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중한 모임에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아침에 대구를 떠나서 지금 막 당도해서 분위기도 모르고 대뜸 여기 서게 되어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점심때도 되고 했으니 빨리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금 늦어지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전주에는 ‘한울생협’이 있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여러 도시에 ‘한살림’을 비롯한 다양한 이름의 생협 조직 속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농산물 직거래를 중심으로 생명을 살리는 활동을 시작한 지 이제 10년이 다 넘었습니다. 오늘 이런 자리는 사실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임입니다. 연례적인 모임이겠지만, 오늘 이런 모임은 여기서 생산자 농민들과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함께 궁리하는 그런 자리란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 자리는 국무회의보다 더 중요한 자리입니다. 국무회의는 맨날 깨부수는 의논만 하는 곳이잖아요. 어떻게 하면 이 산천을 때려부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밑바닥 백성들과 온갖 목숨붙이들을 괴롭힐 것인가, 알고 보면 결국 그런 얘기들을 우리가 낸 세금 받아 가지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진짜 아이들 제대로 사람답게 키우고, 좀더 나은 사람 꼴을 하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끼리라도 서로 협동하고 도울 것인가, 이런 거 연구하고 궁리하려고 모였단 말이에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모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점심 좀 늦게 먹어도 됩니다.(웃음) 전 아침도 안 먹었어요.
저도 텔레비젼에 중독이 되어서 아직 텔레비젼을 끊지 못하고 사는데, 아무것도 아닌 줄 알면서도 집에 있는 날은 대개 9시 뉴스는 보게 되죠. 요즘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서 별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우리 딸이 잠시 집에 내려와 있는데, 어제 같이 텔레비젼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 아이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빠, 세상이 왜 이래”라고 조그맣게 소리를 질러요. 평소에 그런 소리를 잘 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또 어제 뉴스가 특별히 다른 날보다 더 끔찍한 얘기도 아니었어요. 물론 가만히 들으면 전부가 다 기막힌 뉴스들이지요. 어제는 올림픽 이야기도 나왔지만, 서울의 아파트 단지들에서 주민들이 담합해 가지고 아파트 값을 그냥 무턱대고 올려놓는다는 얘기, 여러분도 아마 들으셨을 겁니다. 갑자기 5천만원, 1억원 이상으로 껑충 덮어놓고 올려놓고, 그런 값 이하로 팔지 못하도록 이웃을 협박하기도 한다는 그런 뉴스가 나왔잖아요. 이게 서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해요. 그런 사람들이 뉴스기자에게, 남들이야 10억을 받든 20억을 받든 당신들이 무슨 간섭이냐고 대들더군요. 물론 그런 값으로 아파트가 매매되지는 않겠지만, 그래 놓으면 상당히 시가가 상승할 거라는 계산을 하고 그런 짓들을 하는 거겠지요. 사람들 마음이 이젠 사악할 대로 사악해져서 같이 더불어 산다는 개념 같은 것은 벌써 깨끗이 사라져버렸어요. 이런 뉴스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죠. 그런데 우리 딸이 좀 예민한 아이거든요. 예민하지만 평소에는 그런 소리 전혀 안하는데, 어제는 무엇 때문에 더 참을 수 없었던지 버럭 그런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러요.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해 가지고. 제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뉴스에 접하면 마음이 언짢아지겠지요. 말은 안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란 말이에요. 저는 학교 선생 하면서 거짓말을 많이 하고 살아요. 학생들을 보고 내가 너희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한다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노력을 해도 잘 안됩디다.(웃음) 내 자식의 반쯤은 생각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엄밀히 내 자식은 아니니까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잖아요. 학생들이 좀 억울한 사정이나 고달픈 문제를 갖고 있어도 여유있는 마음으로 충고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나 막상 내 자식이 저러니까 내 마음이 못 견디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당분간 세상이 개선될 가능성은 없잖아요.
저는 철드는 게 늦어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사회적인 문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때는 모두다 가난했으니까 특별히 부러워하거나 미워할 만한 부자도, 잘난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없었어요. 그러다가 서울로 가서 대학을 다니면서 세상에 기막히게 큰 부자도 많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너무도 많은 걸 보고, 또 그때가 한일회담 문제로 대학 캠퍼스가 늘 시끄러울 때였으니까 소위 사회적, 정치적 의식이란 게 조금씩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요. 그런데 제가 그때 품었던 한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나쁜 놈들이 활개를 치고 착하고 어진 사람들은 왜 늘 억눌려 살아야 하는가 하는 거였습니다. 이 의문은 실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의문입니다. 하여간 그때 이십대에 저는 저 나름으로 그런 심각한 의문으로 괴로움이 많았는데요. 그런데 수십년이 지난 뒤에 지금 내 딸이 바로 그런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아빠, 세상이 왜 이래”라고 하는 말에 아무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걔가 계속해서 하는 말이 “아빠가 녹색평론이니 뭐니 하면서 애를 써봤자 세상이 뭐 달라지겠어?”라고 해요. 달라질 리가 만무하죠.
