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바탕
별볼일 없는 사람인데 한번 와서 이야기나 하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 한살림운동의 선구자인 박재일 선생하고 나하고 이십여년 알고 지내면서 일을 거들고 있는 형편입니다.
얼마 전에 올림픽이 개최되어 전세계인이 우리나라를 찾아왔어요. 물론 우리는 앞으로 전세계를 향해서 생활하게 되겠지만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올바른 삶이 있으면서 지금 전세계를 맞아들이고 있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올림픽을 잘 치르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되고, 또 외국손님 오는 데는 이렇게 저렇게 대접해야 된다, 그것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 우리 본바탕, 우리 것이 제대로 있느냐 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 것이 세상의 제일이라는 그런 태도를 갖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성실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 우리 전통으로 내려오는 맥 속에서 누가 봐도 그것은 옳다, 누가 봐도 그것은 거짓이 아니고 참다운 거다, 그런 걸 우리가 갖고 있느냐는 거지요. 없습니다. 그런 걸 가지고 있지도 않고 이어받지도 않았어요. 그냥 무시해버리고. 그렇게 되니까 전세계 사람들을 맞아들여서 우리 전통적인 걸 보여준다고 하면서도 얼렁뚱땅 전부 형식으로만 맞춰 얼버무리고 넘어갑니다. 그것이 우리 생활의 내면에 깔려 있느냐, 없다 이 말이에요.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다 보니, 뭐라고 붙일 딱지가 없어요. 라벨이 없단 말이야. 라벨이 있다고 하면 용공분자 소리를 수십년, 근 사십년을 들어왔어요. 그 이유는 결국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있기 때문인데요. 이 땅에 사는 주인인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안되었을 거란 말이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전통, 우리 사는 방식을 너무도 무시해왔어요.
하지만 이것은 비단 우리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가 지금 그런 형편이죠. 한마디로 주판을 잘못 놓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주판을 잘못 놓게 되면 완전히 털어버리고 다시 놓아야지요. 이것이 이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과제입니다. 여지껏 애써오던 것이 아까우니까 이건 놔두고 말엽에서, 끝에서 어떻게 좀 고쳐가려고 한다면 이 한살림운동은 되지를 않아요.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우리 생활이 어쨌든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걸 단번에는 고치기가 어렵겠지만,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마음에서 인정하고 그러면서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바로세워가는 그것이 중요하다 그런 얘기죠. 그것이 제대로 안되면 소용이 없는 거라.
탐욕과 문명의 위기
그러면 이제 이렇게 되어 돌아가는 원인은 뭐냐. 지금 세계문명은 핵무기, 공해 같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어요.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의 욕심에서 온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맞아요. 저도 욕심이 있어요. 욕심이 있는데, 그러나 욕심을 자꾸 줄여야 한다 이거야. 줄이지 않으면 되지를 않아요. 무농약 식품을 갖다가 우리만 먹겠다, 우리 식구만 먹겠다, 아주 나만 먹기가 곤란하니까 이웃끼리만 조금 먹겠다, 그런 자세 가지고는 안되는 거라. 무농약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좀 오래 살아보겠다고, 혼자만 편리하게 살고 혼자만 떵떵거리고 살려고 하는 그런 기초 위에서는 한살림운동이 되지를 않아요.
지구가 병이 들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대기가 오염이 된 이런 공해의 일체가 욕심에서 온 거란 말이야. 자연보호 하자고 하면서도, 인간들은 자연을 착취하는 생산을 계속하고 있단 말이에요. 병 주고 약 주는 거지. 그렇지 않습니까, 이치가. 원인에 대한 방향전환을 하지 않고 계속 문제의 결과만 놓고 어떻게 땜질을 하려 드니까 그게 되나요? 되지를 않지요.
여러분, 지구는 한정이 돼있어요. 그런데 가령 석유를 보면요, 그 석유라는 것은 백년, 이백년마다 계속 지구 내부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원시적인 광물질이란 말이에요. 수십억년 전에 생겨난 것인데, 그렇게 오래 전에 생겨난 것을 현대에 와서 무작정 쓰는 거라. 그러니까 지금 철이요, 동이요, 모든 자원이 고갈상태에 들어가고 있어요.
