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크 라히미 지음 김주경 옮김 《흙과 재》(동문선, 2002년)
기독교의 신약성서에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뒤 무덤을 딛고 다시 살아난 예수가 몇몇 제자들 앞에 나타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루가 복음서에는 낙심한 나머지 스승의 부활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엠마오로 떠나는 두 제자들에게 길 위의 나그네로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요한 복음서에는 박해를 피해 한 집에 몰래 모여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통해 신천지를 건설하려던 기대가 무너지고 낙심천만해 있던 제자들 앞에 나타난 예수의 첫마디는 모두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당시 유대 세계의 평범한 인사말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 영혼의 승리를 증거하는 이 위대한 순간에 예수가 던진 첫마디가 그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심상한 한마디였다는 사실이 올해 부활절을 지나면서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란 나른한 봄날 오후의 정적과 안온함 정도일진대, 예수가 무심히 던진 것처럼 보이는 이 ‘평화’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예수를 다시 만난 제자들은 어째서 그 이후의 순간부터 평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고단한 삶 ― 투옥과 처형으로 점철된 ― 으로 마감하고 말았을까?
지금도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세계의 한 축에는 전쟁과 살육의 소식들이 무겁게 놓여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최신예 미군 전투기가 마치 불꽃놀이하듯 포탄을 작렬시키는 CNN의 뉴스 화면, 악마 부시와 빈 라덴의 지리한 설전뿐이었다. 무엇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전투기의 불꽃놀이와 부시와 빈 라덴의 얼굴로 점철된 텔레비젼 뉴스는 이 전쟁의 진실을 철저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은 악마 부시와 빈 라덴의 싸움이 아니며, 당연하게도 미군 특공부대원들과 탈레반 전사들의 싸움도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감정을 깨끗이 잘라낸 ‘물질 덩어리’가, 태어난 자리에 붙박혀 인간사의 희로애락 속에 스러져갈 인간의 운명을 갈가리 찢어놓는, 민초들의 삶의 ‘평화’에 대한 도전이면서, 인간의 존엄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그들의 높은 정신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때때로 고통은 녹아내려서 우리의 눈으로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말이 되어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기도 하지요. 아니면 우리 안에서 폭탄으로 변해 어느날 갑작스런 폭발로 우리를 파열시키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프간 출신의 재불 망명작가 아티크 라히미의 소설《흙과 재》는 텔레비젼 화면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정밀한 과학적 분석으로도 그릴 수 없는 전쟁의 내면적 진실 ― ‘고통’과 ‘슬픔’ ― 을 그리고 있다.
다스타기르라는 한 아버지가 있다. 그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정부군과 이슬람 반군들 사이의 내전의 와중에서 소련군의 폭격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몰살당할 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아내와 며느리는 모두 죽었고, 그의 손자 야씬은 귀가 멀어버렸다. 그는 탄광에서 일하는 아들 무라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손자를 데리고 탄광으로 가는 길 위에 서있다.
이 소설은 한 건널목 초소 앞에서, 지나가는 트럭을 기다리며 번민을 거듭하는 다스타기르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된다. 강물은 바짝 말라있고, 말라버린 강바닥에는 가시덤불만이 무성하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황량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노인과 귀머거리가 된 그의 손자가 앉아있다. 손자는 자신이 귀머거리가 된 줄을 모른다. 그는 어느 순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벙어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야씬은 왜 갑자기 탱크들이 세상 모든 것에게서 소리를 빼앗아 갔는지를 할아버지에게 재우쳐 묻지만, 착해 빠진 할아버지는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손주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다.
― 뭐하는 거냐, 얘야? 맙소사! 사과를 먹어야지, 그렇게 하면 쓰겠니! 너는 야씬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운다. 아이가 소리친다. ― 하지 마! 이거 놔! 왜 이 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거야?
다스타기르는 산과 같은 공포에 짓눌리고 있다. 그것은 이 처참한 상황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알리는 것이 두려운 한없이 허약한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의 눈앞에는 얼마 뒤 맞닥뜨릴 아들과의 대면에 대한 공포감으로 어질한 환상만이 밀려들 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잠들지 못한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인 그의 터번은 먼지로 자욱하고, 신께 바치는 기도도 잊어버린 그에게 위로란 그저 나스와르라는 독한 담배잎을 혀밑으로 밀어넣는 것뿐이다.
