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온님,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돌 가 보.”
“돌 가 보.”
“지인 사람 나가주세요.”
평양 보통강 빈터에서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남쪽 아이들이 일상으로 하고 있는 그 줄넘기를 그쪽 아이들도 하고 있는 것이다. 까만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열심히 줄을 돌리고 뛰고 또 뛴다.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뒤부터 텔레비젼에서는 북쪽 여기 저기 산과 들과 도시와 그곳 사람들 모습을 보여줬다. 단정한 옷차림을 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여자 교통순경, 애기를 업은 아주머니들, 재잘대며 책가방을 들고 가는 인민학교 아이들, 노동자 아저씨들 …
영화〈홍길동〉이도〈춘향전〉도〈임꺽정〉도 우리처럼 즐기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왜 우리는 여태까지 적이라고 부르며 막아놓고 살았을까?
“남과 북은 서로 다르다, 사상도 다르고 제도도 다르고 인간성 자체부터 다르다, 북은 소련 공산주의 빨갱이 집단이고 남은 미제국주의 앞잡이 괴뢰집단이고, 그래서 적이 되고 원수일 수밖에 없다 …”
50년간 우리는 이렇게 서로가 적을 만드는 구실을 내세워 반목하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사람 다른 것이야 한 집안 식구끼리도 형제간에도 다르다. 쌍둥이도 똑같지가 않다.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겉모양만 다른 게 아니라 생각도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다. 똑같으면 사람이 아니라 기계다. 만들어놓은 인형이다.
1945년 겨울, 내 나이 아홉살 때였다. 도쿄 공습으로 우리는 후지오카라는 시골로 피난가서 살고 있었다. 뽕나무밭이 넓게 펼쳐진 들판 한가운데 판잣집 다섯채가 있었고 한국 노무자 아저씨들이 모여 살았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난 뒤, 일거리가 없어진 노무자 아저씨들은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다가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판잣집이 모두 헐리고 우리집도 근처 농가 누에치는 잠실을 빌려 이사를 했다. 그 집에 새로운 아저씨들이 찾아왔다. 도쿄에 유학을 왔던 한국유학생들이었다. 아저씨들은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각지에서 온 십여명 가까운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비좁은 방안에 모여 밤샘을 하면서 무엇인가 의논을 했고, 조선부인회니 조선청년동맹이니 단체를 만들고 자주 모임을 가졌다.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주머니들이 모이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무언가 굉장한 일을 하는 듯이 보였다.
이듬해 4월에 우리는 그 아저씨들과 헤어져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뒤, 그들은 두번 다시 보지 못했다.
그것뿐이었다. 거기서는 그냥 환희와 희망에 넘쳐 열심히 무언가 하고 있었고 모두가 하나였다.
그 다음, 1947년 4월이었을 게다. 경상도 청송지방 장터가 있는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엄청난 일을 목격했다. 백명도 넘는 남녀 청년들이 태극기와 함께 붉은 기를 휘날리며 모여든 것이다. 함께 고루고루 평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연설을 했고 만세를 부르고 노래도 했다.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서
우리들은 ○○을 지킨다 …
뒤늦게 진압에 나선 경찰들과 맞서 혼란이 일어났다. 젊은이들 몇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고 대부분 많은 청년들은 어디론가 흩어져 숨었다. 갑자기 조그만 시골장터 마을은 공포 속에 떨었고 집나간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가끔, 주재소는 습격을 당했고 습격을 한 그들은 빨갱이, 혹은 공비라고 불렀다. 주재소는 이층집보다 더 높이 담장을 쌓고 밤낮없이 보초를 섰다.
그러고 나서 3년 뒤에 6 . 25 전쟁이 일어났다. 백만명이 넘는 목숨을 잃었고 집과 재산을 잃었다. 천만 이산가족이 생기고 남북은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되었다. 온 나라가 쑥밭이 된 것이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천만이냐 …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도 반공노래를 불렀다. 온 세계의 반공을 이 조그만 남한땅이 다 짊어진 것처럼 용감했다.