지금은 최대의 위기입니다. 인류사상 이런 위기는 없었어요. 지금 세상이 온통 미쳐 돌아가고 있잖아요. 어제 뉴스에도 곧 철도파업이 있을 거라는 얘기도 나왔고, 요즘 기차 타면 철도원들이 띠 두르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철도 민영화 계획 때문이죠. 아마 전기도 가스도 모두다 민영화될 모양입니다. 정부라는 게 이 사회의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책임도 포기한 것 같아요. 민영화해서 철도 경영이 빨리 흑자로 돌아서게 해야 한다, 철도사업이 수지맞는 장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민영화해서 흑자경영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무슨 얘깁니까. 대량 해고시킨다는 얘기죠. 그리고 대부분 자동화, 기계화로 처리하는 시스템으로 가겠다는 거죠. 일단 공공사업이 아니라 사기업이 되면 철도요금도 물론 자유롭게 올릴 수 있겠지요. 국가가 개입할 명분도 방법도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은 결국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대자본과 다국적 기업들로부터의 압력 때문이란 말이에요. 모든 공공사업을 사기업화해야 한다, 국가의 보조금 지불제도는 모두 폐지하고, 국산과 수입산에 대한 구분도 철폐되어야 한다, 시장을 완전 개방하라, 구조조정하라, 그렇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도 언젠가 다 부자가 될 수 있다, 이것말고는 대안이 없다 ……. 이런 다국적 기업들의 주장에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정부라는 게 동조하는 정도가 아니고 앞장서서 나가고 있잖아요. 세계화 시대에 치열한 국제경쟁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면서 모든 걸 장사논리로만 이끌고 가잖아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간 사람도 사람이지만, 이 나라 산천이 조만간 완전히 망가질 도리밖에 없어요.
며칠 전 미국 대통령이 다녀갔지만 참 한심하데요. 참 우울했습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새삼스럽게 우리가 별 수 없이 식민지 백성이라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을 보면서, 명색이 대학교수랍시고 내가 학생들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고 있다는 게 한없이 수치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게 무슨 꼴이냐. 백여년 전에 이 나라의 선비들 심정을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그때는 물론 기가 막혔겠지요. 그러나 지금이 그때보다 상황은 더 고약한지 모릅니다. 그땐 나라가 눈앞에서 망하는 걸 알고는 있었잖아요. 지금은 더 지독한 내부적 침략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망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지금은 예전처럼 노골적인 정치적 . 군사적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은 없겠지만, 안으로는 더 지독한 노예의 삶이란 말이에요. 인간다운 위엄을 지키면서 살 수가 없게 돼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자동차 가지고 시내를 벗어나서 훤히 뚫린 도로로 나가면 해방감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정부가 해외자본가나 IMF나 미국 사람들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우리가 석유를 들여오지 않으면 한국경제가 그대로 주저앉습니다. 한방울도 나지 않는 석유를 들여오려면 외국자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안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부를 욕하고 자본가를 욕하지만 따지고 보면 문제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한테 있어요. 내가 내 자동차를 유지하려고 하는 한에서 나도 공범이에요. 우리 각자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방법이 바로 나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원흉이란 말입니다.
아까 대구에서 전주로 오는 동안 지리산 휴게소에서 잠깐 쉬다가 왔는데, 또 연중행사가 시작되었더군요. 지리산 고로쇠 수액 판다고 크게 써 붙여놓고 플라스틱통들을 잔뜩 늘어놓았더군요. 자기 몸 보신한답시고 애매한 나무들을 못 살게 하는 건 밀렵꾼들 통해서 야생 짐승들 간이나 쓸개 빼먹는 짓이나 똑같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기 몸뚱아리 하나 살찌고 편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살고들 있잖아요. 기후변화 같은 데 대해서는 개인으로서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지금 공기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고, 물은 마실 수 없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는 데다가 그마저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는 그렇다치더라도 자식들은 어떻게 해요. 그리고,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은 몰라도 이 사회에서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걸 좀 생각하면서 살아가라고 위임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맨날 누가 뭘 많이 먹는가 하고, 거기 빌붙어 먹을 궁리들이나 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조금 양심적이라는 사람들도 기껏 한다는 소리가 지식정보 사회라느니 남북협력을 통한 시장확대 운운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에 그대로 빠져 있어요.
제가 제일 마음이 아픈 게 뭐냐 하면, 농업이 붕괴되고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지금 곤란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래도 내일을 기약해 볼 수 있고, 지금은 엉터리지만 그래도 다음 세대쯤 가서는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볼 수 있기 위해서는 땅이 남아있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 둘러보십시오. 일년에 여의도의 몇십배나 되는 농경지가 잠식되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한해 두해가 아니라 30년 이상이나 계속되어왔는데, 거기다가 지금은 가속이 붙었어요. 멀쩡한 국도와 고속도로가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로가 새로 건설되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요즘 언론에서는 경제가 조금 안정되어 간다고, 경제지표가 나아지고 있다고 그러지요. 우리나라는 참 특이한 나라 같아요. 지금 온 세계 전체가 경제가 나빠져 간다고 합니다. 미국도 10년 넘게 장기호황을 누려왔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라고 하잖아요. 일본은 거의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도 들립니다. 전세계적인 투자과잉, 생산과잉으로 물건 팔아먹을 데가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유독 한국경제만 그 와중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경제상황이 나아지고 주식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는데 그 근거가 뭘까요. 건설경기와 부동산시장 때문입니다. 다른 게 뭐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당장의 곤경 모면해 보려고 지금 계속 땅을 마구 파헤치고 그린벨트 없애버리고 부수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콩팥 떼어 팔아서 돈 있다고 착각하는 꼴이죠.
