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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NAM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배부해 드린 것처럼,〈NAM의 원리〉는 아주 간단한 것인데, 5개의 프로그램과 5개의 조직원칙이 있을 뿐입니다.(본고의 끝 부분 참조) 그것에 관한 자세한 해설은 NAM 웹사이트(www.nam21.org)에서, 한국어 번역으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제 자신이 한국의 신문 및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교수신문〉2002년 5월 6일, 특집 석학 인터뷰 “세계 지성과 만나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나중에 그것을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오늘은 가장 중요한 사항만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배포된〈NAM의 원리〉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입니다.
(2) NAM은 자본에 대항하는 운동을 조직한다. 그것은 자본에 대항하는 장(場)을 유통(소비)과정에 둔다. 즉,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운동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콧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제 경제 속에서의 내재적 투쟁과, 비자본제적 생산과 소비의 형태 ― 시민통화와 생산-소비협동조합 ― 를 만들어내는 초출적(超出的)인 투쟁을 통합한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의 상식과는 반대입니다. 맑스주의자는, 아나키스트들(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도 포함하여)도 똑같습니다만, 혁명은 생산점에서의 노동자의 파업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으로는 자본제 경제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노동운동이 형해화(形骸化)함에 따라, 소비자운동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경보호, 페미니즘, 마이너리티 운동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시민운동’의 모습을 취하며, 노동운동과의 연결을 갖지 않거나, 노동운동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본에 대항하는 장을 유통에서 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생산점에서의 노동자의 운동은 약하고, 시민운동 쪽은 활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본제 경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본제 경제에서 계급관계(자본가와 임금노동자)는 영주와 농노 관계의 변형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경제 외적 강제에 의해서 수탈을 하던 영주가 이제는 농업자본가가 되어 합의 아래 농민을 착취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봉건제에서는 명료한 잉여노동의 착취가 자본제 경제에서는 은폐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의해서 노동자가 자본가를 타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산업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는 통용될 수가 없습니다.
실제,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전혀 일어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 혁명을 적대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경우, 생산과정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동자의 의식은 상품경제에 의해서 ‘물상화’되어 있다고. 때문에 그러한 물상화로부터 노동자를 각성시키는 일이 지식인=전위의 임무가 됩니다. 이 물상화는 소비사회의 유혹이나 문화적 헤게모니에 의한 조작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때문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맑스주의자의 임무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는 일어서지 않습니다. 물론, 임금인상을 위해서 또는 해고에 대항하여 노동자가 일어서는 일은 있습니다만, 그것은 단지 경제적 투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보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자본과 임금노동과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자본은 M-C-M(화폐-상품-화폐)이라는 운동으로서만 존재합니다. 즉, 자본은 끊임없이 ‘변태’하는 일에 의해서만 자기 증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M-C-M 운동에서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잉여가치는 결코 노동자를 생산의 현장에서 착취하는 것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습니다. 이른바 노동자가 생산한 것을, 노동자 자신이 사게 함으로써, 잉여가치가 얻어지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생산점에서는 자본에 대항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노동자는 자본과 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합법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저항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자본은 노동자에 대해서 우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M-C-M 운동에서, 자본은 한번은 파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노동자가 능동적인 주체로서 등장할 수 있는 장(포지션)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제 생산에 의한 생산물이 팔리는 장, 즉 ‘소비’의 장입니다.
맑스는 말합니다. “자본을 지배(예속) 관계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가 소비자 및 교환가치 조정자로서 자본에 상대하여 서는 것이며, 화폐 소지자의 형태, 화폐의 형태로서 유통의 단순한 기점 ― 유통의 무한히 많은 기점의 하나 ― 이 되는 것으로서, 거기에서는 노동자의 노동자로서의 규정성이 소거되는 것이다.”(《경제학 초고》제2권)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소비는 잉여가치가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장이며, 소비자(노동자)의 의지에 종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장인 것입니다.