“소련에 속지 마라. 미국을 믿지 마라. 일본이 일어난다.”
이런 구호도 사라지고 우리의 적은 오직 같은 핏줄인 북조선 하나뿐이었다. 자나깨나 반공, 먹고나도 반공,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흡사 우리는 반공을 위해 살아가는 백성이 되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면서 그 공산당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는 이승복군은 소년영웅으로 추켜세워졌다. 열살짜리 아이를 반공영웅으로 만든 나라는 대한민국뿐일 것이다. 국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모든 아이들을 이승복이 되라고 가르쳤다.
지난 겨울, 한 노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분을 ‘국민시인’이라고 했고 정부에서는 훈장을 내렸다.
그런데 그분은 일제가 우리 국민을 가장 참혹하게 박해하고 있을 때, 그들의 편이 되어 그들이 바라는 글을 썼다. 수십만의 종군위안부가 끌려갔고, 그보다 더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징병으로 징용으로 끌려갔다. 개를 잡아가고 곡식을 뺏아가고 문화재를, 지하자원을, 우리말 우리글을 말살하려 한 그들에게 붙어서 선동을 했다.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구약성서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의인 열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럼,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이 땅에는 의인이 없었던 걸까?
박이엽 선생이 쓴《한국교회사》안중근편을 보니, 북간도 독립군으로 싸웠던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 대목이 나온다.
동지 하나가 안중근에게 따지고 든다.
“잡은 놈을 놓아줄 바엔 무엇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싸웁니까?”
안중근이 대답한다.
“우리는 포로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침략자들이요, 힘없는 자와 선량한 사람은 비록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됩니다.”
그 뒤 안중근은 죄없는 일본군을 상대하기보다 제국주의 앞잡이인 이등방문 하나를 죽이는 쪽이 국권을 회복하는 빠른 길이라고 다짐하게 된다. 그는 착실한 천주교 신자였지만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사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하얼삔역에서 이등방문을 죽였고 그도 다섯달 뒤 교수대에서 이슬처럼 죽었다. 그는 죽기 전 여러편의 시와 글을 남겼다.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
눈보라친 연후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아느니라.
이로움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어라.
서른두살의 안중근은 진정한 의인이요 이 땅의 시인이었다. 온 세상이 모두 “하일 히틀러!”를 외쳐대도 “절대 아니오!” 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던가.
요즘은 오히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마음으로 흠모하는 한국인은 안중근과 윤동주라고 한다. 푸른 소나무처럼 살다간 그분들은 일본을 상대로 싸웠지만 진정한 이유는 목숨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미움이었다.
안중근이 독립군이 되기 전, 어느 프랑스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 신부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도 한국의 참상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 뿐이오.”
그 신부는 보불전쟁의 예를 든다.
“우리 프랑스가 프러시아 제국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어느 나라도 우리 프랑스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소. 나라간의 관계는 그런 것이오. 내 힘이 없으면 아무도 도와 주지를 않소. 내 힘, 오직 내 힘만이 진정한 힘이오.”
1945년 일본이 망하면서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삼팔선을 긋고 나라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결국 해방은 또다른 모양으로 두 강대국에 의해 속박당한 것이다.
1948년 김구 선생이 삼팔선을 넘어 남북협상을 실현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될 수가 없다. 의인 열사람이, 그 열사람의 김구만 있었더라면 삼팔선은 걷어치울 수도 있었고 분단은 극복되었을 것이다.
이로움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어라.
안중근의 시 한구절은 그 당시, 각자 개인의 잇속을 챙기기에 눈멀었던 사람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제의 앞잡이들이 다시 미국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단 50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았던가? 모두가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지 않았는가?
과연 몇사람의 양심있는 시인이 있었던가?
물론 몇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시인이, 소설가가, 교육자가, 정치가가, 종교인이, 지식인이 제 잇속을 위해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못 이룬 것이다. 이유는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