저는 대통령 선거에 아무런 기대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벌써 이름만 다를 뿐이지 똑같데요. 대통령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정책이라고 내놓는 게 전부가 다 똑같고, 여야도 아무 다를 게 없어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예외적으로 성장보다는 분배에, 경쟁보다는 연대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도 과연 농업문제에 대해서 깊은 고민이 있을까요? 우리 농촌에는 이제 유권자도 별로 없잖아요.
하여간 제가 제일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농업붕괴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도 제가 감사한 마음으로 왔어요. 여러분이 하자는 게 결국 뭡니까. 농촌 살리자는 거죠. 제가 한살림이나 이런 생협활동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니까 사정을 조금 압니다만 아무 영문도 모르고 들어온 주부들이 많잖아요. 그저 식구들에게 무공해, 무농약 음식 먹여볼까 싶은 생각으로 가입했을 뿐이죠. 그건 물론 나쁜 일이 아니죠. 그만한 애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정말 다행스러워요. 세상에는 유기농산물이 비싸니 어쩌니 하고 이 운동을 트집잡거나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유기농산물이라고 비싸면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터무니없이 싼 게 농산물 아닙니까. 그동안 계속하여 농촌이 붕괴되어온 건 농산물이 제 값을 못 받아왔기 때문이란 말이에요. 공업화를 한답시고, 소위 근대화를 한답시고 고의적으로 농산물 가격을 억제하고, 공장과 도시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촌경제를 고의적으로 망하게 해놓은 결과가 지금의 농촌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오래 길들여오다 보니까 보통 사람들이 온갖 쓸데없는 물건들을 한마디 불평도 안하고 값비싸게 사들여 놓으면서도 정작 농산물 가격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어요. 김치냉장고 사들여 놓으면서 정작 거기에 들어가는 김치 어머니, 배추와 무에 대해서는 아주 홀대를 하거든요. 그리고 언론도 늘 공업제품에 대해서는 아무 군소리도 못하면서 상투적으로 유기농산물 비싸다는 얘기만 곧잘 합니다. 그래서 뭐 도농직거래 운동이란 거는 알고 보면 도시 중산층들이 자기네들끼리 해먹는 수작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 참 서글퍼요.
어쨌든 저는 순전히 가족 이기심이 동기가 되었다 할지라도 자기 식구들에게 가급적 독이 없는 음식, 가급적 영양분이 있는 음식을 먹이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런 생협활동에 참가하는 분들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이 있어야 죽어가는 농업과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최소한의 꿈이라도 꿀 수가 있습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자식들에게 안심하고 먹일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못 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오늘날 이 현실에 대하여 정말 근본적으로 고민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월이 가도 노상 무농약 농산물 먹어보겠다는 그런 수준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얘깁니다. 궁극적 목표는 농촌을 살리는 일이에요. 내가 도시에서 살고 일자리를 갖고 있다고 해서 나한테 농촌이 관계없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내가 도시에서 설사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간에 농촌이 살아있어야 내 뿌리가 존재해요.
그런데 농촌 살리기라는 문제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겠지만 ‘태평농법’이라는 거 말이죠. 이런 얘기 그동안 별로 공개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태평농법이라는 거 생각해보면 참 곤란한 것입니다. 지금 태평농법 한다는 그분이 5만평인가 하는 땅을 자기가 고안한 쇠갈퀴 같은 것을 부착한 콤바인을 사용해서 무경운 ― 이 말은 원래 일본의 자연농법 창시자 후쿠오카 마사노부 선생의 자연농법에서 가져온 것인데 ― 으로 땅을 갈지 않고 따로 비료도 하지 않고 농약 같은 것도 치지 않고 풀도 매지 않고 농사를 지으니까 거의 일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태평농법이라는 거죠.
