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은 자기가 이 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고른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허영심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작가를 골라냅니다. 이야기는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공적인 이야기든, 사적인 이야기든, 이야기는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야기 자신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라고 명령합니다. 넌픽션과 픽션은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기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픽션은 내게서 춤추듯 흘러나오고, 논픽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 맞이하는 이 고통스럽고 깨진 세계가 비틀어 짜듯이 내보냅니다.
넌픽션이건, 픽션이건,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권력과 권력 없는 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끝없는 순환적인 갈등입니다. 저 뛰어난 작가, 존 버저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그것이 마치 유일한 이야기인 것처럼 말해지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하나뿐인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물을 보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다른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하나의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기를 원하는 한 이야기꾼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달리 보일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쓰는 글은 국가와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 권력의 편집증과 잔인함에 관한 얘기이며, 권력의 물리학에 관한 얘기입니다. 나는,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한 국가나 나라, 한 기업이나 기관 ― 또는 심지어, 한 개인이나 배우자, 친구, 형제자매라도 ― 이 제어되지 않은 방대한 권력을 축적할 때, 그 결과는 내가 아래에서 열거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사태들이 된다고 믿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도 및 파키스탄 정부가 그들의 세뇌된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약속해온 핵 재앙의 공포 속에서 살면서, 그리고 ‘테러에 맞서는 전쟁’ ― 부시 대통령이 “결코 중단되지 않을 과업”이라고 비장하게 부르는 ― 이 수행되고 있는 곳 가까이 살면서 나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핵폭탄, 대형댐, 기업 세계화, 힌두 파시즘의 증가하는 위협에 관해 독자적인 견해 ― 인도 정부의 견해와 상충되는 ― 를 밝혀온 우리들에게는 ‘반민족적’이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나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별로 분개하지 않습니다. ‘반민족적’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일과 내 사고방식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반민족적’인 사람이란 자기 민족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이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어떤 민족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주의를 깊이 의심스러워하고 반민족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반민족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저런 종류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집단학살의 원인이었습니다. 국기(國旗)라는 것은 정부가 처음에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수의(壽衣)로 사용하는 색깔있는 천 조각입니다. [박수]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 나는 여기에 언론기업은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 국기 아래로 몰려들고, 작가, 화가, 음악가, 영화제작자들이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그들의 예술에 올가미를 씌울 때, 그 순간은 우리 모두가 벌떡 일어나 앉아 근심해야 할 때입니다. 인도에서는 이런 일이 1998년 핵실험 직후와 1999년 파키스탄과의 전쟁 기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우리는 걸프전쟁 때 목격했고, 지금 ‘테러에 맞서는 전쟁’에서 또 목격하고 있습니다. 저 중국산(産) 미국 국기의 눈보라 말입니다. [웃음]
최근에, 미국 정부의 행동을 비판해온 사람들은 ― 나 자신을 포함해서 ― ‘반미적’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반미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신성화되고 있습니다.
‘반미적’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기성 체제가 비판자들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정확하게 ― 사용하는 말입니다. 일단 누군가가 반미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의 발언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되며, 논리는 상처받은 국가적 자존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반미적’이라는 용어는 무슨 뜻입니까? 재즈에 반대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언론자유에 반대한다는 뜻입니까? 토니 모리슨이나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거대한 미국산 삼나무를 싫어한다는 것인가요? 핵무기에 반대하여 행진한 수십만 미국 시민들이나, 그들의 정부가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도록 압력을 넣은 수많은 반전 운동가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반미적’이란 모든 미국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인가요?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여기에 대해서는 미국의 ‘자유언론’ 덕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슬프게도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을 미국의 문화, 음악, 문학, 숨막히게 아름다운 땅,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즐거움에 대한 비판으로 혼동하게 하는 것은 고의적이며, 극히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이것은 마치 퇴각하는 군대가, 적(敵)이 민간인을 향해 포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인구가 밀집된 도시 속에 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정책과 자신이 연관되는 것에 대해 모욕을 느끼는 미국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정부의 정책의 모순과 위선에 대한 가장 학문적이고, 신랄하고, 예리하며, 통쾌한 비판은 미국 시민들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미국 정부의 속셈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면,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하워드 진, 에드 허만, 에이미 굿맨, 마이클 앨버트, 찰머스 존슨, 윌리엄 블럼, 그리고 앤서니 에이무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됩니다. [박수]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수백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테러리즘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카시미르 계곡에서 자행된 국가적 테러리즘은 논외로 치더라도, 구자라트 주정부의 감독 아래 무슬림들에 대해 저질러진 최근의 학살만행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는 현재의 인도 정부의 파시스트적인 정책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 심히 부끄럽게 여기고 매우 분개할 것입니다. 인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인도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스꽝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인도 정부 자신은 주저없이 그렇게 나갈 것이지만 말입니다. ‘인도’나 ‘미국’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다거나,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밝힐 권리를 인도 정부나 미국 정부 혹은 그 누구에게라도 양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반미적’이라고(또는 ‘반인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결핍입니다. 기성 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부시가 아니면 탈레반이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가 아니면 악마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들과 한패다. 이런 식입니다.