지난번에 어떤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에 가니까 나무가 울창하더라, 미국이고 구라파 가보면 선진국가는 참 나무 잘 가꿨더라, 그런 얘기를 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듣다가 ― 이건 내 나쁜 버릇인데 ― 역겨워져서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그렇게 반문을 했어요. 왜? 자기네 나무를 울창하게 가꾼 그 사람들이 지구 위에 있는 나무를 숱하게 없애는 사람들이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마치 제 집에서는 무공해식품 먹고 제 집에서는 맑은 공기 마시며 살면서, 제 집 바깥은 엉망이 되어도 좋다는 얘기하고 같거든. 그래봤자 저도 죽는데.
이 문제는 뭘 얘기하느냐. 가령 일본이 일년 동안 쓰는 펄프, 종이 등등을 일본 안에서 나는 것만 가지고 쓰면 일본은 일년 만에 새빨개져요. 통계가 몇해째 그렇게 나옵니다. 미국의 삼림연구소에서 나온 작년, 재작년 연구지를 보니까, 재작년에 앞으로 이십년이면 말레이지아 반도 정도의 숲만 남고 적도지대의 숲은 거의 다 깎여져서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미 그렇기 때문에 대기권의 산소가 줄어들고 있고 생태계는 엉망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그런 발표가 있었어요. 이런 상황이니까 나만 다치지 않고, 나만 어떻게든 해결하고, 그래 가지고는 되게 돼있지를 않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한살림운동은 무농약 식품을 먹는다 안 먹는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이 문명을 가지고 우리가 지구상에서 계속 살 수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그런 차원에 있다 이 말이에요.
애당초 방향이 잘못 잡혀 있어요. 애초에 주판을 잘못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어떠한 방향으로 전환해 나가야 할까요.
욕심 없이, 마음을 비우고
앞에서 잠깐 욕심을 줄여야 된다, 비워야 된다는 얘기를 했는데, 먼저 공(空)에 대한 얘기를 해봅시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아버지가 보입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그랬어요. 그럼 어디 계시냐고 다시 물었겠지요.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 안에 계신다” 그랬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바로 그것이 분리할 수 있는 거냐, 우리와 분리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절대와 상대는 분리할 수가 없어요. 하느님 아버지가 저 공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지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일체에 있는데 그 일체는 바로 내 안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이치가 뭐냐. 이 땅이 없이 우리가 있을 수 있어요?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여기서 떠드는 지금 나도 없고 여러분도 없어요. 또 하늘에 태양이 없으면 우리가 이렇게 있을 수 있어요? 없다 이 말이에요. 공기가 없으면, 물이 없으면. 바로 그 이치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은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서로 만물이 있기 때문에 하나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우리 박재일 선생하고 김지하 씨하고, 우리 운동을 한살림이라고 이름을 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결정을 했대요. 날 보고 한살림이라는 게 어떠냐고 그러데요. 그래서 야, 그거 기찬 말씀이다, 기차다 그랬지. 바로 그거예요. 한살림은 서로 다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계산을 하려고 든단 말이에요. 그런데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자리를 보러 갈 수 있어야 됩니다.
불가(佛家)의 선(禪)에 허회자조(虛懷自照)라는 말이 있어요. 자기를 비운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노자의 도덕경에도 있고, 또 성경에도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가 산으로 자꾸 올라가시지요. 세상에 내려가니까 자꾸 따지고 이것저것 얘기를 해.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욕심만 부려. 그렇게 되니까 답답해서 산으로 올라가서, 어찌 하오리까 하거든. 가서 좌선을 해요. 하느님과의 대화란 건 뭐냐.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그 비운 마음을 보는 거예요.
