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드혼 공동체 지음 조하선 옮김《핀드혼 농장 이야기》(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1년)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지음 박충구 옮김《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가치창조, 2001년)
술락 시바락사 지음 변희욱 옮김《평화의 씨앗》(정토출판, 2001년)
기원전 700년경 인도의 ‘브리하다란카야 우파니샤드’에는 창조에 관한 신화가 한편 나온다.
맨 처음에 인간의 모습을 한 아트만이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고, 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느꼈다. 그는 다른 존재를 원했고, 그래서 여자와 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것과 같은 크기가 되었다가 둘로 떨어졌다. 거기에서 남편과 아내가 생겨났다. 태어난 여자는 “어떻게 하면 그가 자신에게서 생겨난 나와 결합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암소가 되기로 했다. 그러자 그는 수소가 되어 그녀와 결합했고, 거기서 소가 나왔다. 다시 하나가 암말이 되자 다른 하나는 수말이 되어 그녀와 결합했다. 이렇게 해서 개미에서부터 모든 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성의 성교를 통해 만들어졌다.
― 죠셉 켐벨《신의 가면 ― 동양신화》(이진구 옮김) 중에서
이 신화는 태초의 원초적 자아에서 어떻게 다양한 생명체들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아의 근원적인 심리학적 동기는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신화에 의하면 원초적 자아와 그로부터 탄생한 사물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원초적 자아의 끊임없는 자기분화와 결합에 의해 다양한 생명체가 생겨난다. 분화된 생명체 가운데 원초적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화된 생명체 자체가 원초적 생명, 원초적 자아이다. 그리고 이 원초적 자아의 심리학적 원리는 두려움과 욕망이다. ‘나’를 의식한 순간 ‘나’는 두렵다. 그리고 ‘나’는 원한다. 두려움이라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심리학적 원리와 욕망이라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원리가 원초적 자아의 끊임없는 창조행위의 동력이다.
이 인도 신화는 일상적이고 다양한 생명세계가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도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생명세계는 신 자신의 분화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 생명과는 전혀 다른 신의 창조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본질적인 분리가 존재한다. 신은 만물 안에, 또는 만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초월적인 신은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을 끊임없이 자신 앞에 세운다. 신적 주체와 인간적 주체는 역사 속에서 부단히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아담아(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 3, 9)라는 신의 부름 앞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신적인 “나” 앞에 “너”로 마주서게 된다. 따라서 구원사건 역시 역사적 사건으로 계시되며, 구원체험 역시 역사적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정향된 종교이며, 소위 주류 기독교 안에는 탈역사적 형이상학에 대한 저항이 존재한다.
이 두가지 상이한 종교유형은 인간 자아와 우주 자연, 역사 사회에 대한 상이한 견해로 발전되었다. 전자가 인간 자아와 우주 자연, 신적 초월 사이의 근원적인 동일성의 논리를 펼쳐나갔다면, 후자는 이 셋 사이의 분리와 차이를 전제로 하고 역사 사회적인 장 속에서의 만남과 일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전자가 근원적 동일성에 대한 내면적, 심리학적 깨달음의 종교로 발전했다면, 후자는 신의 뜻의 역사적 계시와 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 종교로 발전했다. 힌두교, 불교 등의 인도적 종교가 전자에 속한다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후자에 속한다.
