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상 지음
녹색평론사, 2000년
어느덧 우리사회가 ‘시장만능사회’가 된 기색이 역력하다. 이른바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건설이 자구책을 내놓을 때마다 세간의 관심은 현대의 정상화 방안이 시장의 신뢰를 얼마나 얻을 수 있느냐 여부에 모아졌다. 이런 반응은 기아그룹이 경영난에 허덕일 적에는 거의 없었다. 시장의 믿음을 얻어야 기업의 회생이 가능하다는 논리는 대우그룹 부도위기 때부터 힘을 받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나의 불문율로 굳어진 느낌마저 있다.
또, 사람들은 주식시장의 상황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시황의 변화에 따라 일희일비하기가 일쑤다. “종합주가지수 500선 방어”를 알리는 지하철역 가판대에 붙은 내일자 신문 홍보문구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주가지수 500선이 무너지면, 우리네 삶이 꼭 거덜날 것만 같다.
우리사회를 작동하는 기제들이 워낙 비합리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되다 보니 시장 메커니즘의 합리성에 기대를 거는 여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는 시장경제를 신성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과연 시장은 우리의 믿음대로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전지전능한 걸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망발이다. 시장기구가 내는 목소리는 그 실체가 아주 모호하다. 완전경쟁 시장에 속한다는 주식시장의 경우, 개인 투자자나 기관 투자가의 의지가 있는 그대로 반영되어야 마땅하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주가조작 등에 의해 투자자의 투자 선택은 왜곡되는 것이 다반사다.
주가조작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하지만 주가조작을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직접 실행한 이들에 대한 응징은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주가조작 관련 당사자들도 죄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과실로 인한 교통사고 가해자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람을 치어 죽였어도 피해자와 합의를 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친 것은 자동차이므로 운전자 역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시장기구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으로 경제위기를 타개하자는 망발을 일삼는 것이리라.
책임의 회피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시장기구는 다양성의 말살에도 일조하고 있다. 얼핏 시장의 활성화는 다양한 상품의 출현을 낳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진다.
생명공학을 전면 비판하는 책의 서평을 하면서 시장에 관한 이야기로 운을 뗀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생명공학이 내세우는 논리가 시장만능주의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생명공학은 시장만능주의에 비해 훨씬 더 몰염치하기까지 하다.
생명공학은 21세기판 ‘빅 브라더’
유전자조작을 둘러싼 말장난은 생명공학 연구를 실행하고 부추기는 세력의 몰염치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를 ‘조작’이라 하던가? ‘gene manipulation’을 우리말로 직역해 별 생각없이 ‘유전자조작’이라 했다가, 조작이라는 말의 어감이 꺼림칙했는지 한때는 ‘유전자재조합’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유전자재조합은 일반이 이해하기 어려운 감이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유전자변형’ 또는 ‘유전자전환’이다. 요즘 생명공학자들은 유전자조작이라 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유전자전환 또는 유전자변환이라 고쳐 말한다. 한편 어떤 공학자는 ‘분자육종’이라고 고집하기도 한다. (24면)
완곡한 표현을 만들어내 현상이나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비리’라는 용어는 부정부패 사범에 대한 여론의 비난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법원에서 형량을 상당히 낮추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이미 얻고 있다. 또 ‘근로자’라는 용어는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망각하게 한다.
언어조작을 통한 ‘본질 흐리기’의 원조는 조지 오웰의《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와 그 하수인이다.《1984년》에서 ‘전쟁’은 ‘평화’를 뜻하고, ‘노예’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생명공학자들은 21세기판 빅 브라더라고 할 수 있다. 빅 브라더는 정신의 조작을 통해 사람들이 올바른 것을 그른 것으로, 그른 것을 올바른 것으로 여기게 만들지만, 생명공학자들은 유전자조작을 통해 빅 브라더가 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오웰의 논점을 분석한 에릭 프롬의 통찰은 생명공학을 향한 통렬한 비판이 되기에 충분하다.
