데도 가장 중요한 근간입니다. 우리는 농업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농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올바른 정책은 농업의 중요성을 더욱 확대·강화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래의 진정한 직업은 ‘농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농부는 식량생산자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직접 접촉하면서 비(非)화석연료 경제를 위한 원료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화석연료 경제를 위한 중요한 원자재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섬유소(식물)입니다. 우리가 석유가 아닌 생물학적 자원을 이용하는 산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에너지나 새로운 물질의 생산에 바이오매스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농부를 단지 식량을 기르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자원을 생산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경제성장’이라는 강박증
질문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점령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에 대한 한국군의 파병문제를 둘러싸고 지금 한국사회는 논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작스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한국의 파병문제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독일과 프랑스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독일과 프랑스는 처음부터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병에 반대해왔고 미국을 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불법적인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전쟁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쟁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거짓말에 기초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적어도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는, 파병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독일은 심지어 비전투병을 보내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로서 이라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유엔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입장은 우선 미국이 이라크에서 식민주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국익’ 혹은 ‘경제논리’ 등을 이유로 침략전쟁에 파병한다는 것은 대단히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질문 “우리가 급격히 소비를 감소한다면 경제적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만연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 악순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완전히 붕괴해버린다면 사람들의 기본적 요구조차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자동차산업은 한국경제의 기간산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동차 소비를 감소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동차 불매에 동참하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작스 기본적으로 저는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이 반드시 경제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동차산업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국보다 오히려 독일에서 자동차는 전략적으로 더욱 중요한 기간산업입니다. 독일경제의 엔진이라고도 불리지요.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풍요의 어떤 단계가 지나고 나면 경제성장이 반드시 물질적 성장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성장 즉 돈의 성장과 물질적 성장 즉 자원집약적 성장을 구별해야 합니다. 자원의존성의 증가 없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심지어 물질의 투입 또는 자원집약성을 줄이면서도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길도 있습니다. 요컨대 경제붕괴의 필연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체제가 굉장한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경제가 자원집약적 부문에서 자원요구가 덜한 부문으로 옮겨가는 것은 장기적이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또하나의 진정한 도전은 특히 우리의 실경제를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경제의 근본적인 효능은 사람들이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에 있습니다. ‘경제성장’ 없이도 잘 기능하는 경제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진 중요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도전에 대해 답할 능력이 가장 없는 사람들이 경제학자들입니다.(웃음)
질문 지금의 경제학, 즉 서구에서 확립된 경제학, 좀더 나아가서는 서구문명이 자연(자원)의 무한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작스 저는 대략 1800년경부터 지금까지가 역사적으로 특별한 시기라고 믿습니다. 유럽, 미국, 기타 후발선진국들에게 이 시기는 오히려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국의 역사가, 포머런스(Kenneth Pomeranz)는 묻습니다. ― 어떻게 유럽은 앞서 나갈 수 있었을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서구는 다른 나라를 제쳐두고 앞서 나갈 수 있었을까. 많은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포머런스는 매우 흥미로운 답을 하고 있는데 그는 1800년경에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유럽은 생태학적으로 볼 때 매우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목재의 위기입니다. 1800년경에 유럽과 중국은 비슷한 목재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 포머런스는 묻습니다 ― 어째서 유럽은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중국은 벗어날 수 없었는가.
두가지의 설명이 가능합니다. 우선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재생가능한 자원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유럽은 자신들의 생태학적 발자취를 신대륙으로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하나는 유럽국가들은 유럽대륙 전역에서 화석연료를 채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간추리자면 이러한 두가지 종류의 자원확보, 즉 신대륙으로부터의 바이오매스 획득과 유럽대륙에서의 화석연료 획득이 유럽으로 하여금 목재의 위기와 나아가 자연자원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그것이 단지 특별한 역사적 시기였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최초의 점령자만이 식민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두번째, 세번째로 도착하는 자에게 식민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디서 바이오매스를 구하며 어디서 산업화를 추진할 화석연료를 채취할 것입니까.
