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통권 50호를 내게 되었다. 사람의 일이 반드시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고 해서 좋은 것일 수는 없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 일이 있을 것이다.《녹색평론》이 꼭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잡지를 펴내는 일에 직접 관계해온 사람들로서는 지금 50호를 맞이하는 심정이 그냥 무심한 것일 수는 없다. 창간호를 낼 적에 우리는 ‘이 어둡고 황막한 세상에서’ 이 잡지가 이렇듯 8년 이상이나 버티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녹색평론》이 어떻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고, 미약하나마 하나의 매체로서 이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의 뒷받침 때문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두 달에 책을 한번씩 낸다는 것은 어차피 처음부터의 사회적 약속이었고, 그 약속은 싫든 좋든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약속의 이행이 실제로 가능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은 독자들에게 있었다. 이 책의 계속적인 발간을 지지하고, 기다려주는 독자들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가 《녹색평론》을 발간하는 데 필요한 신념과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녹색평론》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옳지만, 비현실적이며 이상주의적이라고 하는 끊임없는 비판의 목소리 가운데서도, 그러한 ‘현실성 없는’ 메시지야말로 인간다운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의 궁극적인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견해에 동의해준 독자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보다도 기계와 기술이 갈수록 득세하고, 온 세상이 투기꾼들이 활개치는 난장판으로 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무리 순진하게 들릴지언정, 우리는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에 대해 되풀이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의 운명과 생명공동체 전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사회 및 문화체제가 과연 인간다운 삶에 적합하며, 또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묻는 매체이기를 고집해왔지만, 그러나 실제로 《녹색평론》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목표로 한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마 우리가 희망해온 것은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의 전파를 통해서 지금 뿌리로부터 병든 문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연대의 그물이 형성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더 견딜 만한 것이 되도록 돕는 일이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녹색평론》 50호 기념 메시지를 보내주신 분들을 비롯하여, 늘 아쉬울 때 무리한 원고 청탁에도 군말 없이 글을 보내주시는 필자들께 새삼스럽지만 깊이 감사의 말을 드린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잡지가 존속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우리 모두의 삶이 좀더 사회적,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될 수 있는 문화적 저변을 다지고 넓혀 가는 데 《녹색평론》이 다소나마 공헌하려면 독자 여러분들로부터의 솔직하고 활발한 관심의 표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덧붙여 간곡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