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개발의 시대’ 동안에 ‘민중의 평화’는 사라졌다. 발전이라는 외피 밑에서 세계 전역을 통하여 민중의 평화를 깨뜨리는 전쟁이 계속되어온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민중의 평화는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나는 경제개발에 대한 ― 풀뿌리에서 시작하는 ― 제약이 민중이 자기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믿는다. ― 이반 일리치
부안 앞바다 위도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로 지금 부안에서는 거의 전쟁상태를 방불케 하는 흉흉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오랫동안 핵폐기장 부지 선정에 고심해오던 정부가 이번 결정을 내린 것은 당초 위도 주민들의 동의를 얻은 부안 군수의 유치신청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위도 주민들의 동의라는 게 거액의 현금보상을 미끼로 한 거의 속임수 수준의 책략에 의한 것임이 드러나고, 그 결과 이제 와서 국책사업에 관련하여 현금보상이라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이 알려지면서 위도 주민들 사이에서도 핵폐기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만약 위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자신들의 생존이 걸려있는 어업과 관광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 때문에 맹렬히 반대투쟁을 전개해온 부안의 다수 뭍 사람들과 이제는 같은 입장에 서게 된 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말하는 위도 주민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 핵폐기장이 들어설 위도와 그 주변의 부안군 사람들이 환경운동가들과 더불어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핵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관료와 ‘전문가’들은 그러한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계속하여 주장해오고 있지만, 극히 간단한 상식의 눈으로 보더라도, 정말 위험이 없다면 어째서 구미 여러 국가들이 원자력발전을 중단하거나 적어도 더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는지, 또 원자력산업이 계속되는 나라에서 어째서 핵폐기물 처리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구호처럼 외는 말, 즉 그렇게 안전하다면 청와대나 국회의사당 부근이나 혹은 서울의 강남지역에 설치하면 될 게 아니냐 하는 주장은, 결코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단순히 무식한 발언으로 치부될 수는 없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논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령 뛰어난 과학기술력과 관리 능력으로 ― 이것은 현실적으로 물론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 방사능 방출 위험으로부터 어느정도 안전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핵폐기물에 들어있는 다양한 방사성 물질들, 특히 그중에서도 반감기가 무려 2만년 이상 걸리는 플루토늄과 같은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핵 안전시설과 그 관리는 이미 과학기술이나 인력관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역사상 어떤 국가, 어떤 정부가 만년 이상 지속된 예가 있는가. 국가가 망하고, 정부가 소멸되었는데도 방사능으로부터 사람과 생명을 지키고자 홀로 불침번을 서는 과학기술자, 경영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날 극히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위험한 기술을 가지고 문명된 생활을 설계하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소위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잘못은 근본적으로 자기들의 전문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에 대해서까지 ‘전문가연’하는 태도를 취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원자력의 안전문제에 대해서 정부나 산업체나 전문가들은 지역주민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계몽되어야 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지, 풀뿌리 민중이 아니다. 이번에 위도의 주민들이 처음에 핵폐기장이 자신들의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용인하기로 한 것은 방사능의 안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안전에 위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워낙 고달픈 생활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특히 현금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거액의 돈을 거머쥐게 된다면 빚도 갚고, 어디론가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대로의 이기적인 계산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무랄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문제는 돈만 있다면, 지금까지 오랜 세월 뿌리를 박고 살아온 생존의 터전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게 가능하고, 때로는 그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이 어느새 시골의 풀뿌리 공동체에까지 깊이 침투해 있는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무런 새로운 현상도, 놀랄 만한 현실도 아니다. 이러한 현실은 지난 30여년에 걸쳐 이 사회를 압도해온 경제성장과 개발의 논리가 가져다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놀라워하는 급속도의 경제성장과 개발 덕분에 이 사회가 과거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 사회로 전환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과연 풀뿌리 민중의 삶이 얼마만큼 개선되었는지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서 볼 때, 민중의 삶은 전반적인 향상을 기록해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위 경제개발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던 60년대 후반의 사정에 비추어보건대, 지금 한국인들의 생활수준은 적어도 수치상으로 드러나는 상품생산과 소비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진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러한 ‘진보’가 너무도 끔찍한 대가를 지불해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른바 경제발전을 통한 사회적 진보라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간적 비극과 사회적 모순의 누적적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사회적으로, 또 무엇보다, 생태적으로 돌이키기 어려운 대재앙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경제성장과 개발을 제창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아무리 그럴 듯하다 하더라도, 이제 그 방향으로는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아직도 한국사회는 환경보다는 경제성장이 더 긴급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실제로 적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이미 우리의 경제활동 ― 생산과 소비와 폐기의 수준 ― 은 생태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범위와 한계를 훨씬 넘어 서 있다는 사실이다. 