화석연료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의 조건은 오늘날에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 시기를 역사에서 하나의 특별한 시기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석연료 자원과 식민지의 존재는 서구사회의 인식론 형성에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서구인의 문화적 관점과 습관을 형성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전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 등에게는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관념이 없었습니다. 왜 그들에게는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이 없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경제는 사용가능한 연료와 자원이 상실되는, 다시 말해 생물자원이 줄어드는 것 때문에 제한을 받는 그런 경제였기 때문입니다. 환경적으로 이용가능한 생물자원이 유한하다고 인식하는 한 무한한 성장을 꿈꿀 수는 없는 겁니다.
이처럼 고전경제학의 아버지들은 생물학에 기초한 경제시스템만을 목격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1820-1830년대에 이르러 증기엔진이 일반화되면서부터 무한 경제성장이라는 아이디어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유기 자연자원의 한계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증기엔진의 동력인 화석연료가 경제를 계속해서 전진시킬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무한 경제성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증기엔진의 자식’ 또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문화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역사의 하나의 부산물이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 회담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 이《요하네스버그 비망록》은 요하네스버그 지구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작성된 것입니다. 회담 이후인 지금에 와서 이 비망록의 내용을 다시 볼 때, 보완되어야 할 부분, 또는 어떤 한계 같은 것을 평가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아울러 요하네스버그 지구정상회담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좀 말씀해주십시오.
작스 요하네스버그 정상회담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는데, 두가지의 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요하네스버그 회담은 환경의 측면에서나 발전의 측면에서나, 실수이자 실패이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생·음용수의 접근권이 없는 가난한 나라의 수를 현재의 반으로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결과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실천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또다른 중대한 실패는 환경적 측면인데, 국가에 따라서 2012년 내지 2015년까지 전체 사용 에너지의 15%를 재생가능 에너지로 하자는 유럽연합의 제안이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환경이나 발전의 측면에서 보자면 요하네스버그 회담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은 오직 리우 정상회의의 성과를 리우 이전으로 후퇴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번 회담에 참석하였습니다. 300명의 미국 파견자들은 리우 협상의 성과를 무(無)로 돌리려고 온갖 노력을 하였습니다. 특히 리우 협상 성과의 핵심 중 하나였던 ‘북과 남의 책임성 차별화 원칙’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시도는 국제사회로부터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요하네스버그 회담을 리우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에 실패하였고, 국제사회는 리우 협상의 공약을 재확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하네스버그 회담은 정체(停滯)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를 고려할 때, 이 정체는 성공인 셈이기도 합니다.
질문 요하네스버그 회담에서 재생가능 에너지문제를 유럽연합이 제안했다가 실패했다고 하셨는데, 거기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수상 슈뢰더가 2004년 6월 본에서 ‘세계 재생가능 에너지회의’를 열자고 제안한 것으로 압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떤 전망을 갖고 계신지 말씀해주십시오.
작스 요하네스버그 회담 끝 무렵에 유럽연합은 외교적으로 실제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세계의 재생가능 에너지를 15%까지 증가시키자는 유럽연합의 제안이 미국과 G7국가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유럽연합은 독일을 비롯하여 재생가능 에너지에 호의적인 국가들을 초대하여, 대다수의 유럽국가와 기타 뜻이 통하는 국가 간의 협정을 맺으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유망한 발의라고 생각합니다. 다가오는 시대의 중요한 과제는 우리가 어떻게 강대국을 제외하고 또는 강대국에 반대하여 국제 상호협약을 추진하느냐 하는 것일 겁니다. 당분간 리우나 요하네스버그 회담 같은 국제적 다자간 협약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가지의 해결책은 관심있는 나라끼리 모여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지역적(subglobal) 다자간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유럽이 이번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전세계적 협약을 맺을 필요는 없습니다. 뜻이 있는 나라들끼리 모여서 갑시다. 미국을 기다릴 것도 없고 사우디아라비아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한 걸음이었습니다.
질문 지역적 협정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깨지기 쉬운 협정이 아니겠는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국가이기주의를 무시할 수 없고, 특히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국가나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은데요.
작스 국가간의 협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환상입니다. 물론 지역적 차원의 협력이라든가 협정이라는 것은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또 깨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는 뭐냐 하면, 지역 차원에서의 실험이나 반대운동, 대안정치 같은 여러가지 운동들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운동들이 강화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힘이 아래로부터 올라와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거죠.
