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법이란 말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이 방면의 초기 개척자 중의 한사람인 후쿠오카 마사노부 선생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된 90년대 이후일 것이다. 후쿠오카 선생의 책《짚 한오라기의 혁명》과《자연농법》은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계적인 관심과 찬사를 불러모으고 있으나 아직 이 농법에 기초한 구체적인 성과는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선생의 아이디어와 정신은 여전히 대체농법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후쿠오카 선생을 한국에 소개한 최성현 선생이 3년 전에 또 한분의 자연농법 대가를《신비한 밭에 서서》란 책을 통하여 소개하였으니 그가 곧 가와구치 요시카즈 선생이다. 이 책은 “잡초와 함께 짓는 자연농법 철학”이라는 부제가 붙어있거니와 잡초와 작물의 공생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이 책을 접한 이래로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꼭 한번 선생을 직접 찾아가 만나보고자 하였다. 가와구치 선생은 외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자연농법의 전도사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 필자는 자연농법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마침 선생의 농장에까지 들르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1박 2일 동안 일본 나라현에 있는 선생의 농장과 인근의 아카메 자연농 실습농장을 방문하여 느낀 소감을《녹색평론》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에 사는 재일교포 친구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은 채 선생의 주소도 모르고 떠난 일본여행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업도 잠시 접어둔 채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위해 통역과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고마운 친구. 하마마츠에서 나고야를 거쳐 아카메까지 기차로 세시간 반. 삼나무와 대나무 숲이 멋드러지게 우거진 일본의 산촌풍경을 즐기다보니 어느덧 아카메역이다. 6월의 뙤약볕 아래 약도를 보며 굽이굽이 마을을 지나 한 40여분을 걸어 산속으로 들어가니 소형차들로 빼곡한 임시 주차장이 나오고 그 아래 계곡에 위치한 논밭에서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이곳이 가와구치 선생이 91년 3월 첫번째로 문을 연 아카메 자연농 실습지이다. 중간에 끼여들었으므로 실무간사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바로 현장을 둘러본다. 삼면이 산림으로 둘러싸인 계곡이다. 경작지 주변을 모조리 골함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멧돼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란다. 하긴 이런 산중에서 아무런 방비없이 농사를 지으면 짐승들 밥상 차려주는 것이나 다름없겠지.
가와구치 선생이 메가폰을 들고 일일이 포장을 돌며 설명을 한다. 평생 농사지으신 분 답지않게 얼굴이 하얗고 선이 가늘다. 그러나 일하는 맵시는 몹시 재다. 마치 경량급 마라토너 같다. 마라토너 같다는 것은 이날 밤늦도록 계속된 선생의 강의를 보아도 그렇다. 힘이 없는 듯하면서도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강의를 계속한다. 양파수확 ― 언뜻 보면 수북한 풀무덤인데 그속을 헤치니 양파가 나란히 서있다. 하나하나 뽑아서 풀 위에 놓는다. 주변을 자세히 보니 풀속에 여러가지가 자라고 있다. 완두콩, 양배추, 감자, 당근, 배추 등등. 잡초와 함께 짓는 농사라더니 과연 ?? 이날의 주된 작업은 보리수확이다. 회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밭에서 낫을 들고 보리이삭만 베어내 바구니에 담는다. 개중에 낱알이 튼실하고 무거워보이는 것은 밑둥부터 잘라내어 따로 사려둔다. 종자로 쓰기 위해서다. 수확이 끝난 보리밭에는 삐죽한 보릿대만이 촘촘히 서있다. 조만간 그것들은 옆으로 쓰러뜨려지고 그 사이로 모가 심겨질 터이다.
밭고랑에서 아카메 실습지의 책임간사인 시바다 여사로부터 농장의 유래와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여사는 십여년간 유기농 운동을 벌이다가 2년 전부터 자연농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여사는 말한다. “우리는 ‘자연농법’이라 하지 않고 ‘자연농’이라는 말을 씁니다. 농법이라는 것은 농사를 짓는 특정한 방법을 말하지만 자연농은 자연의 원리에 따르는 농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속에 이들의 농사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엿보인다. 농사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방편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세계관의 문제로 되는 것이다. 자연농이란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계 안에서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총체이자 향연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실습생의 대부분이 도시지역 출신인 데다 젊은 사람들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자연농은 숨막히는 도시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이자 대안적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현재 8천여평 크기의 이 산속 농장에는 311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어서 각자 혹은 그룹으로 조그만 토지를 분양받아 나름대로 자연농을 실습하고 있다. 일부 극성적인 회원들은 이를 위해 아예 농장 근처로 이사를 오기도. 이미 책을 통하여 알고 있는 바이지만 다시한번 이들이 말하는 자연농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본다.