환경도 부유한 선진국의 환경이 질적으로 우수한 현실을 감안하면, 환경문제를 생각하더라도 먼저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옳다는, 아직도 흔히 들리는 주장은 오늘날 소위 선진국의 부가 비서구 지역에 대한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착취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모른 척함으로써 가능한 주장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은 선진국 수준의 경제생활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회에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중대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만일 오늘날의 선진국의 중산층 혹은 후진국의 지배층이 누리는 생활패턴이 전세계적으로 되려면, 지구가 서너개가 더 있어도 모자란다는 것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먼저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어, 국제적인 위상이나 발언권을 높여가야 한다는 논리는, 그 애국주의적 열정은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결국 자기보다 경제적인 발전이 늦은 집단, 사회, 지역을 착취하자는 것밖에 안되는 극히 비윤리적인 사고의 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낡은 부국강병의 논리가 계속 허용, 확대되는 분위기에서,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사람과 사람 아닌 뭇 생명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평화의 문제를 생각하는 자리에서, 좀더 근원적으로 이 문제를 들여다보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오늘날 평화, 무엇보다도 민중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특히 민중의 평화를 운위하는 것은 평화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 결코 빠트려서는 안될 차원을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풀뿌리 민중의 일상생활 자체가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는 기본적 사실이다. 그리고, 민중의 평화라는 개념이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지금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군사적 충돌이나, 침략이 본질적으로는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지 결코 민중과 민중 사이의 대결일 수는 없다는 가장 근본적이되 흔히 간과되고 있는 사실을 좀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국민국가라는 틀이 여전히 우리의 삶의 근본적 가능성과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고, 또 실제 전쟁상황에서 일차적으로 희생되는 병사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동원된다는 사실을 외면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또 장래에도 그럴 수밖에 없지만, 풀뿌리 민중을 동원하지 않고는 전쟁이 성립되지 않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전쟁은 어디까지나 풀뿌리 민중과는 이해관계를 같이 할 수 없는 지배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이반 일리치는 일본방문중에 행한 기념할 만한 강연〈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한다〉(1980)에서, 평화라는 개념은 지역, 문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서, 지배자들의 관심이 늘 ‘평화유지’에 있어왔다면, 풀뿌리 민중은 언제나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염원하면서 살아왔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중이 이해하는 평화와 지배층이 생각하는 평화는 그 내포가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민중의 삶에 있어서 평화가 갖는 의미가 국가나 지배자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땅에 뿌리박고 사는 풀뿌리 민중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의 생존이며, 가족과 이웃들과 어울려 삶의 기쁨을 향유하면서,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준비하여 가는 생활이다. 그들에게는 지배와 정복과 영토확장과 같은 ‘전쟁의 동기’를 잉태하는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정복인간(homo conquistador)은 본래 풀뿌리 민중의 심성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멘탈리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확실하다. 지난 수십년간 알프스 계곡의 한 작은 마을에서 살아온 영국작가 존 버저의 관찰처럼, 민중생활이 근본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생존의 순환적인 지속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 집단적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땅의 보존과 오랫동안 땅을 돌보아온 공동체의 지혜, 이웃들과의 협동적 관계와 상부상조, 보살핌과 환대, 고통을 견디는 기술, 그리고 자립적 생존을 위한 토대 중의 토대인 이러한 여러 공동자산(commons)이 훼손 없이 보존되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에 의하면, 유럽에서 적어도 중세까지 민중생활의 토대로서 ‘공유지(commons)’는 지배자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전쟁상황 가운데서도 거의 훼손 없이 보존되어왔다. 밭을 갈고, 밀을 수확하는 농민의 생활이 붕괴되면 전쟁의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들과 제후들이 전쟁을 벌여도, 이렇게 ‘공유지’가 보존되어 있는 한, 민중생활은 대체로 평화로이 유지될 수 있었고, 전쟁은 ‘다른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소문이었을 뿐이다. 민중에게는 땅이 보존되고, 이웃들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한, 자급, 자치의 근본적으로 평화로운 삶이 가능했고, 국가와 교회의 존재는 그들의 삶에서 부차적, 외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중세 말기부터 ‘공유지’는 파괴되기 시작한다. 공유지의 사유화를 본격적으로 강제한 이른바 엔클로져 운동을 통해서 실제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자기 땅이 없는 가난한 농민들의 생존수단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자율적인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공유지가 광범위하게 붕괴되어 가는 시기는 자본주의의 발흥뿐만 아니라 정확히 근대적 국민국가의 출현 및 그 확대과정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말할 것도 없이, 그 시기는 콜럼버스 이후의 서구제국의 해외팽창, 나아가서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가 본격화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문명은 안에서의 억압과, 바깥으로의 정복을 의미한다” ― 이것은 인류학자 스탠리 다이어먼드의 유명한 말이지만, 콜럼버스 이후 500년 동안 서구제국이 온 세계의 토착민중 사회를 정복, 유린해오는 과정에서 그 명분이 언제나 ‘문명개화’였다는 것은, 적어도 유럽에 있어서 ‘문명’의 역사와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명료하게 전해준다. 그것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제나 유럽사회 안팎의 풀뿌리 민중의 삶의 기반을 망가뜨리는 과정으로 점철되어온 것이다. 오늘날 온 세계를 소수의 특권적 부유층과 대다수의 소외된 빈곤층으로 양극화하는 과정을 갈수록 심화, 확대시키고 있는 이른바 ‘세계화’는 단순히 냉전체제 이후의 미국에 의한 패권주의적 세계지배를 위한 새로운 틀, 새로운 전략이라고 볼 수는 없다. 500년 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의 작은 평화로운 섬 타이노에 도착하여, 콜럼버스 자신이 감탄할 정도로, 춤과 노래와 높은 수준의 공예문화를 향유하면서 “거의 낙원 속에 살고 있는” 순진무구한 토착민들을 노예로 만들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을 때, 이미 ‘세계화’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인디언 혹은 인디오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본래 지극히 평화로운 낙원 속에서 살고 있는 토착민들을 가리켜 스페인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이다. 