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감기가 걸려서 목소리가 듣기 거북하실 겁니다. 평소에도 좋은 목소리는 아닙니다마는 …. 오늘 제가 이런 자리에 와서 기념강연이라는 걸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임재택 교수가 하도 오라고 성화여서 오긴 왔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시간 정도 또다시 위선적인 이야기를 해야 될 모양입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이런 모임, 즉 생태유아공동체 같은 풀뿌리 생활협동 운동이 왜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놓고 조금 근본적인 각도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임이 열리고 있는 장소에 대해 우선 얘기 좀 하고 넘어가지요. 여기가 국립대학의 강당이고, 국립대학이란 결국 국가기관입니다. 저렇게 커다랗게 태극기가 걸려 있는 거 보십시오. 아까 시작할 때 사람을 괜히 일으켜 세워 가지고 국민의례랍시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시키더군요. 그럴 줄 알았으면 저는 여기 안 왔을 겁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니,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태극기를 이렇게 숭상하는 사람들이 정작 태극기가 상징하는 실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상징물은 이토록 거룩하게 떠받들면서 상징의 실체인 이 나라의 땅과 산천과 거기서 살고 있는 목숨 가진 것들은 과연 어떤 대우를 받고 있습니까. 지금 온 산하가 도처에서 파괴되고 오염되고 있는데도, 국가기관들이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대하고 있습니까. 완전히 위선자, 사기꾼들이에요.
저는 태극기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그냥 조건반사적으로 경례를 해야 된다고 배워와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식적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건 안하려고 합니다. 아까 총회 시작할 때 국민의례 순서라고 일어나라고 해서, 혼자 앉아있으면 이상할 것 같아서 서긴 섰지만 …. 그냥 서있었어요. 여러분들은 모두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갖다대고 있더군요. 이런 짓도 우리나라에서만 해요. 무조건 왼쪽 가슴에 손을 얹도록 우리가 훈련받아왔어요. 한국의 특수상황 때문인가요?
요즘 정부가 이라크에 파병하겠다고 하는데 아마 국회에서 결국 통과되겠죠. 내세우는 이유가 국익을 위해서랍니다. 전쟁은 명분없는 전쟁, 부도덕한 전쟁이지만 우리는 특수한 상황이니까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가 또 나오고 있어요. 그래도 저는 새로운 정부에 조금 기대를 했는데, 그런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또 깨닫고 있습니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가령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걸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리고, 캐나다 같은 나라는 우리가 보기에 선진국이고, 독립 자주적인 나라처럼 보이지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사실상 미국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경제봉쇄 정책을 취하면 캐나다나 멕시코 같은 국가는 하루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해서 캐나다와 멕시코 정부는 공식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국익을 들먹이고, 한국의 특수사정 운운하면서 파병하겠다고 합니다. 사실 그게 현실적으로도 정말 국익에 부합하는지 따져볼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일단 그게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흥청망청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흥청망청 살기 위해서 무고한 이라크의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한다, 말이 되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인류가 한번도 행복해진 적이 없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이제 하지 맙시다.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가 배웠던 낡아빠진 그런 사고방식을 더이상 되풀이하도록 가르치지 맙시다. 우리가 각자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사람답게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놀라운 것은 대학생들 중에 파병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남들을 억울하게 희생시키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특히 젊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갖고 살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대학생들 중에 국익이니 현실적인 실리를 들먹이는 학생들이 적지 않아요. 국제적 현실은 도덕과 윤리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인 이익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제법 그럴듯하게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면서 말이에요.
저는 대학생들이 이렇게 된 게 대학교육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대학 만들어 가지고 대학을 운영하면서 우리사회가 좋아지는 게 뭐가 있습니까. 한번 근본적으로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 나왔다 하면 전부 다 자기 고향을 저버리잖아요. 자기 마을사람들을 위해서, 고향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젊은이들이 없잖아요. 모두들 대처로, 서울로 가려고 하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떠나려고 하잖아요. 그들이 얼마나 진정한 향토애, 진정한 애국심이 있겠습니까. 사실 그러한 사람들일수록 국기에 대한 경례는 더 열심이지요.
