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으로서의 핵발전
나는 원자력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인위적인 핵분열은 인간이 물질적인 자연에 가하는 최악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핵분열을 일으키는 행위란 자연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내밀한 부분인 원자핵에 인간의 칼날을 들이대어 마음대로 난도질함으로써 자연을 철저하게 짓밟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적 자연에 대한 최악의 폭력은, 생명을 환원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 근본 구성물이라 할 수 있는 유전자를 조작하는 행위일 것인데, 지금 인간은 핵분열을 통해 물질적 자연을 마음껏 유린한 후에 생명적인 자연까지도 멋대로 조작하려 하는 지점에 와있는 것 같다.
인위적인 핵분열이 자연을 철저히 짓밟는 행위이고,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핵발전도 당연히 폭력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후손과 우리를 포함하는 지구생태계의 평안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핵발전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핵발전 반대는 외형적으로 크게 다른 두가지 양태를 지니게 되는 것 같다. 하나는 핵발전소 자체, 즉 핵발전소 건설과 핵발전소 가동, 핵폐기물 처분에 대항해서 격렬한 반대투쟁을 벌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핵발전을 반생명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에 대해 근원적으로 반대하지만 반대투쟁이 아니라 자연과 가능한 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생명운동을 통해 핵발전 극복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들 두 양태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으로 핵발전의 대안을 모색하는 에너지 대안운동이 있는데, 이 운동까지 고려한다면 핵발전 반대의 양태는 세가지가 될 것이다.
반대운동의 한계
한국에서의 핵발전 반대운동은 거의 대부분이 격렬한 것이었다. 이같은 격렬한 반대운동은 핵발전과 그 운영자들이 자연과 사회에 가하는 폭력의 강도를 고려하면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힘이, 즉 자연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핵발전의 폭력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그에 대항하는 사람들도 종종 격렬함으로 맞서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울진이나 영광이나 안면도 등지에서 핵발전소와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이 대규모 집회를 하고, 물리력까지 동원해서 경찰과 공방전을 벌인 것 등등이 모두 핵발전의 폭력적 성격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격렬함의 분출은 동강댐이나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 같은 운동에서는 거의 일어날 수 없을 것인데, 실제로 이들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되었거나 진행되고 있지만 격렬성에서는 핵발전 반대운동에 크게 못미친다. 격렬성에서의 이러한 차이는 핵발전과 댐건설이 자연에 가하는 폭력의 강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댐건설이란 울창한 수풀 속으로 아름다운 강이 흐르는 수려한 자연을 없앤다는 점에서 심미적인 떨림, 안타까움, 슬픈 감정을 유발하는 것으로, 이러한 감정에서 시작되는 반대운동이 격렬한 투쟁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동강댐에 대한 반대운동이 심미적인 떨림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음을 내포하는데, 이러한 심미적 감정은 많은 사람들이 동강의 아름다운 자연을 눈으로 보는 즉시 공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서 핵발전 반대운동은 대단히 격렬하기는 했지만 지역 차원에서 머무르기만 했지 전국적인 반대운동으로 확산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핵발전이 누구나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심미적 대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핵발전은 그 위험이 맨몸으로는 감지할 수 없고 언뜻 보기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예측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실체를 잡기 어려운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응이란 안타까움 같은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의 격한 감정, 갑작스러운 공포감으로 인한 패닉 현상을 낳게 되고, 이는 격렬한 대항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격함이란 해당 지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수그러들기 마련이기 때문에, 핵발전 반대가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개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핵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의 운동이 될 수 없는 것인가? 한국에서는 동강댐 반대 같은 운동보다 전국적인 규모로 나아가기가 훨씬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규모로의 발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외국의 예에 비추어볼 때에도 대규모의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럽의 스웨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의 핵발전 반대운동, 대만의 반대운동이 지역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전국 규모로 발전했고, 나아가서 핵발전 정책 자체를 수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국에서 핵발전 반대운동이 격렬한 싸움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국지적인 것에 머물렀던 원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리고 한국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핵발전 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는 10년이 넘었다. 이미 1990년에 안면도에서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이 있었고, 그후 울진, 인천, 영광 등지에서 반대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투쟁들은 당면 목표, 예를 들어 인천의 경우 굴업도의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후에는 그것으로 끝이었지 더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다른 곳에서의 투쟁도 모두 국지적인 것이었고, 투쟁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나는 한국의 핵발전 반대운동이 한국사회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고 일과성의 투쟁으로만 이어져 온 원인을 다음 두가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이 운동이 한국사회의 원자력 전기를 사용하는, 구조적으로 원자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운동의 주체를 이루는 지역주민들이 당면 목표의 관철에만 급급했지 핵발전을 포괄하는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반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자신의 생활방식에 대한 성찰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핵발전 반대운동이 다수의 시민들이 수긍할 수 있고 이들을 원자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운동은 단순한 주민운동 또는 지역이기주의적인 운동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그리고 운동에 참여하는 주민들이 핵발전 반대에만 매달리고 에너지 시스템이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성찰에 소홀할 때에는 운동의 동력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핵발전 반대운동이 에너지 대안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반대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생각이 좀더 생태주의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운동이 사회 전체로 확산될 수 없고 지속적으로 전개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격렬함이란 활활 피어올랐다가 소진되고 마는 불꽃과도 같이 한꺼번에 모든 에너지를 가져가버리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격렬한 투쟁 뒤에는 지속적인 운동뿐만 아니라 운동 자체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에너지 대안운동