즉, 스페인어로 “하느님의 품속에서”라는 말 “en Dios”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지난 500년 동안 계속되어온 서구 문명의 비서구 지역과 민중에 대한 침략, 약탈의 역사를 세세하게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비서구 문화권에 대한 서양의 침략은 언제나 자기사회 내부에서의 밑바닥 공동체에 대한 가차없는 억압과 파괴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서구의 내부이든 외부이든, 침략은 어디에서든 민중생활의 토대, 즉 자급문화(subsistence)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럽인들과의 느닷없는 첫 대면에 노출됨으로써 거의 전면적인 붕괴, 사멸을 강요당한 아메리카의 토착민 문화는 극단적인 경우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그러한 공격은 바로 서양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내재한 메커니즘의 필연적인 산물이었고, 그런 한에서 토착 아메리카인들의 운명은 서양세계 내부의 기층민을 포함한 세계 도처의 토착민들과 풀뿌리 민중이 겪게 되는 비극적 재난을 예고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금년 봄 온 세계의 양심의 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고, 또 전통적인 동맹국들로부터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자행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도 이러한 일관된 공격의 역사에 있어서 최신의 사례를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공격이 반드시 물리적인 폭력으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 아마도 민중의 자급, 자치, 자율적인 생존의 지속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노골적인 군사적 공격 못지않게 혹은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더욱 위협적인 것은 이른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생존의 토대의 파괴일 것이다. 실제, ‘개발’이라는 것은 1949년 1월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미국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략으로서 4개항에 관한 조치를 발표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다. 향후 미국과 같은 ‘발전된’ 선진국의 첫째 임무는 미개발 내지 저개발된 국가나 지역들에 대한 지원과 원조여야 한다는 트루먼의 새로운 대외정책 노선에 대한 공식적 천명은 결국 좀더 세련된 형태의 식민주의적 지배를 계속하겠다는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서 갓 풀려난 소위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들에 의해서 ‘개발’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저개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되었다. 그리하여 근대적 학교와 대학들이 들어서고, 종합병원이 세워지고, 관료조직이 강화되고, 도로와 항만과 공항이 건설되고, 자동차가 들어오고,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거대한 댐들이 강을 막기 시작하고,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고, 산업단지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농지가 축소, 오염되고, 갯벌이 사라지고, 바다가 오염되고,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도시가 비대화하고, 슬럼이 확장되고, 범죄가 증가하고, ‘빈곤의 현대화’가 만연하게 되었다.
허다한 제3세계 정치지도자들이 대개 맹목적인 개발론자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 현대사의 비극의 한 큰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그 가운데는 더러 ‘개발’의 이러한 귀결에 대하여 솔직히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독립 후 인도를 이끌어온 네루는 정치지도자로서의 생애의 마지막에 인도사회를 서구사회 못지않은 산업사회로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민중의 처지는 갈수록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달아온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신이 산업화를 경계하라고 했던 간디의 가르침을 경시한 게 큰 실수였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4년 작고 직전, 네루는 이렇게 말했다(William Fisher ed., Toward Sustainable Development(1993) 참조).
요즈음 나는 갈수록 간디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근대적 산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이고, 최선의 기계와 최고의 효율을 가진 기술을 선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오늘의 형편을 볼 때, 아무리 빠르게 우리가 산업시대를 향해 진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국민은 이러한 진보의 영향을 입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실일 것입니다. 매우 오랫동안 근대적 발전은 그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좀더 다른 생산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그들의 도구는 근대적 기술에 비해 열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실업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 점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계획을 세워서,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도록 분투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나는 이 문제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식민주의-개발-세계화가 결국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적 지배가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단계별 개념들이라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단계를 통해서 풀뿌리 민중의 삶이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갈수록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려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회적 사실이다. 가령 오늘날 거대한 댐들과 원자력 기술과 정보통신 분야에서의 풍부한 기술인력을 자랑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 ‘풍요’는 극히 일부 계층에 국한된 현상일 뿐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 독립 이전 식민지 시대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도의 경우가 결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지금 금융권력과 초국적기업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세계화’는 낭비가 구조화된 미국식 생활방식을 세계 전역에 무차별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지역생태계에 뿌리박고 살아온 세계의 수많은 지역공동체들을 와해시키고, 인간생존의 자연적 토대를 파괴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추세로 사회적, 생태적 상황이 계속된다면, ‘세계화’의 미래는커녕 인류가 이 지구상에 단순히 살아남는다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곧 다가올지도 모른다.
