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월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날. 전라북도 부안에 갔다.
장승과 솟대가 서있는 해창갯벌이 창밖에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갯벌 가득 바람이 일었다. “새만금갯벌에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플래카드가 솟대에 걸려 있다. 한참 그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조태경 씨(‘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 회원)에게 전화했다. 몇분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조 씨가 나타났다. 갯벌을 에워싸듯 나 있는 30번 국도 바로 건너편이 해창산인데, 그 꼭대기에 ‘부안사람들’의 농성장이 있다.
“처음 해창산을 점거할 때, 인부들한테 바로 끌려내려갈 줄 알았어요. 근데 오늘이 벌써 농성 8일째예요. 농업기반공사와 현대건설 사람들이 몇번 우리를 끌어내려 했지만, 그때마다 계화도 어머니들이 와서 포크레인 앞에 드러눕기도 하며 막아주었죠.”
조 씨를 따라 깨진 돌투성이의 정상부에 올랐다. 원래 200여미터의 산인데, 지금은 70여미터로 키가 줄었다. 새만금사업이 시작된 1991년 10월 이래 산은 폭약으로 발파되고 덤프트럭에 업혀가 새만금 바다 속의 방조제로 차곡차곡 쌓여갔던 때문이다. 15톤 트럭 25만대 분량의 토석이 채취되면서 산의 체적 90%가 사라졌고, 대신 깎아지른 절벽과 웬만한 공설운동장보다 더 큰 터가 생겨났다.
농성장에서 보면, 바다 쪽은 새만금전시관과 방조제, 그 반대편은 바닥만 남은, 사라진 해창산이 있다. ‘부안사람들’이 투쟁의지를 다잡기에 최적의 농성 장소인지 모른다. “한 생명을 죽여 또다른 생명을 죽이는 짓”이었다는 신형록 씨(‘부안사람들’ 대표)의 간단명료한 설명이다. 정부의 새만금사업 강행 발표 1주기를 맞아 “뭘 선물할까?” 하다가 기습적으로 시작된 그들의 농성, 어쨌거나 그후 해창산에서 발파음이 멈추었다.
큰 천막 하나와 1인용 텐트 둘로 이뤄진 농성장. 날이 저물어 밤이 왔고, 자정이 지나 농성장의 불이 꺼졌다. 큰 천막에서 광주 녹색연합 활동가들과 넷이서 잤다. 새벽에 천장을 거칠게 때리며 비가 왔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돌 위의 잠은, 잠결에 몸부림을 칠 수 없어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쑤신다.
농업기반공사 사람들
이튿날 오전(6월 1일 토요일), 농기공 사람들이 농성장으로 올라왔다. 새만금사업단 공보실장과 해창산 채석장이 속한 방조제 2공구 사업소장 그리고 서류봉투를 든 직원 둘이 따랐다. 공보실장은 신 대표를 따로 불러내 “내려가달라”고 요청한다.
그들과 떨어져 서있는 사업소장과 대화를 나눠보았다. “식사나 잠자리가 불편할 테고, 무엇보다 위험한데, 이만 내려가주십사 해서 올라온 거다. 여기 분들의 뜻이 이제 웬만큼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으냐”고 한다. 그 뉘앙스에 “환경운동이란 게 결국 이름 얻자고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불신이 묻어 있다.
사업소장은 건설회사 직원이 아니라 시공감리를 맡은 농기공의 공무원 신분이다. “쌀이 남아돌지 않느냐, 왜 농토 만드는 사업을 하나” 하고 물어보았다. “창고에 쌓인 쌀이 천만석이 넘는다 해도 자연재해가 한번 일어나면 금세 바닥난다. 쌀 증산을 하지 않겠다는 지금의 농정도 두고볼 문제다. 새만금사업은, 남북통일까지 내다보며 하는 장기적인 사업이다” 한다.
