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지역통화운동 동향
오늘날 지구촌에서 유통되고 있는 지역통화 또는 공동체통화는 가지각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뉴욕의 이사카시에서 폴 글로버가 만든 ‘이사카 아워즈’ 같은 시스템은 연방화폐처럼 직접 인쇄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도록 하는 진짜 통화인 반면, 브라질의 꾸리찌바, 영국의 많은 지역과 독일과 헝가리 등에서는 전표나 수표, 또는 통장을 사용해 지역화폐를 유통시키고 있다. 그리고 에드가 칸이 개발해 시카고를 비롯 미국내 많은 도시에서 운영중인 ‘타임달러’ 시스템 ― 일종의 자원봉사 은행처럼 운영되는데, 여기서는 서비스의 종류에 관계없이 1시간의 서비스 제공에 1타임달러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 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과 같이 지역통화제도를 일종의 은행기능으로 보고 녹색화폐를 사용하여 계정을 만들어주고 이를 관리하는 ‘레츠’ 등이 있다.
이렇게 수많은 지역통화운동의 변종들이 지금도 계속 지구촌 전역에서 태어나 실험중인데,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약 3,000개 정도의 지역통화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형태와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영국에서만 거의 500개에 이르는 지역통화제도가 있고, 회원이 2,000명 정도 되는 세계 최대의 ‘블루마운틴 레츠’를 거느리고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에도 약 300개 이상의 지역통화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이밖에도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의 유럽의 여러 도시와 농촌에서도 활발하게 지역통화운동이 시행되고 있으며, 남미와 아시아 등지에도 급속도로 번지고 있어 지역통화제도는 이제 전세계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세계적인 조류의 영향 탓인지, 아니면 97년 말 이후 IMF체제 탓인지 명확치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지역통화운동이 대안경제운동으로 자리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96년부터《녹색평론》에 소개되기 시작한 지역통화운동은 98년 3월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과학운동 조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미래화폐’란 이름으로 지역화폐의 운영을 시작한 이래, 불교환경교육원, 인천의 인하대학교에 소재한 인천정보센터, 중앙대학교 부설 종합사회복지관이 운영하는 기술도구은행, 관악지역화폐 등에서 지역통화운동을 벌이고 있다. 도서출판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작아장터, 교육관련 출판사인 ‘민들레’의 민들레 교육통화 등의 지역통화운동도 있다. 서울시 송파구 자원봉사센터의 송파품앗이와 대구 동구청의 봉사품앗이, 안양시청 자원봉사센터에서 운영하는 지역화폐 등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다양한 지역화폐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부산 녹색통화추진본부, 광주의 나누리와, 현재 준비중인 청주시청,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 등을 포함하면 국내의 지역통화제도는 조만간 약 30개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양적인 팽창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역통화운동은 우리들이 보기에 적지않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통화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정신이 공동체를 살리는 운동이자 환경운동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역통화운동은 공간시스템으로서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지역통화운동 단체에서는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심한 경우 서울에 있는 한 단체에서 발행하는 소식지를 보면, 충북 보은에 사는 회원의 쌀이나 경남 진주시의 회원이 제공하고자 하는 물품목록 등이 제시되어 있는 등 상당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우리의 당면 과제인 지역공동체를 살리고, 지구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데 지역통화운동이 이바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을 예로 들어보자. 필자는 파스퇴르유업에서 생산한 매실요구르트를 별 생각 없이 대전의 한 슈퍼마켓에서 사서 마시고 난 후 상당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이 매실요구르트 병에는 “원유 79.89%(국산), 매실시럽 6.8%(매실 50%(대만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완제품 매실요구르트를 하나 생산하기 위해 횡성까지 국내의 많은 지역에서 원유를 수집해오고, 매실의 절반은 국내, 나머지 절반은 대만에서 수입해오고, 나아가 요구르트 병의 원료는 우리가 모르는 국내의 어떤 지역 또는 외국에서 수입해와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다 요구르트의 생산지인 횡성에서 다시 소비지인 대전까지 막대한 에너지를 들여 운반을 해오고, 이를 필자가 마시고 난 후 빈병을 재활용업체에 넘겨주면서 요구르트의 기나긴 생애는 끝이 난다. 이러한 매실요구르트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의 전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지구자원을 낭비한 것일까? 독일의 ‘부퍼탈연구소’에서 슈투트가르트시의 딸기요구르트를 대상으로 수행한 한 사례연구는 폐기과정을 제외하고 그 이동거리가 대략 8,00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필자가 마신 요구르트의 원료인 매실은 독일-폴란드 사이처럼 근거리도 아닌 대만에서 수입해온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수치는 아마도 더욱 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사회는 너무나도 지속 불가능한 생산, 유통, 소비, 폐기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를 개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당장 어렵다 할지라도 다소라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생물지역주의를 토대로 하여 우리 삶의 양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재조직해야 한다. 