질문 교토의정서에 관해서 묻고 싶은데요. 선생님은 이 교토의정서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교토의정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헤르만 쉐어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든요. 특히 교토의정서 속의 ‘배출권 거래제’ 등에 대해서 말이지요.
작스 물론 교토의정서는 기후변화 위기에 대처하는 데는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세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번째는 평균적으로 산업국가의 온실가스 평균배출량을 현재보다 5% 감소시키자고 했는데 이것은 너무 적은 수치입니다. 두번째는 교토의정서에는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예컨대 공동이행제도, 배출권 거래제, 청정개발체제는 어떤 점에서는 ‘북(北)’의 국가나 산업이 실제로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효과적으로 줄이지 않으면서도 교토의정서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탈출구’였습니다. 세번째로 교토의정서는 선진 산업국가만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기후변화협약’의 내용에 따르면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보면, 선진 산업국가가 아무리 높은 배출량 제한수치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몇몇 ‘남(南)’의 신생 개발도상국들이 이 배출량 제한수치를 훨씬 넘어섰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교토의정서가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의정서는 외교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처음으로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모여 경제성장에 어느 정도의 환경적 제한을 가한 협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비록 교토의정서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절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아무 협약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또한 교토의정서는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만약 교토의정서가 없었다면 국제적으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럽의 환경운동은 더욱 약해졌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국제협약을 힘주어 말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예를 들어 한국, 중국, 말레이시아 등의 환경운동가들이 “‘북’이 이런 협정을 맺었는데 우리는 왜 가입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정부에 물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그 내용이 충분치는 않다 하더라도 교토의정서 자체가 없었더라면 전세계 환경운동 세력에게 큰 후퇴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노동운동과 에콜로지
질문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논리와 에콜로지의 논리가 조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독일 노동운동의 사례를 근거로 말씀해주십시오.
작스 독일의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를 볼 때 몇 단계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단계는 둘이 적대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환경운동은, 노동운동 쪽에서 볼 때는 산업에 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단계에는 이 적대적인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를 두가지 들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노동조합들이 “경제성장이 우리한테 반드시 유리한 것이 아니다” 즉, 경제성장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환경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일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중기(中期)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환경산업이 일관성 있는 에너지 효율적인 정책에 의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소기업들, 지역에 기반을 둔 기업들에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농업에서의 구조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뭐냐 하면 오염산업, 특히 화학산업 같은 분야에서는 환경운동이 강화될수록 일자리를 없애는 것은 사실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노동조합은 이런 이유 때문에 입장이 좀 왔다갔다 하는 상태인데, 예를 들어 금속노조나 화학노조에서는 환경운동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경제발전,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환경운동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보고 상당히 긍정적으로 가는 경향입니다.
질문 독일의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관계, 발전단계에 대해 들으면서, 사실 그 말씀이 실감이 나지는 않습니다. 어제 11월 13일은, 33년 전에 한국의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요구를 하기 위해서 분신했던 날입니다. 한국의 민중들에게는 매우 기념적인 날인데요. 그런데 33년이 지난 2003년 올해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자기 목숨을 끊으면서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생존권, 파업권의 보장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의 노동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한국의 생태주의자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요. 즉, 이렇게 죽어가고 희생당하는 노동자들이 종사하는 산업들이 대부분 금속·화학산업 같은 환경파괴적인 산업이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한국의 생태주의자들은 이런 산업 자체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대하면서도 기본적인 생존권, 파업권, 노동권을 지키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권익과 요구를 옹호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생태주의자들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작스 사실 아주 어려운 문제인데요. 그러나 제가 요즘 독일에서 관찰하고 있는 바는 독일의 금속산업이 지금 새로운 희망을 보고 그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이 뭐냐 하면, 풍력발전산업인데요. 