제자들이 “선생님, 저희들이 가면 저놈들이 죄다 도둑놈들이고, 저희들을 죽이려고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뭘 걱정을 해. 마음 탁 놓고 가. 그러면 성령께서 다 가르쳐줘.” 그 성령이 뭐냐. 슬기, 영(靈)이라는 얘긴데, 그 영은 뭐냐. 바로 생명이에요. 그 아버지의 세계, 빈 세계에서는 그냥 비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일러줘요. 뭘 지금서부터 계산해? 계산하면 욕심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겁내지 말고 가거라. 겁내지 마라” 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은 불가에도 있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들하고 어디를 가는데, “선생님, 여기가 산적의 소굴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는 데입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석가모니께서 “아, 그래? 그럼 내가 보고 가야지.” 그래서 거기를 올라가면서 “나와라” 하니까 산적대장이 나오더란 말이야. 나오더니 “너 거기 있거라” 하고 소리를 지르더란 말이야. 칼을 딱 차면서 말이지. 그러자 석가모니가 “난 가만 있는데 네가 오고 있잖아” 그랬대요. 그게 뭐냐. 석가모니는 천하에 적이 없어. 쟤가 일등 하면 안되고 내가 일등 해야 될 텐데, 우리가 금메달 따야지 쟤들이 금메달 따면 안되는데, 그런 게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산적놈은 세상의 좋다는 것은 다 껴안으려 드는 놈이에요. 그래서 석가모니가 저기 딱 나타나니까 마음이 움츠러들어서 찔러죽일 생각까지 하는 거예요.
욕심이 없는 자는 두려움이 없는 거라. 계산이 없어요. 어차피 상대적인 세계는 선이다 악이다, 길다 짧다, 전부 반대가 있게 돼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악이 없으면 선이 없다 이 말이에요. 또 장점이 없으면 단점이 없어. 일등을 할래도 이등 해주는 놈이 있어야 일등을 하잖아요?
요새는 그런 어머니가 안 계실 거예요. 예전에 우리가 시골에서 학교 다닐 적에는요, 자식이 통지표를 어머니한테 갖다바치면서 “엄마, 우리반 애들이 오십명인데 내가 오십째 했어” 그러면, “야 잘했다” 그러거든요. 지금 보면 옛날 어머니들 참 무식하고 형편없구나 하지만, 사실은 이게 참 중요한 거예요. 옛날에 어머니들이 어디 공부를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들이 오십째가 잘한 건지 일등이 잘한 건지는 몰라요. 그런데 그걸 몰라도 좋다 이 말이에요. 그 어머니들에게는 조건이 없어요. 아무런 조건이 없다고요. 그저 이 자식 건강하고 무병하고 장수하고 동네 아이들하고 말썽 피우지 않고 잘 크고, 그리고 이놈이 좋은 일 해주길 바라고 그러지, 일등 이등 삼등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은 어때요? 내 자식이 꼭 일등 해야 되고 요놈이 꼭 출세해야 되고 요놈이 꼭 돈 많이 모아야 되고 ?? 그러니까 공해가 올 수밖에 없잖아요. 일등만이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되는 이건 엄청난 공해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런 엄청난 짓을 우리가 겁도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행하고 있으니, 우리가 공해 자체 아니에요?
자애 ― 어머니가 자식을 품어안듯
이제 노자의 말을 빌어서, 우리가 한살림운동을 하면서 꼭 지녀야 할 세가지 마음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노자는 이걸 삼보(三寶)라고 그랬어요. 세가지 보배라는 말인데, 자애, 검약, 겸손, 이 세가지입니다.
그럼 먼저 자애란 뭐냐.
예전에 명절이나 제사 때면 고기며 떡이며 음식을 차렸다가 남은 것은 다락에다 올려두잖아요. 그런데 명절이 다 지나고 그 맛있는 것이 분명히 다락에 있는데도 어머니는 그걸 우리한테는 안 내놓으신단 말예요. 그래서 “어머니, 그거 맛있는 음식 좀 주세요” 하면, “객지 가있는 누나가 방학에 오면 그때 같이 먹자” 그러시거든요. 저는 형제가 모두 오남매였어요. 제가 소학교 다닐 적에 누님은 여기 숙명학교를 다니느라 객지생활을 했어요. 요새야 먹을 게 풍족하고 맛있는 음식도 널려 있어서 그러지도 않겠지만. 어머니가 그러시면, 어머니 속을 이해도 못하고 내놓으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어머니 안 계실 때 몰래 다락에 올라가서 훔쳐먹기도 하고 그러지요. 그러면 어머니 말씀이 “다섯 손가락 깨물어봐라.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 그러세요. 이게 자애지요.