사는 일과 파는 일, 혹은 생산과 소비는 화폐경제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분리가 노동자와 소비자를 떼어놓고, 마치 기업과 소비자가 경제 주체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실은 입장이 바뀐 노동자들의 운동인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반면에, 노동운동은 소비자운동인 한에서, 그 국지적인 한계를 넘어서 보편적이 될 수 있습니다. 노동력의 재생산으로서의 소비과정은 육아, 교육, 오락, 지역활동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영역에 관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에 대항하는 장을 생산에서 유통으로, 바꾸어 말하면, 생산자로서의 노동자에서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되풀이하자면, M-C-M이라는 자본의 운동에는, 자본이 만나게 되는 두개의 위기적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력 상품을 사는 일과, 노동자에게 생산물을 파는 일입니다. 만약 이중 어느 것에서 실패한다면,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바꾸어 말해, 자본일 수가 없습니다. 노동자는 이 두개의 장에서, 자본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한 것처럼, “일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노동력을 팔지 말라(자본제 하에서 임금노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또하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듯이, “자본제 생산물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노동자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노동자=소비자에게 ‘일하지 않는 것’과 ‘사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와 동시에 일을 하거나 사는 것이 가능한 토대가 없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비자본제적인 생산과 소비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초출적인 투쟁(생산-소비협동조합이나 LETS)이, 자본제 경제 하에서의 내재적인 투쟁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보이콧을 중심으로 하는 내재적 투쟁)는, 자본제 기업을 비자본제적 기업 형태로 바꾸어가는 일을 촉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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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장을 유통과정으로 옮기는 경우, 중요해지는 것은 통화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생산-소비협동조합, 즉 어소시에이셔니스트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의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웬은 통화 대신에 노동증표를 만들고, 나아가 프루동은 인민은행을 구상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이 없이는 아무리 생산-소비협동조합이라고 해도, 국가적인 통화나 은행에 근거한 자본제 기업에 패배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프루동의 통화나 은행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통화를 따로 만든다는 생각은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어리석은 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케인즈주의적인 정책, 국가에 의한 재정적인 원조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통화를 가지고 은행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맑스가 오웬이나 프루동의 통화를 비판한 것은 틀림없지만, 결코 그러한 통화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배척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맑스는 왜 그러한 통화를 비판했을까요? 그것은 오웬이나 프루동이, 화폐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전경제학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고전파는 화폐를 단순한 가치표시 수단으로서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 스미스는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있다고 할 때, 교환가치를 ‘구매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각 상품은 이미 화폐인 것입니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노동가치)를 표시하면 화폐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리카르도파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이며, 거기로부터 오웬처럼 화폐 대신에 노동증표를 사용하자는 안도 나옵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얼마만큼 일하였는가로 임금을 정하는 것은, 노동의 종류나 질 등을 생각하면,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고전경제학에서 그러한 것이 문제시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말하는 노동시간은, 맑스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적인 노동시간’, 즉 이미 시장에서 화폐에 의한 교환을 통해 결정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10시간 일하여 만든 것이 다른 곳에서 한시간의 노동으로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는’ 한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가치설’이 사후적으로 타당하다고 하는 것과, 그것에 근거하여 통화를 발행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맑스가《자본론》에서 한 것은, 왜 화폐가 있으며, 그것에 의해 매매가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노동가치라는 생각에 의해서는 그것을 보여줄 수 없으며, 또한 화폐가 성립하여 유통하는 근거는 노동가치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맑스가 들고 나온 것이 이른바 ‘가치형태’입니다. 상품의 가치는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에 의해 표시됩니다. 그 경우, 모든 상품이 스스로의 가치를 특정의 상품(의 사용가치)에 의해서 표현할 때, 그 상품은 일반적 등가형태, 나아가 화폐형태라는 위치에 놓입니다. 그 결과 하나의 상품에 ‘직접적 교환 가능성’이 집중됩니다.