지금 풍력발전산업이 가장 중요한 금속산업의 구매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만 갈등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까지 그러한 산업들이 환경파괴를 통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계속 나아간다면 앞으로도 파괴를 통해서 경제발전을 꾀하고 일자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렇게 가서는 안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생태주의자와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분명히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파괴를 일삼으면서 일자리를 지키려 하고 이득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질문 독일에서는 사회적으로 그런 논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작스 제가 물론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조금 어렵기는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 ‘경제성장의 독재’를 극복하느냐 하는 것인데요. 가령 한국이 경제논리 때문에 이라크 침략전쟁에 파병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라면 이것은 분명히 ‘경제성장의 독재’ 하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가지 비유를 들어봅시다.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이 만든 피라미드에서는 소년 소녀들이 처형을 당하고 그 피가 신에게 바쳐졌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재미삼아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즈텍 문명의 논리 안에서는 필연이었습니다. 그들은 59년마다 태양과 달의 원운동이 멈춘다고 믿었고, 소년 소녀들이 피를 흘려야 그 운동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우리 현대인들도 결코 아즈텍 사람들보다 낫지 않습니다. 우리도 경제성장이라는 피라미드 위에서 우리의 농업, 일자리, 경제, 살 만한 도시를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 경제성장이라는 피라미드의 논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필연, 효용, 새로운 이상
질문 《요하네스버그 비망록》에 대해 한가지 더 묻겠습니다. 그 주장의 궁극적인 결론은 산업화된 부유한 나라들의 발자취가 제3세계에서, 또 세계 곳곳에서 줄어들 때, 세계가 좀더 지속가능하고 생태친화적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생깁니다. 독일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 또 미국 같은 부유한 나라들이 과연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어떤 전략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작스 세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필연’, ‘효용’, ‘새로운 이상’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필연’에 대해서 얘기해봅시다. 독일의 지방자치단체는 지금 어떤 곳도 쓰레기를 자체적으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재활용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한가지 더 예를 들어봅시다. 거대 정유업체인 쉘이나 BP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도 2010년 이후 석유생산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기적으로 석유사업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이것은 객관적인 ‘상황의 강제’이고 ‘필연’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효용’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방에는 에너지절약형 램프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너지를 적게 쓰고 전기요금을 절약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이런 절약은 이곳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다른 산업체들도 에너지나 자원을 적게 쓰는 것이 그들에게 이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자동차가 줄어들면 도시가 쾌적해지고 더 살기 좋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길거리나 도로를 전부 자동차에게 내주지 않는 쾌적한 환경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도시 거주자들에게 이득을 주기 때문이지요. ‘효용’과 관련된 또 한가지 사례는 유기농입니다. 사람들은 유기농 식품이 건강에 좋고, 더 많은 영양소를 공급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환경친화적인 실천이 가져다줄 ‘효용’의 문제이지요.
세번째는 ‘새로운 이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가치를 둘러싼 싸움, 이상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업의 최고 매니저에 대한 상이 바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돈을 많이 벌고, 생산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매니저의 상이었잖아요. 하지만 앞으로는 ‘우아하게’ 생산하고, 자원을 적게 쓰면서 생산하는 매니저가 최고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지금은 건축가가 집을 싸게 짓는 데만 신경쓰고, 에너지 소비, 쓰레기 처리 문제,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는 그런 건축가가 좋은 건축가라고 불리지요.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입니다. 지역에서 나오는 자재를 사용하고,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고, 오랫동안 지속가능한 집을 짓는 건축가가 최고의 건축가가 될 것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을 예로 들자면, 지금의 정치는 독일의 이익을 지키는 정치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자기 나라의 이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저개발국가의 이해를 함께 고려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안목을 가진 정치가 좋은 정치로 지향될 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얘기해보겠습니다. 1995년 쉘이 그들의 용도 폐기된 시추선을 바다에 그냥 가라앉히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독일 전역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저는 독일 그린피스 의장으로 쉘 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운동이 벌어진 1년 후에 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쉘의 기업구조가 많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들 쉘의 임원들은 MIT, 하버드, 예일 출신의, 스스로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엘리트들입니다. “더러운 폐기물을 바다에 버리는 것은 추악한 일이다”라는 비판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스스로 그런 비판에 참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기업 이미지를 바꾸고, 기업구조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지요.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은 올바르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세월이 흐른 뒤에 과거를 돌아봤을 때, “내가 한 일이 괜찮은 일이었다”고 평가할 게 확실합니다. 나는 바로 그것이 우리 운동이 가진 큰 힘이자, 변화를 향한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뿐만 아니라 쉘의 엘리트들까지도 바꿀 수 있는 힘인 것이지요.