또 먹을 게 있으면 형제끼리도 서로 더 먹겠다고 다투고 그래요. 힘센 놈이, 약삭빠른 놈이 제걸 먼저 먹고 다른 형제 것까지 뺏아먹으려 들잖아요. 그러면 이제 싸움이 난단 말이에요. 그때 “이놈들, 왜들 이러느냐” 하고 아버지나 어머니가 회초리 들고 나오셔서는 “넌 네것 다 먹고 동생 것 뺏아먹으면 안되잖아” 하시고, 또 다른 자식한테는 “넌 좀 나눠주면 어떠냐” 이렇게 나무라세요. 이게 옳은 거예요. 이렇게 뚜렷이 옳고 그름, 선악을 두지 않고 모두를 품는 마음이 바로 자애란 말이에요.
옛날에 머슴이 주인 방에 들어갔어요. “편히 쉬셨습니까?” 그러자 주인이 물어요. “여보게, 오늘 따뜻하지?” “아니올시다. 몹시 추운 날입니다.” “뭐가 추워? 방이 이렇게 뜨뜻한데.” 아랫목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사람이니까 머슴이 추운 줄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경우가 다르고 사정이 다른 거라. 사람을 부리려고 해도, 종살이하는 머슴의 사정을 다 꿰뚫어 봐야지요. 머슴집에 식구들이 제대로 먹는지, 불이나 제대로 때는지, 겨울에 옷이나 제대로 입어서 견딜 만한지, 그걸 전부 헤아려야지요. 가마 멜 놈이 밥을 제대로 먹어 배가 뜨뜻하고 몸이 뜨뜻해야 가마를 멜 수 있지 않겠어요.
민주주의 하자고 난린데, 요새 산골마다 가보면 쓰레기가 이렇게 쌓여있지 않아요? 이것만 봐도 민주주의 아직 멀었죠. 좋은 거는 나만 가지면 된다 이 심보 아니에요? 나만 즐기고 가지면 되고 남이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남의 사정을 헤아릴 줄 몰라가지고는 민주주의가 안됩니다.
자애의 관계라는 건 말이지,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모두를 내 몸으로 인정하는 관계예요. 이 자애의 정신이 한살림의 기본 정신입니다.
검약 ― 만물을 알뜰하게 모시고 이웃과 나누라
그 다음이 검(儉)인데요. 노자에 “치인사천막약색(治人事天莫若嗇)”이라는 말이 있어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알뜰함만한 것이 없다”는 말씀인데요. 그런데 지금은 알뜰할 수가 없게 돼있어요. 왜 알뜰할 수가 없게 돼있느냐.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죄다 욕심판이에요. 그걸 하면 돈이 얼마나 드느냐, 그거 하면 얼마나 받느냐, 박사 되면 월급을 얼마나 받나, 사장 하면 얼마를 받느냐, 전부 이 관계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돈이 기준이 돼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얘기도 안되는 거라. 옷도 유행에 따라서 맞춰 입지 않으면 그 사람은 흰 오리떼 속에 검은 오리 모양 끼이지 못하는 거죠. 세상이 그렇게 돼 있잖아요.
