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합 조개도 입을 벌리고
종다리는 노래하네.― 코바야시 이사(1763-1823, 일본 하이쿠 시인)
갯벌에는 생명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바다의 짠물이 육지의 민물을 만나 함께 뒤섞이고, 서로를 반기며 하나가 된다. 그곳에서 차고 이지러지는 밤하늘의 달에 맞춰 부드러운 리듬을 타고 조수가 갯바닥에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가면서 바다가 육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서로 반가움을 나눈다. 무수한 생명체들이 모래 속에 몸을 묻고 사는 곳도 그곳이고, 희귀종과 멸종위기의 새들과 함께 무수한 철새들이 계절의 흐름에 따라 아주 먼 곳에서부터 먹이를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곳도 그곳이다.
새만금을 살리자는 메시지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났다. 소위 말하는 거창한 개발공사를 그대로 진행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중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농지와 산업용지를 얻기 위해 33킬로미터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막겠다는 생각, 바로 자연을 통제하려는 우리의 오만과 무지의 또다른 사례인 새만금 공사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임에 분명하다. 이 공사를 반대하는 요지는 명백하다. ‘미래의 식량안보’라는 정치적 용어로 표현된 벼농지의 확보는 ― WTO의 유산의 일부로서 ― 이미 농부들에게 쌀을 증산하기보다는 감산을 권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명분이 아니다. 산업을 위해서라니? 우리는 1996년 시화호 매립공사의 엄청난 실패와 그에 따른 오염으로 생태계가 파괴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다. 갯벌을 매립하는 대신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막아 물이 썩게 내버려두는 대신 강물을 정화해야 한다.
사실상 새만금 갯벌 매립공사는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벌써 위기에 처한 이 행성에 더 많은 오염과 죽음을 초래하는 세계적인 수많은 사례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매립공사에 항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뭔가 새롭고도,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게 도입되었다.
3월 28일, 바로 이 갯벌 현장에서 일찍이 한반도에서도, 아니 전세계적으로도 선례가 없었던 고된 여정이 시작되었다. 부안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그것도 세걸음 걷고 한번 큰절하는 삼보일배의 방식으로 떠나는 순례는 모든 점에서 너무나도 독창적이었다. 이 순례는 침묵 속에 진행되었고, 바로 그 이유로 사람의 혀로 말하지 못하는 새만금 갯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위해 최선의 변론을 한 셈이다. 이것은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의 의식과 감정을 뒤흔드는 뭔가 새로운 것을 낳는 그런 행동이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그리고 큰절마다 이 순례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다. 이것은 비폭력적이고, 자기희생적인 행동으로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수경 스님, 문규현 신부, 김경일 교무, 이희운 목사가, 믿기 어렵겠지만, 진짜로 서울까지 3,000킬로미터를 삼보일배로 걸어갔다. 65일간 지속된 극도로 고통스러운 이 순례로 이 분들의 몸이 겪는 아픔은 바로 우리가 환경과 지구에 가한 손상을 반영한다. 어느 누가 이 분들의 순례에 감동받지 않겠는가.
땅이 아플 때 누가 반응하는가? 이 성직자들은 ‘우리’라고 말한다. 삼보하면서, “우리는 우리 속의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본다.” 일배하면서, “우리는 땅에게 사죄한다.” 무릎이 땅과 맞닿는다. 손바닥으로 땅을 만지고 이마로 땅과 접한다. 이 순례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는 마음속의 탐욕, 성냄, 무지를 인식하고, 땅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참회의 시작임을 알게 된다. 진정한 참회는 우리가 우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 때 나오는 것이다.
나는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아바탐사카 수트라’라고 하는 화엄경(華嚴經)의 인드라망 이미지를 떠올린다. 우주를 상징하는 여신 인드라에는 모든 가닥이 만나는 매듭 마디마디마다 보석이 달려있다. 보석 하나하나는 서로서로를 비춘다. 인드라망은 모든 것이 끝없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 바로 우주의 모습이다. 나에게 이 분들이 하는 큰절은 이 방대한 우주적 그물의 모든 가닥의 매듭마다 달려있는 보석이다. 이 분들의 절은 그 완전한 겸손 속에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유정 . 무정물의 생명과 상호의존성을 담고 있다. 겸손과 자기희생 속에 이루어진 이 분들의 엎드림은 우리도 이 땅에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몸도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분들은 자신의 몸으로 땅에게 순교를 바치는 것이다. 삼보일배의 순례행은 완벽한 보시(布施)이다. 우리도 그 순례의 일부이다. 삼보일배는 우리가 다른 존재와 땅을 착취하여 얻은 우리의 편안한 삶을 버려야 하고, 거기서 벗어나야 함을 보여준다. 묵언과 함께 진행된 삼보일배라는 비폭력 행동은 땅의 복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방식에 깊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이것은 자연과 새만금을 위협하는 폭력이 이라크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동반한, 이윤을 노린 전쟁의 폭력성과도 직접 맞닿아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 성직자들의 순례가 우리들에게, 소박한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내면으로의 여행을 뜻하지 않는다면, 삼보일배의 여정은 그 의미를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순례는 특정한 환경문제뿐 아니라 ‘존재’에 관한 문제, 삶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만금의 생태계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흐리게 하는 마음속의 오염을 닦아냄으로써 바로 우리 마음속의 새만금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국적기업과 시장의 독재,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흙의 정신을 거스르는 파괴적인 전쟁에 항거하여 전세계적으로 점점더 강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동참할 수 있다. 우리는 동참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목소리에.
이 성직자들이 시민단체, 환경운동가들, 지역주민들, 그리고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새만금의 모든 생명체들을 감싸 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어떤 희망을 보여준다.
갯벌은 흐름이 있고 변화가 있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흙과 물이 섞이며, 강 어귀는 흘러내리는 물결로 넓어지고, 조수는 뭍으로 밀려와 모래를 쌓았다가 실어가면서 하늘 아래 갯벌을 드러낸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공간인 갯벌은 흐름을 유지해야 한다. 강과 바다 사이에, 또 육지와 대양 사이에 어떠한 딱딱한 분리가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새만금을 막는 어떤 인위적인 제방도, 우리의 마음을 가두는 어떤 벽도 세워서는 안된다. 창조적인 생각과 행동은 흐름이 있어야 하고, 새만금과 이 지구의 미래와 연결된 사람들의 마음도 자유롭고 함께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열려있어야 한다. 네분 성직자들의 자기희생적인 여정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다면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할 것이다.” (박혜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