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미국과 세계평화
편집자의 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감행되었다. 그 결과 무고한 이라크 민중이 겪었고, 또 앞으로도 겪을 끔찍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온 세계는 이러한 만행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미국의 행동 앞에서 전율하고 있다. 세계 역사상 그 어떤 제국의 지배자도, 지금 부시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실제로 독점적으로 소유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막강한 권력이, 그동안 문명사회가 힘들게 이루어놓은, 유엔을 위시한 평화를 위한 장치와 법과 제도와 상식을 간단히 무시하고, 일방주의적 패권을 추구하려 할 때, 세계의 도덕적 . 윤리적 질서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이라크 사태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의 행태(行態)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는 것은,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다, 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라크 침공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과 같은 “힘이 곧 정의”라는 식의 야만주의가 궁극적으로 인간 삶의 도덕적 . 윤리적 토대를 뿌리로부터 파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속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근원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대의 가장 비인간적인 측면은 이러한 침략전쟁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어가거나 다친 사람들의 경우를 ‘부수적인 손상(collateral damage)’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경제적 동기, 어떤 정치적 욕망, 어떤 탐욕과 어리석음이 전쟁의 근원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이유 없이 훼손시켜놓고 잔인하게도 이러한 ‘기술적’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비인간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용어가 이른바 선진사회의 엘리트라고 하는 교육받은 지식인, 전문가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과 교육과 문화와 과학과 예술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묻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에 의한 이라크 침략전쟁이 뜻하는 것은 폭탄투하와 그에 따른 생명파괴, 주권침해와 점령통치, 석유약탈과 유색인종 차별 등등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고삐풀린 광기와 탐욕이 일방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야만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을 인류사회의 양심이 허락하느냐 않느냐, 하는 좀더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부시 대통령은 지구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세계적인 노력의 결과인 교토의정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미합중국 대통령의 직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9월 11일 테러가 있었던 그해 말 어느 인터뷰에서 “금년은 어떻든 나와 내 아내에게는 환상적인 해였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2001년 가을 수천명의 희생자를 낸 그 끔찍한 테러가, 자신에게는 도리어 축복이었다고 별로 숨기지도 않고 말하였다.
그러나, 물론 오늘의 이 비극적인 상황이 부시 개인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좀더 본질적인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 미국의 문화와 역사, 미국식 민주주의의 진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세계화를 주도하면서 세계 각처의 지역문화와 지역경제를 끝없이 파괴하고 있는 미국 중심의 경제논리일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못한다.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불리운다”는〈뉴욕타임스〉논설필자 토머스 프리드먼의 ‘솔직한’ 발언은 이번 전쟁을 통해서 다시 한번 그 진실이 입증되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제국주의적 ‘세계화’ 경제가 활개를 치는 한 세계 어디에서든 민중의 삶의 평화가 지켜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지난 5월 9일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주최로 열린 평화포럼〈미국과 세계평화〉는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기 위하여, 그동안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천착해온 양심적인 지식인들을 초대하여 그 발언을 들어보는 자리였다. 본지 발행인 김종철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발표자들의 발언과 종합토론의 녹취문을 이 지면에 게재하기로 한 것은, 물론 평화의 의미를 좀더 근원적으로 또 포괄적으로 탐구하는 데 이 기록이 미진하기도 하고, 균형이 결여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읽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성적인 발언에 속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