“사실 이 산에서 앞으로 나올 토석은 방조제 전체 분량에서 1%도 안된다. 지금이야 국립공원 훼손이라고 문제 삼지만, 91년부터 십년 가까이 탈없이 토석공사를 해왔다. 게다가 지금 하는 공사는, 얼마 남지도 않은 토석 채취 때문이 아니라 환경부와 협의 하에 생태공원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사람만 놓고 볼 때 성실하고 선량해 뵈는 소장의 말씨나 표정인데, 새만금사업을 반대한다면서 산에서 농성을 하는 건 조금 억지 아니냐 하는 눈치다. 이미 망가진 산, 복토해서 나무를 심고 사면에 안전조치를 취한 뒤 보기 좋게 조경작업을 하는 것이니 ‘환경 생각하시는 분들’도 반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얄미운 소리다. 공사장에 가깝다는 이유로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산 하나를 파헤친 것도 문제였지만(“토취장과의 거리에 따라 공사비가 수백억원씩 차이가 난다. 경제성 있는 곳을 선정할 수밖에 없다.”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농기공 직원이 한 말), 이제는 조경 . 복구 공사라는 미명 하에 또하나의 알찬 사업장으로 만들어놨으니, 특히나 해창산을 십년 넘게 갖고 논 건설회사 입장에선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소장이 “신 선생님을 최대한 설득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우리로선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정부기관이 주민들한테 자꾸 밀리면 어떡하냐’고 현장 인부들 성화가 대단하다” 하며 나름껏 하소연한다. 농성이 장기화된다면, 신 대표를 비롯한 ‘부안사람들’이 ‘법적 조치’ 또는 ‘강제철거’를 당할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날 설득은 무위에 그쳤지만, “다시 또 오겠습니다” 하고 깍듯한 인사까지 하며 농기공 사람들이 하산했다.
점심이 지나서는 서울 녹색연합 . 환경운동연합과 종교계 인사 20여명이 농성 지원방문을 왔고, 이튿날 일요일에도 방문객들이 왔다. 6월 3일, 월요일 오전에는 계화도 아주머니 20여명이 머릿수건을 쓴, 갯일 나가는 평상의 복장으로 농성장에 왔다. “앞으로 어떡할 것이냐”고 의논하기 위해서인데, 그들 다수는 “이만 내려가자”는 쪽이었다. 하루라도 갯벌에 나가지 않으면 생활이 안되는 형편인데 부를 때마다 달려오기도 힘들지만, 그보다 “밑에 내려와 다른 반대(운동)를 하자. 왜 산에서 고생바가지를 하느냐”는 투가 더 강하다. 제 생업이 걸린 것도 아니면서 일마다 나서는 신 대표에게 평소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있는데, 먹는 것 자는 것에서부터 고생을 하고 있는 농성장 꼴을 보면 안타까움부터 앞서는 ‘어머니의 마음’인 것이다. 내려가기는 하되 ‘제3차 방조제 저지 및 주민생존권 쟁취’ 집회까지 농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어렵사리 결정을 봤다. 집회 날짜는 토요일, 장소는 새만금전시관 앞.
청량한 웃음의 땅
돌 위의 이틀 잠도 못 견뎌 하는 몸을 쉬게 하고 싶었고, 갯벌에 가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재작년 새만금 지역에 처음 와봤을 때는 겨울이었고, 갯벌은 쉬고 있었다. 지금은 초여름이니 그때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해창산에 올라온 계화도 아주머니 중 누구 하나를 붙들고 따라들어가면 된다. 나도 해창산을 내려왔다.
염정우 씨(‘부안사람들’ 회원 . 계화청년회 이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정오 무렵, 정우 씨의 늙은 홀어머니를 따라 계화갯벌로 나갔다. “어머니는 중합을 잘 잡으신다”고 정우 씨가 말했는데, 백합(생합) 큰 것은 대합, 중간치는 중합, 그리고 소합, 이렇게 불린다. 그레질을 하다가 걸려드는 게 있으면 눈앞에 보여준다. 심심찮게 제법 잡힌다. “두 군데 물골로 물이 들어오고, 경운기를 타고 멀리까지 나가지 않아도 하루 2-3만원 벌이가 될 만큼은 갯벌이 아직 싱싱하구나” 싶다. 그런데 30분쯤 지나고, 직접 그레질을 해서 조개를 잡지 않는 한 구경의 흥은 떨어지고 만다. 그레를 줘보라고 하기엔 미안하고, 그렇다고 몇시간이고 따라다닐 일은 아니다. “혼자 다녀보려구? 그려.” 정우 씨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점심으로 가져온 꼬막전을 꺼내 반을 떼 준다. 혼자 하릴없이 걸어다니며 전을 먹었다. 꼬막살이 정말 고소하다. 다 먹고 나니 다시 심심해진다. 이만 나가야 할까, 그러나 아쉽다.
