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편지를 쓰자고 작심하고 앉았지만,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요. 꽤 오래 전부터 선생님과 새만금 갯벌의 운명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기는 했습니다.
지난 2월 7일, 강원도 원주에서는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대화마당”이 열렸고, 그 자리엔 선생님도 오셨습니다.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새 정부가 들어선다니 새만금 갯벌에도 새 희망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그날의 토론은 무척 열띤 것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가슴 느꺼워지는 말씀을 하시던 것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원주를 다녀오고 나서, 저는 혼자서나마 이런저런 생각을 계속 해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계화도의 몇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우리의 기대와 달리 공사가 강행돼 1-2년 안에 마지막 물막이 공사까지 단행된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이냐 하는, 새만금 갯벌에 닥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마음다짐의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러던 중에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중앙로 역에서 화재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제 속에선 갯벌 생각이 어디론가 쑥 들어가버렸습니다. 2월 18일은 지율스님이 경부고속철도의 천성산·금정산 관통을 반대하는 단식기도를 한 지 14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지만, 저는 그만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산과 갯벌의 생명파괴와 대구 지하철의 생명파괴를 단순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사람 생명도 저리 무차별적인 죽임을 당하는데 산과 갯벌의 생명을 죽이면 안된다는 우리의 가난한 주장이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들리기나 할까 싶어졌습니다.
언제나 난데없는 사고
이번의 대구 지하철 화재와 같은 대형재난이 발생해버리면, 하루하루 노동과 실천으로 애써 견지하려 한 그 어떤 성실한 생사관도 일순 흔들리기 마련일 겁니다. 현대 거대도시에서 안전사고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고 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사람 생명이라는 것은 그 어떤 평상의 느긋함이나 안정감에 대한 자기최면이 있어야 하루라도 균형잡힌 일상감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이잖아요. 하여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라 해도 언제나 난데없는 충격의 사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자의 사연이 하나같이 안타까웠지만, 저는 한 젊은 어머니가 “어머님, 부디 아이들을 잘 거둬주세요. 저는 죽습니다 …”라고 울면서 전화했다는 이야기가 제일 가슴 아팠습니다.
채널마다 속보 경쟁을 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물론 제가 비통한 기분에만 빠졌던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거대도시의 어느 한 구석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현실이었는데도, ‘안전불감증’ ‘고쳐야 할 직무의식’ 운운하며 편의적인 희생양을 찾는 데만 골몰하는 이놈의 텔레비전부터가 몹시 불쾌했습니다. 특히 참사 특집보도를 하며 코미디나 시트콤 같은 정규프로는 방영을 연기하면서도, 적재적소에 빠짐없이 내보내는 상업광고, 그러니까 유가족의 오열하는 모습 뒤로 바로 덮치는, “용녀, 감자는 왜 썰고 있나?” 하는 엽기적인 햄버거 광고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놈들은,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매머드급 뉴스거리가 터져 신이 난 것 아닌가, 그런 사고가 시시때때로 터져주어야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자신한테 쏠릴 테고, 때문에 갑작스레 더욱 상승되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만끽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대중과 접촉면이 가장 넓은 텔레비전은, 문제의 본질보다는 ‘뉴스감이냐 아니냐’에 목을 매고 있을 뿐입니다. 교통사고 사망자만 해도 해마다 팔천여명, 오늘 하루에도 30-40명이 죽는다는 것인데, 엿새만 지나면 지하철 사망자 수를 넘는데, 전국 각지에서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일어나는 억울하고 난데없는 죽음, 그런 나날의 반복적인 참사의 사연은 왜 지금껏 묵살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려나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뜯어고쳐야 한다는 그 어떤 옳은 주장도, 그 과정 자체에서 경제적인 이득이 발생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선명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금과 같은 형편에서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직장에 다니며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지 새삼 알 수가 없어집니다. 그런 우리 모두의 무능력 속에서, 늙는다는 것, 자연스레 병이 드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하여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죄없는 아이들이 그날의 지하철 속에서 스러져갔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각지의 도로에서, 물욕에 눈이 어두운 어른들이 만든 온갖 현대정글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엄연한 현실을, 필연적으로, 지속적으로,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숱한 ‘개죽음’을 놔두고 누군들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말을 감히 입에 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생님, 온갖 애통한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도 시간은 거짓없이 흘러갑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시간을 멈출 수 없습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의 충격과 많은 사람들의 통탄도, 치유하기 힘든 슬픔에 빠진 유가족에게 돈봉투를 떠밀어주고 새로 추가된 약간의 지하철 운행 안전조치와 노동조건의 개선 정도를 남긴 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무디어질 겁니다. 저 역시 비명의 죽음들을 잊고 살게 되겠지요. 그런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노래처럼,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넘고 넘어 끈질기게 살아남은 우리들의 바쁜 인생은 마침내 어디에 당도하는 것일까요. 이번 참사가 아니라 해도 우리네 도시생활은 아침부터 밤까지 죄 아닌 것이 없었으니, 어쩌면 오래오래 살아, 죽는 날까지 덕지덕지 죄업을 쌓는 것보다 비명에 가는 것이 차라리 신 앞에서는 떳떳한 일은 아닌지, 자꾸만 두려워집니다.