‘개발’이든 ‘세계화’든 언제나 근대화, 진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어왔지만, 그런 의미에서의 근대주의, 근대성이라는 것은 세계 도처의 토착 민중사회에게는 견딜 수 없는 재앙, 문자 그대로 홀로코스트였다. 그러나, 서구의 침략 앞에서 비서구 지역의 엘리트와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국민국가 체제를 시급히 정비하여, 과학기술과 군사력을 양성함으로써 서양문명을 따라잡지 않으면 안된다는 다급한 욕구를 느끼고, 표현하는 경향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경향은 가령 동북아시아의 바다에 ‘흑선(黑船)’ 혹은 ‘양이선(洋夷船)’이 나타난 19세기 중엽 이래 지금까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것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그 이데올로그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우리가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경우이다. 후쿠자와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자유민권사상’의 제창자로서, 또 게이요(慶應) 대학을 설립하기도 한 교육사상가이자 실천가로서 지금까지도 일본사회에서 널리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구한말의 조선의 개화세력을 배후에서 도와, 갑신정변에서 실패하여 일본으로 피신했던 김옥균을 보호하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느모로 보나 그는 그 무렵 동아시아 사회에서 ‘진취적’ 사상과 운동 경향을 대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세계상황을 문명과 미개와 야만이 공존하는 세계로 파악하고, 아직 ‘미개’ 사회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일본의 국가적 과제는 무엇보다도 서양제국이 보여주고 있는 ‘문명’의 수준을 하루빨리 따라잡기 위해서 진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일본은 당시의 조선이나 지나(支那)가 ‘야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에 비해서는 한 단계 더 발전된 사회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서양에 비해서는 분명히 낙후된 사회였다. 그리하여, 그가 제창한 것이 유명한 ‘탈아입구(脫亞入歐)’론, 즉 “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주장이었다. 아마도 약간 세련된 형태로 변모했을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시아의 소위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러한 ‘탈아시아’의 욕구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는 탈농(脫農), 즉 자급, 자족적 농업중심 사회를 벗어나 팽창적, 공격적 공업중심 사회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후쿠자와 류의 멘탈리티가 메이지시대 이후 계속해서 일본 지배층의 사고의 주류를 이루면서,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화, 중국침략, 태평양전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 … 종전 후의 경제부흥, 미나마타의 비극을 위시한 환경재난, 식량자급률 25%, 평화헌법 체제의 약화와 우경화 추세 등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재앙으로 귀결되어왔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농업중심 사회로는 ‘문명된’ 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는 후쿠자와 식의 사고방식은 사실상 지난 100년 동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적어도 동아시아 사회의 엘리트들 전체를 지배해온 사고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실제로 메이지시대에도 서양 강대국의 모범을 따를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교적 작은 나라들의 선례에 따라, 군사적, 경제적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대신에, 인민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체제로 발전하는 것이 일본의 장래로서 바람직하다는 견해, 즉 소일본주의(小日本主義)를 제창한 지식인들이 소수지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다나카 아키라(田中彰),《小日本主義 ― 日本의 近代를 다시 읽는다》(1999) 참조). 이러한 견해는 시대의 대세에 밀려 파묻혀버렸지만, 오늘날 부국강병의 논리와 공업중심 체제로는 실제로 아무런 희망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게 된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돋보이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일본주의’라는 아이디어에는 기본적으로 인간불평등 사상과 그에 기초한 “주인이 아니면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해묵은 침략과 지배와 전쟁의 논리를 거부하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웃들과 공존공생하는 삶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후쿠자와라는 인물이 ‘자유민권’ 사상의 제창자로서 흔히 기억되고 있다고는 하나, 그의 그 ‘자유민권’ 사상의 배후에는 아시아의 이웃나라들을 야만시하는 강한 경멸감이 들어있었고, 그 연장선에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지지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일본 개화기의 후쿠자와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얼마나 편파적인 인간관, 사회관 위에 서있던 것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후쿠자와의 자유주의 사상이 기실 뿌리깊은 인간불평등 사상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비단 대외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자기 사회 내부의 하층민을 보는 그의 시각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가 소위 명문 사학(私學)의 설립자라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가 국립대학의 설립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라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가 국립대학 설립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국립대학이란 국가의 비용으로 인재를 기르는 교육기관인데, 그러한 국립기관으로서는 가난한 가정출신이면서 머리가 좋은 수재[貧智者]들의 입학을 가로막을 수는 없고, 이러한 청년들이 대학교육을 받으면 대개 사회주의자가 되어 국가체제에 위협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새로운 국제화된 세계에서 어차피 교육도 경쟁원리를 토대로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상품이 비싼 게 있고, 싼 게 있듯이 교육이라는 상품도 각 가정의 능력에 따라 구매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탈아론’과 교육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야스카와 쥬노스케(安川壽之輔)의《福澤諭吉의 아시아 認識》(高文硏, 2000)을 주로 참조하였다.)
최근에 작고한 일본의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군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교과서에서 진실되게 기록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을 오랫동안 계속했던 양심적인 학자이다. 그는 그의 저서《태평양전쟁》(1986)에서 아시아침략을 정당화했던 후쿠자와 식의 논리를 반박하면서 후쿠자와가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에 직면하여 일본이 아시아의 이웃나라들에 대한 침략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나라들과의 협력과 연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갔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옳은 말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풀뿌리 민중에 대한 계급적 편견이 이토록 뿌리깊었던 ‘사상가’에게서 어디까지나 겸허한 마음과 철저한 평등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아시아적 연대의 사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후쿠자와의 경우가 하나의 전형으로서 보여주듯이,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서 대응하려는 노력 역시 대부분의 경우 서양을 따라잡으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 어디서나 부국강병론이 활개를 치고, 농업포기 공업우선 사회로의 재편이 일반화된 게 현대사의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재편 과정에서 민중의 삶은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민중의 삶에서 평화는 점점 가망 없는 목표가 되어왔다는 것도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근대성 내지 근대주의의 역사적, 사회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기본적인 사실의 하나는 설령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 체제의 발전에 의해서, 그리고 그 체제와 결합된 근대적 과학기술에 의해서, 인류사회가 