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건축물은 흙더미와 잡다한 돌조각들 밑에 그 자신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손에 삽을 들고 한층한층 파들어가서 버팀목들을 들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황폐화된 기념물의 기원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간의 관념도 그 토대가 수십년 또는 수백년간 모래로 뒤덮여 온 폐허로 판명될 수 있다.
나는 개발이라는 관념이 그렇다고 믿는다. 오늘날 개발관념은 우리의 지적 풍경 속에 폐허처럼 서서, 그 그림자가 우리의 시각을 흐려놓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이 우뚝 서있는 속임수의 고고학에 착수하여, 그 토대를 벗겨서 그것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야 할 때이다. 개발이라는 관념은 한 퇴폐의 시대에 대한 낡은 기념물이다.
미션을 추구하는 세계권력
1949년 1월 20일 펜실베니아가(街)에 바람과 눈이 몰아치고 있을 때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국회에서 취임연설을 하면서 세계의 가장 큰 부분을 ‘저개발 지역’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지구상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문화를 하나의 유일한 범주 ― 저개발이라는 ― 로 강제로 몰아넣는 핵심적인 개념이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새로운 세계관이 천명되었다. 즉, 모든 지구인들은 같은 길을 따라 움직여서, 오직 하나의 목표 ― 개발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가야 할 길은 미국 대통령의 눈앞에 분명하게 누워 있었다. 그 길은 “보다 많은 생산이 번영과 평화에 이르는 열쇠”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유토피아에 이미 가장 근접하였던 것은 미국이 아니었던가? 이 잣대에 따라 모든 나라는 낙오자 또는 선두주자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산업 및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최선두에 있는 나라는 미국”이었다. 이기주의에 너그러움이라는 옷을 입혀서 트루먼은 ‘산업활동’과 ‘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통하여 이들 저개발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해소하도록” 고안된 기술적 지원계획의 윤곽을 그렸다. 40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볼 때, 우리는 트루먼의 연설이 남(南)이 북(北)을 쫓아가려는 필사적인 경주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또한 우리는 경기장에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도 본다. 어떤 경쟁자들은 도중에 넘어져 버렸고, 다른 경쟁자들은 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고 있음을 눈치채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세계를 경제활동의 경기장으로 규정한다는 생각은 트루먼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식민주의에는 전혀 낯선 생각이었을 것이다. 물론 식민세력들은 원료의 원천으로서 해외영토를 확장하면서 경제경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발로 서서 전지구적인 경제 경기장에서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은 오직 2차대전이 지난 뒤였다.
식민시대에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있어서 식민지를 지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곳에 문명개화를 도모한다는 그들 자신의 소명감에서 나오는 하나의 문화적 의무를 의미하였다. 영국의 제국행정관 러가드 경은 ‘이중적 임무’라는 독트린을 공식화하였다. 그 공식에 따르면 물론 경제적 이윤도 추구하여야 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색인종들’을 보다 높은 수준의 문명으로 고양시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은 토착인들을 다스리는 주인으로서 왔던 것이다. 그들은 공급과 수요의 나선을 출발시키는 계획 입안자로서 오지 않았다.
지상명령으로서의 개발
트루먼의 비전에 따르면, ‘이중적 임무’는 ‘경제개발’이라고 하는 지상명령 밑에 합쳐진다. 그렇게 하여 세계관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고, 개발개념이 보편적 통치의 표준으로 부상하였다. 식민주의의 틀의 영향을 아직 받고 있었던 1929년의 미국의 개발 법령에서 ‘개발’은 ‘이중적 임무’ 가운데 오직 첫번째 임무 ― 토지와 광물과 삼림과 같은 자원에 대한 경제적 수탈에만 적용되고 있었다. 두번째 임무는 ‘진보’나 ‘복지’로서 규정되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사람이나 사회가 아닌, 오직 자연자원만이 개발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동안 국무성의 회랑에서 ‘문화적 진보’는 ‘경제 동원’에 흡수되고, 개발이 최우선적인 개념으로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관은 간명한 정의를 갖게 되었다. 즉, 한 나라의 문명의 정도는 그 나라의 생산수준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개발영역을 자연자원에만 한정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사람들이나 전체 사회들이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거나 또는 심지어 그렇게 간주되어야만 했다.