이제 그렇게 되니까 지구가 파멸상태로 가고 있어요. 인간의 이 문명이란 게 어느 지경까지 왔느냐. 미국도 그렇고 소련도 그렇고, 영국, 독일, 불란서 같은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문화인이라고, 문명인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완전히 넌센스죠. 그것을 받쳐주고 있는 오늘날의 학문, 오늘날의 문화, 오늘날의 문명이 도대체 뭐예요. 자원을 누가 많이 차지해서, 누가 많이 만들어서, 누가 많이 팔아먹느냐 하는 데 모두들 혈안이 되어있잖아요. 이익을 많이 남기는 놈이 왕인 세상이에요. 그것은 반(反)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거예요. 그것이 얼마나 낭비를 가져오고 무한정한 소비를 가져옵니까. 그러면서 결국은 한정되어 있는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켜버리는 거라.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해서 돈을 벌려고 아우성을 치다니, 도깨비도 이런 짓은 안해요. 심각한 문제지요.
앞에서 말한 ‘색(嗇)’자를 봅시다. 요게 ‘인색하다’고 쓸 적에 ‘색’자인데요. 그런데 인색하다는 건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얘긴데, 여기서는 사물을 ‘알뜰히 여긴다’는 얘기예요.
동학의 2대 교주이신 해월 선생은 밥 한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의암 손병희 선생도 밥 한사발은 백부소생(百夫所生)이라, 즉 많은 농민들이 땀흘려서 만든 거다, 그러셨어요. 그런데 사실은 사람만이 땀흘려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일체가 앙상블이 되어서, 하나로 같이 움직여서 그 밥 한사발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밥 한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으로 되는 거지요. 한걸음 더 들어가보면, 해월 선생 말씀에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씀이 있어요.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말이에요. 동학에서 일컫되 인내천(人乃天)이라, 그리고 사람만이 하늘이 아니라 곡식 하나도 한울님이다 이 말이야. 돌 하나도,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자연을 무시하면서 ― 그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마찬가지예요 ― 무한히 자원을 개발해서 제대로 분배만 하면 그게 복지고 민주주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 한계에 와 부딪치고 있잖아요. 이래가지고는 이제 인류가 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실 자연의 모든 존재가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고 있어요. 그 뒷바라지가 없으면 사람은 살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밥 한그릇의 이치를 알게 되면 만사를 다 알게 되느니라 하셨고, 그래서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거예요. 중요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거기에 갈비가 있어야 되고, 외국에서 들어온 무슨 좋은 음식이 있어야 되고, 그래야 잘 먹는 거다 하는 생각, 그거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지. 그 길로 우리가 잘못 온 거지. 그렇지 않아요?
요새 영양문제에 대해서 말들이 많잖아요. 무슨 영양분이 있어야 되고, 어떤 것은 없으면 안되고, 뭐 영양학 같은 학문까지 있어서 이렇게 떠들어대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제 차원을 달리해서 봐야 해요. 오늘날 과학이란 게 전부 분석하고 쪼개고 비교해서 보는 건데, 우리는 통째로 봐야 해요. 쌀 한알도 우주의 큰 바탕, 빽이 없으면 생길 수가 없잖아요. 벌레 하나도 이 땅과 하늘과 공기와 모든 조건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어.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말이지, 벌써 땅이 나를 받쳐주고 있잖아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비춰주고 있고, 이 맑은 공기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줘요. 한 오분만 코를 막아봐. 누구든 죽지. 만물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일하는 만민(萬民)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한몸으로 꿈틀거리고 있어요. 모두가 이 한몸을 지탱해주고 있단 말이야.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알뜰함만한 게 없다” 했어요. 그 얘기는 뭐냐. 우리가 농사지은 거, 그리고 모든 물건을 알뜰히 해서 소중히 쓰면 많은 사람에게 베풀 수 있어요. 알뜰하게 해야 남는 것을 주지.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게 바로 한살림의 정신이에요.
그런데 요새 우리 사는 꼴이 이 검약과는 멀어도 한참 멀어요. 우리 옛날 속담에 “너구리 굴 보고 빚돈 내 쓴다”는 말이 있어요. 너구리가 지금 내 손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나 너구리 있어. 그거 잡히고 돈 좀 꿔줘” 그렇게 허황하고 어리석은 짓을 한다는 거지요. 내가 월급이 얼만데, 저 물건 당장 탐이 나니까 월부로라도 들여놓자고 그러고, 다달이 그 빚을 물고 가잖아요. 이건 제대로 사는 게 아니라 겉도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을 돕기는 어떻게 남을 도와? 이미 빚살림을 하고 있는데.
