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이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나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이나 똑같이 맹신하고 있는 믿음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경제성장에 대한 믿음’이다. 경제는 성장해야 한다는 맹목의 믿음체계는 언제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 누구도 진지하게 질문한 적이 없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자명한 상식’처럼 세상에 팽배해 있는 이 믿음의 뿌리나 바탕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았고,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질문 또한 없었다. 끝없는 성장신화에 의해 세계가 운영된다고 강요하고 있는 이 이데올로기는 매우 두텁고 유혹적인 ‘상식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가면을 조금만 들춰보면 얼마나 허약한 논리와 자가당착, 그리고 탐욕스러운 무지와 공포에 바탕하고 있는 반생명적 이데올로기인지 이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상식의 얼굴을 한 경제성장론은 의심과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성역처럼 우리의 사고방식과 일상생활 전체를 뒤덮고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의 세계관은, 인간이 생명권의 아주 연약한 한 고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외면과 정작 경제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지구자원의 유한성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무지에 바탕하고 있다.
그래서 더글러스 러미스는《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추구되어서도 안되는 ‘경제성장’이라는 ‘그릇된 상식’에 대한 진지한 전복을 꿈꾼다. 정치학자이며 평화운동가인 저자가 진지하지만 단순 명쾌한 문체로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는 이 책의 본래 제목을 “21세기의 커먼센스를 위해서”로 붙이려고 한 까닭도 거기 있었다.
하지만 저자의 소망은, 세계를 경제가치로만 파악하고 자연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전제로 한 끝없는 경제성장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릇된 상식의 숭배자들에게 너무나 간단하게 묵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새로운 상식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일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이 상식으로 자리잡았던 과정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그릇된 상식을 만연시키고 있는 세력들의 실체가 노출되면서, 진정한 행복과 인간다운 삶이 끝없는 경제성장과는 무관하다는 새로운 인식의 싹이 반전(反戰)의 목소리로까지 번지는 희망의 기미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성에 존재하는 어떤 사회보다도 우리사회는 경제성장에 대한 의심할 나위 없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우리네 살림살이 전반이 작동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질문하고 있으며 소망하고 있는 ‘새로운 상식’이 우리사회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도 따로 없을 것이다. 일찍부터 세계화의 허구에 대해 깊이 고민해온 한 사회과학자와 환경운동 현장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가를 모시고, 이 책을 통해 우리사회가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상식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본다. [객원편집자 최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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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전쟁 없이 존속할 수 있는가
최성각 제 경우에는 늘 품어왔던 의문이 책의 제목이라 반가웠습니다. 선생님들도 그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전쟁과 평화’, ‘국가의 권리와 국가폭력의 속성’, 그리고 ‘일본의 교전권’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성장과 풍요로운 삶에 대한 질문’, ‘군대 없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담고 있습니다. 질문들이 매우 예리하고 근원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습니다만. 정치학자이며 평화운동가인 저자는 “경제성장은 당연히 추구해야 할 일이다”라는 상식이 안고 있는 허구에 대해 명쾌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 또한 이런 믿음의 뿌리가 대단히 깊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씌어졌다”면서, 모두 아홉 부류의 독자군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요. 강 선생님은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되는 독자이십니까?
강수돌 저는 우선 과로에 지쳐 있는 (교육)노동자 중의 한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첫번째에 해당되는군요. 제 주위의 밭이 공장화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반쯤) 농민이기도 하고요. 경제라는 요소가 저의 교육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학도이자 선생이고 …, 그러고보니 대부분 해당됩니다. 전쟁의 직접체험 부분은 해당이 안된다 할 수 있겠지만 아프간이나 걸프전, 또 최근의 이라크 사태 등 우리 세대에 직접 일어난 사건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저는 자본주의가 전쟁 없이 존속이 가능할까 하고 생각하는데, 평화로운 시기에는 광고와 유행으로 자본의 이윤증식을 계속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한계에 이르면, 즉 소련과 동유럽 시장이 다 채워졌다고 할 때, 화성이나 달에서 새로운 소비자가 더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지구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면, 대대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방법, 다시 말해 새로운 돈벌이 공간을 창출하는 방법은 ‘합법적으로’ 전쟁밖에 없지 않나 하는 것이지요. 그 전쟁을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려면 온갖 구실을 다 갖다 붙이겠지요. 대개 우리가 전쟁을 나라와 나라 사이의 충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석유처럼 특정 자원에 대한 독점적 욕망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의 자기재생산이란 관점에서 전쟁 과정을 통해 합법적인 파괴를 해야만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은 직접적으로는 군수산업을 살린다는 연관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자본주의 스스로가 일반 소비재나 자동차, 중장비 등 쏟아져나오는 제품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분명히 시장에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지요. 자본주의가 ‘필요의 경제’가 아니라 ‘남김의 경제’인 이상, 과연 ‘지속가능한’ 이윤축적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지요.
최성각 김 선생님은 이 책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타균 저는 시민운동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운동의 현장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민해왔던가 하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만금을 지키기 위해서, 북한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밖에도 다양한 운동의 현장에서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는데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왜 이런 운동을 하고 있는가, 맹목적으로 가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평범한 시민들이 경제성장을 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과거로 돌아가면 퇴보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저 또한 운동부문에서 마찬가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즉, 한 단체의 활동가가 몇명이 되어야 적정한가, 회원은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나왔을 때, 이 책은 꼭 경제부문만 아니라 운동단체에게도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동단체도 ‘발전’이라는 이름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활동성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또다른 사업을 끊임없이 벌여야 하는 딜레마가 있거든요. 스스로는 대안경제, 대안사회를 모색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런 움직임하고는 반대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른바, ‘잘 나가는’ 단체들일수록 이런 점에 대해 생각할 게 많다고 봅니다.