제가 요즘 번역,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 책이 하나 있는데, 미셀 오당이라는 프랑스 산과의사의 저서입니다. 생태유아교육 운동을 시작하면서 임재택 선생이 그동안 여러번 세미나를 열었지요. 제가 그때 몇번 와서 이 의사 얘기를 했는데, 이분은 자연출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의사입니다. 최근에 그분의 새로운 책이 나왔는데, 제목이 ‘농부와 산과의사’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과 아기를 출산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똑같다는 것입니다. 현대농법이 자연적인 방법을 버리고, 소위 기술농업을 함으로써 농토가 사막화되고 또 농산물이 오염되고 질적으로 형편없는 것이 되어버렸듯이, 오늘날 산업사회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병원에서 과도한 기술적 간섭을 받으면서 태어나는데, 그래서 무서운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취제, 분만촉진제, 이런 것은 물론이고, 제왕절개도 아무런 생각 없이 하고 있잖아요. 이렇듯 농사짓는 문제와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문제를 연관지어 쓴 책인데, 여기에 보면 놀라운 뉴스가 또 한가지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모유를 먹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이 늘어가고 있지만, 그런데 지금 모유가 많이 오염돼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조금 영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유에서는 다이옥신이 검출되고 한다고 하니까 잘 처리된 조제분유를 먹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미셀 오당 박사의 책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그분이 수많은 과학적 연구를 검토해본 결과에 의하면, 모유오염 문제보다 큰 문제는 자궁 속에서 성장하는 태아에게 끼치는 오염문제입니다. 태아가 어머니에게서 받아먹는 영양분이 오염되어 있을 때 이것이 나중에 아이의 건강에, 태어난 뒤 섭취하는 어떤 오염물질보다 더 큰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제일 문제삼는 게 자궁내 오염입니다. 여러가지 과학적인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자궁내 오염이 지금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나중에 자라나서 정서적이거나 지능적인 결함을 드러내는 아이들 상당수가 자궁내의 오염의 영향 때문이라는 게 증명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이른바 서구 선진국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도 아니에요. 지구상에서 비교적 깨끗한 환경을 누리고 살고 있다고 하는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등의 자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겠습니까.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피검사를 해보면 아주 희한할 거예요. 미국에서 어떤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미국인이 얼마나 독성물질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조사하던 중 자기 피를 병원에서 검사해보았는데, 아주 독성물질 칵테일이었다고 그래요. 그 사람은 미국의 상류계층입니다.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 그 사람 얘기가 자기 같은 늙은 사람들이야 어차피 그렇다 치고, 아기를 낳아야 할 젊은 여성들의 혈액이 이런 모양이라면, 세계의 장래가 암담하다는 거예요. 꼭 기형아 출산에 대한 걱정만이 아닙니다. 요즘 점점 아토피 증세를 가진 아이들이 놀랄 만큼 증가하고 있잖아요. 또,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요즘 아이들이 침착하지 못하고, 주의집중력이 엄청나게 모자란 것, 이런 현상도 결국 오염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사람이 먹어야 사는 생물학적 존재인 한, 뭐니뭐니해도 음식물 섭취가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각자의 인간성과도 큰 관계가 있을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현인이 있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의 창립자이기도 하고, 다방면에 걸쳐 천재적인 통찰력을 보여준 20세기 초의 현자인데, 이분이 1920년대에 농업강좌라는 걸 했어요. 그가 말년에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농업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때 그분은 근대적 농법이 가져올 재앙을 예견했던 거예요. 이대로 내버려두면 미래에 인류가 큰 위험에 처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게 1920년대였습니다. 그 무렵에 뭐 그리 큰 오염이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이미 서양에서도 선각자들은 다 보고 있었습니다. 농업을 기업화하고, 기계화하고, 화학화하는 방식, 소위 근대적 농사법이 확대된다면 인류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농사를 실지로 어떻게 할 것인지 자상한 강좌를 연속해서 열었습니다. 한국어판으로도 그 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농업강좌를 열게 된 구체적인 동기가 있었어요. 슈타이너는 인지학회를 창시한 사람이잖아요. 인지학회라는 건 본래 신지학회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만, 둘다 근본적으로 유사한 영성수련 조직입니다. 종교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인간의 영성적인 삶, 내면적 삶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삽니까? 밥이나 얻어먹고 그냥 이렇게 뭐 육체적인 만족을 즐기며 사는 게 목적인 것은 아니잖아요. 그것도 필요하지만 보다 높은 어떤 차원으로,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자는 게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제자들과 그런 삶을 추구했는데, 어느날 어느 제자가 물었습니다. 왜 옛날과는 달리 요즘에는 사람들이 열심히 명상을 하고 수련을 해도, 별로 영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사람이 잘 나타나지 않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러니까, 현대에 와서 사람들의 내면적, 정신적 삶이 예전에 비해 왜 이처럼 빈곤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이지요. 매우 그럴듯한 철학적 답변을 기대하면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런데 너무도 간단한, 단순명쾌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건 다른 게 아니고 요즘 사람들이 먹는 음식물이 질적으로 너무 낮아서 그렇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옛날에 비해서 양은 많아졌고, 풍족하게 먹는 것 같지만 실제로 생명력이 고갈된 음식물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벌써 20세기의 초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제 어떤 기사에서 보니까 요즘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대기권에 이산화탄소가 옛날보다 훨씬 많이 증가했는데, 그 결과로 지금 농산물에서 점차적으로 영양성분이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가 나온 게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앞으로 우리가 지금처럼 밥 한그릇 먹고는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몰라요. 워낙 영양분이 고갈되어 있어서 앞으로는 한끼에 밥 두그릇 먹어야 할지 모릅니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이미 1920년대에 슈타이너라는 분이 지적한 거예요. 그리고 그분은 이게 단순히 육체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우리가 충분히 얻을 수 없다는 차원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의 영적인 생활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들은요, 아무리 영적인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안됩니다. 간디의 자서전을 보면 젊었을 적에 한참 수행할 때에는 우유 한잔만 먹어도 마음이 흔들린다는 얘기가 나와요. 맑은 기운이 사라지는 것을 자기가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고 그래요.