“자연농의 기본은 땅을 갈지 않고 잡초나 벌레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화학비료나 퇴비, 미생물, 농약, 제초제 따위도 필요없게 됩니다. 그리고 기계나 시설, 비닐 등도 사용하지 않고 되도록 자연에 맡겨두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밭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일체가 되어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 과부족없이 만들어나가면서 생명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활동원리에 따르면 환경에 조금도 피해를 주는 일없이 단순하고도 적은 노동력으로 기본적인 곡물이나 야채를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와구치 선생의 자연농과 후쿠오카 선생의 자연농법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후쿠오카 선생은 이른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의 농법’입니다만, 그것은 아무래도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볼 때 그다지 실천적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와구치 선생의 자연농은 생명의 관점에서 작물들을 가꾸고 재배한다는 점에서 보다 실천적입니다.” 사실 필자가 여기에 올 때까지 많은 유기농(자연농)관련자들을 만나보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쿠오카 선생의 자연농법은 별로 현실성이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농사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가와구치 선생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쿠오카 선생으로부터 자연농업에 대해 감화를 받았음을 실토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도 혹시나 선생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연락해 보았으나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후쿠오카 선생은 너무 연로하여서 찾아오는 사람을 잘 만나주지도 않을 뿐더러 이미 농사를 작파한 지 오래되어 가도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생의 거소가 친구가 살고 있는 하마마츠에서 너무도 멀어 짧은 일정으로는 가볼 엄두도 나질 않았다. 시바다 여사는 마치 가와구치 선생의 분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농에 대한 나의 계속되는 질문에 막힘 없이 술술 대답을 한다. 하긴 농장의 책임간사로서 수없이 찾아오는 실습생들의 온갖 질문에 답하다보면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농장의 다른 쪽으로 가보니 더욱 원시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어떤 곳은 주인이 잘 돌보지 않아 완전히 풀밭이 된 곳도 있다. 전체적으로 조감해보면 이곳이 경작지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산야의 한 자락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로 경관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연농이 환경에 일체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말이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조금더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모내기를 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를 만났다. 겨우 두평이나 될까 하는 다랑이 밭에 모를 옮겨 심고 있었다. 보리를 수확한 자리에 금줄을 치고 모를 하나하나 손으로 심고 있다. 사진을 몇장 찍고 나서, 그거 일일이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고 짐짓 물어본다. “아, 이거 재미있습니다. 내가 대자연 속에서 생명을 하나하나 심고 가꾼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즐겁고 기쁩니다.” 이웃한 밭의 지주대에 웬 양말뭉치가 듬성듬성 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아, 그것은요, 멧돼지를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 안에 사람의 머리카락이 들어있는데 멧돼지들이 그 냄새를 맡고 근처에 사람이 있는 줄 알고 가까이 오지를 않습니다.” 흠, 재미있는 발상이로구나! 인도의 벵갈지방에서는 농부들이 산길을 갈 때 호랑이의 공격을 막기 위해 뒤통수에 눈을 부릅뜬 사람얼굴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데 이곳에서도 토착 농민의 지혜를 적극 활용하고 있구나 싶었다. 학계에서는 이것을 ‘토착지식’이라고 하여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현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지난 세기 세계농업을 주도한 소위 ‘과학영농’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과학의 이름을 빌린 환경파괴의 농업이었다.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토착지식을 ‘비과학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몰아내고 개개 농사현장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외부에서 들여온 농법과 정보, 물자에 기대어 농사를 지은 결과 과학영농은 오늘날과 같은 환경파괴와 농민소외를 낳고 말았다.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농업이 되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지속가능한 농업’은 이제 다시 ‘토착지식’의 가치에 눈을 돌리고 있다. ‘지속가능한 농업’의 가장 선진적인 형태인 자연농업이 토착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어느덧 해가 많이 기울어 맘씨 좋게 생긴 사내를 뒤로 하고 농장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안내자를 따라 인근의 산장에 들어서니 이날 참가한 모든 실습생들이 모여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산장은 한달에 한번 가와구치 선생을 모시고 하룻밤을 묵어가며 강의를 듣는 장소이다. 널찍한 일본식 다다미방에 식사를 하기 위해 다들 모였는데 얼추 50명은 되어 보였다. 밖에서 꿈지락거리느라고 조금 늦게 들어갔더니 주최측에서 가와구치 선생의 옆에 자리를 마련하여 놓았다. 아마도 이날의 손님 중 가장 먼 곳에서 온 사람에 대한 배려인 것 같았다. 식사 전에 맥주를 한잔씩 부어놓고 나에게 건배를 요청하였다. 나는 조금 상기되어 건배를 크게 외쳤다. 식사는 콩이 든 쌀밥에 몇가지 야채무침이 전부였다. 쌀은 씹는 맛이 아주 좋았다. 배가 고팠던 나는 선생과 담소하며 밥 두그릇을 거뜬히 비웠다.