작년에,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9 . 11 이후의 수사(修辭)에 대해 그것을 어리석고 교만한 것으로 무시하면서 비웃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전혀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잘못된, 위험한 전쟁을 위한 모병 작전이었습니다. 날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반대가 곧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탈레반을 지지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에 경악하곤 합니다. 이 전쟁의 애초의 목표 ―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산 채로든 시체로든) ― 가 좌절된 것으로 보이는 지금, 과녁은 이미 다른 데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간 여성들을 ‘부르카’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합중국 해병대가 페미니즘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우리더러 믿으라고 합니다. [웃음, 박수] (만약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미국의 군사동맹국 사우디 아라비아입니까?) [웃음]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인도에는 ‘불가촉 천민’,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혐오스러운 사회적 관행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는 소수집단과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더욱 혹심합니다. 그러니, 거기에도 폭격을 해야 합니까? 델리와 이슬라마바드, 다카도 파괴해야 합니까? 인도의 저 완고한 관행을 폭격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요? 폭격을 통해서 우리가 여성해방의 낙원으로 갈 수 있을까요? [웃음] 그런 식으로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습니까? 노예제는 어떻게 없어졌습니까? 미국은 수백만의 토착 아메리카인들을 학살하여, 그 시체 위에 건국을 하였습니다. 지금 산타페를 폭격함으로써 그 인종학살이 보상될 수 있을까요? [박수]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끔찍한 기념일이 있는 달, 9월에, 여기 미국 땅에 서 있게 된 것은 다만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물론, 특히 여기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은 9 . 11이라고 알려진 끔찍한 사건입니다. 저 치명적인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거의 3천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 인한 슬픔은 아직 깊고, 분노는 아직 날카롭고,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상스러운 죽음의 전쟁이 세계 전역에 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전쟁도, 어떠한 복수행위도, 다른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 아이들에게로 투하되는 어떠한 폭탄도, 자기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려낼 수는 없다는 것을, 내밀히, 깊이, 틀림없이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원수를 갚지 못합니다. 전쟁은 단지 그들에 대한 기억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또다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 이번에는 이라크를 상대로 ― 사람들의 슬픔을 냉소적으로 조작하고, 세제(洗劑)와 조깅화(靴)를 파는 기업들이 후원하는 텔레비전 특집 프로를 위해 그 슬픔을 포장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슬픔을 싸구려로 만들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슬픔의 상품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의 가장 사적인 감정까지도 가차없이 약탈하는 야만주의입니다. 한 국가가 국민들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은 끔찍한 폭력입니다. [박수]
공개된 단상에서 이런 주제를 건드린다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지만, 그러나 정말 내가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것은 상실감에 대해서입니다. 상실과 잃어버림. 슬픔, 실패, 망가짐, 감각의 마비, 불확실성, 두려움, 감정의 죽음, 꿈의 죽음. 절대적으로 냉혹하고, 끝없이, 습관처럼 반복되는 이 세계의 불공정함. 이러한 상실감이 개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전체 문화, 언제나 그것을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 전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9월 11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짜는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지역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 날짜는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연 9월 11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반추는 비난이나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를 조금 걷어보자는 거지요. 이것은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예의바르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계로 나오시기를” 부탁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박수]
29년 전 칠레에서, 피노체트 장군은 1973년 9월 11일에 CIA의 지원 아래 감행된 쿠데타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그 국민들이 무책임한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칠레가 맑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쿠데타가 끝난 뒤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살해당한 것인지, 자살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쿠데타에 이은 공포정치하에서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보다 훨씬더 많은 사람들은 ‘실종’되었습니다. 총살대가 공개처형을 행하였습니다. 집단수용소와 고문실이 나라 전역에 설치되었습니다. 사망한 사람들은 탄광의 갱도와 표지도 없는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17년 동안 칠레 사람들은, 한밤중의 노크소리, 일상화된 ‘실종’, 갑작스런 체포와 고문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산티아고 공연장의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음악가 빅토르 하라의 두 손이 어떻게 잘렸는지 칠레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노체트의 부하들은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기타를 던져주고는 연주를 해보라고 놀리기까지 했습니다.