건강문제도 그렇지 않습니까. 평소 건강할 때는 잘 못 느끼지만, 건강을 잃을 듯 말 듯한 그런 경계에서는 우리가 몸의 반응을 몹시 예민하게 느낄 수 있잖아요. 아주 예민하게, 고기를 먹느냐 야채를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 몸이 영 달라져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우리 마음 상태도 달라져요. 그런 걸 보면 음식물이라는 것이 우리의 심적인 에너지를 형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걱정이 많은데 … 아이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됩니다. 아이들에게 그냥 손쉽게 피자나 주고, 햄버거나 먹이고, 콜라나 마시게 하고,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온갖 음식물에 다 들어가 있는 합성 착색료, 방부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온갖 이상한 화학물질들 … 그런 화학물질 칵테일이라고 할 수 있는 소시지를 대강 썰어가지고 아이들 도시락 반찬으로 넣어주는 부모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자식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이지 부모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생태유아공동체가 잘되기를 정말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가 무슨 거창한 생각 가지고 시작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한국의 부모 치고 자기 자식 잘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인데, 우선 이기적인 욕심으로라도 자기 자식은 살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출발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좀더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 새끼가 정말 건강하게 자라고, 올바르게 사람 노릇하려면 다른 아이들도 건강해야 하고 전체 사회가 맑고 건강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회를 맑고 건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딴 사람들을 자꾸 비난하고, 딴 사람들 탓을 계속해야 합니까? 나부터 맑고 건강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딴 사람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돼요. 제가 이런 모임에 와서 얘기도 하고, 지금 생명운동에 열심인 젊은이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상당수가 우리만 이런다고 되겠습니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세상은 다 저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 소수의 우리들이 이런 노력을 한다고 무슨 실효가 있겠느냐는 거지요. 물론 당장에 무슨 효과가 있겠어요. 세상은 급속도로 뒤틀려가고 있는 게 확실해요. 환경문제만 해도 파국 직전인데, 설상가상으로 지금 부시라는 사람이 벌이는 전쟁 때문에 세계의 앞날은 정말 암담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겠어요.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생각하는 서구나 미국도 이런 식으로 가면 기본적인 시민권, 인권 이런 게 아마 굉장히 제한받게 될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 알카에다 용의자들이라고 해서 미국의 수사관들이 아랍인들을 붙들어가지고 고문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고문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방송 중에 사람들이 많이 보는 ‘폭스 텔레비전’이라는 게 있는데, 이건 거의 극우 언론이에요. 그 방송의 앵커라는 사람이 그 아랍인들의 고문당한 사진을 방송에서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에게 묻습니다. 이런 놈들이 9 . 11테러를 저질렀다. 이놈들이 앞으로 미국에 어떤 짓을 가할지 모른다. 이런 놈들을 우리가 고문을 해서라도 테러계획에 대한 정보를 빼내야 되지 않겠느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대부분의 시청자들로부터 찬동을 표시하는 전화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런데 미국의 대중들이 잊고 있는 것은, 지금 자신들의 적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에게 가해지는 이런 폭력이 조만간 자기자신들의 시민권, 인권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실마리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국사회도 전쟁을 위한 노골적인 병영국가로 변모할지 모릅니다. 이번 이라크에 대한 침공도 미국 행정부가 실은 이런 것을 의도적으로 노린 결과가 아니냐 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 미국 국방부 장관 럼스펠드나 부장관 월포위츠 같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벌써 오래 전부터 짰던 시나리오라고 해요. 이제는 세계의 초강국으로서, 미국이 세계와 타협하고 대화하고 그런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미국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무력으로 치고 들어가겠다, 국제법 같은 것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런 안하무인격으로 세계를 제국주의적으로 지배하려는 계획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앞으로 한국은 끊임없이 북핵문제 때문에 불안하게 지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만 이런 게 아닙니다. 온 세계의 풀뿌리 민중은 다같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의 보통 시민도 우리보다 팔자가 더 나을 것도 없습니다.
헤르만 쉐르라는 독일의 세계적인 재생가능 에너지 전문가가 있습니다. 아마 세계 최고의 태양에너지 전문가라고 해도 될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에너지문제는 길게 말씀 못 드리겠지만,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태양에너지 시대로 가는 데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석연료 체제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쓴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 반민주적인 에너지 체제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좀더 민주적인 사회, 좀더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면 중앙집권적인 국가 시스템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의 힘으로 우리의 생활을 자치적으로 꾸려나갈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집집마다 동네마다 태양광발전 시스템과 풍력발전을 돌리고, 소규모 수력발전 시설을 하여 자연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고, 에너지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그러한 자율적 체제로 가야 합니다.
