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캠퍼스의 어느 강당, 이반 일리치는 강당을 반쯤 채운 청중속에서 그의 친구 한사람을 알아보았다. 20세기의 지도적 철학자 중의 한사람인 일리치는 막 말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연단을 훌쩍 떠나 한 조그마한 소년 ― 그의 어머니와 함께 강연장에 들어온 크리슈나라는 어린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때 가톨릭 교회의 신부였고, 신학과 역사와 화학 분야의 학위를 가지고 떠돌이 학자이기를 고의적으로 선택한 사람 ― 그는 수십년 동안 ‘전문가들’을 괴롭혀왔다. 그의 방법은 그 전문가들의 ‘사회적으로 형성된 확신’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 그 일리치가 소년 크리슈나의 눈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위하여 연단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런 일은 대학의 형식적인 의전(儀典)을 흔히 거부해온 사람으로서 일리치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떤 특정한 기관과도 제휴하기를 거절하면서 일리치는 매년 펜주립대학과 독일 브레멘대학의 객원교수로서 학기를 나누어 쓰고, 나머지 수개월간은 케르나바카 교외에 있는 어느 멕시코 마을에서 집필을 하면서 지낸다. 11개의 언어를 말하는 일리치는 열두권에 이르는 저서와 많은 에세이를 위하여 방대한 범위에 걸쳐 연구해왔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연구에 대하여 그 자신 거리를 유지하려고 해왔고, 그에 못지않게 그러한 연구기관에 소속됨으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물리적 제약을 극력 피하려고 한다. 그 자신의 말을 빌어, 그는 “입자를 쪼개는 자들, 파동 기계공들, 담론 해체론자들 및 그 동류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독립적이고 예리한 지성은 현대사회의 가장 ‘신성한 암소들’에 관계하여 행사되어 왔다. 여러 해에 걸쳐 일리치는 교육과 교통체계와 종교와 의료의 ‘탈제도화’를 주창해왔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그러한 제도들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좋은 것들을 가장 치명적으로 망쳐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1971년에 나온 책《학교 없는 사회를 위하여》에서 그는 의무교육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의 견해로는 의무교육은 극소수가 따지만 대다수는 잃게 되어 있는 복권(福券)을 강제로 구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학교를 통하여 교육과 좋은 직업과 사회적 성공을 기대하기 때문에 중도에 탈락하거나 점수를 제대로 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생동안 낙인이 찍혀지는 것이다. 잔인하기는 고등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고등교육은 학문적 의욕을 고취하고 민주적 시민을 형성하기보다는 특권의 재생산에 더많이 겨냥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호기심을 죽이고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학교들이 ‘현존하는 차별 형태들을 반영하고 지탱하고 강화하는’ 방식에 대한 일리치의 급진적 비판이 담긴《학교 없는 사회를 위하여》가 나온 지 25년이 지난 뒤 오늘날 미국의 대학에서 복합문화적 교과과정과 정전(正典)문제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현대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제도와 기관들을 폭넓게 검토하고 있는 책《공생공락을 위한 도구》(1973)에서 일리치는 기술공학의 철학과 기술공학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윤곽을 그려보인다. 일리치는 이 예외적인 책에서 다루어진 주요 주제들을 나중에 나온 여러 책들속에서 좀더 상세히 검토한다.《에너지와 평등》(1974)에서 그는 에너지의 고소비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관계 자체를 타락시키며, 속도에 대한 중독 ― 자동차, 비행기 ― 은 사회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비인간화한다고 주장한다.《의료의 한계》(1976)는 ‘보건’과 같은 개념의 역사를 탐구하고, 어떤 한계 이상으로 ‘건강의 의료화’가 진행되면 그 실제적인 결과는 오히려 반생산적이며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1982년에 나온 책《젠더(性)》에서 일리치는 섹시즘은 산업사회의 불가피한 조건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산업사회는 남녀간의 본래적 관계인 ‘비대칭적 상보성’을 ‘법적으로 조작된 평등’의 관계로 전환 . 타락시킴으로써, 남자들과 여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경제적 존재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여성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젠더》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의 가장 최근의 책《텍스트의 포도밭에서》(1993)는 과거를 향하여 거울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일리치는 오늘날 우리가 글을 읽는 방식과 ‘성(聖) 빅토르의 휴’라고 하는 수도사가 800년 전에 글을 읽었던 방식을 비교하기 위하여 12세기를 탐구하고 있다. 실제로, 일리치가 펜주립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주제도 ‘휴’에 관한 것이었다.