농촌에서 농사짓는 게 괴로운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실제로 태평농법으로 하면 한 사람이 몇만평을 감당하는 것도 손쉬운 일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그 책이 꽤 관심을 끌었는데,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게 땅 부자들 귀에 들어가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돌아가신 정주영씨 같은 분 말입니다. 그런 재력과 저돌적인 성격을 가진 사업가라면 그냥 몇몇 소수의 인원을 고용해서 무슨 상무다 부장이다 하는 그럴듯한 직함을 주고는 콤바인 몇대 주고 어마어마한 땅을 경작하도록 할 수 있을 거란 말이에요. 소수의 부자들이 농토를 독점하고 그런 식으로 기계를 써서 유기농산물을 만들어낸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나라의 농업과 농촌이 어떻게 될까요. 미국의 기업농이 그런 식이죠. 그러나 거기서는 비행기로 비료 주고 농약 치고 하니까 지금 미국의 농토가 쇠퇴하고 얼마 안가면 사막화의 위험도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이런 대규모 기계화 농법으로는 계속 더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대규모 기업농으로 가서는 토양을 보존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는 반성이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 태평농법은 그런 문제까지 해결해줄 수 있단 말이에요. 약도 안 치고 비료도 안 쓰고 땅을 갈지도 않아 땅을 점점 기름지게 만들고 그러면서 사람의 노동은 필요없고 ……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현대적인 산업체제의 논리와 딱 맞아 들어가잖아요. 기계화 . 자동화를 통해서 인력을 줄이죠, 그렇게 생산한 것을 도시의 백화점에서 유기농산물이라고 값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고.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된다면 결국 농촌 마을이 없어집니다. 농촌 공동체가 없어져요. 농촌 공동체는 농촌에서 하는 일이 노동집약적인 일이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일하고 살아가는 데 서로 협동하고, 주고 받지 않으면 안될 많은 일거리가 있고 생활방식이 있으니까 자연히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상호부조의 삶을 영위해가는 거죠. 우리의 전통사회뿐만 아니라 농사를 중심으로 하면서 기초적인 생명유지 수준에서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모든 토착적 사회가 다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실업이란 개념이 있을 수가 없죠.
요즘 실업자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는데, 이 문제는 현재와 같은 산업체제를 고수하는 한 절대로 해결이 안됩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실업자가 늘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돌아가게 되어있는 게 자본주의 체제이고 산업주의 문명입니다. 빈곤문제도 그래요. 별 생각 없이 우리가 모두가 부자로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부자가 부자로서 행세할 수 있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늘 존재하고 있어야 해요. 모든 사람이 전부 부자가 되면 부(富)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무도 아쉬울 게 없으니까 부자의 권력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 ‘빈곤퇴치’라는 것은 실은 헛 구호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계속 빈곤상태에 있지 않으면 경제성장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의 노동이란 것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즐겨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싫고 재미없는 노동이지만 임금을 받을 수 있고 보상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산업적 노동은 본질적으로는 강제노동입니다. 가난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강제노동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경제성장, 개발, 산업문명, 진보라는 것은 기실은 끝없이 빈곤을 확대 재창출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곤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부자가 없는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다 같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큼 땀흘려 일하면서 그저 최소한도로 인간다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경제, 최대한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문화 속에서만 실업도 해결되고, 빈곤문제도 해결되고, 출산, 육아, 교육, 의료, 노인부양 문제를 포함한 온갖 생활문제가 비로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체제를 확대하고, 경제성장을 계속해 나가서 사회복지 예산을 증대시켜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른바 산업선진국형 복지체제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 방법으로는 결국 죽도 밥도 안되게 되어있어요. 우선 생태계가 견디어 내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결국 오늘의 생태적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주된 원인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는 모순적인 방법일 뿐입니다. 그리고 스웨덴 같은 이른바 모범적인 복지사회가 얼마나 더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벌써 스웨덴은 국고가 비어가고 있다고 해요. 그런 문제와는 별도로 스웨덴과 같은 국가적 복지체제가 과연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체제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가 스웨덴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성에 반하는 무슨 문제가 있다는 얘기거든요.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저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살아있는 마을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있는 사회말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옛날과 똑같은 모양의 농촌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어요. 어떻든 우리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땅이 살아있고 농촌에 마을이 풍성하게 살아있는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인간다운 위엄을 유지하고 권력에 대해서든 물건에 대해서든 기계에 대해서든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자면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장 분명하게 선각적으로 자기 사상의 핵심으로서 말씀하셨던 분이 바로 간디입니다. 간디는 우리나라에서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싸웠던 인도의 민족적 영웅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굉장히 영성적으로 깊이있는 정치-경제사상가이자 문명비판가입니다. 간디는 보면 볼수록 대단한 혜안을 가졌던 분입니다. 20세기 초에 이미 산업주의 문명이 인류 전체에 대하여 큰 재앙이 될 날이 곧 올 거라고 말했거든요. 간디는 일생을 두고 인도사람들이 입는 카디라는 옷을 손수 물레로 돌려서 짜서 입었습니다. 인도 사람 각자가 집에서 혹은 마을에서 자기가 입을 옷을 손수 지어 입어야 진정한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했어요. 말로만 독립투쟁, 식민지 청산을 떠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죠. 자기자신들의 생활이 자치, 자립적인 것으로 되도록 토대를 만들어놓는 게 가장 확실한 독립의 조건이란 말이죠. 식민세력에 대해서, 혹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 외교적으로 혹은 정치 . 경제적으로 혹은 군사적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하루빨리 키워야 독립 . 자존할 수 있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그건 근본적으로 몰지각한 소리라는 거죠. 그런 방식이 진정 가능할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런 방향으로 추구해서 소위 경제성장을 이루고 정치적 위상을 높였다고 하는 사회들을 한번 곰곰이 들여다보세요. 대내적으로는 차별구조가 강화되고, 대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 못지않은 가혹한 약탈, 착취자가 되는 겁니다.