무라가 지금 네 앞에 서서 묻고 있다. ―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 모두들 별일 없지요? 한 일주일 전부터 이 얼굴과 이 질문이 네 피를 바짝바짝 마르게 한다. 그래, 네 머리로 그 대답을 할 수 있겠느냐?! 아, 이 질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아들이 ‘왜!’라고 묻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 네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네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조용히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평화로이 잠들지 못한 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구나. 눈을 감기만 하면 무라와 그의 어머니가 보이고, 야씬과 그 아이의 엄마가 나타난다. 그리고 흙먼지와 불꽃들과 아우성 소리와 눈물들이 사방에서 흩날린다. … 그러면 너는 어찌할 수 없어서 다시 눈을 떠야 한다. 네 두눈은 불타는 듯하다. 불면증으로 타들어가는 눈.
다스타기르 앞에 건널목 상점 주인 미르차 카디르가 등장한다. 그는 정오가 되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신께 정중한 기도를 바치는, ‘모든 사람의 스승으로 대접받는’ 현자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아들이 점령군의 장교가 되어 소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자 아들과 조용히 의절하고 만 과거가 있다. 그는 친절하게도 다스타기르와 손자 야씬에게 마실 물과 대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탄광으로 가는 트럭을 기다리는 동안 다스타기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슬픔을 어루만져준다. 다스타기르는 그를 통해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뒤범벅이 된 제 슬픔의 얼레를 한가닥한가닥 풀어낸다.
그날 난 방앗간에서 일을 하던 중이었다오. 갑자기 굉장한 폭음이 들리기에 놀라서 뛰어나왔지요. 밖으로 나오자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불바다와 잿더미뿐이었소. 그때 내가 어찌하여 도착 전에 파편이라도 맞아 죽어버리지 못했는지 모르겠소!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지 않고 살아서 그렇게 처참한 꼴들을 두 눈으로 봐야 했단 말인지 … 난 매캐한 연기와 불꽃 속을 뚫고 미친 듯이 달려갔소. 도중에 야씬의 어미를 봤는데 … 그 아이가 글쎄 발가벗은 채로 뛰어가고 있지 않겠소. 울부짖는 게 아니라 웃고 있더이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미친 여자가 되어버렸던 거요. 며느리가 목욕탕에 있을 때 폭탄이 터진 거였소. 차라리 내가 두 눈을 잃어서 그 아이가 그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꼴을 보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 네 목은 폭발 직전이다.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너는 터번의 끝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낸다.
미르차 카디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스타기르는 처음으로 그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삼촌의 무릎에 머리를 괴고, 선과 악의 싸움에서 패배해 몰락해가는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영웅의 삶을 노래한 서사시를 들으면서 안타까움으로 눈물짓던 그의 어린 시절을. 그의 삶에서 평화가 있었다면, 소련군의 침공이 있기 전의 시절, 아름다운 설화와 순수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바로 그 시절이었으리라. 미르차 카디르는 이 절망적인 시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어르신, 지금은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이들보다 더 복되고 행복한 때이지요. 어쩌겠습니까! 험한 시대를 만난 겁니다. 우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걸 잃어버렸어요. 권력이 인간의 신앙이 되었지요. 신앙이 우리의 힘이 되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이제 인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존엄성을 간직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용기 있는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
지금은 다시 조하크의 뱀(조하크는 페르시아의 서사시〈샤나메〉에 나오는 전설적인 폭군으로,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두마리의 뱀 덕분에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는데, 이 뱀들은 왕국 젊은이들의 골을 먹고 산다)들의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젊은이들의 골을 빼먹고 살아가는 뱀들 말입니다. …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슬람 문명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에 대한 별다른 이해도 없는 우리들이 이 슬픔에 동참하게 되는 데에는 몇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아버지 다스타기르와 지혜로운 가게 주인 미르차 카디르와, 하다못해 다스타기르를 탄광까지 태워주는 트럭 운전수 샤마르에게까지 한결같은, 깊은 신앙심과 순수한 마음 때문이다. 그들이 무심결에 토해내는 상투적인 말들에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 ― “신께서 축복하시길! 형제여, 우린 여기가 좋소이다. 햇볕이 있어서 춥진 않아요.” “신께서 아시겠지만, 형제여, 그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오.” “오, 건널목지기 형제여! 자넬 성가시게 했던 걸 용서해 주게. 자네를 낳으신 아버지께 신의 축복이 있기를!” “야씬을 당신과 신의 손에 맡기겠소.”