‘국가’를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된다
질문 최근 반세계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중요한 흐름은 아나키즘입니다.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요. 아나키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스 아나키즘의 핵심은 “국가가 필요하지 않다”라는 것인데요. 저는 근본적으로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국가를 통해 폭력을 가능한 한 억제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국가를 정통성 있고 민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질문 국가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전지구적인 개발이나 발전은 대부분 국가가 주도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국가주의는 이질적인 문화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대와 교류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구획 짓고 가로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구나 근대 이후 국가는 인류가 자행한 폭력의 원인 제공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다양한 위계나 독점에 대항해서 개개인의 자율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작스 선생님이 주도한《요하네스버그 비망록》에서도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공감이 녹아있다고 생각해서 여쭤본 것입니다.
질문을 바꿔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방금 “국가가 폭력을 억제하는 순기능을 한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체험은 그것과 다릅니다. 국가는 폭력을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을 직접 행사하거나 방조했고, 우리를 보호하기보다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는 국가가 파견한 군대가 민주화를 주장하는 양민을 학살한 1980년 광주에서의 체험일 것입니다.
《요하네스버그 비망록》에는 인간의 자율능력에 기반을 둔 다양한 정책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해야만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자율능력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작스 저도 한때 국가에 대해서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그 생각을 수정했습니다. 첫째 이유는 현재 국가에 대항해 가장 날카로운 공격을 펼치고 있는 세계화된 지구적 자본의 위험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우리는 국가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민영화나 경쟁, 효율 지상주의를 강조하며 끊임없이 국가의 보호기능을 약화시키려 합니다.
저는 아프리카나 인도 같은 많은 나라에 있는 제 동료들의 국가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 있음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그들도 20년 전에는 국가에 비판적이었고 또 거기에 대항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친구들은 국가에 대해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구적 자본이 추구하는 민영화나 규제철폐, WTO체제에 대항해서 국가를 방어하고 있어요.
저는 지난 10년 동안 발칸반도나 아프리카 등에서 국가들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국가가 무너진 후, 그 자리에는 폭력이 불타올랐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을 바꾸게 된 두번째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수십년 동안 어울려 잘 살던 사람들이 국가가 해체된 후 서로 죽이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겪은 후 국가라는 것이 ‘문명의 통치’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고전적인 국가이론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그 안에 속한 구성원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고전적인 국가이론은 서구 역사, 특히 유럽 역사에 기반을 둔 것인데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대신, 다른 한편에서 국민들은 국가에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그 권리를 확장해 왔습니다.
우리는 현재 굉장히 크고 폭발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초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입니다. 한편에서는 테러라는 통제되지 않는 초국가적인 폭력이 존재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폭력을 정당하게 독점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폭력을 어떻게 정당하게 독점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이라크 침략전쟁을 둘러싼 다툼의 핵심에는 결국 “누가 폭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존재합니다. 지금은 그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가장 힘이 센 미국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현실적으로는 폭력을 독점하는 존재이지만, 정당성이나 합법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질문 ‘정당한 폭력’이란 것이 가능할까요? 선생님의 고국인 독일은 국가가 끔찍한 폭력을 행사했던 나라 중 하나가 아닙니까?
