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뿌리》 서 숙 (녹색평론사, 2003)
질문 양식으로서의 글쓰기
대체로 소설보다는 시가, 시보다는 산문이 저자의 얼굴과 체취를 잘 드러내주는 편이다. 그래서 산문집을 읽을 때는 글보다 사람을 직접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녹색평론》의 앞머리에 종종 실리곤 하던 서숙 선생의 산문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해본 그녀의 모습은 이렇다. 작고 날렵한 몸, 짧은 커트나 단발의 생머리, 웃을 때 활짝 드러나는 잇몸, 조금 어눌한 말투와 천진한 표정 …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을 왜 이런 모습으로 떠올렸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이번에 나온 산문집《따뜻한 뿌리》를 읽으면서, 그런 상상이 아주 엇나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화두〉라는 글에서 쉰살이 가까워서야 난생 처음 파마를 해보았다는 대목을 읽을 때나, 맹아학교 자원봉사로 책을 녹음하러 갔던 날의 기록인〈눈 그리고 눈〉, 마흔두살에 발레교실에 등록해서 춤을 배웠다는〈옛사랑〉등을 읽을 때 특히 그랬다. 나이를 잊은 듯한 열정과 호기심. 대상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선. 일상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되새김질하는 사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들은 담담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러면 그의 글이 지닌 자연스러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글쓰기의 동기나 목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글은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의 양식이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통의 방식에 가깝다. 독자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형의 되새김질 속으로 함께 빨려들어간다. 저자가 되묻고 있는 수많은 질문들을 독자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형식적 완결성에 대한 강박보다는 사유의 집중도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긴장이 살아있다. 가필(加筆)이 불가피한 직업화된 글쓰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생기(生氣)라고나 할까.
〈옛사랑〉에서 그녀가 중년의 나이에 발레교실에 다녔던 것도 비슷한 경우다. 무용에 대한 오랜 향수도 있었지만, 뒤늦게 그곳을 찾아간 것은 무엇보다도 ‘춤 자체를 위해서’였다. “발레를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좋아서,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발레이므로 계속하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발레의 테크닉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한 비약과 해방을 맛보는 일이다. 이러한 무작정의, 무위의 행위가 그로 하여금 춤 자체에 도달하게 한다. 그가 글을 쓰는 동기 역시 춤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몸의 리듬에 손과 발을 싣는 것처럼, 그의 문장은 내면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진행된다. 짧고 간결한 문장, 현재형 시제, 내면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구어체,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사건, 설명적이지 않은 명료함, 갑자기 찾아오는 반전 … 그래서 그의 글을 무심코 읽어가다 보면 어딘가에 쿡 찔린 것처럼 어떤 통증이나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일상 속에 숨어있던 허방을 우두커니 대면하게도 된다.
인용부호가 없다는 것도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다. 그 점에서 나의 글쓰기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남에게 보여주지 못하게 된 것처럼, 그동안 내 글쓰기가 더해온 것은 경험의 깊이가 아니라 장식의 두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불안은 우선 적게 겪고 너무 많이 쓰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또, 더이상 질문의 양식이 아니라 확신과 설득에 갇히게 되면서 생겨난 역설적 심리이기도 하다. 인용문이 자꾸 늘어가는 현상은 그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는 증표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 직업적 불안으로부터 이 책은 자유롭다. 그는 지적인 장식 없이 오로지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 의지해 삶의 진실로 직진해 들어간다. 그럴 듯한 말들에 적당히 기대어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거니와 어떤 선입견으로 대상을 채색하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빈약함을 가리기 위해 현학적인 용어나 담론을 끌어대기 일쑤인 오늘의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단촐한 글쓰기는 오히려 돌올해 보이기까지 한다. 맨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수식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떤 종류의 용기와 자신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손이 일구어낸 일상의 빛
맨눈으로 발견한 세계가 깊이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침묵에 대한 응시가 필요하다. 이때의 침묵은 단순한 정지나 휴지(休止)가 아니다. 그것은 적요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부단한 파동을 지닌 상태를 말한다. 그는 자신을 응시하며 “멍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아주 중요한 직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곳이 늦은 겨울밤 포장마차 구석이든(〈그 시절의 꼼장어〉), 잘 익은 고추와 깻잎을 “따서 넣고 따서 넣고 또 따서 넣”는 행위만이 남겨진 텃밭이든(〈텃밭에서〉) 말이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을 때, 우리 속에 들끓던 생각들 소리들 모습들이 서서히 사라”질 때, 비로소 “땅기운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땅기운이 모여드는 곳, 일상의 빛이 환하게 드리워진 곳은 어디인가. 타자를 향해 열려진 그의 시선은 회색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그 눈부신 곳을 찾아낸다.