지난 초봄, 사법연수원생 40여명이 갯벌체험을 왔는데, 해창갯벌에 들어가보곤 “시시하다” 하는 것을 고은식 씨(‘부안사람들’ 회원 . 계화청년회 총무)가 “새만금갯벌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계화도로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튿날 연수원생 16명이 계화도로 왔는데, “그 사람들이 갯벌에 들어가자마자 누구야 누구야 서로 부르고 맨발로 뛰어다니고 환호하면서 완전히 어린아이가 돼 버렸다”고 고 총무는 말했다. 내가 선 곳이 계화갯벌이다. 16명의 연수원생이 뭘 보고 환호했는지 알지 못하겠다.
출입통제소 쪽으로 걸어나오는데, “갯벌에선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던 허철희 씨(‘부안사람들’ 회원 . 사진작가)의 충고가 새삼 생각났다. 통제소에서 300-4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동차가 박혀 있다. 외지 사람 하나가 차를 몰고 들어왔다가 뻘에 바퀴가 빠졌고, 차를 빼낼 새 없이 물이 들어와 오도가도 못하고 폐차가 된 경우이다. 프레임에 따개비가 잔뜩 붙었고, 퇴적된 뻘이 바퀴를 완전히 삼켰다. 자동차 한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허 씨의 충고대로 가만히 있어 보았다.
나는 자동차 바로 옆 얕은 물자리 하나를 보고 있었다. 깊이가 10센티 가량. 5분 정도가 지나자 조약돌만한 크기의 게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흡사 노래방의 마이크처럼 생긴 두 눈을 수면 위로 살짝 올리는 것을 보았다. 한놈이 밖의 상황을 한참 주시하고는 용감하게 물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앞발 두개를 놀리기 시작했다. 뻘에서 무엇인가를 콕콕 찍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집게로 집어올리는 것이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의 먹이가 먼지처럼 작기 때문이다. 게는 ‘먹이활동’을 10-20초 하다가도 어느 순간 부리나케 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잠망경을 내놓고 주위를 살피다가 밖을 나와 먹이활동을 재개했다. 이제 한마리뿐 아니라 다른 게들도 따라 나온다. 열마리쯤 된다.
게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눈에 익자, 그 비슷한 다른 작은 움직임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무서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내 주위의 갯벌은 문득 구멍 천지였고, 그 구멍은 하나같이 생명의 집이었다. 구멍마다 끈이 흘러나와 있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긴 끈은 15센티 이상 구멍에서 빠져나와 있는데, 그것은 움직이는 끈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수백개의 끈, 그게 다 싱싱한 갯지렁이였다. 나는 어느샌가 갯지렁이 수백마리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긴 혀처럼 쭉 빠져나와 있다가 어떤 낯선 기미를 감지한 몇십개 구멍은 얇고 긴 혀를 삽시간에 감아들였다. 구멍 속으로 돌아가는 모양이 태엽식 줄자가 빠르게 줄을 되감는 것을 연상시킨다.
갯벌 형제들의 그런 동작들은, 결국 나를 웃게 했다. 세상에 이런 겁쟁이들이 어디 있을까 싶은, 그 과도한 신중함이, 특히 민첩하게 퇴각하는 것이 제일 웃겼다. 녀석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공중에서 오는 습격일 것이다. 즉 새의 발톱과 부리이다. 허공에서 뭔가 히끗하는 것이 있거나 갯벌에 약간의 진동이 와도 저마다의 구멍 속으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머릿속이 다 청량해지는 나의 웃음은, 녀석들의 과민한 공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초성에서 게들과 지렁이와 나는 다르지 않다. 내 생명의 숨기고 싶은 한 단면을 지금 게와 지렁이가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논과 갯벌의 경제적 가치 비교, 새만금호의 수질문제, 전북의 지역민심에 여전히 깊이 박힌 서해안시대 청사진, 식량안보를 넘어 통일시대까지 대비한다는 사업소장의 신념 등 새만금사업을 둘러싼 많은 주장들. 그러나 게와 지렁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한, 이 갯벌이 사람의 편익논리에서 자유로운 그들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한, 논리싸움의 시시비비는 일거에 관심 밖이 된다. 적어도 그날 나는 그랬다. 발 하나를 감히 갯벌에 내리지 못하고 홀린 듯 자동차에 앉아 있을 뿐인 것이다.