헤르만 쉐르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가장 깊이 있는 전문가인데, 현재 독일 연방의회의 의원이기도 합니다. 아마 지금 독일이 소위 선진국 중에서도 태양에너지 시스템 보급이 제일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게 바로 이런 분 덕분일 겁니다. 그 헤르만 쉐르라는 사람이 최근에 어떤 인터뷰에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세계가 이처럼 암담한 상태가 된 것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른바 지도자들이라는 인간들이 백치들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과학기술이 이렇게 놀랄 정도로 발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학기술이 지금 어떻게 쓰이고 있습니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커녕 완전히 재앙을 불러왔잖아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재앙의 강도와 그 파괴력은 점점더 커지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래서 헤르만 쉐르가 하는 말이 세계가 지금 백치들에 의해 통치된 결과가 이 모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국가가 있고 자본이 지배하는 한에 있어서는 과학기술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국가의 보호 밑에 우리가 생존하고 있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 국가 때문에 우리 생활이 편할 날이 없다, 그렇게 보는 게 맞습니다. 아무튼 국가기관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은 국가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일관되게 그래왔습니다. 국가의 군대는 실제로 외국인보다 자기 국민들을 더 많이 죽여왔습니다. 이게 역사적인 현실입니다. 국가가 왜 존재하고, 국가의 군대가 왜 존재합니까. 자기 국민을 탄압하고 억압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을 필요가 있어요. 자, 보십시다. 국가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을 맡아서 어떻게 해놓았어요? 사회적 약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국가의 힘이 커지면 희망이 있을까요? 생각있는 사람이 교육부 장관이 되어서 유아교육 시설에 좀더 투자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미래가 좀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겁니다. 저는 결국 우리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삶의 매듭 하나하나가 문제투성이 아닌 게 없습니다. 요즘 아이 낳는 거 정말 겁나잖아요. 양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먹이고,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학교는 어떻게 안심하고 보낼 것인가. 영어 잘하라고 아이들의 혓바닥을 자르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얼마나 다들 건강이 나쁩니까. 건강 좋은 사람 없어요. 지금 그냥 움직이니까 건강하다고 착각하면서 살 뿐이지요. 언제 드러누울지 몰라요. 그럼 찾는 곳이 무조건 병원이죠. 병원에 가면 시원하게 해결이 되나요? 또 병원이 뭔가가 실효가 있다고 칩시다. 실은 현대의학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전체 질병 가운데서 30%도 안된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리고 그 30%도 대부분 플라시보 효과라고 그래요. 심리적 효과라는 말입니다. 의사가 확신을 가지고 환자에게 약을 주고, 환자도 의사를 믿고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얘기죠. 심지어 비타민C를 주고 그게 좋은 수면제라고 하면 불면증 환자가 잠을 잘 잔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어떻든 현대의학의 위력이 크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아플 때마다 병원에 가야 되느냐 하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기는 요즘은 아프지도 않는데 건강진단 받는다고 병원에 가는 일도 흔해졌어요. 조기 발견해야 된다고 하면서요.
현대문명을 아무리 비판하는 사람이라도 옛날보다 사람이 오래 살게 되었지 않느냐, 라는 말 앞에서는 대개 침묵합니다. 의학의 발달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을 못해요. 그러나 저는 그런 태도가 문제라고 봅니다. 옛날보다 오래 산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거짓말이에요. 옛날에는 유아사망률이 높아서 평균 수명이 짧았던 것이지, 오래 사는 사람은 다 오래 살았거든요. 그런데, 설사 옛날보다 지금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 한들 그게 중요한 겁니까. 사람은 몇살에 죽더라도 좀 깨닫고 죽어야 합니다. 오래 사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오래 사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무조건 장수만 누리려 한다면 우리의 삶은 근원적으로 피폐해져버릴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위엄을 가지고 사는 거잖아요. 우리가 무조건 질병 없이, 오래 살기만 바란다면, 그래서 병에 걸릴 때마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간다면 우리는 늘 이상하게 바보같이 살게 됩니다. 자, 보십시오. 감기 한번 걸릴 때마다 병원에 간다고 합시다. 요즘 가벼운 병이라도 집에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아는 사람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고 있으면 우선 식구들이 성화예요. 왜 병원에 안 가고 식구들 속 썩이느냐고 그러죠. 그런데, 식구 때문에 속상하고, 어떻든 서로 돌보고, 이러는 동안에 가족이 강화되는 것 아닌가요? 서로 보살피고, 어려울 때 같이 있어주고, 옆에서 주물러주고, 위로하고, 그러기 위해서 가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플 때마다 병원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겠다 하면, 그때 필요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돈입니다. 현금만 있으면 돼요. 가족이 뭐가 필요 있어요. 병원에 가면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사람이 있고, 훨씬 좋은 시설이 있고, 직업적인 간호사, 간병사도 있잖아요. 그러니 돈이 제일이지요. 실제로 지금 급속도로 가족이 해체되는 주요한 요인이 이런 데 있습니다.
