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는 오늘날 영성운동과 환경운동 분야에서 그가 하고 있는 지도적인 역할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9살에 자이나교 승려가 되었다가, 후에 간디의 실천적 가르침에 고취되어 종단을 떠나 인도의 토지개혁운동에 참가하였다. 청년시절에 그는 핵무장에 반대하고, 평화를 위해서 8천마일에 걸친 도보행진을 했고, 나중에 영국에 정착한 다음, 환경잡지《소생(Resurgence)》을 편집하면서 세계적인 생태학 교육기관 슈마허 칼리지의 기획자로서 일해왔다. 아래 글은 ‘세계화에 관한 국제포럼’ 등 여러 단체의 주최로 2001년 2월 24일 뉴욕시 헌터 칼리지에서 열린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에 관한 계몽적 집회에서 그가 행한 짧은 연설을 녹음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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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쉬 쿠마르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루는 우리 어머니가 당신이 손수 수놓은 아름다운 숄을 나의 누나에게 주셨습니다. 멋진 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전에 이런 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거울조각들과 알록달록한 색으로 되어있는 숄입니다. 그래서, 이 숄을 받으면서 누나는 “엄마, 정말로 아름다운 숄이네요. 고마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말하기를, “엄마, 이 숄은 너무 예뻐서 차마 제가 몸에 두를 엄두를 못 내겠어요. 걸치고 다니다가 못 쓰게 되면 어떻게 해요. 저는 이게 얼마나 훌륭한 숄인지 누구든 볼 수 있도록 이 숄을 벽에 장식품으로 걸어둘래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야.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야. 나는 벽을 위해 그 숄을 만든 게 아니야. 그것은 너를 위한 거야. 네가 입어야 해. 사람은 벽을 아름다운 것들로 치장하면 자신의 몸에는 추한 것들을 걸치게 되는 법이란다.” 내 누나는 말문이 막혔지요.
누나는 말했습니다. “엄마, 이건 굉장히 아름다운 숄이에요. 이런 숄을 엄마가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손으로 만드는 데에는, 넉달, 여섯달, 여덟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그러니까 제가 엄마한테 선물을 해도 될까요, 자수용 기계를 사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뭐냐? 왜 기계로 만들어야 되니? 내가 너를 위해 만든 숄이 썩 훌륭하지 못하다는 거냐? 왜 기계를 쓰라는 거냐?” 누나가 말했습니다. “엄마, 시간이 절약될 거예요.”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닳아 없어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신이 만드신 시간은 너무도 넉넉한 걸 모른단 말이냐.”
자, 이것이 오늘의 미국에 보내는 우리 어머니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미국에 보내는 전언은, 간단히 말해서, 속도를 줄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많습니다. 잠깐 낮잠이라도 자라는 말입니다. 이게 테크놀로지에 관련하여 내가 경험한 가장 초기의 에피소드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굉장히 똑똑하고, 굉장히 영리하고, 굉장히 약고, 굉장히 지적인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온갖 놀라운 기계장치를 고안해 냅니다. 때때로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왜 이 세상의 모든 자원들을 고갈시켜가면서 이런 굉장한 발명품과 첨단기술들을 만들어 냅니까? 왜 그런 일을 합니까?” 그러면 그들은, “사티쉬 선생, 당신의 나라, 인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기술은 빈곤을 감소시키거나 없애줄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정말 가난이 문제일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세계자원을 파괴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비행기로 날아다니고 있습니까? 캐딜락이나 뷰익 같은 큰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은 몇명이나 됩니까? 결국, 문제는 부자가 아닌가요?”
너무 오랫동안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문제라고, 빈곤이 문제라고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초점을 부자들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집시다. 부자들이여, 당신들은 이 지구와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도대체 당신들의 생활방식은 어떠합니까? 거기에 새로운 세계관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이 존재합니까? 부자들은 가난에 동참하여 좀 덜 풍요롭게 살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조금만 더 부유해져서 우리 모두가 함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세계관, 그런 비전이 과연 있습니까? 고결하고 위엄있는 소박한 삶을 기리는 영적인 비전이 있습니까? 물론 그런 비전이 오늘날 부자의 세계, 자본주의의 세계에 있을 리 없습니다.
이른바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영적인 차원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본의 세계화와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지구에, 우리의 공기에, 우리의 물에, 우리의 천연자원에, 우리의 숲에, 우리의 바다에, 세계의 대다수 민중에 대해서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가 하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이 지구 전체에 걸친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우리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숙고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접근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또는 자본주의에서 또다른 어떤 계획된 굉장한 이데올로기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중요한 것입니다. 약간이나마 조금 덜 소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이것을 고결한 소박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금은 윌리엄 모리스가 펼쳤던 공예운동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제시한 비전으로 다시 돌아갈 때입니다. 간디는 물레를 돌리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굉장한 기계들, 굉장한 공장들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물레질을 하고, 우리 자신의 아름다운 옷을 스스로 지어 입는 창조적인 과정을 소유하고 싶다.”
나는 오늘 저녁 이 방안에 계신 청중들에게 매우 간단한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한가지 일만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빵을 손수 굽기 시작하십시오. 인도 사람들에게, 독립을 원한다면 영국은 잊어버리고 물레질을 시작하라고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에게는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대안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손이 갖고 있는 창조성, 우리의 상상력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나태하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물건들을 손수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직접 빵을 구워 드십시오. 부엌의 오븐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냄새를 여러분이 맡게 될 때 여러분의 아이들,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부모님, 여러분의 친구들, 여러분의 손님들은 환희에 넘칠 것입니다. 그러면, 공장에서 생산된 빵은 이제 끝입니다.
미국에 어떤 빵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영국에는 ‘어머니의 자존심’이라는 상표를 가진 빵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빵에는 ‘어머니’도, ‘자존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머니의 치욕’이라고 다시 이름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빵을 만들기 시작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신성한 빵입니다. 여기에 계신 기독교 신자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나눠주면서 그것이 자신의 육신이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빵은 신성한 것입니다. 공장에서 제조된 빵은 신성하지도, 신선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죽은 빵입니다. 그 안에는 독소가 있습니다. 공장에서는 실로 수많은 첨가물을 빵에 집어넣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의 슬로건, 즉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독재에 대한 저항’은 우리가 날마다 우리 자신의 손으로 훌륭하고 건강에 좋은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녹취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