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소화를 지지하는 논리는 불소화가 갖는 법적, 윤리적, 정치적 함의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의사, 치과의사, 행정관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그들은, 만약 불소화가 충치발생을 감소시키고 육체적 건강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그 문제에 대해 더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주장이 진실한 것이라고 우선 가정해보자. (불소화의 건강 위해성에 관한 매우 실질적인 의심스러움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관대한 가정이다.) 그런 경우에도 나는 여전히 불소화의 반대 논거는 압도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법률적 측면에서 볼 때, 불소화는 강제 의료행위이다. 이것은 이른바 수혜자의 허락 없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법률에서, 동의를 받지 않고 행하는 의료행위는 오직 법원명령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정신적 장애자 및 보호자의 동의를 받은 미성년자에게만 허용된다. 이는 한 개인이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법적 권리를 박탈당했다거나, 미성년 혹은 정신적 불건강 상태로 말미암아 법적 권리를 행사하기에 부적당한 경우를 말한다. 수돗물 불소화는 모든 개인을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 한다. 이것은 유엔의 보편적 인권선언에 주요 목표로 명시적으로 인정된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다.
개인의 법적 권리와 자유의 토대는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그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건강이다)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원칙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개인은 주권을 갖는다.” 그러나, 불소화는 이러한 주권을 침해하며, 만약 불소화가 정당화된다면 신경안정제, 비타민, 항생제, 피임약 기타 수많은 약물을 수돗물에 첨가시키는 것도 정당화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정당화의 논리는 바로 국가가 개인의 마음과 몸에 대한 주권을 가진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아무리 호의적인 동기라 하더라도, 이것은 전체주의의 원리이다.*
이 글의 최초의 집필 때, 나는 불소화는 수도당국의 월권으로서 불법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83년 스코틀랜드의 한 주도적 판례에서(맥콜 대 스트라스클라이드 지방의회간 분규) 존시 경(卿)도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불소화를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1985년의 상수도(불소화)법이라는 특별법 제정으로 불소화를 합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법령은 나중에 1991년의 상수도 산업법 87절에 통합되었다.) 상수도법은 기권399, 찬성165, 반대82로 하원에서 통과되었는데, 이것은 의원들의 놀랍도록 미온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내준다. 이 법령은 유럽인권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원들이 미심쩍어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정부가 불법적인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특별법에 호소한다고 할 때, 그것은 법치를 뿌리로부터 훼손하는 것이다. 특정의 사람들에게 법적 처벌을 벗어날 수 있도록 특별한 면책을 부여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음주운전에 따른 처벌에 대한 공짜 보험을 마련해 주는 것과 흡사하다.) 행정부의 한 축에서 수도당국에게, 불소화로부터 야기되는 법적 시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면책권을 부여할 때, 법률은 조롱거리가 된다. 수도당국은 그들 행위의 법적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따라서 법을 위반하도록 장려된다. 그러니까, 불소화를 추진하려는 전투에서 발생하는 최초의 희생자의 하나는 법이다.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불소화는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불소화는 도덕적 우월성을 가정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어떤 사람들의 소망은 무시해도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든 않든 그들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런 노력이나 희생도 필요하지 않는 만병통치약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이나 아이들의 건강을 위한 부모로서의 책임을 약화시키려고 한다. 여기에서 장려되는 것은 나쁜 의료윤리이다―즉, 그것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대중들을 위한 무차별적 처방을 허용하며, 환자의 다수가 원치 않는 약물을 사실상 강제 복용하도록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건강에 대한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개인인가, 국가인가? 이것은 낙태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단순한 기술적, 의학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개인적 성찰에 비추어 행해져야 할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건강은 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이며, 사람은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가치를 위해 건강을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권리가 있다.