화폐를 가지고 다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힘은, 노동가치나 양에 관련시키지 않아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서, 맑스 자신이 노동가치설을 도입하여 혼란스런 기술을 하였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맑스라고 하면 노동가치설을 연상하는 어리석은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맑스가 처음으로 해낸 일은 노동가치설에 의하지 않고, 화폐만이 구매력을 가진다는 것, 교환이 화폐를 매개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 그와 같은 것들의 근거를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맑스는 이러한 화폐가 자본으로 바뀌어지는 것, 즉 시장에서의 단순한 교환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자본의 운동(화폐-상품-화폐)으로서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맑스는《자본론》에서, 화폐라고 하는 차원을 무시한 고전경제학을 비판하였습니다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주의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이 화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을까요? 그것에 관하여 그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맑스주의자는 일반적으로, 화폐와 시장을 폐지하고 노동가치를 계산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이후에 그와 같이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시장경제를 긍정하는, 그러나 그것이 가져오는 폐해는 국가가 제어하면 된다는 생각(사회민주주의)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맑스의《자본론》으로부터 그러한 초라한 아이디어밖에 읽어낼 수 없는 것일까요? 제 생각으로는,《자본론》에 보이는 맑스의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입니다. ― 화폐의 덕분으로 교환이 일반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화폐가 없으면 안된다. 그러나 화폐에 의한 교환은 자본의 활동(이윤추구)을 발생시키고, 착취나 불평등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화폐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 이율배반은 다른 말로 하면 “시장이 없으면 안된다” 그러나 “시장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것과 동일합니다. 화폐를 ‘양기(揚棄)’한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 두가지 요구를 충족시키는 화폐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맑스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우선 주목한 것은 마이클 린턴이 1982년 고안한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지역교환거래체계)입니다. 린턴은 오웬 등과 달리 노동가치설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노동가치설이란 것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암묵적으로 화폐와 시장을 전제로 하는데, 린턴은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시장을 배척하고, 화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공동체의 호혜적(互惠的) 경제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둘 사이의 교환을 다각화하고, 그리고 다각적인 결제 시스템을 고안해내었습니다. 그래서, LETS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장이며 화폐를 가집니다만, 다른 의미에서는 시장도 화폐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LETS가 통화로서 유통되는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통되는 것은, 작은 공동체 속에서일 뿐입니다. 마이클 린턴은 LETS를 불황 아래에 있는 지역경제를 지키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고안해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처럼 LETS를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에 대항하는 어소시에이션 운동의 기초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지향하는 것은 LETS를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에 대항하는 운동의 핵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LETS를 단순한 지역통화가 아닌 어떤 것으로 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생각한 것은 인터넷을 사용하여 그것을 글로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니시베 마코토(西部忠)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Q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완전히 실패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유통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유통되지 않은 것은 Q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Q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Q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살 수 있는 것도 많아지고, Q를 벌어들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린턴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규모에서는 LETS가 잘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공동체의 호혜제가 가진 강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 그것은 소규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소규모라도 좋겠습니다만, 그것은 전혀 경제적인 현실에 가까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LETS는 어디에서나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시장에서의 교환이 많으며, 공동체간의 친목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Q가 실패한 것은 작은 공동체에서만 적용되는 LETS의 원리를 글로벌한 수준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패하였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존재하는 신용은 글로벌하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규칙 일색, 금지 일색, 프라이버시의 금지 등등 옹색한 공동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자신은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만, 똑같은 이유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LETS의 원리는 본래 양자간의 호혜제를 다각적 결제에 의해서 시장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본은 호혜제이며, 노동가치와 같은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작은 공동체가 아니라 큰 규모로 넓히면, 호혜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됩니다. 암묵적으로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을 취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NAM 내 노동의 대가를 계산할 때에 드러납니다.) 결국 Q는 오웬이나 프루동이 구상한 노동화폐 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맑스가 비판한 것처럼, 암묵적으로 화폐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규제된 가치를 표시할 뿐이며, 그것 자체가 통화로서 유통될 힘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3