간디는 인도의 진정한 독립은 영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한다고 해서 이룩되는 게 아니라고 일관되게 말합니다. 그래서 간디가 생각하는 것은, 진정하게 새롭고 자주적인 인도의 토대는 53만8천개의 농촌 마을이며, 그 마을들 속에서 자립적인 삶의 방식이 번성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독립 이후에 간디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의 농촌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하늘의 조화인지 독립되자마자 간디가 암살 당해요.
이제부터야말로 간디의 사상과 철학이 인도사회에서 제대로 된 실천을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암살을 당해요. 그러고는 네루가 등장하죠. 네루는 간디의 정치적 제자이지만, 스승의 사상과 철학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네루는 속으로는 간디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 늘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이 문제에 있어서는 간디를 망령든 할아버지쯤으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농촌 마을 중심의 사회를 이야기하고, 수공업적 생산방식을 말하는가 하고 말이죠. 그래서 네루는 인도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빨리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모델도 적용하고,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원조도 과감히 받아들이면서, 한때는 중립 외교를 표방하고 그랬잖아요. 그런 점 때문에 세계의 지식인들로부터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지식인들이 말하는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은 굉장히 문제가 많은 거예요.
하여튼 네루는 인도의 산업화를 가장 우선적인 국가 시책으로 삼았고, 그래서 이미 독립 초기부터 거대한 댐 건설들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계획하였어요. 지금 인도에는 예를 들어서 나르마다 강 같은 경우에 강이 얼마나 큰지 대형 댐이 3,000개나 건설 완료되거나 공사중이거나 계획중이라고 합니다. 그게 대부분 네루 시대부터 계승된 국가적 프로젝트예요. 댐 건설이나 원자력 발전소, 핵무기, 새만금 매립공사, 고속도로, 공항, 관광진흥 ― 이런 게 전부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발상들입니다. 간디를 암살한 것은 고드세라는 힌두교 청년이었는데,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힌두교도와 무슬림들 간의 갈등 속에서 간디가 무슬림들을 끼고 도니까 화가 나서 암살했다고 하지만, 법정 최후진술을 보면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어요. 최후진술에서 고드세라는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간디 선생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분이 영원히 인도 사람들의 아버지로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암살을 했다 ― 라는 겁니다. 자기가 보기엔 간디가 미쳤다는 거죠. 서구식 근대화와 산업문명과 진보를 거부하니까. 지금까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는 간디가 옳았지만 이제부터 현대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간디는 오히려 인도의 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인도민중의 적이 되기 전에 그분을 영원한 인도인의 아버지로 모시기 위해 죽였다는 거죠. 이 얘기가 맞을지도 몰라요. 간디가 계속 살아서 인도의 산업화를 막았더라면 아마 인도의 지식인, 지도층 사이에서 간디를 공격하는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실제로 산업주의나 서구식 경제발전에 관한 간디의 생각에 동조하고 귀를 기울인 인도의 지도층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간디가 정확히 예견한 대로 산업주의 문명이 지구와 인류의 재앙이 되었다는 게 분명해진 오늘날에 와서는 간디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발전, 진보의 논리로는 인류에게 전망이 없거든요. 기술의 발전으로 극복될 것 같아요? 지금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은근히 생명공학의 발전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아도 기술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적 기술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는 기술입니다. 인간의 기술적 지식과 재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저 자연의 한없이 정교하고 신비스럽고 복잡한 질서를 무슨 수로 통제한다는 겁니까. 생명공학 기술로 품종개량을 시도하는 문제만 하더라도 그 결과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모르는 거란 말이에요. 또 그런 기술로 개량을 하다보면 종내에는 생물종다양성이 소멸되어버려요. 생물다양성은 지구 생물권을 유지하게 하는 근원적인 조건인데 이게 훼손된다면 모든 게 끝입니다. 제 주변에도 이렇게 안이한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 전공에만 열심인 교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그래요. 지금 하고 있는 공부들 좀 중단하고 세상 돌아가는 문제에 조금만이라도 근본적인 관심을 기울여보라고. 생명공학이라고 하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기술에 인류의 장래를 맡기고, 수천년 수만년 동안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확실한 방법으로서 실천해왔던 방법을 포기하자는 게 말이 되느냐. 지금 우리가 식량자급도가 25%도 안되는 형편에서 정부 사람들은 앞으로 농가 가구수를 10만 이하로 줄이겠다고 계획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제발 우리 모두가 농업과 농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고민 좀 하고 살자고요. 그리고, 농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꼭 식량문제 때문만이 아니잖아요.