오웰의 논점에서 또다른 중요점은 ‘이중 사고’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정신을 조작하는 데 성공한다면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과 반대로 장악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컨대 그가 자기의 독립성과 성실성을 완전히 포기해버린다면, 국가나 당이나 회사에 소속한 사물로서 스스로를 살게 된다면,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 되고 ‘노예는 자유’가 되며, 진리와 오류간의 균열에 대한 의식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된다.1)
박병상 박사는 책의 곳곳에서 생명공학이 야기할 미래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인류가 ‘보강된 유전자 계층’과 ‘자연인’의 두 계층으로 나뉘어 단절이 심화되면, 전통 체내수정으로 세대를 이어가는 ‘자연인’은 ‘보강된 유전자 계층’의 노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섬뜩하다.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거부하는 보호자가 검찰에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 역시 끔찍하게 들린다.
처음에는 박병상 박사의 우려가 기우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빅 브라더’를 닮은 생명공학자들의 입김이 거세지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니, 그런 징후는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로 신문 지면을 통해서다.
생명공학에 대한 언론의 태도
“인터넷과 생명공학기술은 인류에게 희망의 내일을 제시하고 있다”(경향신문 2000. 11. 27)는 한 시사평론가의 주장을 언론의 일반적인 생명공학관(觀)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그렇다고 신문업계 종사자들이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 마냥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생명공학과 관련해 비교적 경미한 사안이거나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법 매서운 필봉을 휘두른다. “환경호르몬 농산물이 식탁을 위협한다”(동아일보 2000. 12. 7)거나 “광우병은 인과응보”(문화일보 2000. 11. 29) 또는 “광우병 공포 유럽식탁 ‘흔들'”(한겨레 2000. 11. 29)이라는 기사를 쓴다.
그런데 광우병이 사람에게 옮겨져 나타나는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의 사례를 적시하며 독자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신문이, 꼭 짚어줘야 할 사실 한가지는 짐짓 모른 척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광우병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영국이라는 나라가 생명공학의 선두주자라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생명공학과 관련한 세계기록을 다수 보유한 바이오테크의 선두주자다.
시험관 아기 시술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 나라가 영국이고, 복제양 돌리를 만든 나라 역시 영국이다. 최근에는 유전병을 갖고 있는 부부의 6개의 수정란에서 정상적인 수정란을 골라 임신을 성공시켜 생명공학 분야의 세계기록 하나를 추가했다. (텔레비젼 뉴스 2000. 12. 9)
아무튼 사안이 경미하거나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생명공학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논조를 펴는 신문들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때가 있다. ‘생명과학 보건안전윤리법’ 시안을 둘러싼 보도가 바로 그런 경우다.
〈경향신문〉(2000. 12. 5)은 인간복제를 전면금지하는 ‘생명과학 보건안전윤리법’ 시안에 관한 해설기사에서 이 법이 “유전공학 기술과 윤리 문제 사이의 논란을 법적으로 상당 부분 정리해줄 전망”이라면서도, 법으로 인해 예상되는 논란을 짚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경제적 목적의 대리모 금지조항을 가장 큰 논란거리로 지적하고 있지만, 정작 기자가 하고픈 말은 지나가듯 해설기사 끝에 덧붙인 이런 문구가 아닌가 싶다. “또 새 법안이 발효되면 국내 일부 연구기관에서 활발하게 진행중인 배아를 이용한 인공장기 생산연구도 상당 부분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활발’과 ‘제동’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는 분석기사의 결론이다.