근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많은 이익과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따져보면 늘 인류 전체 가운데서 극히 소수에게만 국한될 수밖에 없는 혜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계속 간과한다면, 우리는 흔히 근대적 가치와 논리의 근원적인 극복이 아니라 부분적인 개조를 통해서 당면한 위기적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오래된 지적, 도덕적 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도 간디의 사상과 실천은 세계사적 중요성을 갖는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서양문명을 따라잡는 것이 시대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던 후쿠자와의 경우가, 따져보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전세계의 소위 엘리트들의 일반화된 사고방식이라면, 이미 20세기 초에 서양문명의 본질적 모순과 한계를 명확히 간파하고, 그 문명이 절대로 일반화될 수 없는 것임을 꿰뚫어봄으로써, 서구 산업주의 문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방식을 제시했던 간디의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간디의 이러한 예외성은 날이 갈수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일부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공존공생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간디가 제시한 길은 부국강병의 논리가 활개를 침으로써 대다수 민중은 늘 소외와 억압과 빈곤을 강요당해온 현대사 전체의 상황에서 진실로 획기적인,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창조적인 발상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간디의《힌두 스와라지》(1909)는 그가 아직 남아프리카에서 활동중이던 때에 쓴 소책자이지만, 이 책은 생애 마지막까지 간디가 견지하였던 문명관과 사회경제사상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기념할 만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간디 자신 이 책의 중요성을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21년에 간디는 “그것은 1909년에 씌어졌지만, 지금 나는 그 책에서 아무것도 취소하고 싶지 않다. 그 책자는 ‘근대’ 문명에 대한 심각한 공격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나는 인도가 ‘근대문명’을 배격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이득만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또 1945년에는 어떤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힌두 스와라지》에서 내가 기술했던 것을 지금도 완전히 지지합니다. 그후의 내 경험은 1909년에 내가 썼던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비록 내가 그것을 믿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는다 하더라도 나는 유감이 없습니다 … 나는 만약 인도가, 그리고 세계가,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려면, 조만간 우리들이 마을, 궁전이 아니라 오두막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 우리들은 마을생활의 단순소박성에서만 진리와 비폭력의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요지는 각자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디에게 ‘자유인도’의 핵심은 자기들의 삶의 운영방식을 결정할 힘을 갖고 있는 마을자치(스와라지)였다.《힌두 스와라지》를 통하여 간디가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농촌마을 중심의 자치, 자급, 자립적 민주주의야말로 인도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생활방식으로서 영구적으로 지속가능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간디의 시각에서 볼 때, 서구식 산업문명의 근간에는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라는 구조를 합법화하는 인간불평등 사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논리가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것은 널리 인류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장기적인 지속이 가능하지도 않은 자원약탈과 낭비를 내재적인 원리로 하는 경제체제 위에 구축되어 있는 문명이었다. 예를 들어, 독립 후의 인도가 무엇보다 산업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네루는 자본주의의 악이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보았지만, 간디는 “산업화 자체에 악이 내재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은 결코 ‘사회화’를 통해서 근절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간디의 사상은 식민주의에 대한 투쟁 가운데서 정립되었지만,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식민주의에 대한 이해가 갖는 독특함과 예리함이다. 예를 들어, 레닌을 위시한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흔히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본질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파악해왔다고 한다면, 간디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식민주의를 서구 산업문명 그 자체, 즉 ‘근대성’의 불가결한 구성요건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식민주의는 흔히 피식민지 주민들에게 ‘근대적’인 가치와 제도와 문물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갖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이것이 어느정도 사실인 측면이 없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식민주의에 의한 시혜는 어디까지나 좀더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 침략과 약탈을 위해 포장된 명분일 뿐이지, 결코 식민주의 그 자체에 내재한 논리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식민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상업적 이익을 위한 팽창, 지배하려는 권력의지와 ‘영광’에 대한 탐욕이다.
이러한 식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서구 근대문명은, 간디의 시각에서 볼 때, 철저히 폭력에 근거한 문명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진정한 문명이 아니었다. 간디에게 참다운 문명이란 윤리적, 종교적, 영성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의 삶에 이르게 하는 ‘행동양식’이었다. 야만이란 그러한 행동양식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몽사상 혹은 좀더 정확히는 산업혁명을 통해 정립된 서구 근대문명의 주된 ‘행동양식’은 사회적 강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약자들의 운명이 철저히 유린되는 것을 합법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과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연을 마음대로 소유, 착취해도 된다고 보는, 자연과 인간을 철저히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는 인식론적 혁명을 동반했다. 이것은 서구세계의 전통과도 근본적으로 단절되는 경험이었고, 그 결과 철저히 세속화되어 가는 서구 근대문명의 세계에서 정치의 주된 목적이 이제부터는 오로지 경제적 번영을 위한 욕망 충족에 있다는 생각이 뿌리깊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종교는 한갓 미신으로 치부되거나, 아니면 그 사회적, 심리학적 쓸모 때문에 평가될 뿐이었다. 또한, 산업주의 문명은 노동의 개념도 변화시켰다. 노동은 더이상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창조적인 수단이 아니라, 단순히 이윤과 자본, 권력을 생산하는 능력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육체노동은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에게 적합한 것으로 비쳐지기 시작하고, 또 기술의 혁명적 발달과 더불어, 종래 어디까지나 주체인 인간을 돕는 도구였던 기계는 이제부터는 그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율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인간이 도리어 기계의 하인이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적 정치사상은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적 제도를 제창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업국가들에 해당되는 제도와 가치였지, 인도를 포함한 비서구 사회들에까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산업화되지 못한, 즉 ‘문명개화’되지 못한 사회를 위해서 서구 근대 부르조아 정치사상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였다. 