대부분 자신의 친구들과 몇몇 대학동료들로 이루어진 청중 앞에서 강연하면서 일리치는 ‘책에 기초하는 배움의 장소’로서의 대학이 곧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어떤 특정한 유형의 독서기술 ― 즉, 독자와 인쇄된 텍스트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상호교류가 사라지고 있음을 경고하였다. 12세기의 수도사 휴는 문자로 기록된 페이지를 읽으면서 기쁨을 누렸다. 그는 마치 수도원의 포도밭에서 딴 포도의 맛을 음미하듯이 글을 한줄 한줄 맛보았던 것이다. (일리치에 의하면 페이지라는 말, 또는 라틴어로 파지나(pagina)라고 하는 말은 본래 포도넝쿨이 그 위에서 자라는 시렁을 가리키는 말 에스팔리에(espalier)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휴에게는 독서행위는 지혜를 탐구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신체적인 활동이었다. 그것은 삶의 한 방식이었다.
이에 반해 오늘날의 독서는 ‘하이퍼스페이스 속의 수음행위’ 같은 것으로 변해버렸다고 일리치는 말한다. 일리치에 의하면 감각적이고 질감이 있으며 실제로 육체성을 가진 책이 사라지면 인간적인 상호접촉의 살아있는 형식의 하나가 사라진다. 하이퍼스페이스의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 일리치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사 휴가 경험한 ‘말의 향연’에 관한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에 하이퍼스페이스는 우리에게 사실상 황무지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어린시절 고향에서 독일말과 프랑스말과 이탈리아말을 함께 사용한 경험에서 나오는 약간 음악적인 악센트를 가진 68세의 기품있는 남자 ― 일리치는 다음과 같은 싯구로 그의 말을 끝냄으로써 ‘진보’를 비판하였다. “가장 감미로운 것들도 가장 시어빠진 것이 될 수 있다네. 백합꽃이 썩을 때 잡초보다 훨씬 나쁜 냄새를 풍긴다네.” 현대기술이나 심지어 고등교육에 대한 공격의 말 한마디 없었지만 삶과 배움의 현대적 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거기에 무겁게 서려있었다.
데이비드 케일리가 엮은《이반 일리치와의 대담》(1992) 속에서 일리치는 “나는 흔히 내가 전통적으로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근원적으로 소외된다는 느낌을 갖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한편의 시를 위한 가장 적합한 단어가 컴퓨터의〈완전한 단어〉에 접속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고, 유전공학이 자연질서의 일부가 되어버린 시대에 일리치의 통찰은 더이상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북보다는 북소리를 내는 기계를 선호하고, 숲속에서의 산책보다는 자연을 다루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더 좋아하는 데 익숙해진 사회에서 아직도 자신의 두 발을 사용하는 사람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12세기의 수도사 ‘휴’의 이야기는 일리치의 복잡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예가 된다. 과거에 일리치는 생소한 철학적 영역을 다룰 때 흔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생생한 이야기와 인물들을 난간으로 삼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리치와 그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리 호이나키 사이에 일어났던 한 이야기는 일리치의 평생에 걸친 일의 배후에 존재해온 본질적인 충동을 설명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
1993년에 그 자신 전에는 사제(司祭)였기도 했던 호이나키는 일리치의조언을 받아들여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천킬로미터에 이르는 순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스페인의 도시는 9세기 이래 유럽의 순례자들이 찾아가는 주요 목적지였다. 일리치는 그러한 친구의 결정을 축하하여 자신의 벽장에서 오래된 튼튼한 보행용(步行用) 신발 한 켤레를 꺼내어서 그것을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다.