그 한 방안이 바로 통화에 대한 통제수단을 지역공동체가 갖고, 유휴상태의 기술과 자원을 다시 순환시키는 지역화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현재 추진되고 있는 지역통화운동의 주요한 또다른 문제점은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지방정부가 직접 추진주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지금 지역주민의 기초적인 삶이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관청과 시장에 의해 근본적으로 왜곡되고 소외되어 가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가 너무 깊숙이 진행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관과 주민 사이에 오래 전부터 내려온 수직적 위계질서를, 보살피고 나누는 선물경제에까지 깊이 관여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앞서 소개한 2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지금 국내에서 여러 단체들이 지역통화제도를 운영하면서 경험하고 있는 다른 일반적인 문제들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대전에서 운영중인 ‘한밭레츠’는 그런 인식의 산물로 태어난 것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한 철저하게 생물지역주의와 지역적 자율성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지금까지 지역통화운동의 선각자들이 지켜온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밭레츠’의 시작
대전은 토착민보다 외지인이 많이 이주해와 사는 도시로 다른 대도시에 비해 지역주민들이 느끼는 정주성이 비교적 낮은 곳이다. 또한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쉽게 수용되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를 지닌 다소 보수적인 도시이다. 이런 도시에서 중앙은행이 아닌 지역, 특히 회원들로 구성된 공동체 내에서 주민들이 직접 화폐를 발행해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대전에서 지역통화운동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98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이때는 이미 IMF체제가 깊숙이 진행되던 때로 지역주민 대다수가 2가지 중요한 사실을 경험하고 있던 시기이다. 하나는 당시까지 철석같이 믿어왔던 국가도 더이상 국민들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속에서 호랑이임을 자처하고 다니던 기업도 이제는 정글의 법칙을 인정하고 서서히 멸종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다 돈놀이를 하므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은행마저도 처참하게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던 때였다.
이렇게 국민들의 삶과 일터를 지켜주리라고 믿던 정부는 물론 기업도 모두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스스로 가능한 한 자립적인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공생을 모색하는 소박한 생활방식을 확립하려는 운동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역화폐운동이었지만, 이 시스템을 우리들이 사는 지역에 도입하는 일은 대전의 특수성 때문에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대전의제21 추진협의회’ 주최로 ‘지역통화운동의 가능성과 향후 과제’라는 주제를 갖고 시민토론회(98년 9월 24일)를 개최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홍보하는 노력이었다. 이때 필자는 영국에서 국민들에게 레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가이 다운시의 명저,《붕괴 그 이후 ― 무지개 경제의 출현》을 비롯해 적지않은 서적을 읽고 정리한〈지역 변화를 위한 새로운 도구, 지역통화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후 ‘대전의제21 추진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소식지《꿈과 희망의 푸른 대전21》에서 99년 6월부터 몇차례 지역통화운동과 관련된 글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99년 10월 발행한 소식지에 ‘한밭레츠를 시작합니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해 이 운동에 참여하려는 회원들을 모집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한밭레츠’에 시민들이 가입해 계정을 등록하고 사용하는 방법, 등록자 동의서, 제공하고 싶은 것과 요청하고 싶은 것을 기록한 사용자등록 가이드, 그리고 실제 거래내역과 연락처 등이 담긴 한밭레츠 게시판의 예를 소개하였다. 또한 가입회원들이, 직접 거래하는 모든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조금 서투르기는 하지만 간단히 만화로 그려 홍보하는 노력도 시도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개인적으로 평소 친분관계를 맺고 있던 지역의 신문 · 방송 등 언론사의 기자와 PD 등에게도 보도자료를 제공하고 ‘한밭레츠’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즉, “우리들이 사용하는 화폐명은 널리 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이 담긴 순수 우리말인 ‘두루’이고, 이 ‘두루’는 회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시민들이 사용하는 원화와 등가의 원칙을 적용해 1,000두루는 1,000원에 해당한다. 등록소에 가입 신청(가입비는 현금 10,000원, 실직자와 주부 등은 10,000두루)을 한 회원들이 원하는 것과 제공하고자 하는 물품과 서비스 목록을 알려주면, 그를 토대로 등록소에서는 게시판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제공해준다. 