여기 아주 좋은 장농이 하나 있다 칩시다. 내가 죽고 손자대, 증손자대까지 물려 써도 까딱없는 좋은 건데, 그런데 이게 요새 유행하는 이태리 장하고 멋이 좀 달라. 그러니까 그 멀쩡한 장농을 고층아파트에서 내버린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새 것을 들여와. 그것도 빚으로 들여와요. 아무개네 집에도 그거 들여오고 아무개네 집에도 들여오고 ?? 그게 또 식상해지면 이제는 돈있는 사람들이 옛날 것을 골동품이다 뭐다 해서 비싼 돈 주고 다시 사서 모으고, 죄다 그 짓 아니에요? 다들 뭐에 홀려 있는데, 장사치들이 그렇게 최면을 안 걸면 어떻게 장사를 해먹겠어요.
미국에서 흑인들이, 마틴 루터 킹 같은 분이 앞장을 서서 “흑인도 사람이다” 하고 팔을 걷고 인권운동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전세계에 “Black is beautiful” 검은 것은 아름답다, 흰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해가지고 검은 인형들이 나도는데, 기왕이면 이걸 흑인들이 장사를 하면 오죽이나 좋겠어. 하지만 이것도 백인 장사꾼들이 울궈먹더라고. 이 한국에도 웬만한 집에 보면 그때 쏟아져나온 까만 인형들이 다 있어요. 아무튼 사기치고 울궈먹는 데는 이런 머리좋은 장사치들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잘났다는 사람, 세상에 좋다는 거, 이런 데 홀리지 말아야 해요. 거기에 홀리면 가는 거요. 다 같이 가니까 가는 줄 모르고 가는 거요.
옛날에 내가 5·16 쿠데타 나고 사흘 만에 유치장에 들어갔는데, 그날 내가 제일 늦게 잡혔어요. 나하고 같이 일 거들던 분들이 먼저 다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데, 밤 열두시가 지나서 특무대를 거쳐 딱 들어가니까 “야, 만세” 하더라고. 아, 내가 들어가면 싫어해야 될 것 아닙니까. 동지가 하나라도 잡혀 들어오면 재미가 없는 것 아니야. 그래도, 지옥도 같이 가니까 반갑다, 이 얘기지. (웃음)
지금 얘기가 “치인사천막약색(治人事天莫若嗇)”이라, 알뜰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요새 더러들 일본 가서 공부를 하고 와요. 또 일본 관찰하고 오기도 하고. 일본 어느 재벌의 회장 댁을 갔더니 집이 겨우 이십평이더라 이거야. 내외가 사는데. 하기야 그렇지. 늙은 할망구하고 사는데 이십평이면 과하지. 그런데 식탁에 보니까 반찬이 아주 몇개 없고 아주 소박하게 살더라 이거야. 기름지게 먹어봐야 동맥경화증이 생기고 성인병만 생기니까 그렇게 됐겠지. 왜 그것 때문에 놀라요? 그 사람들이 거기까지 온 것은 세계 약소국가들에서 장사 기차게 해먹으면서도, 그래 봐야 별볼일 없으니까 소박해진 거야. 뭘 놀라, 놀라긴. 우린 그렇게 둘러가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서, 하늘과 땅과 대자연, 그속에서 이 만물과의 관계를 깨닫고 우리 자리를 깨달아서 ‘알뜰함’과 ‘소박함’을 배워야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습니다만 벌레 하나, 돌 하나, 풀 하나에 다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거예요. 카톨릭에 보면 아씨시의 프란치스꼬 있잖아요. 그분의 평화의 기도는 얼마나 멋있는 기도입니까. 그런데 이건 교회 가면 입으로만 외는 거라. 가슴으로 하지 않고. 내가 그러니까 그렇다는 얘기요. 여러분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 양반은 말이지 들에 가면 꽃하고 대화를 하잖아. 새하고 대화를 하고. 들짐승들하고 대화를 하고. 하느님 아버지가 함께하는 거를 거기서 보는 거라. 그런데 이 얘기를 요새 교회에서는 기가 막힐 정도로 안해요. 