개발이라는 트루먼의 지상명령은 제3세계 사회들이 이제 더이상 다양하고 상호비교할 수 없는 인간 삶의 가능성들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나의 유일한 ‘진보적’ 트랙 위에 놓여서 서구 산업국가의 척도에 따라 그 성적이 매겨지게 된 것이다.
지구 전체의 역사를 그런 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솔깃할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저개발이라는 것은 성숙의 상태로부터 뒤돌아볼 때만이 식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범(典範)이 없는 개발은 방향 없는 경주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개발이 천명되는 상황에서는 서구의 힘과 영향력이 두루 미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했다. 유엔 헌장의 전문(“우리들, 국가연합 인민은 …”)에 미국 헌법 (“우리들, 합중국 인민은 …”)이 반향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개발이 뜻하는 것은 미국식의 사회모델을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투사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트루먼은 정말로 세계를 그런 식으로 다시 파악하는 방식을 필요로 했다. 낡은 식민주의 세계는 와해되었고, 세계대전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국가로 떠오른 미국은 새로운 세계권력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위해서 미국은 새로운 지구적 질서에 대한 비전이 필요했다.
대답은 개발개념에 의해 주어졌다. 이제 세계는 식민시대의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경제적 상호의존을 통하여 결합된, 동종(同種)의 여러 실체들의 집합으로서 제시되었다. 개발개념으로 인해 신생국가들의 독립과정이 쉽게 허용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 신생국가들은 그들 자신이 경제발전의 주체임을 선포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미국의 날개 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개발은 미국으로 하여금 민족자결의 수호자로서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개념적 도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은 반식민 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유형의 세계지배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재 이유를 찾는 정권들
새로이 독립한 나라들의 지도자들은 ― 네루에서 엔크루마까지, 나세르에서 수카르노까지 ― 북(北)이 남(南)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기자신들의 자화상으로 내면화하였다. 저개발은 제3세계 전역을 통하여 국가 건설에 필요한 기본인식에 토대가 되었다.
1949년 인도의 지도자 네루는(간디에 대립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방법이든 가장 성공적이어서,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고, 대중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굳건히 자리잡게 될 것이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대중들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 경제발전이 일차적인 국가목표가 되고, 생산증대를 위해 나라를 동원한다는 것 ― 이것은 세계를 경제적 경기장으로 보는 서구적 개념에 완전히 들어맞았다.
모든 유형의 경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쟁도 빠른 속도로 전문적 코치들을 만들어내었다. 세계은행은 1949년 7월에 최초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콜롬비아에서 돌아온 열네명의 전문가들은 이렇게 썼다. “단기적이고 간헐적인 노력은 전반적인 상황을 거의 개선할 수 없다. 악순환은 … 교육과 건강과 식량부문을 포함한 전체 경제를 전지구적으로 재출범시킴으로써만 제대로 제거될 수 있다.”
항상적인 수준에서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전(全)사회가 완전히 뜯어고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이보다 더 열성적인 국가목표가 있었던가? 이때부터 유례없이 많은 대리기관과 행정들이 삶의 모든 국면에 관계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계산하고, 조직하고, 무분별하게 간섭하고 희생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이 모든 장면은 집단환각처럼 보인다. 전통이라든지 위계질서라든지 정신적 습관과 같은 것들은 ― 사회 전체 짜임새들은 ― 개발 입안자들의 기계적 모델 속에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전문가들은 세계 전역을 통하여 제도적 개혁에 한가지 동일한 청사진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 청사진의 윤곽은 대부분 ‘미국식 생활방식’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이제 더이상 식민시대에서처럼 “여러 세기를 두고 무르익도록” 내버려둔다는 관점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학자들은 전체 사회를 개발하는 일에 착수하였고, 이 과업을 길어야 이십년쯤 되는 단기간에 완수하려고 하였다.