일리치가 그 신발을 샀던 것은 1973년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살해된 날이었다. “내가 아옌데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는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우리가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아옌데에게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야 한다고 하였고,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와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으며,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집무실에서 살해되는 것보다 자전거에서 살해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하고 대답했지요.”
일리치가 그 신발을 샀던 날,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대통령으로서의 아옌데의 임기는 종식되었다. 아옌데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던 것이다.
20년 동안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던 그 신발은 호이나키에게 썩 잘 맞았다. 그러나 순례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시험하는 일이다. 맨 첫날 호이나키는 깎아지른 산길이 아직 눈에 뒤덮여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면서, 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고사하고 그 산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에 기댄 채, 이미 이 지점을 지나간 수천, 아마도 수백만의 사람들을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순례자들을 북부 스페인으로 이끌었던 신앙의 위대한 신비와 자기자신을 거기로 이끌었던 우정(友情)의 위대한 신비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호이나키는 그때 자신이 의식을 잃었던 게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는 어떻게 자신이 그 산길로 올라가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이 깨어났을 때는 그가 산의 저편으로 걸어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는지 지금까지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신비로 남아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이것은 한 켤레의 소박한 신발을 예외적으로 이용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한 ‘개발’에 대하여 오랫동안 반대해온 일리치의 태도를 엿보게 하는 창(窓)을 제공해주고 있다. 일리치가 아옌데에게 출근시에 자전거를 이용하라고 권고했을 때, 그 권고는 칠레라는 나라의 환경과 자원에 알맞은 대안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일리치는 오랫동안 개발정책이란 기술사회의 가치를 제도화하는 것이며, 실현불가능한 프로그램을 가난한 나라들에게 강제하는 것이라고 지칠 줄 모르게 비판해왔다. 그가 볼 때, 아옌데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면 그것은 평화봉사단과 국제통화기금 ― 개발을 선도하는 가장 악질적인 두 조직이라고 일리치가 종종 비판한 바 있는 ― 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몸짓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의 순례 이야기는 또한 절제, 고통의 감내, 그리고 ‘걸음’에 관해서도 말해주는 것이 있다. 물론 오늘날 이러한 것은 낡고 괴상한 개념들이 되었다. 신속한 땜질, 자구책, 그리고 욕망의 즉각적인 충족이 지배하게 된 시대에서는 ‘순례’라는 단어 자체도 시대착오적인 괴이한 것으로 들린다. 자동차를 몰고 음반가게로 가서 베네딕트 수도사의 녹음된 성가(聖歌)를 사서, 자신의 방안에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는 시대에 무엇 때문에 천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어서 가는가? 호이나키나 일리치는 이런 질문을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순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일리치의 굳센 그러나 복잡한 종교적 믿음을 잠깐 엿볼 수 있다. 일리치는 독실한 가톨릭으로 남아있지만 교회에 대한 그의 관계는 거의 언제나 긴장된 것이었다. 이 긴장은 1968년에 일리치가 세계에서 가장 큰 카페트, 즉 바티칸의 카페트로 소환되었을 때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거의 1951년 그가 사제로 서품된 그날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일리치는 1951년에서 1956년 사이 푸에르토 리코 빈민들과 지내는 경험을 통하여 미국 교회를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일리치가 보기에 교회가 소수집단에게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푸에르토 리코의 폰스에 있는 가톨릭대학의 부총장에 취임한 일리치는 그가 책임맡은 대학의 교육시스템을 겨냥하였다.