교회 안에만 하느님이 계신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을 다스리고 ― 다스린다는 얘기 재미없지요? 사람을 모시고 하늘을 섬기는 길은 알뜰함만한 게 없다는 거요. 알뜰해야 모시고 대접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농부가 타작한 뒤에 마당에 콩 하나 팥 하나가 있을 때 그걸 집어서 모으잖아요. 그 작은 콩 하나 팥 하나 속에 우주 전체의 힘이 들어있는 거라. 만남이 거기 들어있고, 생명이 있는 거라. 알뜰하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겸손 ― 세상에서 남보다 앞서려 하지 마라
그 다음이 겸손이에요. 겸손해야 되요. 지금 저처럼 이렇게 방자하면 안되고. (웃음) 겸손은 뭐냐. 세상에서 남에 앞서려고 그러지 말란 말이에요. 지금은 정반대 아닙니까? 요새 가끔, 데모 잘하는 운동권 학생들이 나를 찾아와요. 다들 민주주의 하겠다고 그러지요. 열혈남아들이고 용기있는 학생들이에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예를 들면 “자네, 여기 과반에 사과가 여러개 놓여있다. 자네는 어떤 것부터 먹겠는가?” 물으면 대답을 못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냥 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 다시 물어요. “여기 우리 대여섯이 둘러앉아 있는데 이런 과반에 과일이, 사과가 놓여있는데, 그중에는 좀 이쁜 사과도 있고 찌그러진 사과도 있고 더 잘난 사과도 있고 그래. 그럼 어떤 것부터 먹어야 돼?” 그래도 답변을 못해. 왜 답변을 못하느냐. 여지껏 가정의 교육이나 사회의 교육이나 세상의 교육이 그런 거라. 좋은 것 먼저 제가 집어먹도록 가르치잖아요. 다 같은 그렇고 그런 사과지만, 보기에 좀 못난 사과부터 자기가 집어야지. 그리고 좋은 건 상대를 먹이려고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느냐. 좋은 건 제가 집어먹고 “민주주의야” 그런다 이 말이에요. 그래가지고 민주주의가 되겠어요? 민주주의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데서 오는 거지. 상대가 좀 실수를 했어도 “앞으로는 더 잘 하셔야죠. 지난번 그건 좀 좋지 않았어요. 더 잘 하셔야죠” 그래야 되잖아요. “지난번에 그 따위로 했으니까 넌 꺼져”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가 되겠어요? 그 따위 민주주의는 서양애들은 하는지 몰라.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를 이 꼴로 만들어놓은 것 아니에요?
자본주의라는 게 뭐예요. 같은 사업을 하는데, 새로운 아이디어가 조금 개발이 되면 수천억불을 들였어도 먼저 하던 쪽은 깨어지게 되어있다 이 말이야. 그래도 새로 개발한 이쪽은 고소해서 “거 봐라” 이런단 말이에요. 그게 좋은 거예요? 말도 안되는 얘기지요. 수천억불을 들여서 만들어놓은 것이 깨져요. 그 수천억불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쌓여서 된 거예요. 그러나 경쟁에 의해서 한쪽은 새로운 물건을 신나게 팔아먹고, 한쪽은 안 팔려서 무너진다, 그런 걸 좋다고 할 수가 있어요? 공산주의도 다른 차원으로 또 마찬가지지만. 그러니까 안타깝다는 거죠.
우리는 샘도 좋아하지만, 바다가 되자면 아래로 내려가야 돼. 크자면 말이지요. 그걸 노자 선생께서 잘 말씀하셨어요. 예수도 같은 말씀 하셨잖아요. “날보고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세상에서 짓밟혀서 억울한 놈들, 세상에서 가난한 놈들, 세상에 모난 놈들, 거기 가서 만나. 그러면 날 보는 거야.”