충격과 침식
1960년대 말기에 와서 깊은 균열이 건물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개발이라는 관념이 요란하게 떠벌였던 약속들이 실상은 모래 위에 세워졌던 것이다! 개발계획을 차례차례 쌓아가는 데 여념이 없었던 국제적 엘리트들은 그들의 이마를 찌푸렸다. 국제노동기구와 세계은행의 전문가들은 성장정책들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빈곤은 정확히 부의 그늘에서 증대되었고, 실업은 성장에 저항적이었으며, 식량사정은 강철공장들을 건설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성장을 곧바로 사회진보로 보는 것은 순전히 허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1973년에 세계은행 총재 로버트 맥나마라는 그런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십년 동안에 국민총생산이 유례없이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인구 중 가장 빈곤계층은 상대적으로 거의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 상위 40퍼센트가 전형적으로 모든 소득의 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트루먼의 전략이 실패했음을 인정하자마자 그는 즉각 또 하나의 새로운 개발전략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농촌개발이었는데, 이것은 소농민들을 이제 새로운 공격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의 논리는 명백했다. 즉, 개발개념은 포기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단지 적용 영역을 넓히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 실업과 사회적 부정의, 빈곤 근절, 기초필수품, 여성 및 환경이 문제로 되었고, 특별한 전략대상이 되었다.
개발은 수많은 상호모순적인 실제 문제를 점차로 더 많이 은폐하면서 그 의미가 폭발하였다. 개발사업은 자기추진적인 것으로 되었다. 새로운 위기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고안되었다. 나아가서, 개발을 위한 배경동기가 서서히 이동하였다. 환경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개발이라는 것은 이제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고, 성장에 맞서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도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개발이란 용어는 의미론적으로 완전히 혼란스럽게 되고, 그 개념은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다.
공허로 가득 찬 개념
그래서 개발은 아무런 꼴도 갖추지 못한 아메바 같은 낱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그 윤곽이 흐려진 만큼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말이 언뜻 무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을 입밖에 내는 사람들은 그들이 선의밖에 다른 의도가 없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발은 그 자체 아무런 내용이 없고, 하나의 기능만 소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개발은 보다 높고 진화된 목표의 이름으로 그 어떤 개입이든지 정당한 것이 되게 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트루먼의 가정(假定)은 눈먼 여객기처럼 비행한다. 어떻게 적용되든지 간에 개발관념은 언제나 뒤따르는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는 선두주자가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고 선진화는 계획된 행동의 결과라고 암시한다. 실제로 경제성장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경우에도, 개발을 운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보편성이니 진보니 타당성이니 하는 개념들을 환기하고, 그럼으로써 그 개념들이 트루먼의 영향력을 회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산은 마치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곳을 자꾸 되풀이하여 밟도록 강요하는 무거운 짐과 같다. 이것은 미초아칸이나 구자라트 또는 잔지바르의 사람들이 자기자신들을 ‘저개발’ 민족이라고 분류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고유의 권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개발개념으로 인해 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다양성과 재간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발은 언제나 다른 세계를 보게 하고, 그 세계와의 비교 속에서 스스로의 궁핍을 의식하게 한다. 개발은 서구에 대한 대안적인 문화로서 토착적 삶이 가질 수 있는 부(富)를 차단한다.
그러나 개발의 반대는 정체가 아니다. 간디의 ‘스와라지’로부터 사파타의 ‘에지도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든 문화에서 놀라운 변화의 예들이 있다는 것을 본다.(에밀리아노 사파타는 멕시코 혁명가로서 토지의 개인소유제가 아니라 옛 인디언 공동체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에지도스’ 관념은 1930년대에 이루어진 멕시코 토지개혁에서 어느 정도 시행되었다.) 후진-선진 또는 전통적-근대적 운운하는 구분은 이제 어떻든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북쪽의 산업사회들에 있어서 진보라고 하는 것은 토양오염에서 온실효과까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트루먼의 비전은 역사 앞에서 추락해버릴 것이다. 그것은 경기가 불공평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비전으로 인해 다다른 곳이 나락(奈落)이기 때문이다.
개발관념은 한때 국제적 열광을 고취하던 엄청난 기념물이었다. 오늘날, 그 구조는 붕괴되고, 총체적 붕괴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 위압적인 폐허는 여전히 모든 것들 위에 머뭇거리고 있으며, 출구를 막고 있다. 이제 우리의 과업은 새로운 터전을 열기 위해 이 잡동사니를 옆으로 밀어치우는 것이다.