1999년 피노체트 장군이 영국에서 체포된 데 이어, 미국 정부에 의해 수천건의 문서가 기밀문건에서 해제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에는 CIA의 쿠데타 연루에 대한 명백한 증거 이외에 피노체트 치하 칠레의 상황에 관해서 미국 정부가 소상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키신저는 피노체트에게 지지를 확약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미국의 우리들은 당신이 애쓰는 일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정부에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결함 많은 민주주의라 해도, 오로지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독재 치하에서 살면서, 자유의 절대적인 상실을 견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피노체트가 죽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그가 빼앗아 간 삶이기도 합니다.
슬프게도, 남아메리카에서 미국 정부의 주목을 끈 것은 칠레만이 아닙니다.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에콰도르, 브라질, 페루, 도미니카 공화국, 볼리비아, 니카라과, 온두라스, 파나마, 엘살바도르, 멕시코, 그리고 콜롬비아, 이들은 모두 CIA의 은밀하거나 공공연한 놀이터입니다. 수십만의 라틴아메리카인들이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되거나, 고문당하거나, 또는 간단히 실종되었습니다. 이런 모욕으로 충분치 않다는 듯이,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 마치 쿠데타나 학살이 이들에게는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처럼 ― 낙인 찍히는 형벌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 목록은 미군의 간섭으로 고통받아온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포함시킨 것이 아닙니다. 베트남, 한반도, 인도네시아,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수백만의 아시아인들이 폭격을 당하고, 불에 타고, 학살되어온 수십년간 얼마나 많은 9월이 지나갔습니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수십만의 평범한 일본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1945년 8월 이후 얼마나 많은 9월이 지나갔습니까? 불운하게도, 그 폭격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 그리고 헤엄치고, 걷고, 기고, 날아다니는 모든 피조물에게 닥친 지옥의 상황을 견디면서 보내야 했던 9월은 모두 얼마입니까?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알부커크에는 ‘국립원자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뚱보 아저씨’와 ‘어린 소년'(이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애칭입니다)이 기념 귀걸이로 팔리고 있습니다. 젊은 펑크족들이 그것을 달고 다닙니다. 양쪽 귀에 하나씩 대학살의 표지를 걸고 다닙니다. 얘기가 옆길로 빠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제는 8월이 아니라 9월인데 말입니다.
9월 11일은 중동에서도 비극적인 기억이 있는 날입니다. 1922년 9월 11일,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영제국이 1917년에 발표했던 ‘발포어 선언’의 후속조처였습니다. ‘발포어 선언’은 유럽의 유태 민족주의자들 ― 시오니스트 ― 에게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그 무렵,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학교에서 싸움대장이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구슬을 나눠주듯이 남의 땅을 제멋대로 낚아채서 나눠주고 했습니다.)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제국주의 권력은 세계의 오래된 문명을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카시미르는 제국주의 국가 영국이 현대세계에 가져다준 저주의 선물입니다. 두 지역은 모두 오늘날 들끓는 국제적 갈등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1937년에 윈스턴 처칠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아무리 오랫동안 개가 여물통에 누워있었다 하더라도 그 여물통을 차지할 최종적인 권리가 그 개한테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아메리카의 홍인(紅人)들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흑인들에게 큰 잘못이 저질러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강한 인종, 더 수준 높은 인종, 그리고 더 세상일에 밝은 인종이 와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나는 이들에게 어떤 잘못이 행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취할 기본적 자세를 정해주었습니다. 1969년에,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는 말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후임자 레비 에스콜 수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팔레스타인인이란 말인가? 내가 여기에(팔레스타인) 왔을 때, 주로 아랍인과 베두인으로 된 25만의 비유태인이 있었을 뿐이다. 이곳은 사막이었다. 저개발 이하의 상태였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메나헴 베긴 수상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두발 달린 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츠하크 샤미르 수상은 그들을 ‘메뚜기떼’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모두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국가 원수들이 사용한 말들입니다.