산천초목을 떨게 할 냄새
저려오는 발을 딛어 ‘삼매경’에서 벗어나 갯벌을 나왔다. 출입통제소 앞에는 어민들 대여섯이 모여 있었다. 70년대 계화간척 때 육로가 생겨 살기가 좋아진다며 직접 돌을 져 나르기도 했다는 김봉수 씨(계화교회 장로)가 다른 주민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김 장로는, 방조제 공사로 주민에게 닥친 생존권 위기보다는 갯벌을 끼고 사는 주민만이 느낄 간척사업 자체의 끔찍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방조제 완공이 이제 겨우 2-3년 남았다. 그러니 지금쯤이라면 갯벌이 시작되는 지점에선 갈대밭이 생겨야 한다. 뻘이 단단해지고 짠물이 가셔서 식생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근데 우리 계화도 바로 앞까지 아직도 물이 들어온다. 이래가지곤 그런 식물이 자랄 수가 없다. 시화호에도 가봤지만, 거기 간척은 새만금과 달랐다. 어느 정도 단계적으로 물을 밀어내면서 간척했다. 새만금은 좌우에서 방조제를 막아오다가 한날 한시 틀어막는다. 그날까지는 물이 계속 차 이 갯벌 전체가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간척 방식이 이러니 어떻게 되겠느냐. 방조제를 완공하는 그날부터 갯벌 전체가 갑자기 썩어들어간다. 시화 간척지보다 훨씬 큰 이 갯벌을 단시일 내 흙으로 덮을 수도 없다. 마을과 갯벌 사이 방풍림 역할을 할 갈대 같은 것도 없다. 그 썩는 냄새를 어쩔 거냐. 수십일 동안 우리 계화도뿐 아니라 온 천지에 진동할 것이다.”
정이동 씨(계화도 주민)는 “내가 낚시를 다녀서 그 냄새 알지. 뻘이 엉켜 썩는 데는 도시 시궁창 냄새 저리 가라야” 하며 맞장구를 친다. 갯벌의 살아있음이란, 조개와 게, 갯지렁이 들뿐 아니라 또 수억 수조의 미생물뿐 아니라 그 모두와 함께 뻘 자체가 살아있다는 뜻인데, 김 장로가 강조한 ‘냄새’는 정말이지 시취(屍臭)라 할 것이다. 갯벌은 하루 두번 바닷물에 적셔져야만 생기를 유지하는 대단히 민감한 생명체이다. 새만금갯벌은 새만금갯벌 크기의 거대한 살덩어리라고 보면 맞다. 방조제가 완공되면 새만금갯벌은 김제, 부안, 군산 지역의 산천초목을 온통 떨게 만들 만큼 섬뜩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게 될 것이다. 방조제 공사가 시작된 이래 “저 큰 갯벌 막으면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에서 하루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는 김 장로의 말은 계속되었다.
“썩어들어간 다음엔 어떻게 되느냐, 마르기 시작한다. 새만금갯벌 전체가 소금밭이 된다. 지금 부는 바람은, 바다에 맹물이 있어 간기가 덜한 바람이다. 그런데 소금밭이 되면, 손에 만져지는 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리게 된다. 겨울 한철 북풍이 불고 나머지 철은 서풍이 분다. 아마 부안 전체 농사를 망치게 될 것이다. 우리 계화도 사람들은 소금바람에 눈도 못 뜨게 될 것이다. 그러니, 대놓고 막아대지 말고 공사를 일단 중단해야 한다. 국민여론을 일으켜 학자들 모아놓고 연구하고, 해양학 하는 사람들이 새만금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나, 실험을 해야 한다.”