큰 나무가 이렇게 되자면 그 밑에 수많은 잔뿌리가 있어야 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그게 바로 한살림의 차원이에요.
여러분, 이솝우화에 사자를 구해준 생쥐 얘기 다 보셨지요? 손아귀에 겨우 요만큼 끼는 조그만 놈이 그저 살려달라고 한단 말이야. “대왕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제가 꼭 도와드리겠습니다.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니 저 좀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걸복걸하니까, 이건 입에 넣어봐야 잇새에 끼이기나 할 거고, 그래서 사자가 내동댕이쳤단 말이야. 그런데 어느날 사자가 사냥꾼들 쳐놓은 그물에 걸려서 이젠 죽는다 하고 아우성을 치니까 들쥐가 와서 그걸 다 끊어주잖아요. 그럼 여기에서 사자는 뭐고 들쥐는 뭐냐 이 말이에요. 작은 것이 큰 것이 되고 큰 것이 형편없는 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잖아요.
여러분, 대통령이면 얼마나 근사한 자리입니까. 그러나 요새 연희궁에 계신 전 대통령이나 이순자 씨가 저 창밖에 나는 새 한마리만도 못할 거요. 마음이 그럴 것 아닙니까? 얼마나 답답할 겁니까? 저 밖에 나는 나비 한마리 신세만도 못한 거라. 그 엄청난 돈, 그 엄청나게 번들거리고 다녔던 그 칠년 세월이 종이 한장, 책장 한장 넘기듯이 끝나는 거라. 그렇지 않아요?
“연자방아 돌리던 망아지는 밭에 가도 돌기만 한다”
그러니까 환상에 잡히지 말아야 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욕심 가지지 않는 그 세계에서 비춰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그리고 성경 말씀에 악인이든 선인이든 누구에게든 하느님이 비를 내려주듯이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그런 말씀 있잖아요? 마찬가지라. 될놈 안될놈, 똑똑한 놈 멍청한 놈, 다 있지만, 그것을 어머니가 다 자애스럽게 품어안는 것처럼 해라 하는 거지요. 무심(無心)에서, 욕심 없는 상태에서 보지 않으면 한살림운동은 시작부터 갈짓자로 가는 거라. 그러니까 이 한살림이란 말이 엄청난 말이지요. 우주의 생명의 차원, 진리의 차원, 그 자리에 서서 문제를 보고 가야지요. 한살림은 영원의 자리에 서서 투영하는 거예요. 이것은 단순히 무농약, 무공해, 이런 차원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자애와 검약, 겸손, 이런 얘기를 했는데요. 한살림의 기본 정신은 이러한 자애가 바탕이 되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만나는 물건마다 알뜰하게 대해야 한다는 거라. 한번 더 말하지만, 알뜰함이란 인색하게 나만 갖는다는 거하곤 달라요. 마땅히 좋은 데에 베풀기 위해서 소중히 다룰 줄 아는 거지.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런 겸손의 토대 위에서 세상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거예요. 알뜰함으로 세상에 누구도 굶주리지 않게 하고, 자애 속에서 잘못한 사람조차 안식처를 찾도록 하자는 게 한살림 정신인 거라.
예수님은 전 우주가 나를 받쳐주기에 내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짐진 자들, 의지할 데 없는 어려운 자들, 다 나한테 오라고 할 수 있었고,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가르친 해월 선생도 무궁무진한 시초가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거예요. 이 엄청난 진리를 타락하고 부패한 도시 속에서 펼쳐 나가고자 하는 것이 한살림의 뜻입니다.
한살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어려운 일이에요. 속담에 “연자방아 돌리던 망아지는 밭에 가도 돌기만 한다”는 말이 있어요. 여태까지의 습관, 관행을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지. 결국은 자신 스스로의 끊임없는 결단을 통해서 자애와 절약, 겸손을 바탕으로 전체를 보고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이 강연기록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1988년 9월 19일, 서울 대치동 성당에서 열린 '한살림 월례강좌'에서 하셨던 말씀을 녹취 .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