이것을 보고 회원들이 전화를 하여 상호합의 아래 거래를 한 후 최종적으로 거래내역을 등록소에 통보해주면 등록소에서는 각 개인의 계정을 통합해서 관리하게 된다. 등록소의 운영은 매 거래시마다 발생하는 거래액의 5%를 수수료로 공제해 사용하게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이때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대체로 “거참, 신기하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냐” 하는 것이었다. 어떻든 지역 품앗이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대로 그들은 여러차례 언론매체에 이 운동을 소개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힘입어 우리들이 회원가입을 받기 시작한 11월 초부터는 각계 각층에서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심지어는 대전과 인접한 청주, 옥천, 공주, 육군본부가 있는 계룡대는 물론이고 전주 등에서도 문의를 해오거나 직접 방문하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하지만 대전시 행정구역 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회원자격을 부여한다는 내부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는 인접지역에서 문의해오는 사람들에게 해당지역에서 직접 시스템을 만들 경우 우리가 도울 수 있다는 뜻을 밝히고 정중히 거절하기도 하였다. 그런 탓인지 좀처럼 생각보다는 빨리 회원들이 모아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당시에 등록소 운영 책임을 맡았던 담당간사가 직접 친지와 이웃들을 대상으로 회원을 모집하는 일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12월 초에 ‘한밭레츠’의 독자적인 홈페이지(www.tjlets.or. kr)를 개설해 공개하자 이미 가입신청을 한 회원들이 빠른 시일내에 거래를 시작하게 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일부 회원들의 의견과 희망사항들이 방명록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구, 인천 등 타지역에서도 축하 메시지가 답지했고, 심지어는 멀리 일본에서까지 한 유학생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긴 전자편지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2000년 1월에는 ‘한밭레츠’를 본격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사카 아워즈’의 격월간 소식지《아워 타운》에서 “우리들은 모두 한 배에 탔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그림을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슬그머니 복제해다가 ‘한밭레츠’의 벽걸이 그림을 만들고, 그동안 회원들이 신청한 거래목록을 수록해 A4 용지 8면 크기의 게시판 창간호(2월 1일자)를 제작했다. 그리고 2월 1일에는 ‘샘이 깊은 물’이라는 전통찻집에서 비전향 출소 장기수 가운데 한분이었던 김용수 선생(현재는 북송되어 북한에 거주함)을 비롯해 70여명의 회원과 가족들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행사를 열었다. 이때는 떡과 과일, 김밥, 음료수 등을 풍성하게 준비하여 회원들간에 나누어 먹으면서 ‘레츠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취지를 교육하는 간단한 설명회와 함께 홍보비디오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회원의 도움을 받아 독자적으로 제작한 약 15분 분량의 비디오 상영도 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화폐인 ‘두루’를 사용해 가상으로 거래를 시현해보는 ‘레츠 게임’과 회원들의 장기자랑 등 다채로운 행사도 진행하였다. 이날 우리들의 모임은 문화방송의 지방 뉴스와 인터넷 신문〈오마이뉴스〉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렇게 ‘한밭레츠’라는 이름의 배를 출범시키는 데 ‘대전의제21 추진협의회’가 산파역할을 담당했지만, 그 사업이 지방의제21 사업으로 정식 채택되지 않은 데다 외부지원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일부 회원들의 문제제기도 있어 창립행사 이후 독립적인 단체로 운영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회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레츠 시스템’ 내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지역공동체를 복원하는 사업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둘째, 물품을 제공하겠다는 사람보다는 기술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업주나 직장인보다는 전문능력을 가진 실직자, 프리랜서 등이 많았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볼 때, 우리들은 출발부터 또하나의 ‘동호회’에 그칠 우려가 있고, 지역사회에 대한 파급효과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 채 시작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창립행사 이후에도 처음 기대했던 만큼의 거래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거래에 참가해본 회원들은 ‘레츠 시스템’의 창시자 마이클 린턴의 지적처럼 “돈은 인치나 갤런, 파운드와 같이 비물질적인 단위”이고, 철학자 앨런 와트가 말한 바와 같이 “돈이 없기 때문에 서로간에 가치를 교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측량단위가 없기 때문에 집을 짓지 못한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추상적인 이념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여전히 “벌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기존 화폐제도의 오랜 관습에 많은 회원들이 길들여져 있어 먼저 거래에 나서겠다는 생각 대신에,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주기만 기다리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이런 소극적인 태도가 자연히 타인의 구매욕을 자극할 만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게다가 낯선 사람과 접촉해 협상해야 한다는 어색함, 선뜻 그 가치를 판단하기 힘든 물품이나 용역 앞에서 멈칫거리는 일 등이 자연스레 발생하여 거래건수는 좀처럼 증가하지 않았다.