1947년에 유엔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여, 팔레스타인 영토의 55퍼센트를 유태 민족주의자들에게 할당하였습니다. 1년 내에 그들은 76퍼센트를 점령하였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었습니다. 선포 몇분 후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승인하였습니다. 서안(西岸) 지구는 요르단에 병합되었습니다. ‘가자’ 지구는 이집트 군대의 통제하에 들어갔습니다. 이리하여, 난민으로 전락한 수십만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음과 가슴속 이외에 팔레스타인은 공식적으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967년에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습니다.
수십년 동안 봉기와 전쟁과 ‘인티파다’가 있었습니다.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협정과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휴전이 선포되고, 깨졌습니다. 그러나 유혈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불법적으로 점령된 상태입니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단적 처벌을 당하고, 24시간 통행금지 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모욕을 당하고, 짐승처럼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 집이 파괴될지, 언제 자기 아이들이 총에 맞을지, 언제 그들이 아끼는 나무가 잘려질지, 언제 도로가 폐쇄될지, 그리고 언제 식품과 약을 사러 시장까지 걸어가는 게 허용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인간다운 존엄성은 아무것도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삽니다. 그들은 자기자신의 땅, 자기자신의 안전, 이동, 커뮤니케이션, 식수공급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협정이 체결되고, ‘자치’니, 심지어 ‘국가로서의 인정’ 등의 말들이 나올 때,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자치? 어떤 종류의 국가? 어떤 종류의 권리를 그 시민들이 갖게 될 것이란 말인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인간폭탄이 되어, 이스라엘의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자신을 날려보내고, 보통 사람들을 죽이고, 일상생활 속에 테러를 주입하고, 그 결과로 양쪽 사회 사이의 불신과 상호 미움이 더욱 강화됩니다. 폭파는 매번 잔인한 보복을 부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가혹한 역경을 불러들입니다. 자살 폭파는 개인적 절망의 행동이지, 혁명적인 전술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공격이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스라엘 정부에게 팔레스타인 영토를 날마다 침범할 수 있는 완벽한 구실을 제공합니다. 21세기식 ‘전쟁’이라는 새로운 유행복을 걸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실체는 낡은 19세기식 식민주의에 불과한 행동에 완벽한 구실을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충실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군은 언제나 미국이고,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과 함께, 평화적이고 공정한 갈등 해소책을 모색하는 거의 모든 유엔 결의를 방해해왔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이 일으킨 거의 모든 전쟁을 지원해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할 때 팔레스타인 가정을 날려버리는 것은 바로 미국제 미사일입니다. 그리고, 매년 이스라엘은 미국으로부터, 미국인 납세자들의 돈 수십억달러를 지원 받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대립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야 할까요? 자기자신 엄청난 고통을 겪은 ― 아마도 역사상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잔혹하게 ― 유태인들이 자신들과 입장이 바뀐 사람들의 고통과 갈망을 이해하는 게 정말 불가능할까요?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은 늘 오히려 잔인성에 불을 붙이는 걸까요? 그렇다면 인간에겐 어떤 희망이 남을까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국가 없는 민족이 국가를 선포할 때, 그것은 어떤 국가가 될까요? 그 국가의 깃발 밑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자행될까요? 우리가 싸워 얻어야 할 것은 하나의 분리된 국가일까요, 아니면 종족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권리일까요?