이제 격렬한 반대운동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일상의 실천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닌, 중간적인 핵발전 반대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에너지 대안운동에 대해 검토해보겠다. 에너지 대안운동은 핵발전 반대운동으로부터 발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그 가장 바람직한 형태는 핵발전 반대운동의 직접적인 확대의 결과로 나타나는 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에너지 대안운동은 ― 아직은 대단히 미미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 핵발전 반대운동으로부터 직접 파생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대안운동도 핵발전을 반대하기는 하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직접적인 핵발전 반대운동과는 거리를 두게 될 수밖에 없다. 대안운동에는 핵발전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좀더 장기적이고 발전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모색하는 사람들도 참여하지만, 대안의 제시라는 것이 에너지 시스템과 관련된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과학기술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 연구자들도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핵발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또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에너지 대안운동이란, 핵발전을 뛰어넘어 에너지의 효율적 이용과 재생가능 에너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을 관철하려는 것이기는 하지만 핵발전에 대한 극명한 반대투쟁을 전개할 수는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핵발전을 반대하는 데는 소극적이더라도 에너지 시스템의 전환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포용하면서 나아가게 된다. 에너지 대안운동과 핵발전 반대운동 사이의 미묘하다면 미묘하다 할 수 있는 협력과 긴장의 관계는 대안운동의 바로 이러한 성격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한국의 에너지 대안운동이 지금 막 시작된 단계에서 핵발전 반대운동과의 협력이나 긴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는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앞으로 두 운동은 함께 하면서도 갈등하는 관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대안운동과 핵발전 반대운동의 협력 또는 보완이란 핵발전 철폐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반대운동이 적극적인 실력행사를 통해서 원자력산업의 확대를 저지하고 여론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대안운동은 이렇게 주의가 집중된 가운데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핵발전 극복을 위한 운동을 국지적인 차원을 넘어 전국적인 차원으로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대안운동은, “위험하다고 해도 우리가 40% 이상의 전기를 원자력을 통해서 공급받고 있는데 핵발전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같은 불안에 찬 물음에 대해 이러한 불안을 종식시킬 수 있는 답을 제시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에게 핵발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고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안운동의 중점 사업은 재생가능 에너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범활동, 에너지 시스템 전환을 위한 연구,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홍보에 중점을 두게 된다.
대안운동과 반대운동이 위와 같은 각 운동의 독자적인 목표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서로 보완하며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두 운동 사이의 협력은 아주 부드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반면에 두 운동이 서로 각자의 목표의 중요성을 고집하고 자신의 당면 과제에만 집착한다면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서 핵발전 반대운동 쪽에서는 에너지 대안운동에 대해, 당장 핵발전소 건설이나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저지하는 것이 시급한데, 대안운동이 핵발전 반대를 표명하면서도 수십년 후에나 가능할 먼 미래의 일에만 매달림으로써 전선을 흐트린다는 비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대안운동 쪽에서는 핵발전 반대운동에 대해, 반대투쟁으로만 일관하고 단기적인 싸움에만 몰두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발전적인 전망이 없는 운동을 계속해 간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핵발전 반대운동과 에너지 대안운동이 성공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적당한 협력관계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운동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이 둘을 구분하는 것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어차피 한국에서 앞으로 전개될 두 운동의 양상이 서로 상당히 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에너지 대안운동은 핵발전 반대운동에 대해 장기적인 전망과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반대운동이 국지적이고 투쟁적인 싸움에 매몰되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운동은 핵발전소나 폐기물 처분장 건설저지 등의 싸움을 통해서 핵발전의 폭력성을 부단히 일깨워줌으로써 대안운동이 기술적인 재생가능 에너지의 개발이나 시범사업에 매몰되어 그 원래의 목표인 핵발전 극복과 대안적 시스템의 확립으로부터 멀어지고 기술주의적으로 경도되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두 운동 사이에서 이와 같이 서로 깨우쳐주고 견제하고 협력하는 일이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면, 두 운동은 협력과 긴장의 변증법을 통해 형성된 고양된 힘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핵발전 철폐와 에너지 시스템의 전환을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생태주의 운동의 역할