작스 맞습니다. 지난 세기 유럽만큼 국가에 의해 폭력이 자행된 곳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폭력의 ‘사유화’가 훨씬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알 카에다가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알 카에다는 현재 초국가적인 기업처럼 활동하고 있습니다. 알 카에다는 경계 없이 여기저기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자기들이 행동을 벌일 수 있는 가장 조건이 좋은 곳에서 끔찍한 폭력을 행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지요. 국가가 설사 심한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그것이 사유화된 폭력보다는 덜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국가를 인정하는 이유입니다. 한가지 첨언하자면, 저는 독일사람입니다. 독일사람들은 헤겔 이후로 국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웃음)
질문 작스 선생님은 “국가가 어떤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계시군요. 하지만 현실에서 국가는 오히려 세계화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한국정부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선생님 얘기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전통이 확립된 독일의 현실 조건 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작스 (웃음) 선생의 의견을 인정합니다. 이탈리아 사람인 제 아내는 국가에 대한 제 얘기를 들으면 웃습니다. 저는 제 경험을 통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장한 전후의 독일은 국가가 시민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 시민들은 그런 국가에 대해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경험 때문에 저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지탱하는 국가를 선호하는 것이고, 국가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기보다는 더 나은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질문 아까 한국에서 노동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의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은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를 정부나 의회의 대의 기능이 미흡하다는 데서 찾고 있습니다. 정부나 의회가 기득권의 카르텔을 형성해, 노동자·농민·사회적 소수자를 비롯한 약자들의 목소리를 전혀 대변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더 나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독일의 사회민주당이나 녹색당의 정체성을 지향하는 정치운동이 존재합니다. 아직 현실적인 힘은 미약한 상태이지만 진보적인 정당도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스 여러번 강조했듯이, 좀더 나은 국가를 만드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진보적인 정당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면 긍정적인 일이지요. 아나키즘이나 자유주의(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가능하면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사회 개개인의 자율능력을 신장해 자치의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하는 것은 확실히 올바른 방향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건대, “국가를 없앰으로써 폭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어떤 형태가 민중들을 폭력의 지배로부터 보호하고 또 민중들이 그것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생태주의운동과 정당, 의회정치
질문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겠습니다. 환경운동이 녹색당과 같은 정당을 통해 의회에 진출하는 데 주력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스 이것은 다른 차원의 고민이 필요합니다. 환경운동이 제기하는 생태주의적인 문제제기는 궁극적으로 의회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를 위기로 가져갈 것입니다. 대의민주주의는 이기적인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조정하는 데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지주나 자본, 노동 등이 자기들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을 조직해 의회에서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자 서로 경쟁하고 조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생태주의는 다릅니다. 생태주의의 이해는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이해가 아니라 인류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운동의 물음은 모든 새로운 형태의 물음에 모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도 그렇습니다. 여성운동이나 발전에서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제기 등은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이해와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각각의 계급을 위해서 의회에서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기존 패러다임은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와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태주의운동은 의회와 거리를 둡니다.
의회정치는 궁극적으로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운동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환경운동가와 생태주의자들은 지역이나 직업, 언론, 학문 등 각자가 발딛고 선 현장에서 사고의 변화와 새로운 지식의 창출을 모색하고 다양한 실험을 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넓은 의미의 문화적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좁은 의미의 의회정치는 생태주의와 맞지 않습니다. 한가지 예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지난 20-30년간 가장 중요한 정치운동은 여성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운동은 서구에서 정당 같은 의회정치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닙니다. 여성운동은 이런 흐름에서 비켜나 아래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느 누구도 여성운동을 피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생태주의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 방금 말씀하신 지향에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런 언급은 녹색당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독일의 현실을 염두에 둔 인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작스 그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운동은 현실정치 이전에 문화와 문명을 바꾸는, 아주 장기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좁은 의미의 현실정치와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운동을 등치시키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파티스타와 반세계화운동
질문 최근 가장 주목받은 반세계화운동 중 하나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운동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스 사파티스타운동은 반세계화운동을 촉발시킨 상징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는 것과 같은 시점에 자기들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운동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반식민주의’입니다. 치아파스 지역의 원주민들은 멕시코의 식민주의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세계화에 종속되는 것에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크게 두가지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개발 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반개발 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입니다. 전자는 치아파스 지역에도 개발의 열매를 끌어들이자고 주장하고 있고, 후자는 치아파스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질문 사파티스타운동 내부에 친개발과 반개발이 있다는 얘기는 아주 생소한 얘기인데요. 좀더 자세하게 얘기해 주시지요.
작스 물론 저는 사파티스타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치아파스 지방에 직접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보는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것인데요.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사파티스타운동의 일부에서는 “더 많은 학교, 더 많은 병원, 더 많은 석유개발 이득을 치아파스 지방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또 다른 쪽에서는 “우리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병을 고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 석유 같은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질문 우리는 후자만 존재하는 줄 알았습니다.