빈곤의 발견
나는 나중에 나 자신을 발로 차버릴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당시로는 내가 한 말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1985년 멕시코시티의 대지진 사고 여섯달 뒤의 일이었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테피토 지역을 걸어다녔다. 이 지역은 서민들이 주로 사는 구역이지만 토지 투기가들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지진으로 황폐화되었다. 나는 온통 폐허와 체념과 붕괴와 더러움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일 거라고 기대하였지만, 막상 가서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거기에는 자랑스러운 상호부조의 정신이 있었고, 활기있는 건설활동과 그림자 경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 끝무렵에 내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모두 좋다. 그러나 까놓고 말하면 이 사람들은 여전히 끔찍하게 가난하다.” 그러자 곧 한사람이 반박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테피토 사람들이다!” 얼마나 기막힌 나무람인가! 나는 어째서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던가? 나는 내가 무의식중에 개발철학의 상투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반응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소득층 만들기
전지구적인 규모로 ‘빈곤’은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발견되었다. 1940년 이전에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1948-9년 사이 최초의 세계은행 보고 가운데서 ‘문제의 본질’의 윤곽이 그려져 있다. “개발을 위한 필요성과 잠재력이 단 한가지 통계를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유엔 통계국에 따르면, 1947년 미국의 일인당 평균소득은 1,400달러가 넘고, 다른 14개국에서는 400달러에서 900달러에 걸쳐 있다. 그러나 세계 전체인구의 반 이상에게는 평균소득이 일인당 100달러 미만으로 ―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아래로 ― 떨어져 있다. 이러한 격차야말로 저개발국의 생활수준을 높여야 할 긴박한 필요성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일의 엄청난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문서에서 ‘빈곤’이 언급될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일인당소득에 대한 통계적 측정치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통계의 의미는 그 통계가 미국의 기준에 우스꽝스러울 만큼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에 달려 있었다.
소득규모가 사회적 완성도를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때 그러한 경제적 모델에 따르지 않는 여하한 사회도 ‘저소득’ 사회로 규정되기 쉽다. 이런 방식으로 지구적 규모로 빈곤을 인식한다는 것은 통계의 비교 적용에 불과한 것이었다. 소득규모가 확인되자마자 전지구적으로 하나의 질서체계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수평적으로, 멕시코의 자포텍족들이나 북아프리카의 투아레그족 또는 인도의 라자스타니 사람들과 같은 이질적인 세계들이 함께 분류되는 것이 가능해졌고, 수직적으로는 ‘부유한’ 나라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이들 여러 민족들은 거의 측정하기 어려운 열등생의 위치로의 편입을 강요당하였다.
이런 식으로 ‘빈곤’은 전체 민중들을, 그들 자신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서구적 기준에서 그들이 무엇을 결핍하였느냐라는 기준에 따라 규정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경제적 관점에서 얕잡아보는 태도가 식민시대의 인종적 경멸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태도는 개입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저소득이 문제가 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유일한 대답은 ‘경제개발’이었다. 빈곤은 억압으로부터 오는 결과일 수 있으며, 따라서 빈곤해결을 위해서는 해방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또는,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는 자기충족적 문화가 필수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언급되지 않았다. 한 문화의 에너지는 경제적인 것보다 다른 영역으로 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언급될 리도 만무했다.
그렇기는커녕, 산업국가들에서 행해지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모든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빈곤은 경제성장을 통해 추방당해야 마땅할, 소비력의 결여로 진단되었다. ‘빈곤’의 깃발 밑에서, 많은 사회들이 현금경제체제로 강제로 재조직되는 일이 도덕적 십자군처럼 수행되었다. 누가 그것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동물의 수준으로