팔레스타인은 한때 중동에서 세속적 가치가 존중받는 성채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허약하고 비민주적이며, 모든 점에서 부패했으나, 명백히 비당파적인 PLO가, 노골적으로 당파적인 이데올로기를 견지한 채 이슬람의 이름으로 싸우는 ‘하마스’에게 입지를 빼앗기고 있는 중입니다. ‘하마스’의 선언문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슬람의 병사가 되고, 적들을 불태울 성화(聖火)를 위한 장작이 될 것이다.”
세계는 자살 폭파범을 비난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긴 여정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1922년 9월 11일에서 2002년 9월 11일에 이르는 80년 동안의 전쟁은 너무도 긴 기간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세계가 줄 수 있는 조언이 있을까요? 그들은 그냥 골다 메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여,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중동의 또다른 지역에서 9월 11일은 좀더 최근의 기억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1세가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양원 합동회의에서 밝힌 것은 1990년 9월 11일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사담 후세인이 전범(戰犯)이며, 자신의 국민을 상대로 인종학살을 자행해온 잔인한 군사 독재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인물에 대한 꽤 정확한 묘사입니다. 1988년에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북부의 수백개 촌락을 유린하였고, 쿠르드족 수천명을 죽이기 위해 화학무기와 기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해에 미국이 후세인에게 미국산 농산물을 구입하도록 5억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듬해, 후세인의 인종학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 미국 정부는 지원금을 두배로 늘려 10억달러를 주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또한 후세인에게 고품질의 탄저병균과 헬리콥터 이외에, 화학 및 생물무기 제조에 이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의 물질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담 후세인이 가장 잔인한 악행을 자행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 정부는 그의 가까운 동맹자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요? 1990년에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그의 죄는 전쟁을 일으킨 데 있다기보다는 주인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독자적인 행동은 걸프만에서의 힘의 균형을 뒤집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담 후세인은 제거되어야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사랑을 더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애완동물 신세가 된 것이지요.
이라크에 대한 최초의 연합군측 공격은 1991년 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세계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전쟁을 황금 시간대에 지켜보았습니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CNN 방송을 보기 위해 별 다섯개짜리 호텔 로비로 가야 했습니다.) 수만명이 한달간 계속된 폭격 속에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 전쟁이 그때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에 찬 처음의 반전(反戰) 목소리는 베트남전 이후 한 국가에 대해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공중 포격 속에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영국 군대는 이라크에 대해 수많은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전쟁 이후 10년 이상 계속되어온 경제봉쇄 속에서 이라크 시민들에게는 식량과 의약품, 병원 장비, 구급차, 깨끗한 식수 등 기초적인 필수품들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약 50만의 이라크 아이들이 경제봉쇄의 결과로 죽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유엔주재 미국 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한 대가는 치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배격하는 데 사용된 용어가 바로 ‘도덕적 등가(等價)’였습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도덕적 등가’ 때문에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노골적인 산수(算數)를 말했을 뿐입니다.
10년간의 폭격도 ‘바그다드의 짐승’,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조지 부시 2세 대통령은 다시 한번 같은 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면전을 제안하고 있고, 그 목표는 명백히 이라크의 정권교체입니다.〈뉴욕타임즈〉는, 부시 행정부가 “사담 후세인의 위협에 대처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미국 국민과 의회, 그리고 동맹국들을 설득하기 위한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백악관의 참모장 앤드류 H. 카드 2세는 부시 행정부가 이번 가을을 목표로 전쟁계획을 어떻게 차근차근 밟아왔는지 묘사했습니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8월에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지 않는 게 좋다”고 그는 말합니다. 워싱턴의 ‘새로운 상품’은 곤경에 처해 있는 쿠웨이트 국민들이 아니라, 이라크가 대량파괴 무기를 가졌다는 주장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전 자문관 리처드 펄은 “평화 운운하는 도덕적 설교 따위는 무시하라. 그가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썼습니다.
무기사찰을 수행한 사람들은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의 실상에 대해서 엇갈린 보고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의 무기고는 해체되었고, 이라크가 대량파괴 무기체계를 재건할 능력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얼마나 많은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혼란이 없습니다. 미국 정부가 무기사찰단의 방문을 환영할까요? 영국은 어떨까요? 이스라엘은?
