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미국과 세계평화
앞에서 말씀하신 분들이 대체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말씀들을 하셨고,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지구적인 차원에서 대안적 체제를 언급하셨습니다. 혹은 반전운동이 전지구적인 반전 연대운동으로 갈 것이다, 하는 낙관론을 피력하셨는데요. 저희들 NGO의 고민은 이런 거대한 목표와 낙관론을 두고, 현실에서 우리가 지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한겨레〉신문 보신 분들은 2면에 제가 한귀퉁이에 나온 사진을 보셨을 겁니다. 지난 5월 7일 ‘한반도 평화 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는 소식인데요.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던 여야의 국회의원 40명과,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환경운동연합,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녹색연합, 평화네트워크 등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이것을 구성했습니다. 국내에서 남남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을 비판하더라도 당장 어떻게 협상 테이블에 미국을 불러내서 북에 대한 봉쇄를 ― 아까 러미스 선생님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봉쇄보다는 선제공격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봉쇄를 통해 북한 붕괴로 몰고가는 시나리오가 더 현실적이라고 봅니다만 ― 풀게 하고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 일환으로 오는 6월 1일부터 10일까지 NGO와 국회의원 대표 6명이 미국의 동부와 중부, 서부를 순방하면서 미국의 정계 인사들과 평화운동가들, 그리고 워싱턴 주변의 ‘씽크 탱크’를 만나서 논의하고 설득할 계획입니다.
고맙게도 오래전부터 평화주의를 표방했던 미국의 퀘이커 재단이 비용 일체를 대고, 정계 사람들과 약속을 주선해주겠다고 해서 지금 그 계획으로 가는데, 그들은 미국 쪽에서 제기하고 있는 5가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오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반미주의에 대한 실체가 뭐냐. 둘째, 미군 주둔 문제 어떻게 할 거냐. 셋째, 북한 핵문제 어떻게 할 거냐. 그리고 네번째, 북한 인권문제 어떻게 할 거냐. 끝으로 SOFA 문제 어떻게 할 거냐 하는 데 대한 구체적인 답을 가지고 와라 하는 거지요. 그걸 갖고 논의하자는 건데, 그러나 이 다섯가지야말로 끔찍할 만큼 미묘한 문제들입니다. 사실은 반전이나 평화라는 먼 목표를 놓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뭘 할 건가 하는 것을 지금 고민해야 되는 상황이라서, 저희가 지금 같이 모여서〈한반도 리포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당연히 이것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보다는, 어떻게 적절한 수사(修辭)를 사용해서 그들을 설득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고민을 하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그 연장선에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제가 여기에서 ‘여성과 평화 만들기’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만, 굳이 여성주의적 관점이 아니라도 한국에서 사실 평화운동은 여성이 먼저 시작했고, 우리 여성들이 했던 다양한 평화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록 그동안 한국에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해왔던 평화운동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피해자로서의 여성
먼저 제가 잠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전쟁 또는 군사주의와 여성’입니다.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쟁의 주된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을 통해서 남성도 목숨을 잃습니다. 그러나 크리미안 전쟁 이래로 전쟁에서 군인보다 민간인 피해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전으로 오면 올수록 전쟁은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전쟁이 아니라 민간인이 직접 피해를 입는 전쟁으로 바뀌어왔습니다. 1990년대에 이르면 전체 사상자의 90%에 육박하는 피해자가 민간인이고, 특히 피난민의 거의 4/5가 여성이라고 합니다.
여성은 노동장소, 재산, 친구, 친척, 가족구성원 등을 모두 잃게 됩니다. 여성은 어린이와 노약자의 생계를 돌보아야 하고 아이를 낳아서 교육해야 합니다. 즉 여성은 확대가족네트워크의 부양자가 되는 거죠. 그러면서 여성은 경제적인 책임을 지면서도 의사결정권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죽게 하거나 상처만 입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여성은 쉽게 강간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에 의한 체계적 강간사건은 전세계를 경악시키면서, 한국의 군 위안부(정신대)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종교가 다른데,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 지역에 들어가서 보스니아 여성들 수천명을 잡아 집단강간을 한 후에 이 여자들을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낙태할 수 없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가 출산할 무렵에 여자들을 놔줌으로써, 보스니아의 이슬람 여성들이 기독교, 곧 적의 아이를 낳아야 되는 이런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전쟁이 여성에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게다가 이 여성들은 자의에 의해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닌데도, 주변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공동체의 지원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쟁을 얘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매춘 문제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체계적으로 매춘을 강요당하는데, 매춘 문제는 매춘여성과 비양심적인 남성고객의 문제가 아니라 한마디로 메커니즘과 제도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지역경찰, 정부, 군대, 모두가 가세하는 하나의 집단화된 악이 존재합니다.