우리들은 실패했습니다. 어디에서나, 아마 한국에서도, 지역통화를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거기에서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LETS 속에서 지금까지의 노동화폐에 없었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특히, ‘통화의 발행권[主權]’이 개개인에게 있다고 하는 LETS의 생각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지역통화가 유통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LETS가 아니고 보통의 신용통화입니다. 그런 것이 생긴 것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통화가 몰락하였기 때문인데, 이러한 지역통화는 오히려 자유주의자 하이예크가 말하는 ‘은행권 발행 자유화론’에 준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들의 참고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LETS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또한 그것이 작은 공동체를 넘어서서 유통되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제로 우리들은 그 열쇠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라 마사토(原祐人) 씨가 고안한 시민통화 L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지역을 넘어서 유통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래서 지역통화가 아니고 ‘시민통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저는, 맑스는《자본론》에서 화폐라는 차원을 무시한 고전경제학을 비판하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읽어내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저 자신이《자본론》을 지금까지 그런 관점에서 읽어오지 않았습니다. 맑스는 오웬이나 프루동의 통화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이 통화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Q와 같은 자칭 통화가 왜 화폐로서 유통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맑스의 생각으로는, 화폐는 원래 상품이지만, 다른 모든 상품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표시하는 데 사용하는 유일한 상품으로서 화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화폐는 실제로는 금 화폐입니다. 이것만이 국제적인 결제에서 통용되는 세계 화폐입니다. 그래서 중상주의의 시대는 ‘중금주의’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고전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조소하였는데, 맑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실, 공황이 오면 사람들은 은행권이나 어음과 같은 신용화폐를 버리고, 갑자기 금 화폐를 쫓아다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엔과 같은 은행권은 종이조각인데 왜 통화로서 유통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국가에 의한 강제력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엔이 유통되고 있는 것은 국제적인 기축통화인 달러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고, 달러의 배후에는 금이 있는 것입니다. 달러의 금 태환이 정지된 지 30년이 지났으며, 이제 금 화폐 따위는 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972년 미국이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시킨 것은 자국의 준비금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금 방위가 다름아닌 달러 방위인 것입니다. 금과의 태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라들이 금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확실히 금 화폐의 물신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전경제학자들처럼 금 화폐가 불필요하다는 생각에서가 아닙니다. 맑스가 말하는 것은, 금이 화폐인 것은 그 자체에 무엇인가가 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일반적인 등가형태의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금이 화폐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 우연입니다만, 그러한 일반적 등가물이 생긴 것은 필연입니다.
금에는 아무런 비밀도 숨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잊어서 안 되는 것은, 금 자체가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화폐가 되는 상품은, 그 자체의 상품성(타인을 위한 사용가치)을 갖고 있지 않으면 화폐일 수가 없습니다. 즉, 다른 상품을 살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상품화폐의 예로서, 교도소에서 통화로서 사용되는 담배를 생각해도 좋겠습니다. 담배가 통화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주 손에 넣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사용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오로지 통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통화인 것은 어디까지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으로, 예를 들어 그것을 물에 담가버리면 더이상 그것은 통화로서 유통되지 못합니다.
금 화폐도 마찬가지로, 금이 마멸되면 평가도 내려갑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폐 또는 은행권은 금이 아닌데도 왜 유통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왜 구매력을 가지는 것일까요? 지폐 유통에 대해서, 맑스는 지폐를 ‘국가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유통과정에 투입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맑스가 보여준 견해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지폐가 유통되는 근거를 전혀 보여주지 않습니다. 국가에 의한 ‘강제통용력’ 때문에 지폐가 유통되는 것은 아닙니다.
맑스는 지폐가 유통되는 근거를《자본론》제3권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3권은 맑스가 남긴 노트를 엥겔스가 편집한 것이며,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맑스가 은행권을 상업신용, 즉 약속어음의 발전으로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폐는 단순히 금을 대신한 것이 아닙니다. 지폐는 상품화폐(금)의 뒷받침에 의해서 신용으로서 창조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폐라고 하더라도 국가 지폐와 은행권을 구별해야 합니다. 은행권은, 신용화폐로서, 상품신용(어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맑스는《자본론》의 앞 부분에서, 공황의 가능성을 상품이 화폐와 교환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비약’(C-M)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데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신용이 존재합니다. 신용이란, 근본적으로 C-M 교환을 관념적으로 선취하는 것, 즉 나중에 지급한다는 약속에 의해서, 일단은 상품이 팔린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교역의 속도가 가속되고, 화폐량 이상의 교환이 실현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현실상의 결제를 요구받습니다. 그때에 공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맑스는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공황의 가능성뿐이며, 현실의 공황은 신용시스템이 발전한 시장경제에서만 발현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용시스템에 관해서는《자본론》제3권을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은행권에 관해서, 아니 더 넓게 화폐에 대해서 고찰하기 위해서는《자본론》제1권만이 아니고, 제3권의 신용론을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맑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처음의 화폐론만을 보고, 그것이 상품화폐론이라며 비판합니다. 특히, 달러 태환 정지, 변동환율제 이후의 현실에서, 맑스의 생각은 금 본위제와 마찬가지로 낡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문제로서, 금의 중요성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금 화폐를 공고한 형이상학으로 간주하고 이와 싸우는 ‘현대 사상’이 있습니다. ― 지폐가 유통되는 것은, 금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국가에 의한 강제력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지폐가 유통되는 것은 왜냐? 이와이 카츠히토(岩井克人)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유통이 되기 때문에 유통된다고. 그것이 화폐인 것은 그것이 화폐이기 때문이라고.