몇가지 문제점과 새로운 시도들
‘한밭레츠’는 흔히 하듯이 맨 위에 총회를 두고, 대표, 운영위원장, 사무처 등을 둔 형식적인 의결 · 집행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위계구조가 명확한 조직을 가질 경우 자칫 시스템 자체가 관료화될 위험이 높고, 불필요한 운영경비도 많이 소요되며, 무엇보다 레츠정신에 위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의상 등록소장의 역할을 담당할 운영위원장과 회계감사, 그리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소수의 운영위원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와 시스템 관리자만을 두고 슬림형 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운영위원회는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지는 주요 사안에 대해 토의와 합의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초기에 대두되었던 논쟁거리 가운데 몇가지 예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현금과 ‘두루’를 함께 사용할 경우 현금거래의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주유소를 운영하는 한 사람의 회원가입을 놓고 대두되었는데, 주유소 사장은 석유의 원가가 높다는 점을 들어 5%만 ‘두루’로 거래하면 좋겠다는 의사를 등록소에 밝혀왔다. 이를 놓고 한편에서는 석유가 상대적으로 구매욕이 높은 품목이기 때문에 초기에 거래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을 들어 ‘두루’ 비율이 낮기는 하지만 회원가입을 허용하자고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거래 초기부터 그런 예외를 인정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현금소비를 줄인다는 당초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견해를 들어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결국 예외는 두되 가능한 한 70% 이상의 현금거래를 요구하는 거래는 제외하자는 결론을 내렸고, 그 결과 주유소 사장의 레츠 가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둘째, 회원들 중 상당수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 거래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으므로 이들을 거래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현금과 ‘두루’를 교환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시스템 내에서 현금이 더 큰 비중으로 다뤄지게 되어 ‘한밭레츠’의 설립취지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여 거부되었고, 대신 등록소가 재정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당장의 현금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가입비와 수수료로 모아진 등록소 소유의 ‘두루’는 현금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예외조치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전 인근지역에서 가입의사를 밝히는 사람들 역시 생물지역주의를 준수한다는 원칙을 적용하여 회원가입을 받지 않았다. ‘레츠 시스템’을 운영하는 한 단위로서 대전이라는 대도시 전체를 포괄한다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 사실이다. 회원간의 접근성을 높여 거래과정에서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소단위로의 자급자족형 경제시스템을 유도한다는 레츠의 근본적인 취지를 살리려고 이렇게 불가피한 조치를 취했다. 시간이 지나 ‘한밭레츠’가 보다 견고히 자리잡고 등록소의 여건이 갖추어지면 구 단위로 분할해 운영하고, 이들을 ‘레츠네트’ 형식으로 묶어 운영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처럼 ‘한밭레츠’가 레츠의 정신과 원칙에 충실한 시스템을 만들기로 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회원수가 창립 이후 작년 말 현재까지 불과 약 60-70여명만이 늘어 총회원수가 13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고, 거래가 월평균 20-30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 가운데 하나이다. 게다가 구매욕을 유발시킬 만한 거래목록이 많지 않고, 거래를 하고는 싶으나 이동거리로 인해 접근성이 떨어져 거래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으며, 열성회원이 개인 사정으로 거래를 중단하거나 이탈하는 경우도 생겨나는 등 문제점 또한 적지않다. 이밖에도 등록소 운영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게시판과 소식지 제작비, 전화 및 통신비, 우편료, 홈페이지 운영비는 물론이고 시스템 관리자의 인건비 등 ‘두루’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금수요를 수수료와 가입비만으로 감당키 어렵다는 사실도 시스템의 안정적 운영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외, 교습, 대여 등의 분야에서 월 고정거래 3-4건, 품앗이 경매를 통한 거래 10여건, 한의원 진료 10여건, 기타 3-4건의 거래는 매월 이루어지고 있어, 향후에 거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개발할 경우 시스템이 좀더 안정적으로 성장해갈 가능성은 충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위해 격월로 외국의 레츠에서 시도하고 있는 바와 같은 ‘폿트럭 디너’ 형식으로 회원모임인 ‘품앗이 만찬’을 열고 있다. 이 만찬행사에서는 회원들이 각자 준비한 음식으로 뷔페상을 차려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회원간의 근황을 확인하고 신입회원을 소개하는 등 친목을 도모한다. 그리고 각자의 거래목록을 홍보하고 등록소가 처한 현재의 어려움을 공유하며, 회원 상호간에 꼭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재주있는 회원들의 장기자랑도 펼치면서 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키고 있다.