그러나 일리치와 로마 사이에 정말로 불화가 시작된 것은 그가 멕시코에서 국제문화자료센터를 세우고 운영하고부터였다. 스페인어 머릿글자들을 따서 CIDOC이라고 알려진 이 센터는 라틴아메리카로 향하는 미국의 사제, 수녀, 수도자들을 위한 집중적 어학교육기관이었지만 동시에 반체제 지식인과 평신도 종교활동가들의 집합장소였다. 이들은 일리치의 자극을 받아 평화봉사단에서 가톨릭 선교활동에 이르는 자원봉사 프로그램들의 바탕에 있는 기본전제를 비판적으로 파헤쳤다. 급진주의자들의 싱크탱크로 일컬어지면서 이 센터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교회가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에 충돌하였다. ‘성공적’인 몇년 후 일리치는 로마로 소환되었다.
일리치는, 바티칸 안팎에서, 자기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해에 그는 ‘제도로서의 교회’에 소속된 ‘피고용인’의 자리를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어머니 교회’라고 일컫는, 아름다움과 진실과 깨달음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장소로서의 교회를 섬기는 미천한 하인임을 늘 자처해왔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도 근원적으로, 저 소박한 신발에 관련된 이야기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는 벗들에게 깊이 헌신적인 사람이다. 그는 친구들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 사랑을 주고, 안내를 하며, 위안을 베풀고, 공동체의 느낌을 주는 일 ― 을 다 하려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벗들이 삶을 회피하는 것을 도울 수는 없고, 도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일리치에게 삶이란 아픔이나 고통의 감내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리치의 신발은 호이나키가 순례여행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순례길의 거친 자연조건이나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으로부터 호이나키를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물을) 보지 않기 위하여 이미지와 영상이 만들어내는 방탕한 놀이에 굴복해버렸음”을 일리치는 주목한다. 죽음을 부정하고, 현실의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시대에 단순한 친절함이라든가 우정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인공지능과 전자공동체가 지배하는, 감각이 배제된 세계에서 ― 포옹, 입맞춤, 얼굴을 맞댄 대화 등으로 ― 감각을 일깨운다.
아옌데가 죽고, 그가 신발을 샀던 그해 1973년에 일리치는《공생공락을 위한 도구》를 출간하였다. 그 책의 서문에서 일리치는 우정의 중요성과우정이 성립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 즉 자기절제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오늘날 “청빈의 개념은 타락해버렸고, 청빈이라고 하면 쓰디쓴 맛이 느껴질 뿐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청빈은 우정의 기초를 형성하는 ‘절제되고 창조적인 유희’의 바탕이었다. 일리치는 청빈은 “즐거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올바른 인간관계를 파괴하거나 외면하는 것만을 배제하는 덕성”이라고 한 아퀴나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정과 자기절제는 좋은 삶에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자기절제는 오늘날 유행하는 개념들 ― 자구책이니 자기관리니 또는 심지어 자기자신과 환경에 대한 책임감이니 하는 것들(일리치는 이 모든 것을 ‘해방심리학’이라고 부르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 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구공동체'(이것은 일리치에게 모순어법의 예이다)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장려하면서 모금운동을 벌이는 환경주의자에 응답하여 사람이 자동차나 원자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 누군가가 절제된 생활방식 ― 즉 개인적 자유가 사람들 사이의 상호의존성 속에서 실현되는 ‘공생공락’의 삶 ― 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책임감’이나 강요된 ‘당위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품위에 관해 말하는 사람의 편에 같이 서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우정 개념은 그의 삶에 있어서 주된 동력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리치의 많은 저술의 지도적 원리였다. 때때로 그것은 모순된 행동으로 보이는 것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친구의 초대를 받아들여 일리치는 비행기를 탈 경우가 있는데, 비행기는 교통문제에 관한 자신의 저술에서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 마이크가 그와 청중 사이의 친밀성을 깨트리는 것을 유감스러워하면서도 그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때문에 마이크를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한쪽 뺨에 자라고 있는 커다란 혹이 주는 고통으로 자신의 하루가 시련을 견뎌내는 시험기간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 그는 ‘비인간적인 의료산업’에 의한 진단이나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 일리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깊은 동료의식이며, 마지막 몇 문제를 설명하고자하는 충동이다.