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도 농촌이 반드시 살아나야 된다고 믿습니다. 사람이 사는 가장 높은 가치가 뭡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아요? 여러분들은 뭐라고 생각해요? 전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우애,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해요. 제가 젊은 시절에 이런 이치를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뒤늦게 좋은 사람들 다 놓치고 이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건강도 아닌 것 같아요. 건강이 제일이라고 얘기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건강하게 살도록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은 해야죠.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건강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게 분명해요.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를 상상해보면 그건 확실한 것 같아요. 가끔 저는 내 자신이 죽을 때를 가상해서 뒤에 남은 가족이나 내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죽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임종시의 말이라는 건 자기의 인생을 요약하는 것이니까 거기에 위선과 거짓이 끼여들 틈이 없죠.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에게 가장 진실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거란 말이에요. 어떤 이태리 철학자는 무신론자일수록 죽기 직전에 솔직한 이야기를 한다는 얘기를 했어요. 죽은 뒤에는 털어놓고 참회할 데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같은 경우에도 죽을 때, 평생 동안 돈을 많이 벌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유감스러울 것 같지는 않아요. 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출세를 못한 걸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죽을 사람도 없을 거예요. 내가 권세가 많아서 남들을 좀 부려먹지 못하고 가는 게 아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리고 또 평생 좀 건강하고 기운도 세게 지냈더라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이 번창하고, 세상에서 이름도 날리고 …… 이런 게 보통 사람들이 늘 탐하는 것인데 말이죠. 옛날 소설〈옥루몽〉같은 걸 보아도 그런 욕망의 세계에서 우리 조상들도 살았거든요. 이런 욕망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들 속에 뿌리깊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모든 것도 죽는 순간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단 말이에요. 대체로 숨을 거두기 직전에는 누구든, 사람들하고 좀더 잘 지냈으면 좋았을 걸, 누구에게 그렇게 박절하게 하지 않았어야 옳았는데, 그러니 너희들은 사이좋게 잘 지내고 남들에게 친절하게 해라 등등, 이게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생의 마지막 무대에서 내뱉는 공통된 대사입니다. 인간이란 본래 영물이니까 평소에는 등신같이 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듯해도 속 깊이에서는 알 건 다 알고 있어요. 핵심은 무엇인지 뭐가 진짜인지 알고 있는 거예요. 알고 있으면서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온갖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엉터리 짓 하다가 죽는 순간에는 깨닫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우정입니다. 지난 1월에 제가 전주에 왔다가 돌아갔습니다만, 그때 저하고 같이 시간을 보낸 분이 몇분 여기 앉아 계신데, 그날 황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미친놈 꼴이었지요. 사실 바쁜 건 죄악입니다. 바쁘게 지내다보면 사람들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주의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요. 어떤 철학자는 도덕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주의집중의 문제라고 해요. 그건 정말 옳은 말인 것 같아요. 요즘 우리들 생활이 뿌리로부터 어긋나있는 것은 우리들이 대체로 바쁘게 지내는 것과 굉장히 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그날 모처럼 제가 전주에 왔다가 행사가 끝나고서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저를 자동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더라고요. 저는 모처럼 전주 음식맛 좀 보고 가는가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동차가 시내를 벗어나서 교외로 가요.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니 새로 생긴 채식 전문 뷔페식당으로 간다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녹색평론》에서 맨날 채식 얘기를 하니까 이 분들이 저를 생각해서 그리로 데리고 간 거예요. 실은 저는 고기는 안 먹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니거든요. 가끔 계란도 먹고 생선도 먹고 때로는 라면도 먹습니다. 그런데 채식전문 식당이라는 건 그렇다 합시다. 뷔페는 문제 있는 거 아니예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집회를 가지고 행사를 할 때는 뷔페식이 필요할지 몰라요. 그렇지만 이 서양에서 들어온 뷔페라는 음식 먹는 방법이 과연 인간간의 관계를 결합시키는 것인지 분리시키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 전통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토착사회에서 음식은 어떻게 먹습니까? 나누어 먹잖아요. 된장찌개를 상 가운데 놓고 여럿이 둘러앉아서 나누어 먹습니다.
예전에 중국에서는 유토피아를 대동(大同)세상이라고 했답니다. 동양에서는 유토피아라는 말을 안 쓰고 대동세상이라고 하죠. 그런데 대동이라는 말이 원래 무슨 말이냐 하면, 동양철학 전공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동(同)자가 본래 상형문자인데, 그게 천막을 쳐놓고 그 밑에서 사람들이 함께 밥 먹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이상사회가 별 게 아니라 사람들이 밥을 같이 먹는 세상, 즉 한 식구로 사는 세상이라는 얘기죠. 혈연, 지연, 부족, 인종, 종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따위를 따지지 않고 그냥 세상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는 세상 말입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기막혀서 우리가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러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곳곳에서 틈을 비집고 당장 대동세상을 실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제가 좀 아는 분인데, 이 분은 밖에 나와서는 식사를 좀처럼 하지 않으려고 해요. 음식점에서 사서 먹는 밥이란 게 전부 오염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농사와 농산물 유통에 대해서 아는 사람의 눈에는 그게 독이지 인간의 식사라고는 할 수 없거든요. 그러나 그런 생각 때문에 자꾸 바깥 생활을 기피하다 보면 사람 만나는 기회도 줄어들고, 협소해지고, 늘 혼자서만 지낼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아는 어떤 이는 당근을 절대로 안 먹는 사람도 있어요. 당근은 오염된 땅의 중금속을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음식에 당근 들어가 있으면 일일이 건져내고 먹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잖아요. 오염된 음식이라도 여럿이서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 좋고 깨끗한 식품 혼자서 뒤돌아 앉아 먹는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이죠. 아까 말씀드렸죠. 