착란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
선생님, 새만금 갯벌이 파괴되고 산이 파헤쳐지고 민초들이 오랜 삶터에서 쫓겨나고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세상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해의 미친 몸부림임을 압니다. 그런 걸 지켜보아야 하는 우리의 영혼도 조금씩조금씩 미쳐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은 멈춰지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으니, 이 뜻모를 시간이 누구의 편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에도, 세상에도 항거하지 못하는 미약한 저는 자학의 감정에만 파묻히는 걸까요. 인간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허무감이,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절망감이 자꾸 저를 유혹합니다. 신도 더는 어쩔 수가 없어 ‘재앙의 버튼’을 눌러버린 것 아닐까, 이제 하나하나 준비돼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지하철 사고 후의 온갖 뒤틀린 시간의 흐름도 그 반증이 아닐까, 하는 ….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런 착란적인 의심에 휩싸였습니다. 신경정신과에선 ‘재앙화 사고’의 전형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방 안에서 요란스레 빛을 뿌리는 텔레비전이라는 것의 존재가, 그 속의 화면이 믿기지 않습니다. 왜 하필 이런 도착적인 시대에 우리는 태어났고 오늘도 이리 살아있는 것일까, 이 따뜻한 방 안에 앉아서도 왜 그 끔찍한 참사 현장을 너무도 쉽게 채널을 돌려가며 훤히 다 볼 수 있게 된 것일까. 어쩌자고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승객들의 모습이 첨단 휴대폰의 사진에 찍혀 우리의 마음을 전율시키는 것인지, 스러져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유언들이, 그 떨리는 목소리들이 생생한 녹음으로 남아 우리의 고막을 때릴 수 있는 것인지, 정말 이 모든 것이, 대재앙을 이미 마련해놓고 아직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그 심리적인 준비를 하게 하려는 신의 마지막 냉엄한 배려인 것은 아닐까 …, 기상이변에 의한 대기근이든, 핵발전소의 폭발이든, 대규모의 전쟁이든, 두눈 뻔히 뜨고 가족과 친지의 죽음을 오랜 시간 지켜보아야 할 우리는, 지하철 사고에서와 같은 짧은 시간의 질식사가 부러울 날도 오는 것이 아닐까 ….
아무래도 저의 과도한 두려움일 뿐이겠지요. 아직은, 나뭇가지에서 잎사귀 하나가 떨어지는 데도 온 우주가 용을 쓴다, 라는 말을 믿고 싶습니다. 수백 아니 수천수만명이 죽든, 아니 단 한사람이 죽든, 그 모든 죽음에는 무한한 필연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작용했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 이 세상이 이런 꼴일 수밖에 없는,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모든 역사적 필연을 그때그때마다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그때그때마다 새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건재한 남은 모든 것에 비통한 마음으로 감사해 하면서 ….
그런 식으로, 보다 긴 호흡으로 다른 문제도 봐야겠지요. 새만금 갯벌의 운명 또한 그렇습니다. 저번 원주 토론회의 뒷풀이에서 누군가 얘기하는 것을 잠깐 들었는데,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 20년 전에 간척이 끝난 갯벌을 이제라도 다시 살리려고 방조제를 폭파시켜 바닷물을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네들은 앞으로 80년 후면 예전의 갯벌로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기꺼이 그 80년 세월을 기다리겠다고 한답니다. 새만금 갯벌도, 1-2년 뒤 마지막 물막이 공사까지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하더라도, 그리고 갯벌이 무참하게 망가지더라도, 그게 영원한 죽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그후 20년이 지나서라도 다시 방조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우리 또한 80년, 아니 100년을 내다보며 그야말로 새만금 갯벌의 ‘부활’을 느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막아보되, 그럼에도 우리의 힘과 지혜가 당장은 미약하여 어쩔 수가 없다면, 그러나 우리 진실한 마음만은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면, ‘부활’의 때가 오기를 인간의 자리에 서서 차분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번 지하철 참사에서 숨져간 이들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할 겁니다. 유가족들한테는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할 말이겠지만, 어쨌든 그네들의 죽음이 고귀한 희생이 될 수 있도록 남은 우리들이 더 열심히 기도하고 또 저마다의 자리에서 실천하며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과 같은 재난은, 지하 땅까지 뚫어 교통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대도시의 존재, 그런 삶의 양식을 필연적으로 양산해낼 수밖에 없는 체제가 근인이니, 그전부터 해오고 있었던 곳곳의 대안적 실천을 보다 더 열심히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무한한 시간의 은혜를 믿고, 그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잊혀지는 아픔은 잊어버리며, 그럼에도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진실이 있다면 죽는 날까지 지켜가며 우리 몸과 마음 속에 깃든 사람의 본성에 맞게 하루하루 살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마음먹는다 해도, 그래도 저는 아직 살아서 선생님께 이렇게 편지도 쓸 수 있는, 내 작은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따뜻한 생명의 활동이 고맙고도, 자꾸만 켕깁니다. 제 내면 속에서는 사랑의 속삭임이 들려오고, 제 몸 밖의 많은 것들을 더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아픔의 목록도 늘어가는 것이니, 불어오는 한결 따스해진 바람결이 문득문득 두려워집니다. 이 사랑과 두려움의 의미도 지금 당장 알려 하지 말아야겠지요? 다시 한번 시간의 은혜를 믿고 느긋이 기다려봐야겠지요?
건강하십시오. 선생님이 원주에서 “기도와 폭파”에 대해 너무 열렬히 말씀하실 때, 그 내용보다도 “어이쿠, 저렇게 흥분하시면 안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언제 한번 찾아가 뵙겠습니다. 술 한잔 사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