만약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때문에 미국의 선제공격이 정당화될까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핵무기고를 가지고 있고, 또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바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만약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정당화된다면, 어떤 핵국가라도 다른 핵국가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할 수 있고,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인도는 파키스탄을 공격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 수상이 미국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면, 미국은 선제공격으로 그를 ‘몰아낼’ 수 있을까요?
최근에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 발발 직전에 물러서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자신은 바로 그러한 충고를 받아들이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요? 누가 도덕적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전쟁을 일으키면서 평화에 대해 설교하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조지 부시가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라고 한 미국은 지난 50년 동안 단 한해도 빠짐없이 이 나라 저 나라와 전쟁을 해왔습니다.
전쟁은 이타적인 이유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은 대개 주도권 다툼이나 비즈니스 때문에 일어납니다. 물론, 전쟁 장사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발칸 지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최근의 무력개입은 석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이 앉혀놓은 아프가니스탄의 꼭두각시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미국의 석유회사 ‘유노칼’의 전직 직원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이 중동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이곳에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석유는 미국의 엔진이 부드럽게 돌아가게 합니다. 석유는 자유시장이 돌아가도록 해줍니다. 누구든 세계의 석유를 통제하는 자가 세계시장을 통제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석유를 통제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뉴욕타임즈〉의 논설위원 토마스 프리드먼만큼 우아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친 짓도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미국은 이라크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인은 협상이나 망설임 없이, 혹은 유엔의 승인 없이도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뿐만 아니라, 유엔에 대해 미국이 거의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을 보십시오. 세계화에 대한 그의 책《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아마도 이것은 예민한 순간에 씌어진 것이겠지만, 프리드먼의 이 말은 내가 지금껏 읽어본 기업 주도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묘사임이 틀림없습니다.
2001년 9월 11일과 ‘테러에 맞서는 전쟁’ 이후, 보이지 않는 손과 주먹은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를 악문 채 거짓 미소를 지으면서 ‘개발도상국들’을 억압하는 미국의 또다른 무기 ― 자유시장 ― 를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결코 중단되지 않을 과업’은 미국의 완벽한 전쟁이자, 미 제국주의의 끝없는 확장을 위한 완벽한 수단입니다.
지난 10년간의 고삐 풀린 ‘세계화’ 속에서, 세계의 총소득은 연간 평균적으로 2.5퍼센트 증가해왔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빈민은 1억명이 더 늘어났습니다. 상위 100개 거대 경제 중에서 51개 경제는 국가가 아니라 기업입니다. 세계의 상위 1퍼센트가 보유한 부는 하위 57퍼센트의 부를 합한 것과 맞먹고, 이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테러에 맞서는 전쟁’이 확대되면서, 이 과정은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정장을 입은 신사들이 볼썽사납게 서두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폭탄이 퍼부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크루즈 미사일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동안에도, 또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핵무기가 쌓이고 있는 동안에도, 계약서가 만들어지고, 특허가 등록되고, 송유관이 설치되고, 자연자원이 약탈되고, 물이 사유화되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기업 세계화’ 프로젝트의 ‘구조조정’이라는 목표가 사람들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습니다. ‘개발’ 프로젝트, 대대적인 민영화, 노동 ‘개혁’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땅과 일터로부터 내쫓고, 그 결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야만적인 강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전역에 걸쳐 ‘자유시장’이 서방(西方)의 시장은 뻔뻔스럽게 보호하면서, 개발도상국가들에게는 무역장벽의 철폐를 강요함에 따라,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있습니다. 민중적 소요(騷擾)가 지구촌 각처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볼리비아, 인도 같은 나라에서 ‘기업 세계화’에 대한 저항운동이 커가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정부는 통제의 고삐를 더욱 세게 죄고 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테러분자’라고 낙인 찍히고, 또 그렇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적 소요는 시위행진이나 데모, 세계화에 대한 항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또한 범죄와 혼돈, 그리고 온갖 종류의 절망과 환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고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서 보듯이), 점차적으로 문화적 민족주의, 종교적 완고성, 파시즘,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테러리즘과 같은 끔찍한 것들을 낳는 비옥한 온상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세계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유시장’이 국가간의 장벽을 허물고, ‘세계화’의 궁극적 목적지가 일종의 히피 낙원 ― 여권도 필요 없고, 우리 모두가 존 레논의 노래(“국가 없는 세상 ?? “)처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 ― 이라고 하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위입니다.