최선의 양심적 자유주의를 대표했다고 평가받아온 존 스튜어트 밀도 이러한 ‘문명’과 ‘비문명’이라는 개념을 근거로 세계를 가르는 방식에 동의하였고, 그 결과, 후쿠자와가 자신의 자유민권 사상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논리 사이에 별로 갈등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밀도 자신의 자유주의 사상으로써 인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양심적 자유주의자조차 끝내 제국주의적 멘탈리티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그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적 근대성에 내재한 근원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흔히 우리는 제국주의적 지배와 정복의 논리와는 별도로 서구의 근대성이 갖고 있는 역사적 진보성과 보편적 가치는 따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들어왔다. 예를 들어, 인권 혹은 시민적 권리의 개념, 법치주의,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 의한 제도적 복지체제, 여성해방의 논리, 근대적 교육제도, 경제적 번영의 가능성, 종교적 관용을 포함한 관용의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근대적 과학과 기술의 혜택 등등 ― 이러한 것은 서구와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배경이 다른 비서구 지역 어디에서도 ‘보편적’인 것으로 적용될 수 있고, 또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특히 제3세계의 교육받은 지식인들 사이에 뿌리깊이 퍼져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근대적 가치와 제도의 원활한 수용과 운용을 가로막는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에 의한 사회적 불균형이며, 따라서 이러한 불균형을 어떻게 시정하느냐 하는 것이 유일한 문제라고 그들은 흔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근대성 그 자체는 의심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이자 ‘진보’의 불가결한 계기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할 수 없는” 진보적 가치들이 오랜 인류사의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또 세계 도처의 토착 공동체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실은 극히 부분적이고 한시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인권이나 법치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지금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농민운동과도 연계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하여 강력한 풀뿌리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멕시코의 노(老) 지식인 구스타보 에스테바는 젊은 시절 한때 정부에서 일하고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사람이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멕시코 남부 농촌지역에서 토착민들과 함께 생활을 같이 하며 살아왔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전문가 버릇을 떨쳐버린(deprofessionalized)’ 지식인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현대적 지식인으로서는 거의 예외적이라 할 만큼 철저하게 풀뿌리 민중 공동체의 입장에서 오늘의 문명세계를 보고 있는 그가 쓴 비교적 최근의 책《풀뿌리 포스트모더니즘》(1998)은 모더니즘의 진정한 극복은 엘리트 지식인들의 현란한 지적 언어유희를 통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밑바닥 민중 공동체에 의한 자립, 자치적 삶의 방식의 유지, 회복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핵심적 메시지를 중심으로 씌어져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풀뿌리 민중 자신의 삶이 소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들의 삶을 그동안 짓밟고 유린해온 가장 근본적인 폭력, 즉 근대적 기획들의 극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실제로, 에스테바는 그 자신 오랜 세월 멕시코의 도시 변두리와 궁벽한 농촌에서 겪었던 풍부한 체험을 근거로, 이러한 풀뿌리 공동체 어디서나 발견되는 ‘서로 어울려 사는 삶(conviviality)’이라는 공동체적 생활방식이야말로 비단 변두리로 밀려난 소외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금 전세계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예증 가운데, 인권이나 법치라는 서구적 개념과는 달리 멕시코의 토착민 사회가 오랫동안 어떻게 자신의 독특한 관습을 보존해왔는지에 대한 에스테바의 설명은 주목할 만하다. 에스테바에 의하면,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서구식으로 하자면 범인을 체포하여 기소, 재판을 거쳐 징벌을 가하는 것이 인권을 보호하고,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정당한 방식이겠지만, 토착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계획적이든 우발적이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며칠동안 그가 흥분상태에서 진정될 때까지 어떤 방에 가두어놓거나 어디에 붙들어매어 놓거나 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한다. 마을에서 추방하자, 외딴 곳에 격리시키자, 등등 여러 의견이 나오지만, 대개는 그가 외롭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를 받아들여 우리가 돌보면서 지켜주자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범죄행위를 죄를 저지른 사람의 전체적 상황에서 따로 분리해내어 그것을 개별적으로 묻고, 징벌을 가하는 방식, 즉 근대적 인권 내지는 법치주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원리에 토대를 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정의의 실현과 공정한 질서를 중시하는 근대적 개인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감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철저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는 ‘보살핌의 문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보살핌의 문화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토대, 즉 살아있는 공동체의 존재이다.
서구 근대문명이 발전시켜온 인권 내지는 법치주의 원리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인간적으로 더 탁월한 원리가 토착 전통사회에서는 이미 오랜 예전부터 뿌리박고 있었으며, 그것은 근원적으로 공동체적 삶의 방식에 기인해왔다는 사실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른바 ‘관용(tolerance)’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서구 근대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떠나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며, 따라서 철저히 서구적 토양에서 배태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종교적 신념이나, 인종이나, 계급이나, 민족에 따른 차이, 즉 이방인이나 낯선 사람들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허용한다는 뜻이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관용’이라는 것은 결국 세련된 혹은 ‘문명화된’ 형태의 ‘불관용’일 뿐이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지배그룹이 인정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진 존재이지만, ‘문명화되어’ 있는 지배그룹 혹은 주류문화의 너그러움 때문에 그 존재가 허용되는 게 가능하다는, 그러한 수준의 ‘관용’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최선의 경우에 약자에 대한 강자의 아량이나 선심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포기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저히 서구 부르조아 문화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관용’의 개념에 비해 근대 이전의 서구 전통사회나 오늘날의 토착 공동체의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환대(hospitality)’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환대’는 상대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 타자를 받아들이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자의 처지에 보상을 바라지 않고 반응하는, 풀뿌리 공동체의 오래된 생활관습이다. 이것은 철저히 평등주의적인 인간관,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집을 떠나 여행중에 있는 ‘과객’에게 무상으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거의 상식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상식적 관습은 세계 각처의 토착사회 어디서든 존재하는 기본적인 관습이었다. 풀뿌리 공동체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궁핍한 물질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흔들림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환대’의 관습 때문이었다.