내가 이 깨끗한 음식 먹고 수명을 10년 더 늘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우정의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이걸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블레이크라는 영국 시인이 있는데, 이 사람의 잠언에, “새의 보금자리, 거미의 거미줄, 사람의 우정”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러니까 새와 거미에게 제일 중요한 게 새집과 거미줄이듯이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우정이라는 얘기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우정 또는 우애가 우리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쉽게 되거나 안되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정이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생활이 있어야 하고 생활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의 도움이 필요없는 생활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돕고 협동하는 생활을 유지할 수도 없고, 아쉬워할 리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의료문제나 요즘 주부들의 제일 큰 관심사가 아이들 양육하는 문제, 출산문제 등인데요. 이런 얘기 제대로 하자면 시간이 한참 걸리니까 오늘은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만, 하여튼 요즘 한국에서 제왕절개율이 50%라는 사실은 정말 기가 막히는 문제입니다. 의사들은 별문제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요. 왜? 우리는 단순히 살덩어리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심층에 뿌리깊은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제왕절개를 통해서 태어나거나 출산시에 기술적 간섭을 많이 받고 태어난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근원적으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해요. 불란서의 유명한 산과의사 미셀 오당이라는 분은 지구의 생태적 미래는 인간의 아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데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로워야 우리가 타인이나 자연세계에 대해서 폭력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굉장히 중요하고 근원적인 얘기이죠. 그런데 지금 현대 기술사회에서는 산파를 거의 볼 수 없잖아요. 산파가 저절로 없어진 줄로 아십니까? 미국의 의사협회라는 것은 원래 산파를 포함해서 자치적으로 건강을 돌보는 민간의 많은 지혜와 기술을 없애고 불법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그래서 현대적 기술의학이 지배를 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자주적인 능력들을 잃어버리게 된 겁니다.
옛날에는 아이를 낳고 애를 기르고 사람이 죽을 때 임종을 하고 장사를 치르는 게 비즈니스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중요한 통과의식이었고, 이런 의식은 전부 가족과 마을의 힘으로 치러냈잖아요. 지금은 인간생존에 필요한 모든 기초적인 것들이 전부 상품이란 형식으로 접근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전부 돈을 벌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는 고정관념 속에서 살고 있어요. 당장 현금을 구해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가 미친 듯이 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면 사람과 사람끼리 돈 관계를 떠나서, 또 국가의 복지체제라는 것을 떠나서 우리가 자주적, 자치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진정으로 안전하고 위엄있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애써 저금하려고 할 필요도, 꼬불칠 필요가 하나도 없잖아요. 내가 일할 기운이 없어지면 동네사람들이 나를 돌보아줄 것이고, 내 죽은 뒤에 내 자식들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교육도 그래요. 오늘날 우리사회가 엄청난 교육지옥이 되어있는 것은 정말 배움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니라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경쟁적으로 남을 제치고 남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아니면 남의 뒤에 처지지 않기 위해서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 우리 꼴이 늘 참혹하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공동체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협동적으로 서로 도우면서 살아간다면 지금과 같은 교육도 필요없는 것이 됩니다. 본래 인간은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저절로 배움을 익히며 성장합니다. 그것이 오랜 인류사회의 경험이거든요. 학교교육이라는 것은 사회적 서열화를 전제로 하고, 또 그러한 차별적인 서열화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학교는 사람들이 서로 우애있게 사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해하는 근대적 질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아미쉬라는 독특한 공동체가 있다는 걸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겠지요. 지금 수십만명이 주로 인력과 축력에 의지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수십년간 투쟁해서 미국 연방법원으로부터 자기 아이들을 미국의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기본적인 셈법만 알면 족하지 더이상 교육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농사지으면서 수공업 제품 만들어 내고, 현대적 테크놀로지를 될수록 멀리하고, 텔레비젼은 말할 것도 없고, 전화도 집집마다 두고 살지 않습니다. 전화가 집집마다 있으면 가족의 해체를 가져올지 모른다고 동네에 공중전화 한 대씩 두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현명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미국의 주류 사회처럼 살아가면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소외와 차별이 생길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런 생활방식은 하느님에 대해서 불경(不敬)을 저지르게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현대문명의 본질은 이 ‘불경’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마시는 이 물이 좋으냐 나쁘냐, 이 물이 어느정도 오염이 되어있느냐 하면서 이른바 과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우리가 결국 이 기술사회의 논리에 말려들어갈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맨날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 물을 하느님 앞에 바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죠. 동학에서는 깨끗한 물 한잔으로 한울님께 심고(心告)하라고 하잖아요. 물이 더럽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봤을 때 우리의 삶이 죄악에 가득찬 것이라는 얘기가 되거든요. 그걸 무슨 약품으로 아무리 소독을 하고 정화를 한다 한들 우리의 삶의 야만주의와 불경함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다시한번,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농촌 공동체를 살리고, 땅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생협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큰 의미도 없어요. 일본의 자연농법 창시자 후쿠오카 선생 같은 분은 대단한 양반이지요. 한사람의 사상가로서 오늘의 인류를 위해서 값진 가르침을 보여주는 사람이지만, 그 방법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가 없죠. 그분은 자연농법이라는 농법을 창시하고 그런 농법의 철학적 의미를 가르쳐주고는 있지만,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냥 산속에서 외롭게 살고 있어요. 아무리 사상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재미가 없어요. 에른스트 블로흐라는 독일의 철학자는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왕국이 너희의 가운데(among you) 있다”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해요. 이 말을 잘못 번역해서 “너의 속에(within you)”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확하게는 내 개인의 내부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사람들과의 관계에 천국이 있다는 얘기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여럿이서 같이 땀을 흘려 일하고, 같이 놀고, 서로 보살피면서, 함께 밥 먹고 사는 데서 사람다운 삶이 존재한다는 뜻이죠.