밀집한 증권가와 은행가. 공중에서 명멸하는 전광판 숫자들과 일확천금. 그 아래 한뼘 땅 위에 앉아 그는 하루종일 두손으로 콩을 까고 곱은 손가락으로 종이돈과 동전들을 조심스럽게 챙긴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매순간 우리를 잠식해오는 거대도시의 추상을 균열시킨다. 작은 지렛대가 되어 우리 삶의 변함없는 착지점이 어디인지 일깨워준다.(〈눈부신 곳〉)
한국 자본주의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여의도의 아파트에서 살면서도 그는 길가에 앉아 하루종일 채소를 팔며 콩을 까고 있는 손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묵묵히 일하는 손의 침묵이야말로 거대도시의 추상을 균열시키는 작은 지렛대라고 말한다. 어디 그뿐인가.〈젊은 노인〉에는 낡고 오래된 것들을 무엇이든 매만지고 고쳐서 새로 태어나게 하는 노인이 등장하고,〈도장 파는 집〉에서는 조그만 가게에서 돋보기 안경을 쓰고 도장을 파던 노인이 추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노인들의 자리, 그 수공업적인 세계는 급속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현대적인 도장가게에서 단 2분 만에 기계가 새긴 도장을 들고 나오면서 그는 이렇게 되뇌인다.
두손으로 하던, 두손 끝에 정성과 마음을 모아 하던 일들이 사라진 지금, 그 손들은 무엇을 하는가. 무슨 일을 하여서 잃어버린 집중과 긴장의 순간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손을 쓰지 않으면서부터,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생기를 잃게 되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나른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손을 통해 연결되는 현장성과 멀어지는 만큼 막연해지고 추상적이 되는 것이다.(〈도장 파는 집〉)
손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기계문명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잃어버린 삶의 긴장과 생기를 회복하는 길은 수공업적 세계의 신성한 노동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숨도 안 쉬고 돌아가는 탈수기 속의 빨래와도 같은 우리들. “난도질당한 옷들을 통 속에서 구해내” “맑은 냇물이 힘차게 흐르는 곳에”(〈빨래하는 날〉) 담그듯이, 이제는 그 폭력적인 기계로부터 스스로를 꺼내 새로운 물결에 헹구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세탁기 속에서 빨래들이 어떻게 뒤엉키고 곤두박질치는가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고.
이렇게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의 사유는 보다 근원적인 곳을 향해 나아간다. 마치 가느다란 잎맥으로부터 역류해 들어가 거대한 뿌리에 이르는 물줄기처럼. 그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찢겨지고 잘려진 존재인지를 조금씩 알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뿌리를 찾아서
그의 시선은 일상에서 벗어나 아주 멀리 뻗어가기도 한다. 영문학 교수라는 직업 때문인지 외국에서 보고 들은 얘기들이 적지 않은데, 그 경험을 통해 문명의 폭력과 허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한다. 아프리카에서 사파리를 하며 무기력하게 길들여진 사자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자화상을 읽어내는 것도 그런 경우다. 그는 사자를 보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끌어내리고 오염시킨 뒤, 두렵고 공허해져서 새 우상을 만들어낸다. 그 발밑에 엎드린다. 우리는 군림하면서도 경배해야 하는 역설적인 존재인 것이다. 문명의 이름으로 파괴한 자연을, 신성을 우리는 문명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든 물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사자를 보다〉)
그런가 하면〈아프리카〉라는 글에서는 가난하지만 정결한 원주민교회에 앉아 “극도의 가난과 극도의 포만, 이 양극의 질곡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의 격조가 다시 삶속에 돌아와 뿌리내릴 수 있을까”라고 묻기도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낙관적인 대답을 내리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킬리만자로의 산정에 표범 한마리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신성성의 회복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회의적인 질문이야말로 회복에 대한 강렬한 갈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유적지에 가서도 그가 주목하는 것은 신전의 웅장한 규모나 유물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아테네, 델피, 올림피아의 신전과 폐허를 향해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며, 그 모습이야말로 잃어버린 근원을 되찾으려는 몸짓이라고 말한다. 진정성에 대한 갈증.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뿌리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기억의 실핏줄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잘려진 뿌리는 아직 따뜻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진정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성에 대한 갈증으로 시들어가고 있다. 진정성이 무엇인가. 하늘 아래 하나뿐인 것. 유일한 것. 서있는 곳에 뿌리내려 다른 무엇과도 대치될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많은 사람들이 이 높은 산 위로 힘겨웁게 올라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거대자본, 세계화에 대한 환상. 흔들리는 삶의 구심점.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근원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발 디딜 곳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역설은 실은 이 신전을 창조한 고대인의 신앙과 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땅에 서있는 유한한 인간이 그것을 넘어서고자 발돋움했던 흔적들이 저 여신들의 모습일 테니까. 이것을 깨닫는다면 지금 우리들은 떠돌고 있지만 순례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리스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