또한 작년 7월부터는 색다른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품앗이 만찬 때에 ‘품앗이 경매코너’를 만들어 각종 수공예품, 농산물, 재활용품 등의 물품을 경매형식을 빌어 현장에서 직접 거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대전 MBC에서는 ‘토요일이 좋다’라는 주말 정보프로그램에 ‘한밭레츠’ 전반을 소개하는 10분짜리 기록물을 만들어 방영하였고, 지금 그것을 우리는 회원들을 교육하고 홍보하는 시청각 자료로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의 과제와 전망
지난 1년간의 ‘한밭레츠’ 운영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과제와 전망을 간단히 개괄해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들이 부정할래야 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한 운영비와 간사의 인건비 등과 관련된 재정 문제이다. 돈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에 돈이 필요하다는 역설은 이 사회에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고민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일 것이다. ‘한밭레츠’도 동일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거래목록이 기록된 게시판도 2달에 한번이 아니라 1개월에 한번 회원들에게 제공한다면 더 많은 거래가 이루어지겠지만 이 역시 인력과 재원 부족으로 쉽지만은 않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거래의 활성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원래 의도한 대로 수수료(거래액의 5%)만으로 ‘한밭레츠’의 자립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현재의 거래실적만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등록소의 운영 자체가 불가능한데, 거칠게 계산을 해볼 경우 현재보다 약 30-40배 이상의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이것도 현재 상태에서 지출되는 고정비용을 제외한 규모이다. 이것은, 좀더 활발한 거래를 위해서는 추가자금이 필요한데 그 돈 역시 거래가 활발해져야 마련되는 모순된 상황에 우리가 빠져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해나가려면 수수료를 통한 수익금 이외에 별도의 자금을 확보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한밭레츠’에서는 시민단체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방식처럼 회원들이 회비를 납부토록 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중이다. 이 사안은 이미 운영위원회에서 논의되었는데, 대부분의 운영위원들이 수수료 대신 회비를 납부토록 하는 안의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현재는 회원들에게 제안을 해둔 상태로서, 홈페이지를 통한 인터넷 설문조사와 전화 면접을 통해 대다수 회원들이 게시판의 제작과 발송에 필요한 기본경비로 책정된 월 1,000원의 회비 납부에 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설령 이것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스템 관리자의 인건비나 사무실 운영비 등의 문제는 남아있을 것이다.
둘째, 회원들끼리 만나는 기회도 꼭 만찬 때가 아니라 특정장소에 교류센터가 마련된다면, 그곳에서 좀더 많은 접촉이 이루어지고 물품을 거래하거나 공유하기도 하고 친목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상근인력이 필요하다. 실례로 영국에서 제작된《레츠 지침서》를 보면 지역통화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계정을 관리하는 회계원, 홈페이지 관리자, 홍보전단을 제작하는 등의 업무를 전담하는 인력을 포함해 적어도 3-6명의 인력이 필요한 것으로 나와있다. 대부분이 자원봉사자로 운영되는 이들 나라와는 달리 우리 실정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2-3명의 상근인력은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 11월 서울에서 있었던 전국 단위의 워크샵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지역통화운동의 상이한 전개방식은 몇가지 주요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단체 중 ‘송파품앗이’와 ‘기술도구은행’ 그리고 ‘한밭레츠’가 지역통화만을 위한 유일한 단체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FM시스템’이나, 녹색연합의 ‘작아장터’, 불교환경교육원의 ‘두레’ 등은 지역통화운동을 통해 지역을 살리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전국적 거래를 도모하려 한다는 문제점과 함께 시스템 관리자가 각 단체의 주된 업무를 겸임하고 있어 레츠에 대한 집중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은 거래실적이나 회원들의 결합력 면에서도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중 ‘송파품앗이’는 구청으로부터, ‘기술도구은행’은 한 기업의 복지기금으로부터 관리자의 인건비와 시스템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보장받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한밭레츠’도 이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한밭레츠’의 경우 대전시 행정구역 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회원을 모집하고 거래가 진행되는 만큼, 접근성이 떨어져 거래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열성적인 회원 중에는 왕복 2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면서까지 거래를 성사시켜 잔잔한 미담이 되기도 하지만, 이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유발한다는 측면에서 무작정 장려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구 또는 동 단위로 레츠를 분할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문제를 점진적으로 풀기 위해 우선 금년부터는 구별 연락망을 구축하고, ‘품앗이 만찬’과는 별도로 구별 모임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적극 추진해보자는 의견도 있다.