상품화폐(금)를 부정하고 그리고 국가에 의한 강제력 등을 인정하지 않을 때, 통화가 유통되는 근거를 물으면, 이상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이와이 카츠히토의 배후에 있는 것은, 금과의 태환이 정지된 상태(변동환율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이의 논의는, 오리지널과 카피의 이항대립을 해체한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모던한 것을 넘어서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변동환율제가 금 화폐를 넘어서기는커녕, 암묵적으로는 금 준비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과 의미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은, 맑스의 신용화폐론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즉, 상징화폐(지폐 등)가 대출-상환이라는 상업신용의 관계로부터 온 것임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폐가 금(오리지널)의 대리(카피)라면, 누구나 바로 그것을 금과 바꾸어 버리겠지요. 그러나 은행권(banknote)은, 은행이 발행하는 약속어음(note)인 것입니다. 은행권이 유통되는 것은, 단순히 준비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상업신용으로서 통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시민통화 L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L은 얼핏보면 포인트카드 또는 마일리지카드와 비슷합니다. 통상, 포인트는 그 가게에서밖에 통용되지 않지만, 그 포인트를 다른 가게, 나아가 모든 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그러한 시도는 이미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두가지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대형상점이나 대기업의 독점적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그것이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통화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시민통화 L은 중소상점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하여, 대자본의 독점에 대항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욱이, 시민통화 L이 포인트카드 따위와 다른 것은, 각 기업이 L을 다른 기업과의 거래에서도 발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L은 신용통화인 것입니다. 시민통화는 포인트카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통상 포인트카드는 가격할인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L의 관점에서 보면 포인트카드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실은 손님이 가게에 포인트분만큼의 엔(돈)을 맡기고 포인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포인트란 가게가 발행하는 은행권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시민통화는 그러한 신용화폐입니다. 시민통화 L은 LETS와 마찬가지로 무이자입니다. 엔 대신에 L로 지불하는 것은 무이자로 엔을 빌리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L은 소비의 장으로부터 산업적 연관 속으로 깊이 침투하게 됩니다.
시민통화 L은 LETS와 마찬가지로, 중앙은행과 같은 것을 가지지 않습니다. LETS와 다른 것은, 여기서는 법인이 이 통화 L을 발행하는 권리(주권)를 갖는 것에 대하여, 개인(소비자)은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개인이 L에 참가하는 것은 포인트카드에 등록하는 것과 똑같이 용이합니다. 한편, 개인도 통화발행권을 가질 수 있는데, 그 경우 법인과 똑같이 취급됩니다.
L이 구매력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엔에 의해 지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엔이 구매력을 가지는 것은 달러에, 그리고 소급하면 금에 의해 지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L은 신용통화로서 처음부터 당연히 유통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한편, 지역통화는 유통되는 근거가 없습니다. 작은 공동체에서는 그것이 유통됩니다만, 그 밖에서는 유통되지 않습니다. 지역통화는 한때 유행이 되더라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윤리적인 동기나 친목적인 동기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는 자본제 경제의 압도적 힘에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에 반해서, 시민통화 L은 포인트카드와 똑같이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서 이득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 뿌리를 두고 유통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들은 물론 시민통화 L이 구매력을 가지는 것, 통화라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L은 포인트카드와 마찬가지이며, 자본주의적 경제의 일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화폐-자본을 양기하는 방향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L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러한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 상세한 사항을 여기서 말씀드릴 여유는 없습니다.