저는 현대의학과 현대적 병원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전통적인 가족의 유대는 희박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각자 가족도 없이 혼자서 쓸쓸하게 비인간적인 기술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결국, 국가나 국가기관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놓다가는 결국 이런 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한가지 예로서 의료문제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만, 교육도 마찬가집니다. 국가가 정말 우리 아이들의 행복, 그 아이들이 진실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대해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육부와 학교가 아이들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하는 건 괜히 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자기 아이에 대해서 정말 진정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아이들을 잘 아는 이웃사람들밖에 없어요. 인간본성으로 볼 때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만 진짜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자기 아이나 이웃 아이의 교육도 책임져야 되는 거예요.
하여간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 자신의 삶의 문제를 국가라든지 전문가라든지 하는 멀리 있는 기관에 맡겨서 처리하겠다는 허황한 생각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갖고 있는 큰 맹점이 뭐냐 하면 중앙정부, 국가권력의 힘으로 국가적 복지체제를 만들어서 수많은 사회적, 인간적 문제들을 해결하자는 생각입니다. 근데 잘 생각해봅시다. 서구 복지국가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몇십년 해보니까 안된다는 거 아니에요? 설사 그것이 경제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어떻게 돼요? 스웨덴이 가장 복지체제가 잘된 나라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라는 거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사는 게 재미가 없는 거예요. 생활의 안전망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확보가 되어있지만, 그래서 굶주릴 염려는 전혀 없는데, 밥이 아무 맛이 없는 거예요. 사람과의 관계도 맛이 없어요. 왜? 전부 비인격적 관계가 돼버렸기 때문이죠. 당장 굶주린다거나 아파서 치료를 못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죠. 시스템이 잘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재미가 없는 거예요. 이게 정말 중요한 거 아닙니까?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고,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 혹은 있으니까 ― 사람끼리 서로 돕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그러는 동안에 진짜 맛있고, 생기있는 삶이 가능해지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생태적으로도, 국제적인 사회정의의 측면에서도 국가 중심의 복지체제는 더이상 갈 수가 없다는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지국가 체제를 만들려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해야 하고, 우리보다 경제력이 약한 사람들 소위 후진국 민중의 피를 빨아먹어야 돼요.
지금 새 정부 들어서서 동북아 중심 국가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노무현이라는 사람도 한심하지만, 새 정부의 브레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이렇게 한심합니다. 지금이 어느 땐데 19세기, 20세기적인 낡아빠진 부국강병의 논리와 사고를 가지고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것인지 … 생각해봅시다. 동북아 중심 국가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을 중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 들으면 어떤 기분이겠어요? 왜 아직도 그런 바보 같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말이라도, 이제부터는 공생의 윤리에 입각해서, 아시아의 다른 이웃 국가들과 친하게 지내는 국가가 되겠다, 하면 안됩니까? 그러면 뭔가 미흡한 기분이 들까요?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국가, 문화국가가 되자고 하면 왜 안됩니까?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 정치가들 중에는 김구 선생님밖에 안 계신 것 같아요. 김구 선생님은 우리는 부강한 나라 싫다고, 우리는 문화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동북아 중심 국가라는 그런 천박한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발상이에요. 자기가 가장 힘센 자가 되어가지고 떵떵거리며 살겠다는 이런 생각은 현실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하지만, 원리상 이것보다 어리석은 사고방식이 없어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당했으면 일본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소위 구미 열강의 침략 앞에서 독자적으로 자기보다 발전이 늦은 나라를 침략함으로써 자기들이 패권국가의 하나가 되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발상법을 전환해서, 아시아 국가들과 연대해서 구미 열강의 침략을 막겠다는 쪽으로 나갔어야 그게 올바른 역사가 됐을 겁니다. 19세기, 20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칩시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이런 낡아빠진 사고의 틀에 매여 있으면 인류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어요? 이제부터는 부국강병주의를 가지고는 더이상 나아갈 데가 없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 가지고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약육강식의 전쟁터밖에 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속에서 누군들 인간다운 위엄을 지키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여기 모여서 하고자 하는 이런 생활협동조합 활동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지금은 우선 먹거리 운동에 국한되어 있지만, 앞으로 이런 운동이 좀더 발전되어 전 생활범위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문제, 교육문제, 노인 돌보는 일까지도 국가기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책임져 보자. 적어도 삶의 기초에 관한 문제를 더이상 국가와 시장이라는 거대한 비인격적인 시스템에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협동적인 노력, 이웃들과의 연대의 힘으로 자치적으로 꾸려가보자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존심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무책임해지지 않고,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바깥의 시스템에 맡겨놓아버리면 결국 우리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자발적인 능력과 책임감이 둔해지기 마련입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 … 생각도 하기 싫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 비극의 와중에서 많은 승객들이 119에 전화를 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도우러 오지도 않는 119에 대고 필사적으로 전화를 돌리고 있었던 광경을 생각해봅시다. 또 올 수 있었다 하더라도, 119가 모든 상황을 해결해줄 수는 없는 거란 말입니다. 나와 내 옆사람의 공동의 노력으로 이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기민하게 생각할 만한 훈련이 평소에 되어있었더라면 상황이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하철 자체의 문제, 당국이나 관계자들의 책임은 엄격히 물어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대부분 자기 생활의 문제에 자발적,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조건 급하면 119란 말이에요. 열쇠를 잃어버려도, 몸이 조금 아파도 덮어놓고 119에 전화를 건다고 하잖아요. 이게 벌써 우리가 의존심리가 굳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가 모두 등신이 되는 겁니다.