식사 후 가와구치 선생을 모시고 질의 . 응답 형식으로 진행되는 강의가 시작되었다. 선생은 먼저 나에게 농장을 둘러본 소감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던 농장의 모습이며 지상천국이 이에 다름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야생초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내가 자연농에 주목하는 것은 자연농이야말로 야생초의 가치를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농법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선생은 자연농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은 야생초의 생육을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다만 주어진 조건에서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여름에 작물의 성장에 위협을 줄 정도로 웃자란 풀들을 베어낼 때에도 모조리 베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풀들에게 양보를 구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베어내어 그 자리에 깔아준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자연농법을 연구하면서 품고 있었던 몇가지 의문들을 연속적으로 물어보았다. “만약 ‘4무농법’의 원칙을 지킨다면 유효 미생물 농법(EM농법)도 자연농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선생은 ‘4무’란 무경운, 무제초, 무농약, 무비료를 의미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하자 선생은, 자신은 이중에서 무제초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후쿠오카류의 자연농법에서는 무제초와 무전정을 원칙으로 하지만 실제로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그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입니다. 아무리 자연의 원리에 따른다고 하지만 ‘농(農)’이라는 것이 ‘인위(人爲)’인 한 작물의 성장을 돕기 위해 적절한 제초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초는 경작지의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잡초는 적당히 있으면 오히려 작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잡초와 함께 짓는 농사’라고 합니다. 유효 미생물 농법이라는 것은 미생물을 외부에서 가져다 쓰는 것인데 그것 역시 부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자연은 그 자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외부로부터 무언가 들여오면 작물 자체의 생명력이 의존적이 되고 결국에는 약해집니다. 한번 땅을 갈고 비료를 주기 시작하면 계속 그렇게 해야 하는 것과 같지요. 그런 점에서 토착 미생물을 배양하여 이용하는 것이 더 자연농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작물이 자라는 그 자리에서 미생물이 살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명의 보전은 생명 스스로 조직하고 번성하는 원리에 맡겨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연농은 경제성이랄까 수확량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
“수량이라는 것은 ‘물질의 세계’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자연농이 수확량에 있어서 관행농법에 비하여 적을는지는 몰라도 생명의 수에 있어서는 월등하다고 봅니다. 자연농에서 생산된 작물은 일체의 다른 생명들과 함께 자라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력이 충만해 있습니다. 관행농법에 의하여 몇할의 낱알이 더 생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산하기 위하여 투입된 비료와 농약, 기계설비 그리고 그로 인한 환경파괴 등을 감안하면 결코 더 경제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모내기하는 것을 보니까 번거롭고 노력도 많이 드는 것 같은데 좀더 손쉬운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한국에서는 ‘태평농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보리수확과 동시에 볍씨를 직파하여 성공적으로 재배하고 있습니다만 …….”
“글쎄요, 거기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직파가 잘 안되었습니다. 처음에 자연농으로 전환하여 후쿠오카 선생의 방법대로 직파를 해보았습니다만 2년 동안 전혀 소출을 낼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잡초를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실험을 거듭하여 만들어낸 것이 지금의 모내기 방식입니다. 겨울풀과 여름풀의 생장이 교차하는 시점에(주로 6월 중순에서 하순) 밭 한 귀퉁이에 마련된 모판에서 어느 정도 자란 모를 하나하나 이식하는 것입니다. 관행농에서의 노동은 소출을 많이 내겠다는 욕심에서 이루어지므로 그런 노력들이 힘들게 보이겠지만 자연농에서는 신비스런 생명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노동이 즐겁고 기쁘기만 합니다.”