《핀드혼 농장 이야기》,《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평화의 씨앗》, 이 세권의 책은 각기 이 두 종교유형이 삶의 역동성과 인간 실존의 요구에 부응하여 스스로 형태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핀드혼 농장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핀드혼 만의 모래와 바람뿐인 척박한 땅에 정착하여 생명이 넘치는 풍요의 농장을 이루어낸 다섯명의 신비가들의 체험적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유기농법이나 과학적인 영농법에 의해 풍요를 일구어낸 성공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들 안에 있는 요정들, 자연령들과의 대화와 내면의 신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일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핀드혼 농장을 일구어낸 다섯명의 신비가들은 기독교적 전통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주류 기독교 전통에서 소홀히 해왔던 자연과 신성, 인간 사이의 일치와 협력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성공적인 귀농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적 자연관의 변화된 형태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역사적, 사회적 종교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전통 안에 있으면서도 자연적 동일성의 종교의 방향으로 한걸음 다가서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 중 하나이자 그들 중 내면의 신과의 교통을 주로 담당했던 에일린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우리들 밖에 있는 신에 대해 가르쳤던 것이고, 그와 같은 신이 우리 안에도 계시는 것이다.”(83) “신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다. 모든 사람은 바로 그 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84) 그리고 그녀의 내면에 있는 신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진실로 나[神]와 하나이다.”(83)
에일린은 수년 동안 내면의 신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기록했다. 핀드혼 농장은 과학적인 영농기술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 내면의 신의 소리에 따라 모든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놀랍게도 이 신비한 음성을 따르는 것이 과학적인 영농기술보다 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이고도 상호적인 교류를 통해 더욱 강조되었다. 이 책에서는 산스크리트어로 ‘빛나는 존재’를 뜻하는 ‘데바’라는 말로 식물 영(靈)을 지칭했는데, 도로시는 이 식물 영과의 교통을 주로 담당했다. 그녀는 토마토 데바, 양상치 데바, 들장미 데바 등 온갖 종류의 식물 영들과 대화를 한다. 그들은 토마토를 어떻게 재배할 것인가, 그 열매를 어떻게 하면 크게 할 것인가를 그 영들에게 물었다.
이러한 대화의 과정은 창조의 힘이 사랑을 통해서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과 식물, 자연령들 사이에 깊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신비가들은 존재의 일체성을 경험한다. 데바들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람이 불어올 때 그 바람은 너의 일부이며”(172), “태양이 주는 선물, 그 햇살 하나 하나가 나 자신의 일부이다.”(174) 수선화가 활기차게 봄을 맞을 때 저 멀리 떨어진 별들도 존재의 일체성을 명상한다.(175) 하나의 존재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지상의 전체 의식이 같이 고통받고 있다.(174) 식물의 영들과 자연의 영들은 끊임없이 진동하며 인간과의 ‘함께 울림’을 기다리고 있다. 신비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식물에게서 우리에게로, 우리에게서 식물에게로, 하나의 완벽한 순환이 이루어졌고, 자연스럽게 생명의 일체성은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의 경험이 되었다.”(97) 핀드혼 농장이 이루어낸 기적 같은 결과는 자연숭배라든가 인간의 의식을 본능으로 몰아치는 사나운 원시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일체성, 세계와의 일체성을 이루어 안전하고 활동적으로 각성된 의식을 통해 모든 에너지들을 불러오고 변형시킬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다섯명의 신비가들은 건실하게 몸을 움직이고 내면의 안내자와 식물들의 영, 자연령들의 소리를 따른 결과 7년 후에는 모래땅 위에 풍요로운 농장이 들어서게 할 수 있었고, 거의 이백여명에 달하는 영적인 농군들의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핀드혼 농장의 실험과 성공은 인간 영혼의 변형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핀드혼 농장의 성장은 인간 혼의 성장을 상징한다.”(71)
영들과의 대화와 신비체험을 중시하는 이들의 종교적 경향에는 당연히 위험이 따른다. 그것은 진정한 대화가 아니라 신비가 자신의 왜곡된 의지와 욕망의 발현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무지막지한 자연적 힘의 숭배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영적 대화의 카리스마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있을 수 있는 모든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명의 일체성에 대한 인식과 내면의 고요함을 달성함으로써 기독교적 종교체험의 지평을 확대했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종교의 지평 안에서 깊은 생명의 동일성과 일체성에 대한 인식을 이루어낸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역시 기독교 전통 안에 있으면서 동일성의 종교적 관념들로 접근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로서 미국에서 활동하며 호스피스 운동과 죽음에 대한 연구에 전념해온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의 자서전이다. 큐블러-로스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고, 그들의 내면에 대한 탐구의 과정을 통해 인간과 신 사이의 절대적인 단절과 차이보다는 인간 안에 있는 신적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핀드혼 농장 이야기》가 자연의 신성에 대한 체험에 많이 기울어있다면,《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은 인간 안의 신적 본성과 인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큐블러-로스는 아주 어려서부터 “내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교회 지붕 밑이나 인간의 규율에 속해 계시지 않으므로 어떤 교회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52)고 생각했다. 어린 큐블러-로스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그속에서 살다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다. 자신이 책임 맡아 기르던 까만 토끼를 제 손으로 직접 정육점에 갖다주어 종이봉투 속의 따끈한 고깃덩어리로 바꾸어가지고 집에 돌아오던 일. 사랑하던 친구 수지와 이웃집 아저씨의 죽음. 이러한 경험들은 “나는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죽는 것이 아름답고 고귀한 죽음인가, 나아가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종교적 의식의 확대로 이어진다.