제가 농업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도 실은 이런 문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농업이 중요한 것은 물론 식량자급이나 국토보전이나 그런 면도 중요하지만, 농업이 온전해야 우리가 자치적,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농업문제를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지금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0%도 안될 겁니다. 그것도 대량으로 석유를 사용해서 그런데, 석유가 없어지면 어떤 비참한 상황이 될지, 그런 것에 대해 이 사회에 대책이 있는지, 참으로 한심한 상황입니다. 제네바에 있는 ‘석유자원 분석연구소’라는 데서 예측하고 있는 거지만, 이제 2008년이 되면 세계의 석유생산량이 피크에 오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석유값은 폭등하게 될 겁니다. 거의 모든 산업이 석유에 의존해 있는 한국경제의 현실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다급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국가적인, 사회적인 대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국가는 늘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이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지식인들은 뭐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비교적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정치개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회적 공정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적인 공정성의 문제, 부정부패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러한 것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생활의 토대 중의 토대인 농업을 이렇게 피폐하게 만들어놓고 어떻게 이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면서 늘 피상적인 현상에만 주목하고 있단 말이에요.
한국 사람들 먹는 거 다 좋아하죠. 약국에서 제일 잘 팔리는 게 소화제하고, 변비약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먹는 식품, 농산물의 출처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무관심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다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건 대단히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지금 쌀이 남아돈다고 하지만, 그래서 쌀값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지만, 만약에 쌀수입 개방이 본격화하고, 저렴한 외국쌀이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우리나라 쌀농사는 전멸할 것이고, 우리쌀이 생산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헐하게 공급되던 외국쌀은 값이 천정부지로 폭등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미국 사람들한테 달라고 하면 주겠어요? 줄 것 같아요? 농업을 피폐시켜 놓고는 아무것도 안돼요. 사실상의 식민지가 될 거란 말이에요. 노무현 정부 들어서고 나서 농업에 대한 새로운 근본적인 대책이 제가 볼 때는 하나도 없어요. 그냥 지금까지 하던 대로 농사를 수출산업에 대한 걸림돌로 여기고 있어요. 심지어 경제계에서는 아예 농업을 포기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현실적으로 우리의 농업을 지키는 일은 오로지 여러분과 같은 깨어난 소비자들밖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기농산물 생산자들과 제휴하는 노력,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정부나 기업, 이들을 대변하는 언론, 전문가, 이런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한국의 농토가 다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귀찮거든요. 괜히 공업제품 수출하는 데 마찰만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말 농사 지켜줄 사람이 누구겠어요?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켜줄 것 같아요? 농사의 ‘농’자에도 관심이 없는데 … 농과대학 교수들도 마찬가지예요. 오죽 농사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농과대학 이름을 전부 다 바꾸겠어요. 정말 수치스러워요. 미국과 일본도 농과대학 이름은 바꾸지 않습니다. 근데 우리는 뭐 생명자원대학이라는 둥 웃기는 이름으로 전부 개명을 했잖아요. 농사의 농자가 어때서요? 세상 사람들 중에 밥 안 먹고 똥 누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모든 학문, 모든 지식, 모든 철학의 중심에 농(農)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저는 농학과는 따로 자연계 대학에 속해 있을 게 아니라 인문대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사람살이의 근본이거든요. 농사는 단순히 기술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철학이며, 정신입니다. 그 다음에 뭔가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늘과 땅과 오랜 인간사회의 지혜가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존한다는 게 가능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농(農)이 근본이잖아요.