얼마전에 여러분도 MBC 보도에서 보셨겠지만, 우리나라 동두천의 매춘 여성들이 성병이 많아서 미군에게 성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미군이 항의를 했고, 그래서 대대적인 ‘성병 소탕작전’이 벌어지면서 성병에 걸린 여성들에게 동양여성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독히 강도 높은 페니실린을 투여하고 수용소에 가둬 두었던 일이 MBC에서 특집으로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군부독재정권과 미국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매매춘에 관여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지역에서는 가정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에 벨그라드에 대한 조사는 전쟁과 폭력의 피해자인 남성이 만들어낸 또다른 가정폭력의 피해자, 여성의 참혹한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참혹한 실상이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환경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내전으로 인해 엘살바도르의 경우 경작지의 80%가 파괴됐습니다. 그리고 토지의 77%가 황폐화됐습니다. 오늘날 아프리카 여성들은 환경파괴 때문에 초래된 물 부족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루에 물을 길으러 먼 거리를 14번 정도 갔다오는데, 한번 물을 길어오는 데 30분이 걸립니다. 다시말해 하루 7-8시간을 물을 길어오는 데 쓰는 이런 상황이 지금 전쟁 때문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수원의 감염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 물 부족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 사망이 개발도상국 어린이 사망의 34%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에 드는 비용은 여성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복지비를 깎아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여성성의 이미지를 강화시키고 남성성의 이미지를 군사주의 이미지로 포장합니다. 저는 역사학을 연구하기 때문에 자주 접합니다만, 1차대전 당시 영국에서 나온 포스터 등을 보면 전투에 참여한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가 부엌의 화덕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면서 자신들의 귀환을 기다린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전쟁포스터가 1차대전 당시 얼마나 많이 활용되었는가를 보면, 결국 전쟁이 가부장제와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은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지만 분단상태에서 군사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보면 미군범죄나 ― 결국은 SOFA가 문제되는 게 이런 건데 ― 매춘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또 성폭력과 가정폭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은데, 통계라는 것은 끊임없이 조작이 가능해서 실상이 은폐되고 있지만 우리 여성단체들은 세계 2위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왕따) 같은 것도 일종의 군사주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주의는 이렇게 우리 일상생활 속에 모세혈관처럼 퍼져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우 매매춘 여성을 약 90만에서 100만명으로 잡고 있는데, 그중 상당수가 인신매매를 통해 매춘을 하고 있다는 것은, 두번의 참사, 즉 군산과 부산에서 일어난 두번의 화재사건에서 드러났습니다.
가해자로서의 여성
여성은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피해자이지만, 그러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 자신에 대해 냉혹하게 성찰해보면 여성은 또한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가령 여성이 군에 입대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성은 드문 경우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여성은 군대에서도 ‘2등 군인’ 취급을 받습니다. 군대에서 여성은 간호직이나 교사 같은 역할을 맡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군대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성평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대의 엄격한 ‘이원화’를 통해서 사실은 군대 내부의 가부장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들 스스로 “여성도 가해자이다”라는 자기비판을 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에서부터였습니다. 나치체제 하에서 독일의 여성들은, 자신들은 단지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며 여성은 전쟁과 히틀러체제의 피해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0여년 전부터 여성 사가(史家)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나치체제 하부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참여해서 히틀러를 도왔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을 더이상 피해자로 간주하는 것은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목소리는 일본 여성들한테도 자극을 줘서, 최근 일본 여성들 중에는 우리의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깊이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았다는 것 때문에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일본이 가해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본이 2차대전을 준비하는 시기에 여성들에게도 군수산업과 다양한 부문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여성의 국민화’ 과정이라 하는데, 이런 국민화 과정에서 일본의 여성들은 만족하고 무언가 모를 뿌듯한 정체성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일본의 페미니스트 중 상당수가 협조했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전후의 일본 페미니스트들은 거기에 대한 냉혹한 자기반성을 하지 않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피해자니까 우리는 피해자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여성도 가해자”라는 말이 나오게 된 거죠.
여성은 출세할 수 있고 정치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군대를 가면 여성이 평등해질 것이다라고 얘기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군대가 여성을 변화시킬 것이다” “군대 들어가서 여성은 오히려 남성화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들은 더욱 군사주의적으로 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성고문 사건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여성학자 권인숙씨가 미국에서 쓴 논문의 제목이〈내 안의 군사주의〉입니다. 요즘 그것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는데, 그이는 이 글에서 과거 학생운동문화를 비판하고 있어요. 학생운동권이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 투쟁했지만, 사실 학생운동 내부에 군사주의가 내재화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또 군인가족의 여성들을 인터뷰해 보면, 실상과는 달리 자신이 군사주의화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무의식중에 우리 삶의 군사주의화에 여성들도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여성들 스스로 깨닫고 자기비판해야 됩니다.