나카무라 테쓰(中村哲)는 일본 후쿠오카 출신의 의사로서,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변경 지역 촌락에서 주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구호 사업을 전개해온 사람이다. 그의 책《우물을 파는 의사》(2001)에는 젊은 시절 등산을 좋아하여, 중앙아시아의 험준한 산들을 오르고 내리는 경험 끝에 그가 어떻게 해서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궁벽한 시골에서 의료활동을 하면서 장기체류를 하게 되었는지 그 내력과 더불어, 오랜 전쟁의 참화로 온갖 생활조건이 파괴되어 가는 그 지역에 근년에 닥쳐온 가장 심각한 재난, 즉 물 부족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의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그가 우물을 파는 의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얘기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의 테러에 뒤이어 미국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나카무라는 아프가니스탄의 실정을 알리기 위해 급히 일본으로 돌아와 각지를 돌며 강연을 행하였는데, 그 강연중에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시골마을은 아무리 전쟁의 참화로 파괴되어 왔어도, 그 나름으로 공동체적 토대 위에서 자립적으로 살아올 수 있었는데, 그 자립의 원리는 마을마다 불문율로 갖고 있는 오래된 두가지 관습, 즉 ‘환대법’과 ‘복수법’이라는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였다.
‘복수’라는 것은 이슬람의 전통에 따른 정의의 실현방식을 말한다. 상대방이 내 이빨을 하나 뽑아갔다면, 그에 정확히 상응하는 보복, 즉 나도 상대방의 이빨 하나만을 뽑아와야지 그 이상의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전통에서 말하는 ‘복수’의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계무역센터에서 수천명의 미국인이 희생되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 이어서 이라크, 그리고 전세계에 걸쳐 무고한 인명과 땅을 파괴하고, 위협을 계속하는 미국식 ‘복수법’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로 문명화된 방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는 관습이다. 나카무라가 볼 때, 이러한 관습이 낯선 사람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환대법’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민중사회가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인간적으로 살 만한 사회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었다.
실은 아프가니스탄 마을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 모든 문화, 모든 사회적 집단이 각기 자기 나름으로 타자를 환대하는 방식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서구세계에서 환대의 방식은 비서구 세계에서 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왔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호스피탈, 호스피스 등 명칭에 그 자취가 남아있을 뿐 환대의 실질적 내용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견해는 이반 일리치에 의해서 주로 개진되어왔는데, 그는《환대와 고통》(1987)이라는 에세이에서, 역사적 경과에 따라 서구 근대사회에서 ‘환대’의 관습이 사실상 사라져버린 현상을 한 가톨릭 순례자의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작고한 추기경 쟝 다니엘루가 들려준 경험은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진실을 간단히 전달해주고 있다. 그의 중국인 친구 한사람이, 기독교도가 된 다음에, 북경에서 로마까지 걸어서 순례를 행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그는 규칙적으로 환대에 접했다. 슬라브 국가들 속으로 들어가서는 그는 이따금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되었다. 그러나, 그가 서방교회 지역에 도착한 뒤에는 그는 구빈원에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각 가정의 문들은 낯선 이들과 순례자들에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대’에 관련하여, 동양과 서양이 보여주는 차이는 오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일리치는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낳은 서양세계의 경험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의 시작을 보고 있다. 일리치의 유명한 표현대로, “가장 좋은 것이 부패함으로써 가장 나쁜 것이 되어버린” 이 경험은 4세기에 고대 로마에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써 비롯되었다. 일리치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사마리아인 이야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같이, 신분, 인종, 종파,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하여 표시하는 자발적 ‘환대’의 정신이었다. 그리하여, 지하에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는 고난 속에서도 초대 기독교인들의 가정에는 예외 없이 세가지 물건이 늘 갖추어져 있었다. 양초 하나, 마른 빵 한조각, 담요 한장. 왜냐하면 밤중에 누구든 길을 가는 나그네가 대문을 두드리면 어느 때라도 그를 초대하여 자신의 집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도록 촛불로 안내하여, 준비된 빵으로 허기를 면하게 하고, 담요를 깔아 잠자리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인 환대의 풍습은 로마의 국교로 된 기독교 교회가 가난한 사람, 집없는 사람, 떠돌이 행려병자 등을 제도적으로 구제하는 기관들을 설치, 운영하기 시작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기독교도들의 가정에서 나그네를 위한 양초와 빵과 담요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 것들을 더이상 준비해두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일리치는 이러한 ‘환대의 제도화’에서 근대국가의 복지체제의 기원을 보고 있지만, 하여튼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의 전적인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던 타인에 대한 친절한 행위, 보살핌의 행동이 이처럼 공적인 기관 혹은 ‘전문가’의 일이 됨으로써, 적어도 서방 기독교 사회에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우애의 자발적 표현이라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좋은 자질을 기르는 기회로부터, 교회는 자기도 모르게 사실상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환대의 제도화’는 서구 근대국가의 발전과 그로 인한 제국주의적 팽창을 통해서 돌이킬 수 없이 심화, 확대되어왔다. 이미 공동체가 붕괴된 곳에서 사람들 사이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자발적인 친절과 보살핌의 행위가 순조롭게 유지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동체(community)가 본래 어원적으로 함께(com)라는 낱말과 선물(munus)이라는 낱말의 결합에서 온,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화폐경제가 삶의 온갖 국면을 지배하고 있는 근대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베푸는 배려와 보살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증여행위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화폐가 아니라, 증여행위가 경제의 중심이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화폐경제에서 증여경제로 ― 이것은 아마도 평화의 문제를 논의하는 마당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가장 근본적인 과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평화로운 세계는 단지 총성이 멈춘다고 해서 보증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소수의 다국적기업들과 그들에 봉사하는 범지구적인 엘리트 계층이 향유하는 낭비적인 소비주의 문화의 확장을 위해서 다수의 풀뿌리 민중의 삶이 끝없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구조화된 ‘폭력의 경제학’ 속에 갇혀있다. 