‘자유시장’이 훼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줄 ‘달콤한 거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다국적기업들은 관련 개발도상국의 국가기구 ― 경찰, 법원, 때로는 군대 ― 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래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가난한 국가에서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충성스럽고, 부패하고, 가급적 권위주의적인 정부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합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자유로운 척하는 언론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정의를 실현하는 척하는 법원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핵무기, 상비군, 보다 엄격한 이민법, 그리고 삼엄한 해안경비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화란 오직 돈과 상품과 특허와 서비스에 관한 것이지, 결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인권존중에 관한 것도, 인종차별이나 화학 및 핵무기, 또는 온실효과와 기후변화, 또는 정의에 관한 국제적 협약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약간의 제스처라도 있으면 ‘세계화’라는 사업 전체가 망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테러에 맞선 전쟁’이 아프가니스탄의 폐허 속에서 공식적으로 깃발을 내린 지 일년 가까운 사이에 나라마다 차례차례로 자유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자유가 제한되고,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시민적 권리가 유보되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반론은 ‘테러리즘’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반론을 다스리기 위해 온갖 법안이 통과되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공중으로 사라져버린 듯합니다. 물라 오마르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피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사라져버렸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약식재판 제도는 뜻밖의 곳에서 부상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형태의 폭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미국, 중앙아시아의 모든 공화국,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는 동안 대형매장(mall)에서는 계절에 맞추어 바겐세일이 한창입니다. 모든 게 할인되고 있습니다 ― 바다, 강, 석유, 유전자, 무화과 말벌, 꽃, 어린시절, 알루미늄 공장, 전화 회사, 지혜, 야생지, 시민적 권리, 생태계, 공기 등, 46억년의 진화를 거쳐온 이 모든 것들이 싸구려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포장되고, 밀봉되고, 상표가 붙고, 값이 매겨지고, 선반에 진열됩니다. (반품사절.) 정의(正義)도 이 매장에 출시되어 있다는 얘기를 나는 들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아마 제일 좋은 것을 살 수 있겠지요.
도날드 럼스펠드는 ‘테러에 맞선 전쟁’에서 자신이 맡은 임무는, 미국인이 미국식 생활방식을 계속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세계를 상대로 설득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화난 임금이 미친 듯이 설칠 때에는 노예들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떱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여기에 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즉, ‘미국식 생활방식’은, 간단히 말해서, 지속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수]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권력은 수명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아마 이 막강한 제국도, 앞선 여러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결국 안으로부터 폭발하게 될지 모릅니다. 벌써 구조적인 균열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테러에 맞선 전쟁’이 그 범위를 넓혀감에 따라, 미국 기업의 심장부는 대량출혈을 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공허한 지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는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세 기관, 즉 IMF,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의 통치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기관은 모두 미국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비밀리에 이루어집니다. 이 기관들의 수장은 밀실에서 임명됩니다. 이들 수장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정치적 입장, 신념,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이들을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이 우리들을 대신해서 결정권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습니다. 그 누구에 의해서도 선출된 바가 없는 이러한 극소수의 탐욕스러운 은행가와 최고경영자(CEO)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것은 거기에 어떤 근본적인 악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극소수의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도록 허용했던 결과입니다. 21세기의 미국식 시장자본주의도 똑같은 이유로 실패할 것입니다. 두 제도 모두 인간의 지성에 의해 구축되었지만, 인간본성에 맞지 않아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태는 더 나빠졌다가 조금씩 나아질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늘에 작은 신(神)이 있어서 우리에게 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과 다른 세계는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이 여신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에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요한 날, 주의깊이 귀기울이면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오는 게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면 ― 물론, 인도에서 본 것은 폭스(Fox) 뉴스입니다만 ― 마치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조지 부시의 복제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웃음] 나는 미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여기서 뵙고, 토마토가 내게 날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인간에 대한 저의 믿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박혜영 옮김)
이 글은 Lannan Foundation 주최로 2002년 9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열린 초청강연의 원고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글의 원문은 인터넷(www.zmag.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