근데 왜 관심이 없느냐 하는 겁니다. 달리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긴가요? 아마도 많은 지식인들은 테크놀로지가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밑바닥 백성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녹색평론》심각하게 보는 지식인은 별로 없어도, 농민이나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자식 키우는 사람들이거나 남의 자식들 돌보는 사람들은《녹색평론》을 심각하게 읽고 있어요. 하기는 기득권층에서는 진짜 사회변화, 뿌리로부터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기득권자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이 있을 리 없죠. 뭔가 지금 간절한 사람들이 꿈을 꿀 수밖에 없어요. 아이들이 아토피 때문에 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 없이는 이 세상을 바꾸어야겠다는 진정한 열정이 생기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답답한 우리가 스스로 우물을 팔 도리밖에 없어요. 기존 제도나 시스템에 기대할 수가 없어요. 여기 신문사에서 오신 분들도 있는지 모르지만, 언론에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기득권 가진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다 보니까 생각나는 분이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서 때로는 울분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면서,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요. 제 주변에 있는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아도 희망은 제로예요. 이 사회에서 어떻든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서, 좀 책임감을 가지고 사물의 근본을 생각하면서 현실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사람들이 맨날 연구비 타령만 하고 있어요. 아니면 어떻게든 이름을 내거나 출세하려는 데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교수들이 내놓는 연구업적이란 게 우리가 사는 데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대부분이에요. 학문이라는 이름 밑에서 왜 저렇게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는가. 기가 막힌 현실이죠. 우리나라의 대학교수치고 우리 농촌에 일년에 한번이라도, 아니 평생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방학만 되면 쥐뿔 나게 외국에 나갑니다. 방학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외국에 나가고, 그걸 유능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어요. 외국에 나가서 그 사람들 하는 짓이란 대개 자기 자식들 유학시키는 일 준비하거나 그런 일들이에요. 이 땅에 뿌리박고 살겠다는 정신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보면서 저는 우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그래도 살아야지,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가는 데까지 가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 데 제일 필요한 게 뭐냐 하면 내 마음 속에 존경하는 분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계시고, 나보다도 훨씬더 가난하게, 외롭게 지내면서도, 사람들에게 맑은 기운을 끊임없이 주신다고 생각하면, 그런 분이 지금 나와 같은 사회, 같은 시대에 살고 계신 것을 생각하면, 큰 위로가 되고 용기가 생기거든요. 그런 분들 가운데서 저에게는 권정생 선생님의 존재가 참으로 큽니다. 보통 그분을 아동문학가라고 하지만, 단순한 아동문학가가 아니지요. 다 아시겠지만, 이분 자신은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지내시고 계시잖아요. 20대 청년기에 결핵에 걸려가지고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병고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지금도 비교적 몸이 괜찮을 때가 나락 한섬을 지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 하니까요. 안동 조탑리에 있는 조그만 일자 집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사람의 거처로는 가장 작은 집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집에서 혼자 살고 계시죠. 평생 결혼할 생각도 못하시고, 한때는 유랑도 하면서 걸인 노릇도 했고, 오랫동안 시골교회 종지기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70년대에 작품 발표를 시작하셨지요. 그러면서도 이분처럼 꿋꿋한 사람도 없어요. 지금도 늘 편찮으시니까 찾아뵙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찾아가서 말씀을 들으면 제가 정신이 확 깹니다. 절더러 글을 늘 쉽게 쓰라고 충고도 하시고 그래요. 제 글이 좀 어려운가 보죠. 글을 쉽게 써라.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별로 귀담아 듣지 않을 텐데, 선생님이 왜 그런 말을 하시는지 짐작이 되니까, 이건 사실 무서운 말씀이라는 거 느껴져요.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거, 그게 무슨 말이겠어요. 특권적인 입장에서 쓰지 마라, 진리는 소수의 특권적인 엘리트 문화에 있는 게 아니라 풀뿌리 백성들의 삶에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런 아주 뼈있는 얘기를 그렇게 순하게 얘기하십니다. 설명도 없어요. 근데 이분 자신의 글을 보면 정말 글이 쉽잖아요. 하고 싶은 말 다 하시면서 누구든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건 아니건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란 말이에요. 권 선생님의 유명한 동화《강아지똥》만 해도 그렇지요. 강아지가 길가에 똥을 누었는데, 계절이 바뀌고, 비바람을 겪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중에 흙이 되어가지고, 거기서 민들레가 피어난다는 이야기잖아요. 똥이 민들레로 환생하였다는 이야기잖아요. 이 세상 생명은 어떤 것이라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끝없이 순환하면서 서로서로에게 밥이 되면서, 되풀이하여 꽃을 피운다는 그런 아름다운 얘기를 소박한 아이들의 말로 써서 문단에 등단하셨지요.