넷째, 거래내용을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와 관련해 대안을 모색하는 일도 ‘한밭레츠’가 추진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업 중 하나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밑반찬 만들기나 케이크 만들기, 그리고 농사짓는 가족을 둔 회원들이 쌀과 꿀, 곶감 등을 직접 가져와 거래하는 먹을거리와 관련된 거래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한의사 1명을 포함해 5명의 전문의가 참여하고 있는 의료분야, 특히 한의학 영역에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질병에 대한 치료 수요가 다른 어떤 것보다 높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는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컴퓨터가 다른 전자제품에 비해 고장이 잦은 데다, 그 수리비 또한 천차만별이고 비용도 비교적 고가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컴퓨터와 관련된 거래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래의욕이 높은 부분이 교육분야이다. 자녀들의 과외를 비롯해 각종 재능교육과 관련된 거래가 다른 분야에 비해 월등히 많은데, 이는 사교육비 부담이 늘어나면서 회원들이 ‘레츠 시스템’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크게 갖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와 같은 4가지 분야의 거래가 좀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영역에서 회원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지금까지 회원간의 거래가 미흡했던 부분의 문제점을 파악해 보완하는 노력이 아주 긴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비교적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 특히 노 · 장년층의 회원 확보에 좀더 역점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한밭레츠’의 경우 130여명의 회원 중 순수 실업자는 10명 이내이고, 대부분 직장인이거나 자영업자, 또는 주부이므로 시스템의 원활한 운영에는 적지않은 장애가 있다. ‘송파품앗이’의 경우 그것을 활성화시킨 주역들이 60대 이상의 노 · 장년층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큰데, 실제로 운영위원장이었던 60대의 노인은 레츠 시스템이 활발해지려면 능력과 경륜이 있으면서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다수 회원들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회원의 다수가 시간이 많은 실업자들로만 이루어져도 거래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대전에 있는 빈들교회에서 운영하는 ‘품두레 마을’의 경험에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이렇게 ‘한밭레츠’가 안고 있는 과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대전과 그밖의 지역에서 새로운 조짐과 주목할 만한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가 우리들에게 계속 들어오고 있다.
얼마전 시스템 관리자가 대전지역 인근농가 5가구를 대상으로 레츠 시스템에 대해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두세 농가가 ‘한밭레츠’에 참가할 의사를 보였다. 올해에는 이들을 통한 거래가 적지않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에 대해 철저한 대책을 수립 · 추진해야 할 것 같다.
다음으로는 충남대 학생회원 중 일부가 금년중 대학내에서 그 학교의 상징을 따서 ‘백마레츠’라는 독자적인 레츠를 시작할 계획을 가지고 준비중인데, 이들에 대한 지원업무도 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학사회가 각자의 전공분야가 있는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품앗이를 활성화시키고, 전공도서나 수험도서 등을 나누기도 하고 자취물품을 거래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대학가 주변지역의 자취방과 하숙집, 문화 · 오락시설 등으로까지 회원들을 포섭하는 노력을 확대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밖에도 몇가지 주목할 만한 실험들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역통화운동이 실업극복의 주요 수단으로 떠오르자 각 지역의 실업자 지원센터나 실업극복 시민운동협의회 등이 지역통화제도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이것은 운영비를 확보하면서도 사업의 집중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어 앞으로 신중히 검토해볼 만한 사안이다.
단기적으로는 이미 운영중인 주민자치센터의 일부 공간을 할당받아 녹색가게, 푸드뱅크, 나눔센터 등으로 운영하면서 회원들간의 교류와 정보교환의 장으로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또한 지역의 중소기업체나 자영업체에서의 구인수요를 회원들의 구직수요와 연결시켜 실업자의 고용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레츠’가 모체가 되어 인근의 그린벨트 지역에 거주하는 직접생산자의 활동을 자극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후원하는 농업’을 시도해볼 수도 있고, 도시 자체를 생태적으로 개조해가는 데 주요 수단으로 최근 들어 주목받고 있는 ‘도시농업’을 실험적으로 추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