1960년대 말에 이르러 대부분의 민중을 보다 높은 생활수준으로 이끌어 올리는 데 ‘경제개발’이 결정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제 더이상 눈을 감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빈곤개념이 필요해졌다. 1973년 세계은행의 맥나마라는 말했다. “우리는 세기말까지 절대빈곤을 근절시키도록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실제로 뜻하는 것은 영양실조와 문맹을 일소하고, 유아사망률을 줄이고, 평균수명을 선진국들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외면적으로 규정된 최소수준 이하로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절대적으로 빈곤”하다고 선언되었다. 일인당소득이라는 잣대는 쓰레기더미에 내팽겨쳐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빈곤에 대한 국제적 논의에 있어서 두개의 초점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동안 국가간 평균소득 차이에 의해 완전히 흐려져 있던 사회내부의 계층간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는 사실에 새로이 주의가 쏠리기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소득이라는 개념은 현금경제에 충분히 통합되지 않은 사람들의 실제 삶의 상황을 가리키는 지표로서는 적당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빈곤을 이해하려는 이러한 새로운 노력들은 성장경제의 결과에 대한 실망으로부터 나왔지만, 그러나 그런 노력들 자체가 그 나름의 환원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세기전환기에 영국에서 있었던 최초의 시도에서 절대빈곤선을 계산해내는 일은 영양섭취에 근거했다. 그러니까 식량섭취량이 어떤 최소한의 열량을 넘지 않을 때, 그런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사람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러한 정의(定義)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실제로 살아있는 수백 수천만명의 사람들의 삶을 단순히 동물적으로 환원한다는 데 있다. 하나의 객관적이고 의미있는 평가기준을 찾아보려는 시도의 결과, 사람들이 희망하고 추구하는 바 그 모든 풍부한 다양성을 무시하고, 동물로서 생존하는 일에 관한 단 한가지 벌거벗은 자료가 제시된 것이다. 이것보다 더 낮은 공통분모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 취해진 조처들 ― 쌀을 먹는 사람들에게 밀을 배달해 주는 일로부터 기록문자가 아예 드문 지역에서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는 일까지 ― 이 흔히 그 지역 민중의 자존심에 무감각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생활세계들을 칼로리 수준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국제적 개발 원조행정을 훨씬더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수혜자들을 말쑥하게 분류할 수 있게 하고(그러한 분류 없이는 세계적 전략이 헛되게 될 것이다), 또 그것은 세계가 긴급 비상사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항구적 증거로서 이바지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없다면 어떤 개발대리인들의 정당성은 의심받았을 것이다).
가난이 반드시 빈곤은 아니다
예를 들어, 건강/불건강, 정상/비정상, 또는 부유/가난과 같은 이분법은 정신적 증기롤러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의 세계를 획일화하고, 모든 것을 완전히 납작하게 수평으로 만든다. ‘가난’에 관한 주형화(鑄型化)된 이야기는 다양하고 대립적이기도 한 ‘가난’의 여러 형태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 놓았다. 예를 들어, 그러한 상투성으로 인해 검소와 비참과 궁핍 사이의 차이가 모호해졌다.
검소함은 소유의 광기로부터 자유로운 문화의 특징이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오직 작은 부분만을 시장에 의존할 뿐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생존유지 수준의 생산방식에 의해 충당된다. 우리의 눈에 이러한 문화 속의 사람들은 매우 빈약한 소유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돈은 오직 주변적인 역할만을 하고 있는 데다가 소유라는 것은 오두막 한 채, 몇개의 솥과 옷가지가 고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누구에게나 들판과 강과 숲에 접근할 권리가 허용되고 있고, 다른 곳에서라면 현금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온갖 서비스가 친족관계나 공동체의 의무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이른바 ‘저소득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다. 더욱이 커다란 잉여가 흔히 보석이나 잔치나 화려한 건물에 사용되고 있다. 한 전통적인 멕시코 마을에서는, 예를 들어, 부의 개인적인 축적이 사회적 추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작은 이윤만이라도 공동체를 위한 선행에 사용하는 것으로써 사회적 특전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보는 것은 자기충족의 상태를 알아보고 그것을 기르는 문화에 의해 유지되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재산축적 사회에 의해 압력을 받을 때만 굴욕적인 ‘빈곤’의 문화로 떨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검소함이 그 토대를 박탈당할 때 활개치는 것이 비참함이다. 공동체적 유대와 더불어 토지와 삼림과 물은 비현금 문화에서 생존을 꾸려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빼앗기거나 파괴되자마자 비참이 시작된다. 농민과 유목민과 부족민들이 자꾸만 비참한 상태로 떨어져온 것은 그들이 그들의 땅과 사바나와 숲으로부터 쫓겨난 다음이었다. 실제로 가난에 대한 최초의 국가정책이 있었던 것은 16세기 유럽에서 공유지에 대한 사적 점유, 즉 엔클로저로 인해 떠돌이와 걸인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과부와 고아들을 부양하는 일은 공동체에 맡겨진 과업이었다.