김 장로의 결론은 약간 김이 빠진다. 한동안 소란을 떨었던 민관공동조사가 그 비슷한 일을 이미 했던 것이다. 조사단의 보고서를 검토한 정부는 새만금지구를 둘로 갈라 동진구역부터 개발하고 만경구역은 만경강 수질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순차개발안을 내놓았을 뿐이다.
“우리라도 똘똘 뭉치면 공사를 막을 수 있다. 확실하게 반대를 하려면, 해창산에 앉아 있을 게 아니다. 방조제 돌 떨어지는 데 가서 선박시위를 해야 한다”고까지 김 장로는 말한다. 말이나마 행동방법까지 나온 때문인지 정이동 씨는 “이 말 들으면 이 말 옳고, 농기공 말 들으면 농기공 말 옳고 …” 하며 한발짝 물러서버린다. 다른 어민들은 바다 쪽을 보며 계속 묵묵했다. 이제라도 반대의 뜻을 확실히 세우고 집단행동에 나선다는 게, 10년이 넘게 1조원 이상 들어간 공사인지라 아무래도 허무한 소리로 들리는지 모른다.
한 여성어민의 분노
갯벌에 다녀온 화요일 이후, 농성장으로 가지 않고 계화도에 머물며 염정우 씨 집에서 계속 숙식을 해결했다. 농성장을 기피한 것은 내 속의 어떤 패배감 때문일 것이다. 사업 강행 발표가 난 작년 5월 이후 새만금사업은 언론의 관심에서 밀려났고, ‘부안사람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활동해 왔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이 ‘바위에 계란치기’라고 생각하듯이 나 또한 그런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다. 올해도 1,800억원의 공사비가 집행되고 있는데, 전 국민적인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업은 계속 진행되고 갯벌은 죽게 돼 있는 형편이다. ‘부안사람들’이 아무리 애써도 방조제 공사는 결국 마지막 물막이에 이를 것이라는 판단이 정확하다.
객관적 상황이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몇년째 새만금 반대운동을 선도해온 ‘부안사람들’은, 고소고발을 당하고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고 때로 목숨이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더 격렬히 투쟁을 벌여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새만금에서 열명이 죽어야 된다. 그래야 새만금이 산다”라고, 어느 교회의 목사가 분김에 그런 말도 했다는데, 그런 무서운 주장도 하나의 생각으로서 가치가 있는 걸까. “어쩌면 ‘부안사람들’은 패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임박한 패배에 담담해 하는 마음을 가질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염정우 씨의 작은 방에서, 농성장에선 꺼내기 힘들 얘기를 깊게 나눴다.
아무려나 5월 24일부터 시작된 ‘부안사람들’의 이번 해창산 싸움. 미리 말하면, 약 한달이 지난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강제철거가 있었고, 그후에도 항의시위가 계속되었다. 그걸 다 소상히 옮기기엔 아무래도 무리인데, 그 정황은 ‘부안사람들’의 인터넷사이트(www.nongbalge.or.kr)에 게시된 글과 사진, 동영상을 참조하면 좋겠다. 이 자리에선 6월 8일 토요일, 새만금전시관 앞에서 열린 집회, 거기서 인상깊게 본 장면 하나만 이야기해야겠다.
그날 오후 집회가 시작되기 전, 농기공 사람들은 전시관 앞 광장으로 어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쳤는데, 그 과정에서 직원 한사람이 어민에게 폭언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멱살잡이를 하는 둘을 가까스로 뜯어냈지만, 폭언을 당한 어민의 아내가 더 화가 났다. 그녀는 단신으로 광장을 지나 전시관 앞에 가서 유리문을 발로 차며 어디론가 숨어버린 폭언 당사자를 고함쳐 불렀다. 그녀의 사나운 행동은 누구도 말리기 힘들었다. “니놈들 때문에 계화도 어민들 다 죽게 생겼다.” “니들이 잘한 게 뭐 있다고 우리 아저씨한테 욕하냐” “이 나쁜 놈들아, 우리 먹여 살려라” 등의 말을 격하게 토해냈다. 안으로 문을 잠근 전시관에선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 한사람이지만, 일순 전시관 전체를 압도했다. ‘주민생존권’의 문제, 즉 생존의 벼랑에 몰린 사람만이 터트릴 수 있는 무서운 분노였던 것이다.