팝 스타들과 문화적 ‘우상’들에 게걸든 사회에서는 지식인들도 쉽게 개인숭배에 빠져들기 쉽다. 일리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그에게 헌신적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개인숭배의 분위기는 전혀 서려있지 않다. 세제르 곤쿠오글루라는 터기출신 여성은 ― 그 남편이 펜 주립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 가을의 두달은 일리치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나머지 열달은 일리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지낸다고 말하였다. 세제르는 자신이 고향에서 성장할 때 익혔던 의식(儀式) 하나를 설명하였다. 어린시절,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날 때는 언제나 그 사람의 손에 입을 맞춘 다음, 그 사람의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일리치를 만날 때까지 세제르는 이 관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날 오랜 기다림끝에 일리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기의 스승에게 전통적인 터키식 방법으로 인사를 하였다. 일리치는 이 인사법의 우아함에 깊이 매료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차례로 세제르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품위있는 행동이었다.
편집자의 말
본지는 이번호부터 오늘의 ‘녹색운동’에 크게 공헌해온 현대의 사상가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연재물을 시작한다. 그 첫 순서로 여기 소개하는 사상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1926년 비엔나에서 출생하여 유럽 여러 곳에서 교육을 받고 가톨릭의 사제(司祭)가 되었던 사람이지만, 무엇보다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진정성은 푸에르토 리코와 멕시코 등 제3세계 민중사회에서의 현장체험을 통하여 서구식 산업문명체제의 근본적 허구와 폭력성을 뿌리로부터 증언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시장경제와 산업주의라는 서구식 개발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제3세계 사회의 토착적 삶의 지혜와 기술을 깊이 훼손하고, 대다수 민중이 인간다운 존엄성을 갖고 살 수 있는 조건을 박탈하는가를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과정에 있어서 ‘공생공락'(conviviality)이라는 개념이 일리치에게 핵심적인 열쇠였다. 경제성장과 개발, 그것을 기초로 하는 ‘진보’의 형이상학에 대하여 우리가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 ― 자동차 중심의 현대적 교통체계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듯이 ― 사람끼리의 ‘공생공락’을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하는, 배타적 경쟁의 논리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일리치의 주된 관심은 유럽의 옛 문화, 특히 12세기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문화쪽으로 기울어져왔다. 지금도 진행중인 일리치의 이 방면에서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아마도 좀더 기다려본 뒤에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초점의 이동은 역사와 현실로부터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문명에 대한 비판이 훨씬 더 근본적이고 깊이있는 것이 되기 위한 노력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점의 이동이라고 하지만, 일리치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예전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근년에 이르러 그가 자주 언급하는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기술이 ‘인간다움의 근거’를 훼손하는 문제는 기실 일리치의 초기 저술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리치에 의하면, 산업주의체제가 배격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빈곤이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다운 위엄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갈수록 망가뜨리기 때문인 것이다. 심화되는 산업기술문명 속에서 이제 가장 큰 재앙은 인간이 기계나 로봇의 처지로 격하(格下)되어간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일리치의 발언이 주는 큰 매력은 ― 그리고 어쩌면 상당한 어려움은 ― 그러한 생각이 투박한 사회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극히 섬세한 말투로 전달되고 있다는 데 있다. 어떤 기성의 학문적 . 사상적 틀도 단호히 거부하고 독창적인 통찰력으로 산업사회의 모순구조를 파헤쳐온 일리치는 본질적으로 극히 부드럽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보인다. 여기에 옮겨싣는 글의 출전은 Utne Reader 1995년 1-2월호이며, 필자 마릴린 스넬(Marilyn Snell)은 그 잡지의 부편집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