핵발전을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생태주의적 생명운동은 현 단계에서 에너지 대안운동이나 핵발전 반대운동의 관심 밖에 놓여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태주의적인 접근은 핵발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대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깨움을 줄 수 있다. 핵발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단순히 위험하다는 것에서 출발하겠지만,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핵발전이 근본적으로 반생명적인 것임을 깨닫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들에게는, 반생명적인 것은 반생명이 아니라 생명으로써, 다시 말해서 격렬한 투쟁 ― 어느 정도는 반생명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 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마음과 행동을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는데, 핵발전 반대운동을 어떻게 생명적인 것이 중심이 되는 운동으로 바꾸어가느냐 하는 과제가 던져질 수 있다. 물론 핵발전 반대운동 속에 생태주의적인 입장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고 보고 반대운동으로부터 떠나 생명운동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앞의 과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어진다. 그러나 생명운동 또한 핵발전의 폭력과 같은 현안에 대해 침묵하기만 할 경우 퇴행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생명운동만이 근본적인 해결방식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생태주의적인 마음을 유지하면서 그 마음을 핵발전 반대운동 속에 확산시키는 가운데 운동을 전개해나가려는 자세가 핵발전 반대운동을 지속적이고 전사회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 대안을 모색하는 경우도 생태주의적인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대안운동이 기술주의적인 편향에 기울어지는 것을 억제하고, 일상생활을 통한 대안의 실천을 확산시키고 거기에 동력을 제공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에너지 대안이 원자력이나 화석연료에 기반한 거대하고 중앙집중적인 것이 아니라 에너지절약과 에너지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작은 실천과 재생가능 에너지라는 분산적이고 적정한 규모의 기술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대안운동은 기본적으로 생태주의적인 실천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주의적인 태도는 핵발전 반대운동이나 에너지 대안운동에서 모두 정신적인 바탕을 이루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핵발전 반대운동에서 생태주의적인 태도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격렬한 반대투쟁이나 보상투쟁, 한국전력의 지원을 받는 ‘원자력 민간감시센터’ 운영 등은 생태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대투쟁이나 보상투쟁은 종종 지역이기주의적인 양태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전이 울산광역시에 새로운 핵발전소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대해 “왜 하필이면 우리가 사는 울산이냐” 하는 말도 들리는데, 이 말에는 다른 고장에 건설하는 것은 상관 않는다는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핵발전소가 들어서 있는 어떤 지역에서는 “우리 마을에 이미 여러개의 핵발전소가 들어와 있으니 다른 발전소도 건설하게 하고 보상이나 많이 받자”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하는데, 이 생각도 부근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주의적인 발상일 것이다. 핵발전 추진자들의 지원을 받아 핵발전을 통제하겠다는 감시센터 또한 타협의 산물이고 지역주민에 대한 일종의 보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핵발전 반대운동이 보상투쟁이나 감시센터운영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은 반대운동의 현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생태주의적인 자세나 대안 모색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격렬한 싸움 후의 동력 소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정부의 ‘한전 민영화 계획’에 대해 핵발전 반대 진영이 보인 초기 입장 또한 반대운동이 당면 목표에만 매달린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반대 진영에서는 한전의 민영화에 대체로 찬성했고, 이는 노동조합이나 다른 진보진영과의 갈등을 빚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조합 측에서는, 한전이 민영화되면 핵발전이 침체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민영화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보인 핵발전 반대진영에 대해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까지 써가면서 비판하기도 했다. 정부의 민영화 계획 자체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핵발전에만 집착해서 다른 것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을 과격한 말로 비난한 것이다. 사실 정부의 한전 민영화 계획은 한국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고, 이 기조에서 발전소의 상당 부분이 해외매각될 가능성도 내포하는 것이었는데, 핵발전 반대진영에서는 이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은 채 입장을 표명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노동조합 측에서도, 초기에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상당수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우려에서 민영화뿐만 아니라 전력산업의 바람직한 구조개편까지도 반대한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환경단체와의 접점을 배제했던 것이 사실이다.
핵발전 반대운동을 비롯한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협력관계를 맺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핵발전소를 폐쇄하자는 환경운동의 요구가 관철될 경우 핵발전소 근무자들은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 노동자들은 핵발전 반대운동에 대항하게 된다. 독일에서 핵발전 포기를 결정한 후 핵발전소 노동자들이 이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것은 환경운동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의 갈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핵발전 반대운동이 국지성으로부터 벗어나 전사회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발전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운동과 연대할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나 그들의 방사능 피폭 실태 등에 대해 연대해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핵발전을 현재 상태에서 동결하고 더이상 확대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과 함께 바람직한 전력산업 구조조정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 셈인데, 이들과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핵발전 반대와 에너지 대안을 위한 운동에는 상당한 힘이 실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핵발전 반대운동, 에너지 대안운동, 생태주의적인 접근에 대해서 검토해보았다. 이들은 모두 반생명적인 핵발전을 반대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행동의 양태에서는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이들의 행동 특색은 각각 격렬한 투쟁, 대안을 위한 선전과 실천, 생활방식의 조용한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격렬성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는 금방 소진될 수 있고, 대안의 모색은 기술주의와 사업위주로 나아갈 수 있고, 생태주의는 현안에 대한 분명한 관심과 입장표명 없이 침묵만 할 때 퇴행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핵발전의 반생명성을 극복하는 데는 이 세가지 행동 양태의 협력과 긴장의 관계가 필수적일 것이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17-21일 건국대에서 열린 '아셈2000 민간포럼'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