“관행농법으로 기른 작물의 종자가 자연농에 적응하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한 일년이면 바로 적응을 합니다.”
“자연농에서는 작물의 인위적인 육종에 적극적입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육종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씨앗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과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률적으로 말하기 곤란합니다.”
여기까지 질의와 응답이 이루어졌을 때 한 젊은이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의를 제기한다. “자연농은 정신적인 측면이 중요한데 한국에서 오신 분은 순 기술적인 질문만 합니다.”
그러자 가와구치 선생은 고맙게도 변론을 해주신다. “아닙니다. 내가 볼 때 저분은 자연농의 그러한 측면을 충분히 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적 측면이 기본이 되기는 하지만 기술적 측면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아까 식사를 함께 하면서 잠시 나누었던 대화를 통하여 나름대로 짐작하시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자연농법의 철학적 측면보다도 기술적 측면에 더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도시에서 대안적 삶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생의 철학과 인생관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선생의 강의는 교육과 의료, 예술에까지 다방면에 걸쳐서 늦도록 이어졌다.
다음날은 포장에서 오전부터 선생의 강의가 계속될 예정이었다. 나는 시간 때문에 거기까지는 참석 못하고 바로 사쿠라이 시에 있는 선생의 농원을 방문해 보고 싶었다. 마침 옆에 있던 다마노라는 재일교포 청년이 고맙게도 자신의 차로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아침식사 후 작별인사를 고하자 선생은 자신의 농장에 가서 22년간 자연농으로 다져진 부드러운 흙을 꼭 보고 가라고 당부하신다. 그러고는 전화를 넣어 집에 있는 사모님에게 점심까지 부탁하는 듯하였다. 선생의 집은 아카메 농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자동차로 한 30분쯤 가보니 집들이 꽤 많은 전형적인 일본 농촌이었다. 먼저 다마노 군의 안내로 논밭부터 둘러보았다. 지방도와 마을 사이에 꽤 널찍한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다마노 군이 손짓하는 곳을 보니, 세상에, 주변의 논은 이미 모내기를 끝내어 물이 찰랑찰랑한 모습인데 선생의 논(이 아니라 밭)은 무려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풀들로 가득이었다. 기가 막혔다. 전년도에 보리를 아니 심었단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많은 풀들을 베어내지 않고 어떻게 모내기를 할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한쪽에 모판이 마련돼 있었다.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여기서 어떻게 모내기를 하는지 물어보았다. 선생의 제자답게 다마노 군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풀더미 사이를 헤치고 주워 든 작대기로 땅에 구멍을 내더니 모 하나를 떼어서 심는 시늉을 한다. 좀 떨어져서 보니 풀숲에 가려 일하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래가지고는 농사가 제대로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실제로 가와구치 선생이 하는 그대로 해보라고 부탁을 한다. 지금은 도구가 없어서 곤란하다며 대신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먼저 풀숲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논에 금줄을 쳐놓고 모를 담은 나무상자로 풀들을 쓱쓱 문질러 눕혀 나가면서 모를 하나씩 심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풀들은 겨울에 발아해서 자라나 이제 곧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저절로 멀칭이 된다는 것이다. 흐음, 과연! 설명을 통하여 일단 이해는 되었지만 정말로 이 방법이 통할는지는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이 자리에서 선생은 그런 방식으로 22년간 해왔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좀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야채 밭으로 가보았다. 야채 밭 역시 풀과 작물이 구별이 안갈 정도로 풀들이 많았다. 다마노 군의 설명에 의하면 사실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이 강연과 초청으로 워낙 바쁘게 다니시다 보니까(현재 전국에 흩어져 있는 13개소의 자연농 실습지를 직접 지도하고 있으며 그밖에 수많은 강연에 나가고 있다고 한다) 정작 자신의 논밭은 제대로 돌보지를 못해 풀들이 극성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채들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밭엔 온갖 벌레와 벌 나비들이 윙윙거리고 맨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심어놓은 양배추는 벌레가 먹어 온통 구멍투성이지만 속에선 질세라 끊임없이 결구가 맺어지고 있었다. 