작스 여러분을 실망시킨 것 같군요.(웃음)
질문 현실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지요.
여성,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질문 아까 여성운동의 긍정적인 면에 관해 말씀하셨는데요. 남성만 참여했을 때와 여성이 함께 참여했을 때 도시계획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여성이 참여할 경우, 도시계획의 세세한 모습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쪽으로 변한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도시계획을 할 때 꼭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참여하도록 한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사정이 어떤지 알고 싶고, 이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작스 맞는 말입니다. 저는 여성의 참여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고, 그게 독일의 도시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현재 독일에서는 여성의 활동이 매우 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독일을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또 독일에서 나온 연구들은 “도시계획의 상당 부분이 자동차를 타는 남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도 인구의 절반만이 자동차를 몰 수 있습니다. 수입이 적은 사람, 여성, 어린이, 노약자는 자동차에 대한 접근능력이 떨어집니다. 그 얘기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계획이라는 것이 체계적으로 국민의 절반을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는 자동차를 모는 남성들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그 접근이 차단된 여성, 노약자들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도시에 대한 토론, 누구를 위한 도시계획인가에 대한 토론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성, 노인, 어린이, 청소년, 자동차가 없는 사람들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려를 더 해야 합니다.
이반 일리치, 우정의 사상
질문 2002년 12월에 위대한 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브레멘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장례식에 참석하셨습니까?
작스 물론 참석했습니다. 올해(2003년) 1주기 때 이반 일리치를 추모하는 심포지움이 브레멘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저는 이반 일리치를 27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는 특권을 누렸는데요. 작년 12월 초에 그가 운명했을 때, 저는 여섯시간 후에 브레멘에 도착했습니다.
일리치는 그날 오후 두시에 운명했는데, 그때 그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을 하고 있던 여학생 한사람이 30분쯤 나갔다 왔더니, 그는 소파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황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틀 반 동안 소파에 누워있었고, 그 주위에 촛불들이 켜져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그와 작별하기 위해서 왔는데, 한시간이든 여섯시간이든 머무르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그 분위기는 전체적으로는 진지했지만 침착하고 또 어떻게 보면 유쾌한 것이었습니다. 그후에 가톨릭 식의 장례식이 있었고, 우리는 그를 떠나 보냈습니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이반 일리치는 십여년 전부터 어떤 종류의 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왼쪽 뺨에 큰 혹이 있었는데 십년 전부터 고통으로 매우 괴로워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이 이 혹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죽음은 말하자면 보통사람이 죽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질문 이반 일리치가 종양에 대해 진단받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스 십여년 전부터 유명한 의사들이 와서 이반 일리치에게 “나한테 오면 3일 안에 그 혹을 깨끗하게 제거해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물론 항상 그걸 거절했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반 일리치는 “의학은 치료는 할 수 있지만 죽음을 지연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암이 자기한테 오고 그것이 죽음을 가져온다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 태도는 전혀 비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암 치료라는 것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이반 일리치는 70년대 중반에, 아주 유명한, 현대의학을 비판하는 책을 썼습니다. 의학에 대한 그의 비판의 핵심은 “현대의학이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탈취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런 점에서 아주 일관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현대의학으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요.
질문 작스 선생님도 암이 생겨도 치료를 안하실 생각이십니까?
작스 모르겠습니다.(웃음)
질문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웃음) 그런데, 선생님은 이반 일리치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작스 정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발전’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하도록 해주었고, 그에 관한 개념적인 도구들을 저에게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선생님의 저작 전편에 걸쳐 이반 일리치의 생각이 녹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용어에 대해서 조금 보겠습니다. 제가 감동 깊게 읽은 선생님의 글 가운데 대표적인 표현으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큰 도전은 지구상에 지금보다 두배 이상의 인구가 늘어났을 때 그 많은 인구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환대(hospitality)를 베풀면서 동시에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대’라는 용어를 쓰셨어요. 이것은 이반 일리치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이반 일리치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단적으로, 이반 일리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의 사상이 너무나 래디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활동 또는 저작은《요하네스버그 비망록》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아주 현실적이고 정책적인 제안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특히 비망록의 제5장에서는 ― 이것은 물론 요하네스버그 정상회담을 계기로 작성된 것이지만 ― 정부와 NGO들 사이의 현실적인 접촉, 외교적인 교섭, 협약 등이 갖고 있는 실천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제가 보기에 확실히 이반 일리치의 접근방법과 많이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작스 일리치는 아마도《요하네스버그 비망록》같은 것은 ‘비현실적인 아이들 장난’이라고 치부할 겁니다.(웃음) 이반 일리치는 ‘지구적인 사고’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결코 지구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지구적으로는 ‘통계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경험하고 함께 사는 것은 바로 각자가 사는 그곳에서만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거기에 모순되는 것이지요.