여성과 평화운동
그러나 어쨌든 간에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가장 먼저 평화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70년대에 이미 ‘교회여성연합회’를 중심으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피해자 문제를 여론화하고 그들의 치료비와 생계비를 지원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문화 퇴치운동을 했고, 87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는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최루탄 추방운동을 하면서 전경들에게 빨간 장미꽃을 달아주는 운동을,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벌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1990년부터 방위비 예산삭감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또 걸프전에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어머니들의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또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미군 폭력에 맞서 싸움으로써 SOFA 개정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습니다.
남성 중심의 많은 운동들이 그동안 통일운동에 집중해왔습니다. 통일부에 등록된 NGO만도 1,000개가 넘습니다. 그러나 그 1,000개가 넘는 통일운동 단체들이 모두 한반도의 ‘정치적 통일’만을 얘기했지, 우리 속에 얼마나 비(非)평화가 들어있는지, 우리 문화가 얼마나 폭력적인지에 대한 자기비판과 성찰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여성들은, “통일을 통한 평화로”가 아니라, “평화를 통한 통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운동도 해야 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에 못지않게 해야 될 것은 우리 내부의 평화운동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희들은 평화주의 문화를 내세우면서 우리 안에 있는 적대감과 불관용에 대해 스스로 문제제기하자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공존하자는 것이지요. 남북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동질성을 억지로 찾아낼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가치를 받아들이려는 상호공존의 자세가 평화교육의 본질이 되지 않고서는 우리사회에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이미 몇년 전부터 평화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여성 평화아카데미, 사이버 평화교육, 어린이를 위한 통일 인형극 순회공연, 청소년 평화캠프 같은 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중 특히 저희가 자랑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까 얘기한 퀘이커 재단이 지원해서 지난 2년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와 저희 ‘여성단체연합’과 ‘민족회의’의 실무자 20명을 뽑아 미국과 독일에서 교수를 불러오고, 또 우리 실무자들을 그쪽에 보내고 해서 ‘갈등해소와 관용’ 교육을 한 것입니다. 서로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상호공존하고 나아가 의견의 차이을 좁히려면 구체적인 테크닉이 필요하고 그 바탕이 되는 철학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지난 2년간 훈련시켰는데,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들이 지금 다양한 NGO에 가서 배운 것을 실천하고 또 교육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호공존과 관용을 주장하지만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외국인 차별과 같은 선악이 분명한 것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많은 까다롭고 미묘한 문제에서는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당장 시급한 문제는 북한에 대한 지원인데, 북한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미국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북한에 중유를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동시에 남한사회 내에도 북한을 도와주면 안된다는 여론이 굉장히 강한 것도 정부를 움직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들을 설득하고 대화를 해서 불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합의를 만들어서 그 합의에 기초해 북을 돕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해소와 관용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평화교육이 일상적으로 확대돼야 합니다. 가령 유네스코에서는 다양한 일상적 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는데요. 무기 장난감을 평화적인 장난감으로 바꾸어주기, 백령도·철원·강화도·판문점·매향리 같은 군사적인 피해지역을 돌아보는 평화기행을 통해서 평화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운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여성들이 중심이 된 평화운동 사례로,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이 주도한 다양한 형태의 시위, 인터넷을 이용한 ‘평화쪽지 날리기’, 미국 대사관 앞에서 벌인 여성들의 1인시위 … 이런 시위와 캠페인을 통해서 평화운동을 확산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매스컴들이 여성들에게 아주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널리 알려지지 못한 점이 있고요. 또다른 문제는, 비록 여성들이 앞장서서 평화운동을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은 이것이 대중운동으로 되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가령 지난번 국회 파병안처리 반대 때에도 여성들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지만, 언론의 주목을 끌 만큼 몇천명이 모이려면 역시 ‘민주노총’이 가세를 해야 되더군요. 여성들의 평화운동을 어떻게 대중화할 것인가가 중요한 고민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동시에 제기하는 문제는, 여성들이 실천하는 평화운동은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그린햄 핵미사일기지 반대운동 같은 경우에 여성들이 철조망에 기저귀를 걸고 시위를 한다든가 혹은 이번에 한국군 파병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할 때 저희가 폭격으로 부상당한 이라크 아이들의 사진을 목에 걸고 국회 앞에서 시위를 했는데요, 이런 방법들이 말하자면 여성들이 호소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자칫 이런 방법이 여성의 모성성, 여성성만 강조하는 거 아니냐, 여성성의 이미지를 고착시킬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비판인데요. 하지만 저희는 평화운동의 초기단계에서는, 평화운동의 메시지가 사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나도록 하려면 이런 대중화된 방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편 저희는 우리의 집회문화가 가끔 폭력적으로 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경찰이 폭력적으로 시위를 막은 것에 대해 경찰청장에게 제가 항의했더니, 그는 시위대가 폭력적이라고 저한테 하소연을 했습니다. 제가 하도 답답해서 그러면 나중에 현장사진을 놓고 다시 얘기하자, 그러고 왔는데요. 특히 시위대들이 전경들에게 행하는 언어폭력,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인 폭력에 대해서 저희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여성들이 접근하는 평화운동은 방법이 좀 달라야 된다 하는 것만 여기서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쟁점과 대안
왜 여성이 더 평화에 대해 친화력이 강한가. 최근 어느 연구결과를 보겠습니다. 노르웨이의 국회의원을 조사를 해보니 여성의원이 남성의원에 비해 다른 정당과 더 잘 협력하고, 사회복지나 보건, 교육, 환경, 국제협력과 같은 의제를 훨씬더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 스웨덴의 연구에서도 여성의원들이 해외원조나 난민수용, 국방비 감축에 훨씬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전쟁참여에 대해서는 훨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여성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가 아니냐 하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특히 여성은 친밀성에 기초해서 돌봄이나 보살핌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이 평화운동에 훨씬 적합하다, 이런 얘기도 하는데,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의견이 있습니다.