불소가 상당히 치통의 위험을 경감시킨다 해도(이것 자체가 의문스럽지만), 어떤 사람들은 축적성 독극물이자 소수의 경우라 하더라도 매우 유해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불소의 위험보다는 (치명적이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 치통을 감수하기를 택할지 모른다. 설령 이러한 두려움이 근거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두려움이 끼칠 수 있는 심리적 상해가, 치통보다 건강에 더 유해할지 모른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모든 결정은 자신의 가치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개인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불소화는 위험한 선례를 만들어낸다. 공공정책의 결정에서 선례가 갖는 힘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공정책은 그 특성상 최초의 원칙에 비추어 이루어지기보다는 점진적으로, 기존의 정책에 대비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선례는 “작은 실마리가 중대한 일이 되게” 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선출한 대표자를 통해서 무엇이 공공복지를 위해 이바지할지 안 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소위 민주적 사회라고 하는 곳에서 불소화는 지금 의회가 아니라, 비선출직 지역 보건담당자들–그들 중 대다수는 의료인들인데–에 의해 뒷문을 통해 도입되고 있다. 그들은 주민들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았고, 주민들의 대표도 아니다. 예를 들면, 1976년 여름 웨스트 서섹스의 사실상 모든 (선출된) 지역당국자들이 불소화에 반대하는 데 표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보건당국은 불소화의 도입을 권고하였다. 이러한 절차만이 비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절차의 배후에 있는 사고방식 역시 비민주적이다. 실제로, 이것은 반민주적인데, 고대 그리스에서 현재까지 민주주의를 폄하하는 가장 악명높은 논리의 하나는 언제나, 통치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고, 논쟁거리는 ‘기술적’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가부장적인 논리였다.
불소화를 하기로 한 결정은 1960년대에 선출된 지역당국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불소화는 하나의 정치적 문제로서 분명히 또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지역 보건당국의 소관사항으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불소화가 아무런 정치적 요소를 갖지 않은 단순한 의료문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건강이라는 것이 육체적 건강만을 뜻하는 협소한 문제로 정의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러한 편리한 탈정치화의 방법이 이 경우에 먹혀든다면, 다른 경우에도 이런 방법을 이용하고자 하는 기도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전문가들이 ‘기술적’ 근거에서 결정을 내려도 좋다면, 무엇 때문에 협의, 토론, 법제화를 둘러싸고 소란을 피우고 시간낭비를 할 것인가? 민주사회에서, 궁극적 통제와 최종 결정권은 주민들 자신과 그들의 선출된 대표에 맡겨져야 한다. 영국의 경우, 이러한 이념은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우위, 그리고 ‘국왕의 각료들'(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선출된 정치인들)에 대한 공무원의 복종이라는 이중의 원칙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지역 보건당국’을 통한 불소화의 시행은 최종 결정을 의료관료들의 손에 맡기는 것이고, 따라서 이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소화는 비민주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위헌적인 것이 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불소화가 유익할 것인가?”가 아니라 “공공의 물공급체계를 불소화할 권리가 국가에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개인의 법적, 도덕적, 정치적 권리에 두루 관계하고 있다. 의료는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어야 한다. 의료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지, 의료적 처치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의료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불소화가 의료적 처치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다―불소화는 “물을 처리한다”는 의미에서의 정화작용이 아니라 “사람을 처치한다”는 의미에서 의료행위이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의료를 베푸는 것과 똑같은 것이며, 다만 이 경우에는 의사가 환자의 이름이나 병력, 혹은 환자가 복용해야 할 정확한 복용량, 또 환자가 정말 처치를 필요로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모른 채 행하는 의료행위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알려져 있다―불소화된 물을 마시도록 강요받을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의료처치를 받는 특권을 위해서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니며, 또한 불소화가 그들에게 어떤 실질적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정말 달갑지 않다.
불소화 지지자들은 이 메모에서 논의된 법적, 윤리적, 정치적 요소들을 고려한 바 없다. 이러한 요소들이 불소화를 도입해온 사람들에 의해 간과되거나 무시되었다고 해서, 불소화가 유해한 법적, 윤리적, 정치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문제들은 너무도 중대한 것이어서, 법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요소들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수돗물불소화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 명분이 된다.
많은 과학자들은 불소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건강상의 문제에 대하여 공중을 일깨우는 데 태만하지 않았다. 이제 불소를 사용하는 주요 방법으로서의 수돗물불소화가 갖는 법적, 윤리적, 정치적 파급효과에 대하여 공중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예술과 인문학 분야의 그들의 동료들이 맡아야 할 과제가 되었다.
친불소화론자들이 여기에서 제기된 법적, 윤리적, 정치적 주장을 반박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테두리 내에서(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원칙에 의존하지 않고) 불소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불소화 시책은 마땅히 강력히 거부되어야 한다. 친불소화론자들이 지적 논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그 문제를 회피해서 도망갔을 뿐이다.
이 글은 영국의 불소화 반대 전국조직 National Pure Water Association에서 발간된 책자 "The Legal, Ethical and Political Implications of Fluoridation: A Memorandum"(1977, rev.1999)을 번역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