이반 일리치는 또 정치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그린피스가 함부르크에 있는데 함부르크에서 제가 사는 부퍼탈로 오는 도중에 저는 종종 브레멘에서 내려 이반 일리치를 만났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그때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왜냐하면 제가 그린피스 일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린피스가 하는 일은 대단히 고상하지만 유머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 거기에만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그린피스라고 하는 것은 세계를 ‘경영’하는 한가지 형태였습니다. 그것이 대안적인 것이든 반체제적인 것이든 간에. 그는 죽기 십년 전부터 아주 진지하게 우정에 대해서 생각했고, 진정성 있는 경험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질문 이반 일리치가 우정을 강조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가 보기에 지난 십년 동안의 생각만이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다른 형태로 이미 얘기되고 있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반 일리치는 현대문명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 자급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반 일리치가 말했던 ‘서브시스턴스’는 물론 내포가 큰 말입니다만, 제가 단순하게 이해하기로는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라고 봅니다. 일리치가 ‘버나큘러 밸류스(vernacular values)’, 한국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토착적 가치’라고 할까요, 그것을 항상 높이 평가해왔는데, 그런 입장이 결국은 우정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작스 제가 보기에 이반 일리치의 사상은 개인 개인, 사람들의 자율성과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관들(institutions) 같은 것에 대항해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학교에 대항해서 독학을 옹호했고, 의학에 대항해서 돌봄 혹은 치료를 옹호했고, 자동차에 대항해서 걷는 것을 옹호했고, 필름이라든가 텔레비전에 대항해서 ‘보는 것’을 옹호했고, 스피커에 대항해서 ‘듣는 것’을 방어했습니다.
그는 어떤 불안감, 걱정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사회적인 기관이든 기술적인 기관이든, 이것들이 사람으로부터 원초적인 기능들을 뺏어가고 이 기관들이 서비스를 독점하게 될 것이라는 데 대한 걱정, 불안이었습니다. 기관들이 사람들을 압도해버리고, 사람들을 서비스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운동과 움직임을 압도해버리고, 그걸 깔아뭉개고 사람들을 단지 승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학교는 배우고자 하는 자발적인 욕구를 뭉개버리고 사람들을 배워야 하는 대상, 즉 학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텔레비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서비스의 대상으로 만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사라져버리고, 기관이 인간의 행동과 감정을 프로그램화해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더이상 인간이 아닌, 기관의 부속물로 만들어버린다고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습니다.
김종철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좋은 강연을 듣고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신 작스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박수)
(통역 ― 박혜영, 이필렬)
이 기록은 작년 11월 13-14일 이틀 동안, 영남대와 팔공산 갓바위유스호스텔에서 녹색평론사 주최로 열린 제2회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의 공개강연 및 토론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둘째날의 토론회에는 김타균 실장(녹색연합), 박병상 대표(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이필렬 교수(방통대,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최성각 소장(풀꽃평화연구소) 등 30여명의 생태주의 운동가와 사상강좌 운영위원들이 참가해, 본지 발행인 김종철 교수의 사회로 7시간이 넘게 깊이있는 토론을 펼쳤다. 첫째날 강연에 이은 질의 및 둘째날 토론 내용을 요약·정리하면서, 질문자 및 토론자의 이름을 일일이 적지 않고 모두 질의/응답 형식으로 재구성하였음을 밝혀 둔다. [관련문서] 요하네스버그 비망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