어느모로 보나 오늘날 ‘북’의 부유한 계층이 ‘남’의 형제들을 희생시켜온 대가로 누리고 있는 삶의 방식은 범죄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러한 생활도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 혹은 희망의 가능성이 있는지 모른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에 불과한 미국 사람들이 세계 전체 자원의 절반을 소모하고 있는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노력보다도, 그러한 생활방식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이 팽배한 세계적인 현실을 생각하면, 장래는 실로 암담하다고 해야겠지만, 지구온난화를 비롯하여 어김없이 다가오는 생태적 재앙이라는 긴박한 현실 앞에서 지능이 높다는 인간이 언제까지 이 임박한 재앙을 못 본 척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근원적인 해결은 풀뿌리 민중 공동체의 자기 회복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과학기술의 힘에 기대어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과학기술은 최선의 경우에 부분적인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과 같이 자본과 국가에 예속되어 있는 한 그것은 도리어 치명적인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 다국적기업, 특히 생명공학 회사들은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 의료와 농업에서 비약적인 진보가 이룩될 수 있다고 미국정부를 위시하여 각국 정부의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선전하고 있지만, 이것이 비군사적인 수단에 의한 세계 전체의 사실상의 식민화를 꾀하는 기도라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금 특히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는 유전자조작 식품을 온 세계의 농지와 식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생명공학 기업과 미국정부가 어떤 책략을 쓰고 있는지를 보면 이것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2002년 남부 아프리카에 식량부족 사태가 만연하였을 때, 미국은 처음에 유전자조작 잉여 농산물을 아프리카 아이들의 점심식사용 식량으로 강제적으로 먹이려고 시도하였다. 심지어 미국은 유전자조작 식품을 국제 긴급구호 식품으로서 받아들이도록 적십자연맹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제적인 시도는 먹혀들지 않았다. 잠비아와 짐바브웨 정부는 유전자조작 식품과 같은 의심스러운 식품으로 자기 국민을 먹이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도록 내버려두겠다고 말하면서, 미국 쪽의 시도에 저항을 했다. 수단도 유전자조작 식품을 원조식량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미국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미국 상원은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미합중국의 지도력에 관한 법령(2003)’을 통과시켜,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에이즈 치료약을 제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Devinder Sharma, “GM Foods:Towards An Apocalypse” ZNet, 2003년 7월 19일).
이제 미국정부는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미국이 원하는 대로 먹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인류역사에서 선례가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이 상업적 이윤과 극소수 기득권층의 권력욕망을 위하여 이처럼 치욕스럽게 봉사하는 도구로 둔갑해버린 것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만약 아프리카나 그밖의 ‘개발도상국’들이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받아들인다면, 지역의 기후·풍토에 맞지도 않는 유전자조작 농산물 재배로, 또 WTO의 지적 재산권에 묶여있는 생명공학 회사들의 종자들을 매년 되풀이하여 사들이지 않을 수 없는 메커니즘에 의해서, 세계의 광대한 지역에 걸친 토착농업은 그날로 붕괴될 것이란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지만, 오늘날 제3세계의 빈곤의 가장 큰 원인이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에 의한 식량원조, 그리고 나아가 ‘현대적’ 농업기술과 그에 결부된 기계와 화학물질의 남용으로 인한 농경지의 훼손과 농촌공동체의 와해, 소농의 몰락에 기인해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결국, 민중의 평화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공동체의 보존과 회복이다. 농업은 아직도 세계의 절대다수 인구가 종사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일자리이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사실상의 기업식민지로 전락해가고 있는 오늘날, 자본과 국가와 ‘전문가’로 이루어진 막강한 지배세력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한 토대 중의 토대로서 독립 소농들의 존재는 갈수록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제퍼슨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치, 자급, 자립적인 소농의 존재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존립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생태적 위기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소농의 역할은 한결 더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농경은 오직 소농들이 번창하는 농촌공동체의 활력이 보증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와 개발의 시대 동안에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소농은 지금 세계화의 논리가 활개를 치는 상황에서, 세계 전역에서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다. 막대한 정부 보조금에 의하여 날이 갈수록 비대화하고 있는 대농, 농기업, 생명공학 회사들의 지배 밑에서 광대한 농경지가 사막화하고, 오염되고, 죽어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우리가 이제라도 소농을 되살리려는 노력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땅에 뿌리박은 지혜로써 수천년의 세월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아온 풀뿌리 민중 자신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그들의 일방적인 희생 위에 ‘풍요’를 구가해온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 역시 더는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지구는 모든 사람의 기본욕구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비록 소수라도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곳이다.” 오늘날 에콜로지스트들 사이에 자주 인용되고 있는 간디의 이 말은, 되돌아보면, 생태적 위기라는 문제가 아직 어느 누구의 관심사로도 떠오르지 않았던 20세기 초의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시대를 앞지른 탁월한 선견지명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요컨대, 서구문명이 이룩해온 공업중심의 물질적 번영이라는 것은 그 혜택이 인류의 극히 일부분에게 국한될 뿐이며, 그나마도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와 자연자원을 끊임없이 억압, 착취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간디는 누구보다도 먼저 명쾌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산업문명의 해독과 한계를 극복하자면, 다시 말하여, 모든 사람이 장기적인 지속성의 토대 위에서 차별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대한 비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간디는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농업중심의 순환적 생활방식에 토대를 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척결해야 할 것은 세계의 ‘낙후된’ 사회의 가난이 아니라, 세계의 ‘선진’ 사회의 풍요로움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는 것보다 지금 민중의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지난 8월 24일 제주도 서귀포에서 열린 인권재단 주최 '2003 평화회의'에서 발표된 원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