농업기반공사나 새만금전시관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새만금갯벌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불같은 분노의 대대적인 결집이 혹 새만금갯벌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나, 그 여성어민의 분노의 몸짓이 가슴 아프다 해도, 아무래도 그 분노를 선뜻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새만금 반대운동의 중요한 한 동인이 “주민생존권 쟁취”이고 그건 분명 상당한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지만, 현실 대다수 어민들을 생각하면 그 동력은 아무래도 진실되기가 힘든 것이다. “갯벌보호와 주민생존권 보호”라는 명분으로 계화도 주민들이 외지인의 갯벌출입을 통제하면서 주민들 스스로는 배를 타고 흡입식으로 조개류를 마구 채취하는 판국인데, 그것은 새만금갯벌에다 대고 주민들이 벌이는 마지막 빚잔치나 다름없다. 즉 갯벌을 살린다느니 지킨다느니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타락한 ‘계화도 민중’이 적지 않은 것이다. 고은식 총무의 말도 생각나는데, 농림부, 환경부, 농업기반공사 등의 장례식을 치렀던 그날 집회엔 40-50여명의 어민들이 나왔지만, “우리가 받은 보상금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다시 제대로 보상하라 하며 사람들을 모으려 했다면 일주일 새 천명은 일도 아니게 모을 수 있을 거다. 근데 그렇게 모인다 해도 소용없다. 정부가 새만금 농토에서 두 필지씩 현지 어민들한테 불하한다고 하면, 아니 살짝 그런 말만 흘려놓아도 어민들은 바로 흩어질 거다”라는 그의 말이 계화도 민심의 전반적인 수준을 짐작케 해주었다. 김제, 부안, 군산을 합쳐 “2만 어민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라고들 하지만, 새만금 반대운동에 대한 호응도가 가장 높다는 계화도가 그런 실정이니 ‘재보상’ 문제에 초연한(“하루라도 갯벌에 나가지 않으면 생계에 지장이 있는”) “일부 주민”과의 연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즉 생명운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부안사람들’의 고충이 짐작이 갔다.
농성장이 철거되던 날도 짧게나마 얘기는 하고 넘어가자. 전시관 앞 집회가 끝나고도 해창산 농성은 계속되었지만, 그 이틀 뒤, 그러니까 6월 10일 월요일 오전, 농성장이 강제철거되었다. 농기공과 현대건설 쪽 사람 100여명이 농성자들을 끌어냈다. 소식을 듣고 갔을 때, 포크레인이 이미 해창산 정상부에 올라가 있었고, 신형록 씨는 팔과 다리를 네명의 노동자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 공사장 입구 흙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너무 꽉 잡혀 피가 잘 통하지 않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철거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고, 부안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신 대표의 결박을 풀게 하고는 폭행자를 지목하게 했다. 인부들과 농성자들이 함께 경찰서로 연행됐고, 양측은 서로 폭행을 당했다며 진단서를 끊으려 했다. 다 함께 부안 성모병원까지 갔다. 진료 대기실에 앉은 그들 모두는 잠시 조용히 텔레비젼을 보았다. 먼 나라 일처럼, 한국과 미국 간 월드컵 축구경기의 휘슬이 막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형록 씨는 입원했다. 이튿날, 나는 부안을 떠났다.
사마리아 여인과 ‘부안사람들’
집에 돌아와 열흘이 지나도록 부안에서 얻은 몸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한국과 스페인 간 8강전 축구경기가 있고 그 다음날 밤인가, 부산에선 비가 내렸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스산할수록 전라북도 부안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땅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피로감을 떨치기 위해 염정우 씨가 들려준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몇번이고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새만금예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계화교회 집사이기도 한 염정우 씨 방에서 나흘인가 잠을 잤는데, 우리는 해창갯벌에 걸린 플래카드, “새만금갯벌에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그 문구보다 더 올바른 표현이 있지 않을까, 즉 방조제 공사로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갯벌에 몸을 주러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방조제 공사와 상관없이 갯벌에 이미 ‘와 있었던 예수님’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실로 갯벌은 그런 존재일 것이다. ‘예수님’이란 이름이 거북하면, 성자(聖者)라고 해도 좋겠다. 일제시대에도 먹을거리 걱정은 몰랐다 할 만큼 갯가 민초들에게 매일의 먹을거리를 내어주었고, 사람뿐 아니라 바닷속 미물들의 알자리가 되어 치어들을 보살펴주었으며, 가부장제의 억압에 시달리는 아낙네들의 가슴을 그 한없는 넓이와 시원한 갯바람으로 어루만져주었으니 이 모든 게 성자의 행적이 아닌가. 이제 곧 새만금갯벌에 닥칠 죽임도 그런 차원에서 보다 의미가 깊어지는데, 하늘이 이 땅에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논과 밭을 베풀어주었는데도 잘못된 국가정책으로 다 망쳐놓고는 죄없는 갯벌을 희생양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죄업으로 대신 죽는, 성자들의 가없는 대속(代贖)의 행렬을 지금 한국의 새만금갯벌이 잇고 있는 것이다.