다른 신문에 비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중앙일보〉(2000. 12. 5)의 각계 반응을 담은 해설기사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인공장기 배양을 놓고 불붙은 논란의 찬 . 반 양론을 소개하고 있으나 반대론(인간복제 전면금지에 대한)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박세필이라는 박사의 주장을 두차례에 걸쳐 비중있게 인용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수만명의 환자들이 장기가 없어 생명을 잃고 있다”며 “이 법안대로라면 당장 연구를 중단해야 할 판”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또, “최근 시민단체의 반대로 과학기술부 산하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자문위원에서 해촉됐다”며 “신설된 ‘국가생명안전위원회’에도 전문가가 배제되고 여성계나 시민단체가 다수를 차지할 가능성이 커 이제 겨우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국내 배아연구는 전면 중단될 위기”라고 말했다.
그런데〈매일경제신문〉(2000. 12. 9)의 사설은 한술 더 떠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낸다.
“생명공학의 성격과 발전 속도에 비추어 볼 때 엄격한 규제는 그 실효성 측면에서 보아도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개체 복제는 엄격히 금하되 과학·기술의 변화 추세를 보아가면서 상황에 따라 규제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이번 시안은 연구 당사자와 생명과학의 혜택을 받고자 기다리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과학계·의학계 지도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이들이 스스로 윤리적 기준을 만들도록 하고 이를 중심으로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새로운 시대흐름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신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만큼 생명공학 연구가 아무런 제약 없이 이뤄지고 있는 곳도 드물다. 윤리적 기준을 과학·의학계 인사들이 스스로 정하게 내버려 두라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달라는 얘기나 다름 없다. 고통받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라는 것은 역겨울 정도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정리해고를 당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의 심정은 얼마나 헤아릴지 의문이다.
원자핵보다 더 무서운 생명공학의 파괴력
그런데 이채로운 것은 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문일수록 생명공학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박병상 박사의 명쾌한 진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생명공학은 결코 ‘식량증산’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생명공학의 주된 목적은 ‘돈’이다.”(104면)
겉으로는 인도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생명공학의 동인은 돈에 있다는 지적보다 내가 이 책에서 더 강렬한 인상을 받은 대목은 따로 있다. 생명공학이 원자핵보다 훨씬 더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핵은 지금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도 그 가공할 위험성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더구나 반대여론 또한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문제가 다르다. 현재 아무런 이상이 없어도 앞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 아무도 단정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피해로부터 아무도 예외일 수 없다. 웬만한 사고가 아니라면 핵은 인간을 멸종까지 몰아가지는 않겠지만 생명공학으로 인한 사고는 인간의 발자취를 생태계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다. (176면)
그러고 보니, 생명공학의 안전성을 옹호하는 정부당국의 논리는 예전에 핵무기와 관련해 개진했던 논리와 비슷한 점을 보여준다. 유전자조작 식품의 유통을 수수방관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 펼치는 “미국에서 안전하다는 식품이므로 한국에서도 당연히 안전한 것 아니냐”는 논리는 미국의 핵우산 아래 안전을 도모하자던 위험천만한 논리를 연상케 한다.
이 땅에서 미국 FDA의 인증은 식품 또는 약품의 안전성을 보장하는 보증수표 구실을 한다. 하다못해 생수업체는 자신의 상품이 주한미군의 검사기준을 통과한 사실을 품질보증의 유력한 근거로 내세운다.
하지만, 소비자는 더이상 이런 선전에 현혹되지 않는다. FDA는 유전자조작의 첨병인 다국적 곡물기업 몬산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몬산토의 자문변호사가 FDA의 정책수석이 되고, FDA 수장의 하마평에는 몬산토 부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형편이다.2) 또한,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함으로써 주한미군의 환경 수준은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핵보다 더 무서운 생명공학의 위험성을 공론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런 점에서《파우스트의 선택》은 아주 소중한 존재다. 과학적 객관성을 가장해 생명공학을 부추기는 논리는 횡행해도 이를 반박하는 논리는 출판시장에 발을 붙이기 어렵다. 녹색평론사가 아니라면 이런 책이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1) 레이먼드 윌리엄즈 외《오웰과 1984년》 문학과지성사, 1984년, 152면.
2)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외《허울뿐인 세계화》따님, 2000년, 1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