강수돌 일반적인 현실주의에 들어있는 논리 중의 하나가 “더 멀리, 더 빨리, 더 높이” 이런 올림픽 구호이지요. 이런 기득권층의 논리가 모든 경제성장이나 경제발전 전략에 들어있는데, 그러한 ‘위로부터의’ 패러다임이 심지어는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사회운동 세력 안에조차 상당한 정도로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지요. 지금 말씀하신 대로, 무한한 확장의 욕구, 그리고 더 빨리 뭔가를 달성하려는 조급증, 부분적으로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싸움들, 또는 풀뿌리 갖고 안되니까 보다 높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라는 방식 속에 지배적 시스템의 논리가 운동 주체 안으로도 깊이 내면화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최성각 저자는 경제성장론을 맹신하는 사람들을 ‘타이타닉 현실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경제성장 만능론의 세계화가 진행중이며, 특히 길고도 긴 압축개발 시절을 아무런 질문 없이 받아들인 우리 현실에서는 경제성장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현실주의’가 그 어느 사회 못지않게 팽배해 있습니다. 하지만,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이런 현실주의는 문제가 있다고 한 저자나 그 생각에 동의하는 소수들을 ‘타이타닉 현실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 유토피아주의자, 근원적 비관주의자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르겠지요. 하지만, 주류 상식과 달리 회복해야 할 ‘진정한 상식’은 무엇인가, 이 책이 끈질기게 질문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경제발전론에 의한 사고장해와 자아분열
강수돌 ‘선성장 후분배’처럼 성장 이데올로기야말로 우리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지요. 그것을 저자는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장과 분배’를 함께 한다고 해도 사태는 대개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셨지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운동세력조차 많은 경우 ‘사고장해’에 빠져 있다는 것이지요.
최성각 오늘 아침〈한겨레〉신문을 보니까, “개혁이 미흡할 경우 4.5% 성장”이라는 기사가 보이더군요. 노무현 당선자는 선거때 경제성장률 7% 이야기하다가 당선된 뒤에는 낮췄지요. 사람들은 국가목표인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 큰일날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리고요. 그뿐 아니라 SK그룹의 재산은닉 기사가 나오고, 또 2·15 국제 반전시위로 ‘주가가 올라’ 흥분한 사람들 기사도 보입니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거리에 나가 전쟁은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따로 있고, 그들이 준 영향으로 따뜻한 곳에서 주가가 올라 희색이 만면한 사람 따로 있는 우리 현실이 떠오릅니다. 다른 면에는 “동북아 미개발지역 돈되는 사업 많다”라는 좌담 제목이 나와있군요. 우리가 비교적 신뢰해온 신문조차 이런 기사제목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뽑고 있습니다.
어제 텔레비전에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경우 외국인투자가 집중될 것이라며 흥분해 있는 쿠웨이트 국경지역 상인과 기업가들의 기대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어떤 매체를 보아도 경제성장이 당연시되는 기사들을 생활처럼 만날 수 있지요.
강수돌 반전시위와 주가 이야기를 말씀하시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떤 기업에서 구조조정을 대대적으로 한다, 그래서 대량해고 계획이 나오면 바로 그 다음날 그 회사 주가가 올라가거든요. 한쪽에서는 해고의 날벼락이 떨어졌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주가가 오른다고 환호성을 지르거든요. 그걸 조금 드라마틱한 관점으로 보면, 내가 우리 회사 주식을 갖고 있는 경우,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당장 잘린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왼쪽 얼굴로는 우는데, 그 오른쪽 얼굴은 주가가 오른다고 웃어야 하는 ‘자아분열’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걸 확장해서 보면, 한쪽의 실업과 다른 쪽의 주가상승은 한마디로, ‘사회의 자아분열’이지요. 물론 이 과정은 한 임금노동자가 더이상 잃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자기 삶의 토대가 망가지는 한편 주가는 오른다고 환호하는, 사회의 자아분열 모습이 떠오릅니다.
최성각 국가성립과 국가폭력의 본질로서 이 책의 저자는 경찰권, 처벌권, 교전권을 들고 있습니다. “교전권은 군대의 인권이다”라는 말로 국가폭력을 함축하고 있는데, 국가폭력이 언제나 타국민보다 자국민을 더 죽였다는 사실, 이것도 보통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는 내용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살인을 하면 사법제도를 통해 처벌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면 “살인하고 있다”는 감정을 갖지 않는데, 이런 국가이데올로기도 사람들이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의심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국가폭력에 대해서도 이데올로기의 꺼풀을 벗기고 보면 다른 측면이 있듯이, 경제성장론 또한 마치 지상의 목숨 가진 사람 모두의 당연한 요구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경제성장론이 이렇게 우리네 삶에서 맹위를 떨친 건 아니었다고 봅니다. 우리사회만 해도 1950년대 혹은 조선말 때 사회목표가 곧 경제성장은 아니었지요. 아무래도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박정희 시절’에 부상되고 강화되었다고 봐야겠지요?
(이하 생략)
2003년 2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