궁핍(scarcity)은 근대화된 가난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대부분 현금경제에 갇혀 노동자와 소비자로서 살아가면서 그 소비능력이 너무나 낮아서 도중에 낙오하는 도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곤경 때문에 그들은 시장의 변덕에 쉽게 좌지우지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돈이 끊임없이 더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성취에 이를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점차로 쇠퇴하면서, 동시에 상류사회에 대한 선망에 의해 자극되는 그들의 욕망은 무한대로 커진다. 이러한 시소게임 같은 궁핍의 효과야말로 현대적 빈곤을 특징짓는다. 상품에 기초한 빈곤은 19세기에는 여전히 ‘사회문제’로 묘사되었지만 1929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에는 복지국가와 그 소득과 고용정책이라는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로 되었다. 정확히, 빈곤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케인즈와 뉴딜 정책에 영향을 받아서, 전후시대의 개발관념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더 검소하게, 덜 비참하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개발정치인들은 ‘가난’을 문제로 보고, ‘성장’을 해결책으로 보아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북반구의 상품경제의 경험에 의해서 형성된 빈곤개념을 가지고 일해왔다는 것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다. 행운이 덜 주어진 ‘경제인간’을 염두에 둔 채, 그들은 성장을 고무해왔다. 그리고 흔히는 다양한 ‘검소와 문화’들을 황폐화함으로써 비참을 생산해왔다. 성장의 문화는 오로지 검소의 문화가 황폐된 터전에서만 세워질 수 있을 뿐이며, 그 대가로 비참한 궁핍상태와 상품에 대한 의존성이 생겨난다.
40년이 지난 지금 어떤 결론을 끌어내어야 할 때가 아닌가? 누구든지 가난을 추방하고자 하는 자는 경제효율성에 기초하여야 하고, 가난과 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테피토의 내 친구야말로 그 자신 ‘가난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였을 때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그는 그 자신의 테피토식 자기충족의 문화에 매달렸다. 아마도 그는 그러한 자율성 없이는 오직 비참과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현금부족 상태가 닥칠 것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경제학자의 맹목
“인도가 영국을 모방하기로 한다면 그 결과는 나라의 멸망일 것이다.” 1909년 아직 남아프리카에 있을 때 모한다스 간디는 40년 이상에 걸쳐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함에 있어서 그가 지녔던 근본적인 신념을 그렇게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의 명분은 상실되었다. 독립이 성취되자마자 간디의 원칙은 잊혀지고 만 것이다.
간디가 영국인들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은 인도로 하여금 보다 더 인도답게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네루는 인도의 독립을 더욱 서구적인 인도를 만드는 기회로 보았다. 한 암살자의 총탄으로 인해 두 민족적 영웅 사이의 논쟁이 공개적인 것으로 되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그러나 두사람 사이에 오고간 십년에 걸친 서신교환은 이 문제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간디는 기계와 엔진과 공장을 대동하는 기술문명에 한번도 유혹당하는 일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기술문명이란 신체적 노력을 최소화하고 물질적 쾌락을 최대화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다른 숭고한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질적 안락에 대한 강박적인 관심에 대하여 그는 다만 어깨를 추스릴 뿐이었다. 훌륭한 삶이 그러한 기초에 세워질 수 있는가? 수천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전승되어온 인도의 전통이 좀더 실속있는 것을 제공해왔던 것이 아닌가?
많은 문제에서 전통주의로부터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힌두의 전통에 부응하면서 삶의 영성적 방식에 우선권을 두는 사회를 주장하였다. 스와라지, 즉 개인적 진실을 따르는 내적 자유가 지배하여야 하는 곳에서 영국식의 산업주의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간디는 인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촌락이 부활하기를 기원하였고, 그에 따라 평가될 수 있는 진보의 형태를 염원하였다. 그의 눈으로는 인도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은 자동화의 시대에 영국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상들과는 모순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서구를 전면적으로 모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서구문화의 개별적 요소들은 인도의 갈망을 좀더 낫게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한에서만 채택되어야 한다.
네루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에게는 신생독립국을 가능한 한 빨리 서구의 업적에 접촉시키고, 경제적 문명을 향하여 길을 내딛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미 초기에, 간디에 대한 그의 커다란 숭배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디의 비전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부작용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도였지만, 그래도 그는 인도 사회를 일차적으로 하나의 경제, 즉 상품을 생산해내는 능력여부에 의해 스스로를 평가하는 사회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경제적 관점으로부터 볼 때, 인간본성이나 정치의 기능이나 사회개혁의 성격은 모두 하나의 특정한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욕망하는 것보다는 적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항구적인 궁핍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정치적 과업은 물질적 부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역공동체에 기초한 생활경제로부터 전국적 경제체제로 사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네루는 정확히 개발관념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적 환상을 조장한 것이다. 그 환상에 따르면, 한 사회의 본질적 실재는 그 기능적 성취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나머지는 단순한 민속이나 사적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경제는 모든 다른 것을 가려 놓는다. 경제법칙이 사회를 지배하고, 사회법칙이 경제를 지배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개발전략가들이 한 나라에 시선을 보낼 때 그들은 경제를 포함하는 한 사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회를 보는 것이다.