이게 잘못하면 여성은 평화, 남성은 전쟁광, 이런 도식적인 분류로 나갈 수도 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잘못해서 본질주의로 흐르면 곤란하다는 건데요. 중요한 것은 남성보다도 여성들이 더 많이 아이를 기르고 돌보고 하는, 생활상이나 노동환경에서 훨씬 생명을 돌보고 배려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여성이 더 평화운동에 친화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또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사회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남성에 비해 권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남성보다는 훨씬 권력에 덜 민감합니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남성이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사회화 과정에서 충분히 개발하지 못한 것이다, 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여성이 지닌 평화지향적인 태도에 못지않게 평화운동에서 주목할 점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기왕의 전쟁이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정당한 전쟁’을 주장하는 이론에서는 전쟁은 정당한 동기, 정의로운 권력, 정의로운 목적, 목표와 수단 사이의 균형과 함께 상대적으로 정의로워야 하고, 최후의 수단일 경우에만 시도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럴지라도 여기에서는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러딕과 같은 페미니스트 학자는 전쟁이론을 내세우는 남성들의 국제관계에 대한 현실주의적 고려는 인간은 지배욕을 지녔고, 절대절명의 과제로 간주되는 자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지극히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이해함으로써 인간본성에 대한 비관주의를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남성이론가들에 의해 제공된 이런 이론들은 인간본성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관점을 지녔고, 이는 전쟁에 대한 대안적 사고를 어렵게 만듭니다.
부시가 주장하는 ‘정의로운 전쟁’의 논리를 보면, 이러한 전쟁론은 철저하게 추상성과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 무기가 있기 때문에 전쟁을 해야 된다, 그렇게 주장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들이 가장 정확하고 엄격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오직 추상성에 기초해서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기술 전략적인 고려라는 게 극도로 추상적인 것인데, 이 전쟁이론에서는 ― 러미스 선생님도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 개인보다는 국가를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고, 국가를 위해서는 개인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이 겪는 구체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완전한 불감증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개인은 국가의 목적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전쟁’ 이론은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어거스틴, 니버, 월쩌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 이론은 이라크 공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혀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항상 악용됩니다.
그리고 전쟁과 평화는 이분법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상황이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 매일매일 사는 것 자체가 전쟁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정당한 전쟁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이분법도 또한 우리가 극복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충분히 다룰 수는 없습니다만, 아까 김종철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극적인 평화’의 개념이 중요합니다. 갈퉁 같은 사람이 제기하고 있는 이 ‘적극적인 평화’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화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전쟁은 없지만 구조적인 폭력, 잠재적인 폭력이 있는 사회에서 그것은 평화롭다고 할 수 없다는 적극적인 인식이지요.
우리 산하 단체에 장애인 여성들의 모임이 있는데요. 우리사회에서 장애 여성들은 사무실도 하나 제대로 못 구합니다. 돈을 두배로 주겠다 해도 안 빌려준다는 거예요. 저희를 찾아와 하소연을 하길래, 여성노동자 협의회가 마침 건물을 하나 얻었길래 거기에 같이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상황은요, 바로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엄청난 폭력이고 ‘총성 없는 전쟁’을 날마다 치르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차별, 구조적이고 잠재적인 폭력을 지양하는 적극적인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평화포럼 <미국과 세계평화>
영남대인문과학연구소, 2003년 5월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