미국에 예수의 생애를 평생 연구해온 종교사학자로 존 도미니크 크로싼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 예수를 꼭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예수를 어떻게 신화화해왔든지 간에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그 당시 예수의 실존적 상황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관점이지요. 이 학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은 복음서를 통해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같이 밥 먹어라(eating together)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아픔을 낫게 해주는 것(healing)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cure) 게 아니라 몸과 마음과 심령의 건강을 다 아우르는 포괄적인 치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단순히 의료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신적, 영적인 교감의 문제인 거죠.
그런데 크로싼이라는 학자는 이러한 복음서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근원적으로 당시의 지중해 연안지방의 유태 농민의 세계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책 제목이《역사적 예수》인데 부제가〈지중해 연안의 유태인 농민의 생애〉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농민이라고 하면 절대로 대농(大農)을 얘기하지 않아요. 농민은 항상 소농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음식 나누어 먹는 것은 근본적으로 농민의 풍습이고 세계관이라는 거죠. 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굉장히 급진적이잖아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면서 드는 예수의 몇몇 유명한 비유 중의 하나에, 어떤 장자가 저녁밥을 해놓고 사람들을 초빙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동네 부자들과 세력가들을 집으로 불러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는데 시간이 되어도 이 사람들이 안 와요. 그래서 하인을 보냈는데 전부다 바빠서 지금 못 온다는 전갈이 옵니다. 무슨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 다른 약속 때문에 못 간다, 부자들이나 잘난 사람들은 항상 이렇습니다. 그래서 장자가 하인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저 큰 신작로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보이는 대로 데리고 와라, 그 사람들하고 같이 식사하자, 그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학자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건 대단한 이야기예요. 당시도 위계사회이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는 같은 식탁에 절대로 안 앉았답니다. 계급이 같고, 신분이 같고, 인종이 같고, 종파가 같아야 식탁에 같이 앉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작로에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데리고 와서 같이 식사하자는 이야기는 인간사회에 있는 모든 차별과 불평등성을 전부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굉장히 혁명적인 선언인 셈이죠. 그런데 이 사상의 뿌리가 무엇이냐 하면 그게 바로 농민의 세계관이라는 겁니다.
제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동양의 노자사상의 근본 뿌리도 농민의 세계관이라고 해요. 당시 중국은 이미 국가체제를 만들어서 왕이 있고 통치체제가 확립된 계급사회였지만, 중국의 변방에는 제도화된 통치체제도, 지도자도 없이 그냥 풀뿌리 민중들끼리 자유롭게 마을을 형성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오랑캐란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들입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이라는 사상은 그런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것이라는 견해지요. 노자는 요순사회도 이미 아니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어진 정치를 한다 하더라도 이미 국가체제니까 진정한 자주적, 자치적 민중 공동체는 아니지요. 청동기 시대 초기에 자발적으로 상호부양의 유대관계를 이루어서 살았던 농민의 세계관이 바로 도가사상의 뿌리라는 얘깁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 차별 없이 한 지붕 밑에서 같이 밥 먹는 대동세상 말입니다. 위계질서가 확립된 사회가 되면 말이 쉬워서 그렇지 자기 하인하고, 거지하고 같이 밥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밥을 같이 먹는다는 근원적인 평등의 세계관, 즉 뿌리깊이 농민적인 가치를 우리가 상실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지옥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 땜질을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 리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 부시 대통령이 와서 전쟁은 안하겠다고 말했다고 해서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참으로 서글프고 비참한 이야기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민족의식을 발휘해서 우리도 힘을 길러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한 부국강병의 논리는 거꾸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정말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게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보여줄 만한 생활을 우리가 창조해야 합니다. 꿈같은 소리를 제가 하고 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런 게 없겠는지 끊임없이 틈새를 비집고 찾아보면서, 이 야만적인 사회의 지배논리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그냥 체념하고 따라갈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정말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오늘 너무 심각한 얘기만 해서 아름다운 시를 한편 읽고 끝내겠습니다. 평생 농촌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간 프랑스의 시인 프란시스 잠이 쓴 시인데,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어서 번역시집《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곽광수 옮김)를 가져 왔습니다. 제목이〈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로 되어있는 작품인데, 이 시에서 어떤 인간의 일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하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이런 ‘위대한’ 일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저도 정말 간절해요. 얘기 그만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은 지난 2월 23일 전주의 한울생협 2002년도 총회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