초기 의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와 피조물의 근본적인 생명력은 어떠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의지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쟁으로 고통 당하다가 죽어가는 순박한 사람들을 그녀는 적과 동지의 구별 없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초라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나치 유대인 수용소 벽에 수없이 그려져 있는 나비의 모습은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이 오색의 영롱한 나비들을 그리면서 또다른 탄생과 날기를 기대했는가? 인생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이 있다면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평생의 주제가 될 죽음과 탄생의 신비에 사로잡혔으리라.
의사가 되어서는 죽음을 회피하고 부정하고자 하는 의료계의 현실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말기 암 환자들,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의료계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워 많은 오해와 반대에 직면하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뚫고 나간다. 그녀는 죽어 가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그녀가 얻은 깨달음은 죽음은 삶의 하나라는 것이다. 죽음은 단순히 슬프고 외롭고 비인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고 삶의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녀는 죽는 체험 자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다. 죽으면 나비가 고치에서 빠져나오듯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왔다가 수호천사, 영적 안내자의 도움으로 계곡이나 터널, 문 같은 곳을 지나며 찬란한 빛을 본다.(227) 그녀는 인간은 영혼의 안내자, 혹은 수호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으며, 사후세계와 죽음 체험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영혼의 불멸과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게 된다. 큐블러-로스는 신비체험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과감하게 영들과의 교통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비교(秘敎)적인 집단에까지 참여하고 거기서 인간적인 배신과 좌절,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큐블러-로스는 그 순간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으면 무엇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밀고 나간다. 그래서 그녀 주변에는 늘 숭배자와 적이 함께 있었다. 꼭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만은 없는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결국 그녀가 이른 결론은 삶과 죽음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고받았느냐?”라는 질문이라고 한다. 조건 없는 사랑을 얼마나 잘 배웠는지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있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사랑뿐이다.(337)
그녀는 육체를 떠나 불멸의 세계를 향하는 영혼을 나비의 이미지로 그리며, 이제 74세로 질병에 시달리며 임종을 앞둔 자신의 유일한 소원은 몸을 떠나 큰 빛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334) 죽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아주 아름다운 체험이 될 것이라고 한다. 육체적인 삶은 전 존재에서 아주 짧은 시간일 뿐이고 이 지상에서 주어진 모든 시험이 끝나고 나면 고치가 미래의 나비를 가두고 있는 것처럼 영혼을 가두고 있는 육체를 벗을 것이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한마리 아름다운 나비처럼 날아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이 있는 곳,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끊임없이 자라는, 결코 외롭지 않은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서 고통과 두려움과 근심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큐블러-로스는 기독교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기를 주저하는 사후세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기독교 전통이 몸의 부활을 믿는 데 반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그리스적 관념을 부활시켜 놓았다. 또한 그녀는 인간 안에 있는 신적 본성은 인간이 신적 근원으로부터 태어날 때 부여받은 ‘신적 섬광’이라고 한다. 이 신적 섬광이 인간의 불멸성을 알려준다는 것이다.(336) 이렇게 그녀가 인간의 신적 본성과 불멸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적 섬광’이라는 말은 본래 영지주의 전통에 속해 있으며, 그것은 신, 인간, 자연의 본질적 분리와 역사 내적인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독교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녀가 주류 기독교 전통에 얼마나 멀리 있느냐, 가까이 있느냐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솟구치는 인간 실존의 외침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는가, 그리고 그녀의 종교적 인식이 삶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사이비 심령술사에게 속고, 때로는 황당해 보이는 영체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근거해서 마지막까지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것은 그 모든 실수와 좌절, 위험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향한 그녀의 탐구가 진실했음을 의미하며, 그녀의 종교적 실험이 가치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평화의 씨앗》은 태국 불교 승려로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있는 술락 시바락사의 글이다. 그는 소승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불교 승려로서 정치적인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박해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서 다양한 평화운동, 정치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나치게 획일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만, 그의 책은 인간 내면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소승불교가 어떻게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실천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태국의 타락한 정치, 사회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영혼의 샘물을 태국의 불교에서 길어올리고자 한다.