염정우 씨 방에서 문득 소스라치는 기분에 빠지곤 했는데, ‘사람 예수’, 즉 ‘신의 인격화’라는 고루한 관념을 떨쳐내고 새만금갯벌을 다시 보면, ‘새만금갯벌에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없는 ‘새만금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나던 것이다. 새만금갯벌이 인자한 표정을 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염정우 씨가 베개맡에서 들려준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그래서 내게 더욱 각별했는지 모르겠다. 깊은 밤, 때로 구수하고 때로 열정적인 마흔살 노총각의 그 이야기는 이랬다.
“내가 좋아하는 성화(聖畵) 중에 사마리아 여인을 그린 게 있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여자라고 보면 돼. 이방인이지, 과부고 자식도 없고, 늙었고, 가난하고, 병들었지, 그래서 누구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니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여자지. 근데 그 여자가 예수를 만나게 돼. 우물가에서 예수가 물을 달라고 하는 거야. 왜 나한테 물을 달라 하냐고 화를 내. 그런데, 화내는 여인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빛! 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눈빛! 그런 깊은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되고, 그 순간 구원받는 거야. 그런데 … 나중에 그 여인이 어떻게 되느냐, 자신에게 새 생명의 빛을 준 예수가 처형될 때, 바로 자기 머리 위로 올려지는 예수를 보게 되는 거지. 그 여자 심정이 어땠겠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죽은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는 사마리아 여인을 그린 거야.”
염정우 씨가 말한 그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왜 나는 여인의 입맞추는 행위가 지극히 담담한 빛으로 내 마음속에 떠올랐던 걸까. 아니 누(gnu) 한마리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다가도 맹수의 배 밑에 깔리고 나서는 먼산을 보듯 순박하고 담담한 눈망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일까. 텔레비젼에서 본 다큐멘터리 화면이라 해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격렬히 몸부림치는 게 아닌, 그 어떤 한없는 순종이 나는 감동적이었다.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예수였고, 예수는 그 운명을 받아들였고, 그런 예수의 선택을 또한 받아들였던 여인의 심경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예수의 처형에 엄청난 심적 고통을 받았다 해도, 생명의 참된 빛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예수와의 만남을 후회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를 만난 건 그녀의 인생에서 더없는 축복이었다. 그녀에게는 죽은 예수의 피투성이 맨발도 환한 빛 속에 있었다.
직접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눌수록 ‘부안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쁜 사람들이었다. 나는 신형록 씨, 허철희 선생, 고은식 총무, 염정우 선배 등 ‘부안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이 ‘반대운동’을 하며 손끝 하나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세상은, 작년 5월 정부의 ‘강행’ 발표 이후 새만금갯벌을 이미 죽여버렸다. “새만금간척은 재고가 필요하다”고 하던 이가 전북지역에 와선 “대통령이 되면 새만금, 확실하게 밀겠다”라고 말을 바꾼, 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의 유력 정치인이 새만금갯벌을 죽여버렸다. 아니 새만금사업을 반대한다던 국민 85%의 알량한 환경의식이 새만금갯벌을 죽여버렸다. 새만금갯벌은 완전히 버림받았다. 지금 이 세상에선 그 옛날의 청년 예수처럼 죽어야만 하는 것이 새만금갯벌의 운명인 것이다. ‘부안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죄가 너무나 크다”고 제 가슴을 치며 자학할 일이 조금도 아니다. 죽은 이의 발에 입을 맞추는 사마리아 여인의 담담함은 그래서 ‘부안사람들’의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새만금갯벌이 죽어갈수록 ‘부안사람들’이 지극히 담담해지길 바란다. 자기위안적인 역설만 늘어놓고 있다고 나를 탓하지 말기를.