그들이 사용하는 상투적인 관용구들에는 거의 이 ‘신(神)’과 ‘형제’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언어 구조가 언어 사용자들의 심층적인 무의식을 일정 정도 드러낸다고 보면, 그들은 무의식 속에서도 ‘신’과 ‘형제’라는 조화로운 세계를 그리워하는 깊은 신앙심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목숨처럼 중요한 것은 신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며, 이것을 짓밟혔을 때 그들은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다스타기르는 아들 무라에게 가족의 불행을 알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끔찍한 공포를 갖고 있다. 아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느니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나았다고 그는 진심으로 믿는다. 그러나 또한 그는 아들에게 며느리 제이나브가 폭격 당시 불구덩이 속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미쳐버린 채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에 더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의 괴로운 환영(幻影)에 등장하는 알몸의 제이나브는 음부만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그 음부만은 베일로 가려주기 위해 환영 속에서도 그는 처절하게 투쟁한다. 그의 아들 무라는 자기 아내를 모욕한 이웃 남자에게 복수하고 감옥살이를 한 뒤 탄광으로 떠났던 사람이다. 요컨대 그들은 ‘상처받은 명예’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 어수룩하고 착해 빠진 노인의 내면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명예감.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불행을 알려 내면의 평화를 헝클어놓는 것을 자신의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이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스타기르는 손자 야씬을 미르차 카디르의 가게에 맡겨둔 채 트럭을 얻어 타고 아들 무라가 있는 탄광으로 떠난다. 그 길 위에서 그는 또다시 숱한 번민과 괴로운 환영에 사로잡히지만 아들에 대한 그리움도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군의 앞잡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탄광에서 그는 아들을 만나지 못한다. 가족의 몰살 소식을 들었을 때 무라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다 불 속에 몸을 던지려 하였으나, 결국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고 탄광 책임자는 증언하면서, 무라가 이 탄광에서 크게 성공할 재목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음 주에 무라를 문맹퇴치 교육 강좌에 보내려고 하지요. 거기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울 겁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무라도 그럴 듯한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광부들의 대표자로 그를 뽑았어요. 그는 아주 똑똑하고 근면하고 혁명적인 젊은이니까요. …
다스타기르는 낙담한다. 그는 무라가 자신의 영혼을 “돌에다 불에다 석탄에다 그리고 자기 앞에 앉아있는 석탄 냄새를 풍기는 이 사내에게 팔아넘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낙담한 채 돌아나오는 다스타기르에게 탄광 책임자의 사환이 몰래 전해준 말은 그렇지 않았다. 탄광의 책임자는 탄광에서 제일 가는 일꾼인 아들 무라의 이용가치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는 무라의 고향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은 반군들의 소행이었고, 그의 아들 야씬과 아버지 다스타기르까지 모두 이미 죽어버렸다고 거짓말하여 무라를 체념하게 만든 것이다.
이제 다스타기르는 사환에게 자기 보따리를 풀어 자신이 살아있다는 표시로 나스와르 통을 무라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무라는 네 나스와르 통을 알고 있다. 첫 월급으로 그것을 사다준 사람이 바로 무라이기 때문이다. 무라는 그 나스와르 통을 보자마자 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가 널 찾아오면, 넌 네 아들 무라를 다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오지 않는다면, 더이상 무라는 네게 없는 자이다.
다스타기르는 폐허가 된 고향 마을로 되돌아간다. 나스와르를 씹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미 그것은 사환을 통해 아들의 손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이제 아들 무라는 아버지가 던져준 선택항 속에 있다. 이 폐허 위에서 아들 무라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 부활한 예수의 현현(顯現)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예수는 절망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인사했고,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주저없이 ‘평화’를 위한 고단한 싸움의 길에 나섰다면, 아버지의 나스와르 통을 받아 든 다스타기르의 아들 무라는 어떻게 했을까.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프간은 붉은 군대와 미국을 등에 업은 극단주의자들의 싸움 속에서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제는 다시 미국과 그 극단주의자들의 싸움으로 현세의 지옥이 되어있다. 이제 전세계는 ‘인간 영혼의 스승의 나라’로 불러도 아깝지 않을 아프간을 그저 ‘전쟁으로 망가진 세계 최빈국’으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무라는 어떤 선택을 하였을 것인가. 아프간의 지난 20년간의 역사는 ‘존엄’과 ‘평화’에 대한 반역이었을진대, 그것은 무라의 선택이 어떠했을지를 암시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무라의 선택을 남겨둔 채 고향 마을로 돌아가는 아버지 다스타기르의 행동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너는 걸음을 늦춘다. 잠시 멈추어 선다. 고개를 숙인다. 잿빛 흙을 손가락 두개로 조금 집어 혀밑에 넣는다. 그리고는 길을 간다. …
이제 다스타기르는 나스와르 대신 폐허의 땅 잿빛 흙을 그의 혀밑에 집어 넣는다. 스승 예수가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다면, 아버지 다스타기르는 상처입은 ‘존엄’으로 괴로워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의 탱크 앞에 죄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무감하게 스러져가고 있고, 상징적인 맥락에서는 이미 전쟁터가 되어버린 우리들 나날의 삶터에서도 ‘평화’와 인간의 ‘존엄’은 스러져가고 있다. 나스와르 통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잿빛 흙을 집어 혀밑에 넣고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앞에 선 우리들의 선택은 어떠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