손으로 대충 땅을 파보아도 부식질의 깊이가 30센티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그러니까 자연농이란 켜켜이 쌓인 식생(Biomass)들의 사체 위에 짓는 농사인 셈이다. 이러한 상태에 농약이니 비료니 하는 것들은 오히려 부담이 될 뿐이다. 경운을 하게 되면 애써 가꾸어놓은 생명의 보금자리를 마구 파헤치는 꼴이 될 것이었다. 가만히 놓아두면 자연은 제 스스로 경작되는 것을 왜 인간들은 필요없는 것들을 땅에다 들이붓고 들이붓고 하여 결국에는 땅도 하늘도 다 오염시켜 놓고 좁은 실험실에 틀어박혀 이제는 생명을 조작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며 또 돈을 퍼붓고 있단 말인가! 아, 저 한줌의 흙속에 담긴 진리를 인간들은 끝까지 외면할 것인가, 하는 우울한 상념에 잠겨 선생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집앞에서 인기척을 내니 요코 부인이 다정히 맞아주신다. 거무티티한 나뭇결이 아름다운 200년이 넘은 넓은 고가엔 두 식구 외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따로 지은 듯한 널찍한 거실로 안내되었다. 입구 양옆에 선생의 저서들이 수북히 쌓여있고 반대편엔 피아노를 비롯한 몇가지 악기와 원색 세계미술전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와 양갱을 내려놓은 부인으로부터 자연농에 얽힌 숨은 이야기를 듣는다. 관행농의 잘못을 깨달았을 즈음 후쿠오카 선생의《짚 한오라기의 혁명》을 읽고 크게 감명받은 선생이 하루는 시고쿠에 있는 후쿠오카 선생을 찾아갔더란다. 그러나 후쿠오카 선생은 당신은 이런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며 매정하게도 퇴짜를 놓았단다. 이에 오기를 품은 선생은 그때부터 독자적으로 자연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인은 말한다. “후쿠오카 씨는 지주출신으로서 애초부터 남에게 농업기술을 가르치려 드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책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옛날부터 소작인 출신인지라 무엇이라도 작물을 길러 그것으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는 작물을 길러서 지주에게 그 일부를 갖다바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작물을 (의도적으로) 기르고 증식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것이 후쿠오카 씨와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이야기를 듣고보니 같은 자연농법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강조하는 후쿠오카 선생의 경우와 생명의 생육과 재배에 강조점을 두는 가와구치 선생의 차이가 뚜렷해진다.
요코 부인은 농부의 아내로서 한사람의 농부임은 물론 미술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예술인이었다. 그림에 약간의 취미가 있는 필자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평을 하자 부인은 내실로 들어가 포장지에 싸인 큰 액자 그림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수채화와 일본화의 전통이 교묘히 배합된 전형적인 여성 터치의 화초화이다. 수작이었다. 왜 이 좋은 그림을 안 걸어두냐고 하니까 이것은 한여름의 화초이기 때문에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실의 그림은 그러니까 계절마다 바뀌어 걸리는 것이었다. 그림뿐이 아니었다. 수북히 쌓여있는 노래책을 보고 이것이 다 무어냐고 하니 노래에 취미가 많다는 것이다. 각국의 민요와 가곡을 포함하여 약 300여곡을 부를 수 있단다. 입이 딱 벌어졌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하여 한곡조 부탁한다고 하니 서슴없이 노래책을 꺼내어 들고 우리의 ‘도라지 타령’을 멋드러지게 불러제낀다. 다음엔 필자도 끼여들어서 함께 ‘아침이슬’을 불렀다. 계속하여 베트남과 러시아 민요를 한곡씩 더 불러주었다. 부인의 목소리는 성악가 뺨칠 정도로 힘있고 깊이가 있었다. 일찍이 농부는 예술가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들 부부야말로 대자연의 멜로디를 합창하는 참된 예술가가 아닌가 싶었다. 부인은 우리에게 선생의 저서를 몇권씩 나누어주고는 인근에 있는 우동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대접한 뒤 평안한 귀국을 빌어주었다.
요즘 한국의 농산물 시장에는 자연농업이라는 딱지가 붙은 농산물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것들이 과연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연농에 의한 생산물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자연농은 단지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채택되는 농법이 아니라 자연의 도에 따라 사는 총체적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와구치 선생은 우리에게 참된 농부의 모습, 그리고 미래농업의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거의 손노동에 의존하는 선생의 방식이, 갈수록 집중화 . 대형화되는 농업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고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