그는 전통 불교에서 존중하는 내면의 깨달음과 함께 또하나의 깨달음에 대해 말한다. 불교적 해탈을 위해서는 욕망(貪), 분노(瞋), 어리석음(癡)을 해소하는 내적인 깨달음뿐만 아니라 개인의 욕망, 분노, 어리석음이 사회에 어떤 해악을 미치는가에 대한 외적인 깨달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불교란 기본적으로 고립된 자아의 한계를 이겨내는 길이요, 자기만의 운명에 골몰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과 함께하라는 삶의 지침이다. 그러므로 불교 역시 자연스럽게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불교는 인간을 새롭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33) 인격적 변화와 사회구조의 변화는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불교 전통에는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정의가 상보적인 관계로 상호 중시된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한 중국 성인의 말을 빌어 그는 “성인이 나타날 때마다 강은 더욱 맑아졌으며, 나무는 더욱 푸르러졌다”(36)고 한다. 나아가서 그는 불교 오계(五戒)의 현대적, 사회적 의미를 재해석하며,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 가령 폭력이나 여성문제, 세계화, 소비자본주의, 개발, 발전 등의 현대 사회 현상들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제시한다.
술락 시바락사의 불교 이해는 인간 자의식의 발생과 그 해소에 골몰하는 전통 불교의 지평을 뛰어넘고 있다. 물론 대승불교 전통 안에는 미륵불교처럼 이 땅에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사회적 관심이 전면에 부각되는 경우도 있지만, 소승불교는 대체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남이 아니라 나에게서 발견하고, 내향적인 자기성찰에 몰두한다. 이처럼 사회구조보다는 ‘나’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문제해결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찾는다면 상대적으로 사회 구조악이나 사회변혁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기 쉽다. 그러나 술락 시바락사는 조국의 암담한 사회정치적 현실을 바라보면서 선사들이 하는 법어를 내놓지 않았다. 그는 인간 내면에 천착하는 전통 불교의 자기수양 전통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이 정의로운 태국 사회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 그 역시 자신이 자라온 종교적 전통의 한계를 넘어서서 삶의 바닥에 한걸음 다가선 모습을 보여준다.
위의 세권의 책은 각기 제도 종교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 인간 삶의 역동적인 정황으로부터 어떻게 창조적이고 생기에 넘치는, 그래서 정말로 인간 삶에 생명의 기쁨을 주는 살아있는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삶의 역동성과 복합성, 다원성 앞에서 종교의 고정된 틀은 허물어진다. 앞에서 말한 두가지 종교유형이라는 것도 어쩌면 쉽게 평가하고 해석하기 위해 책상 앞에서 틀을 맞추어놓은 것이지 삶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민초들, 우리의 종교적 천재들은 끊임없이 이 틀을 넘나들었고, 틀 자체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주류적 종교 밖에서 끊임없이 돌출했던 새로운 종교운동들은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인간이 살아있으니 종교도 살아있다. 살아있는 인간이 변하니 종교도 변한다. 인간이 다르니 종교도 다르다. 인간은 살기 위해, 살라는 생명의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초월과 궁극, 근원을 추구한다.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에 충실히 임한다. 살아있는 인간만이 살아있는 종교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