문단에 등단하기 전까지 한 20년 동안 이분이 뭘 하고 사셨냐 하면, 조탑리에서 목사도 없고 전도사만 있는 조그만 시골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종지기를 하셨습니다. 그때 종을 치기 위해서 겨울 새벽 4시에 나오는데 얼마나 손이 시립니까. 요즘은 기후가 이상하게 돌아가서 겨울에도 혹한이 드물지만, 그 무렵에는 정말 혹독한 추위였거든요. 그래서 이분이 장갑을 끼고 종을 치다가 어느날 아차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삼라만상에 전하는 이 거룩한 시간에 자기가 손 시리다고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후로는 아무리 추워도 맨손으로 경건하게 종을 칠 수밖에 없었다고 어디선가 얘기하셨어요.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또 재미난 얘기가 있는데, 거처하는 데가 허름한 문간방이니까 구들장도 헐고, 벽도 갈라지고 그렇게 엉성한 거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자다가 발밑에 물컹하고 걸리는 게 있어서 살펴보니까 쥐들이 추워서 따뜻한 곳을 찾다가 거기서 자는 거예요. 그래 한 겨울 내내 그 쥐들하고 같이 지냈어요. 쥐들도 목숨붙이들이잖아요. 사람만 춥습니까? 권선생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끼리만 잘살겠다고 하는 건 너무도 염치없는 짓이란 겁니다. 지금 전쟁도, 생태적인 위기도, 온갖 사회적인 문제도 그 근원은 무엇입니까? 나만 잘살자고, 또는 우리만 잘살자고, 또는 인간끼리만 잘살겠다는 욕심 혹은 어리석음 때문이잖아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저 같은 사람은 실천을 못해요. 그런데 권선생님은 언행이 일치해요. 나는 솔직히 내 발밑에 쥐새끼가 와있으면 걷어 차버릴 것 같아요. 저는 개미 같은 건 별로 죽일 마음이 없어도, 바퀴벌레는 보이는 대로 죽이려고 덤벼들어요. 바퀴벌레도 자기 어미한테는 얼마나 예뻐 보이겠어요. 고슴도치가 자기 아이 찾는 얘기 아시죠? 어느날, 고슴도치가 자기 아이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나, 도저히 찾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만나는 동물들한테 자기 새끼를 보았는지 물어보면서 새끼 고슴도치의 생김새를 얘기하는데, 피부는 비단결 같고 어쩌고 하니까 …. 찾을 수가 없잖아요. 고슴도치 어미 눈에는 새끼의 피부가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내 새끼가 이쁘면 남의 새끼도 그 부모에게는 말할 수 없이 이쁠 거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게 문제예요. 제 새끼는 군대 안 보내고 남의 새끼들만 군대 보내려고 하는 거, 이건 말이 안되잖아요. 지금 이라크 침략전쟁에 파병한다고 하는데, 파병 결정한 사람들이나 거기에 동의하는 국회의원들이나 자기 자식 거기에 보내는 사람 있을까요?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이런 얘기 해도 될지 모르지만,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 아시죠?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인데, 출판사에 관계없이 좋은 책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에 MBC 방송의 ‘느낌표’라는 독서권장 프로그램에서 그 책을 다음번 선정도서로 하겠다는 연락이 저희에게 왔어요. 그 프로그램은 꽤 호평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물론 그 나름대로 의미있는 거라고 저도 생각해요. 근데 저 자신은 텔레비전 자체에 대해서 워낙 부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출판한 책이 그런 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는 게 달갑지 않아요. 물론 책이 그렇게 방송을 타면 꽤 많이 읽히겠죠. 출판사나 저자에게도 적지않은 수입이 생길 것도 틀림없고요. 방송국에서 처음 연락하면서 당장 20만부쯤 준비를 해두는 게 좋다고 그랬어요. 그런 걸 보면 거의 폭발적인 수요가 생긴다는 게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방송국 쪽에서 좀 당황했던 모양이에요. 출판사 측에서 거부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 거고, 프로그램 녹화 예정날짜는 잡혀있을 테니까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을 거니까요. 그래서 방송국 사람들이 저자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던 모양이에요. 아마 선생님 책을 이런 식으로라도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는 게 좋지 않으냐 하고 설득하려 했겠지요. 하기는 저도 그런 생각을 안한 것이 아니고, 또 적지않은 인세수입이 생기면 권선생님의 아무 대책 없는 노후생활에도 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기가 싫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권선생님 반응도 명쾌했다고 그러더군요. 방송국 사람에게 한마디로 느낌표 도서로 선정되는 게 싫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행복한 경험은 책방에서 자기 손으로 책을 고르는 일인데, 왜 그런 행복한 경험을 없애려는 거냐, 그러셨답니다.
여러분이 오늘 제 얘기 들으시고, 권선생님 한번 뵙겠다고 안동으로 가실까 봐 드리는 얘긴데, 그분이 요즘 특히 외부인의 방문을 굉장히 성가셔 합니다. 몹시 고통스러워하신다고 해요. 오래 앉아있지도 못하는데, 타처에서 자꾸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제발 찾아갈 생각들 하지 마시고, 그 대신 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분이 우리와 동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살고 계신다는 사실에 위안과 기쁨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쓸데없는 욕심, 그 결과가 뻔히 보이는 헛된 욕심에 휩쓸려 결과적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길을 막고 있는 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언제까지 이래서는 안되잖아요. 이제 우리가 진짜 철저하게 이기적인 욕망을 발휘해서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인간답게 살려면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우리 스스로 서로 돕고 협동하고 연대해서 살아갈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엄마들이 자기 새끼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뭐 있습니까. 뭐가 부끄럽다고 못 나섭니까. 그리하면, 이것이 결국 우리 농토를 살리고, 우리 농업을 살리는 길이죠. 농사가 중심이 되는 순환형 사회가 이제 와서 실현 가능하냐 아니냐 하는 것을 따지지 맙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존재가 실제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믿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아이를 낳을 때 계산하고 낳았습니까? 하늘에서 선물로 주시니까 우리가 받아들인 거잖아요. 인색한 사람은 이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심 후한 사람은 늘 친구가 있잖아요. 그보다 더 좋은 사회보장 시스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국가적인 시스템이니 복지체제니 하는 거 더이상 믿지 말고 우리끼리 살아가는 데 어떻게 최선을 다할 것인가, 그것을 계속해서 연구하면서, 밑바닥에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생활을 조직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희망의 길이 뚫리지 않겠습니까?
이 강연기록은 지난 3월 29일 부산에서 열린 (사)생태유아공동체 창립 1주년 기념강연을 녹취 .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