달밤의 계화도, 그 아름다웠던
마지막으로, ‘부안사람들’이 내게 들려준 이쁜 이야기를 옮겨볼까 한다. 우리 모두의 피로감을 떨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먼저, 조태경 씨가 한 이야기이다.(그런데 덧붙이면, 조태경 씨와 개인적으로 이미 친분이 있었는데, 지난 봄까지만 해도 녹색연합의 간사 신분이었던 그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부안에 내려와 ‘부안사람들’ 회원이 된 지 한달 가량 됐을 뿐이다. 갯벌이 어떤 것인지 책이나 말로만 들었을 텐데, 어느밤 복된 체험을 하고는 듣는 나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까 저녁 물때에 갯벌을 나갔는데, 용석이 형 경운기 타고 한참을 들어갔어. 거기서 백합을 많이 잡았어. 근데 용석 형은 일이 있어 먼저 마을로 돌아갔고, 나중에 나 혼자서 갯벌을 걸어나왔지. 저 멀리, 계화마을 불빛만 보고 걷는 거야. 주위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근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야. 멈춰 서서 들어보니, 형, 정말 놀라웠어. 아주 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이 온통 가득한 거야. 한참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들었어.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엔 귀가 멍멍할 정도였어. 그게 다 뭐겠어. 구멍마다 생명들이 소리를 내는 거잖아. 대합창이야. 새만금갯벌이 밤에는 거대한 노래밭인 거야. 나 진짜 너무 놀랐어.”
방조제 2공구와 4공구에 약 2-3Km씩이 뚫려 있다 해도, 나날이 물의 힘이 떨어지는데 아직도 그런 멋진 노래밭을 펼쳐놓는 새만금갯벌이 너무 대견하다. 새만금갯벌은 마지막 날까지 만물의 본성인 선한 의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또다른 이야기는, 고은식 총무가 해주었다. 어느 대화중에 “이야기문화가 얼마나 살아있느냐가 공동체의 건강도를 따지는 한 핵심이다”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 말을 들은 고 총무가 어린 날을 회상했다.
“계화도 간척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야. 육로가 생겼지만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지. 달이 뜨면, 호롱불 켠 방 안보다 밖이 더 밝아. 그런 달 밝은 밤 계화도가 어땠는 줄 알어? 주민들이 집 앞 골목에 주르르 나와앉는 거야. 수박 깨놓고 이웃끼리 끝도 없이 이바구를 하는 거지. 애들은 애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놀고 …. 밤 10시쯤 되면, 누구야 머시기야 하며 엄마들이 애들 부르는 소리로 온 마을이 떠들썩했어. 전기 들어오고 텔레비젼 생기면서 그런 게 다 사라졌지. 이바구 전통을 살리려면, 계화도로 들어오는 전선을 짤라부려야 혀.”
갯벌과 바다를 낀 작은 마을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달밤의 풍경, 언필칭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가 따로 없다. 그곳의 주민생존권에는 보상금과 다른 차원의 지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부안사람들’의 새만금사업 반대운동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운동’은 바람을 타기 마련이고, 아니 바람을 잘 타야 승리하고, 그러나 그 어떤 바람도, 제 아무리 거세게 인다 해도, 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운동은 종내엔 허무한 것이다. 생명운동 역시 운동인 한 그럴 수밖에 없다. ‘부안사람들’은 그것마저 알고 있을 것이다.
캄캄한 갯벌 속에서 계화마을의 불빛이 이정표가 되었다는 조태경의 걸음처럼, ‘부안사람들’의 앞에는 어떤 불빛이 있는 걸까. 새만금갯벌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불어넣는 실천을 ‘부안사람들’이 해내기를 빌고 싶다. 고난의 길을 계속 가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만, 사마리아 여인처럼, 새만금갯벌을 누구보다 일찍 만났던 ‘부안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의 기도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