시민통화 L은 엔으로부터 떨어져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제 경제가 산출한 시스템을 역이용하는 것이며, 이른바 엔에 달라붙은 암(癌)과 같은 것입니다. 시민통화 L에 근거한 경제권을 증식시키는 일은, 그 자체가 암인 자본제 경제에 대한 ‘대항암 운동’입니다. 엔이 유통되는 한 L은 유통됩니다. 무리하게 L을 제거하면 엔 시장경제도 죽어버립니다. 대항암이라는 비유는, L에는 적용이 되지만 Q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Q는 단순한 장난감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유통과정으로 운동의 중점을 옮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의 하나로서 통화의 문제가 나왔습니다. 때문에, 시민통화에 의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생산-소비협동조합처럼 자본제 경제의 바깥으로 나오고자 하는 대항운동, 그리고 반전운동, 조합운동, 마이너리티 운동처럼 내재적인 대항운동이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통화는 이러한 운동에서 불가결한 커다란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이야기에서도 분명한 것처럼,〈NAM의 원리〉는 극히 간단하지만 이제 실행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바로,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 단, 그 속에서 새로운 발견이 나올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시민통화 L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NAM의 원리〉는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 NAM 운동은 일본의 상황에 규정되어 있는 면이 다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NAM의 현실에 대해서는 대단히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NAM적인 것과는 상당히 먼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NAM 조직이 금후에 해산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놀라거나 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그것은 NAM적인 운동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NAM의 원리
프로그램
(1) NAM은 윤리적-경제적 운동이다. 칸트를 흉내내어 말하면, 윤리 없는 경제는 맹목이고, 경제 없는 윤리는 공허하기 때문에.
(2) NAM은 자본에 대항하는 운동을 조직한다. 그것은 자본에 대항하는 장을 유통(소비)과정에 둔다. 즉,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운동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콧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제 경제 속에서의 내재적 투쟁과, 비자본제적 생산과 소비의 형태 ― 시민통화와 생산-소비협동조합 ― 를 만들어내는 초출적(超出的)인 투쟁을 통합한다.
(3) NAM은 ‘비폭력적’이다. 즉, 국가권력을 폭력적으로 탈취하는 혁명을 거부할 뿐 아니라, 의회를 통한 국가권력의 획득과 그 행사를 지향하지 않는다. NAM이 목표로 하는 것은 정치적 국가 그 자체의 폐기이다.
(4) NAM은 그 조직과 운동형태 자체에 있어서, 실현해야 하는 것(참여적 민주주의나 다양체적 어소시에이션)을 체현한다.
(5) NAM은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이며, 그것은 현실적인 제 전제로부터 태어난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정보 자본주의적 단계로의 이행이 가져오는 사회적 제모순을, 한편으로 그것이 가져온 사회적 제능력에 의해서 극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NAM은 역사적 경험의 음미 위에서 미지의 것에 대한 창조적 도전을 지향한다.
조직원칙
(1) NAM은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어소시에이션이다. 개개인은 NAM의 내부에서 일정한 룰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스스로의 주권을 보지(保持)한다. 개개인은 다른 조직이나 운동에 소속하여도 된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분산된 조직이나 운동을 매개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2) NAM이 기획하는, 혹은 회원이 비회원과 함께 형성하는 조직이나 운동은, 각각 자율적이며 NAM으로부터 구별된다. 그것들이 다른 조직이나 운동과 제휴하는 일은 있어도, NAM이 그렇게 하는 일은 없다.
(3) NAM은 다음 세가지의 영역으로 구성된다. 관심계, 지역계, 계층계. 그것들은 각각 복수의 부문을 유니트(단위)로서 가진다. 각 사람은 동시에 이들 세 영역에 속한다. 관심계의 경우, 각 사람은 복수의 단위에 소속해도 된다. 각 유니트는 각각 자율적인 어소시에이션이며, 대표 및 사무국을 가진다. 이들의 유니트에서 선발된 대표가 센터 평의회를 구성한다. 또한 거기에서 대표가 선출된다. 대표는 어느 레벨에서건, 호선과 제비뽑기에 의해서 선출된다. 규약개정 등의 중요한 의제에 관해서는, 전 회원에 의한 토의와 투표가 실시된다.
(4) NAM은 부르조아 국가에 있어서 유명무실한 ‘삼권분립’을 참으로 실현한다. 상기의 의사결정기구 외에 집행기관으로서 센터 사무국이나 각종 위원회가 있으며, 감사기관으로서 감사위원회가 있다. 집행기관은 각각 센터 평의회에 의해 임명되며, 감사위원회는 직접 전 회원으로부터 제비뽑기로 선출된다.
(5) NAM은 윤리적-경제적 어소시에이션이다. 강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일방적인 봉사나 자기희생도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속에서의 노동은 자발적이지만, 시민통화에 의해서 지불된다. 또한 외부로부터의 기부에 대해서도 시민통화로써 반환된다. (이광오 옮김)
이 원고는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주최로 필자가 2002년 11월 12일에 행한 강연원고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