생산은 하느님이 아니다
과테말라의 쿠이체 근처 산속에서 마야 인디언들이 밭을 일궈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 메마른 땅과 원시적 도구와 빈약한 수확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쉽사리 결론을 내리게 될지 모른다. 그리하여 개선책들을 재빨리 강구해볼 수 있다. 보다 나은 윤작, 개량된 종자, 작은 기계, 사유화, 그리고 기업경영 교과서가 추천하는 방법들.
이 모든 개선책들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 관점은 악명 높게도 색맹인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명증하게 비용-수익의 관계를 알아보지만, 현실의 다른 차원들을 인식할 능력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그 인디오들에게 있어서 땅은 자기네의 조상과의 연결을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라는 사실을 경제학자들이 알아보는 것이 어렵다. 마찬가지로 마을공동체를 그 속에 드러내는 집단적 노동형태의 중심적 중요성을 주목하는 데 경제학자들은 흔히 실패한다. 마야 인디언들의 세계관은 경제학자들의 세계관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의 역설의 형태로 말해본다면, 경제활동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경제학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경제학이라는 것은 물화(物貨)와 관계된 활동들을 바라보고, 그 활동들을 보다 큰 맥락 속에 놓고 보는 많은 방법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사회에서 물건들이 생산되고, 분배되고, 소비된다. 그런데 오직 현대의 서구화된 사회들 속에서만 가격과 생산품, 소유와 노동조건이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법칙에 의해 압도적으로 형성된다. 다른 곳에서는 이것과는 다른 법칙이 타당하고, 다른 모델들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잠비아의 벰바족은 풍작이나 성공적인 사냥을 자기네 조상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큰 생산을 희망하면서 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마하라쉬트라의 농부들은 순환적인 질서에 따라 농사를 짓는데, 이것은 해마다의 혼인, 축제, 순례라는 행사일정에 일치한다. 만약 그들이 새로운 농사법을 채택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사회적 달력을 곧 파괴시켜버릴 것이다.
물질적 부를 끌어모으는 일이 강요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경제활동은 부지런히 생산에 열중하는 일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일자리를 선택하거나 땅을 갈거나 물건을 교환한다거나 하는 경제활동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때 그때마다 역할을 맡아서 특정한 사회적 드라마를 수행하는 방식으로서 이해된다. 그 드라마의 이야기는 무엇이 누구에게 속하고, 누가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그것이 교환되는가를 크게 규정한다. ‘경제’는 밀접히 삶과 관계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명령적인 위치에 서지는 않는다. 오직 서구에서만 경제가 드라마와 그 드라마 속의 각자의 역할을 통제한다.
서구의 발명품
1744년에 제들러 백과사전은 ‘시장’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부지중 하나의 순진한 정의를 내렸다. “… 넓은 공공장소로서, 장식된 건축물이나 스탠드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어떤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음식물이나 물건들을 팔려고 거기 내놓는다. 그래서 그 장소는 또한 장터라고도 일컬어진다.”
지난 2세기 동안 축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했던 ‘시장’이라는 것이 어떤 장소밖에 아니였다니! 그 백과사전의 저자는 기껏 군중이나 스탠드나 바구니들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기에는 ‘시장점유’라든지 ‘가격변동’이라든지 ‘균형’과 같은 것에 관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더이상 전통적인 장터를 생각하지 않은 최초의 사상가였다. 그는 시장을 모든 가격들이 그곳을 통해서 상호전달되는 전사회적 공간이란 뜻으로 사용했다. 이 혁신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고, 전국가적 범위에 걸치는 경제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반영했다. 그 이전에는 국내시장이라는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7세기 말경의 유럽에서도 같은 나라 안의 서로 다른 지역들끼리 교역이 행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까마득한 옛날부터 교역은 존재해왔다. 북부 독일의 한자동맹이나 베니스의 번영을 생각해보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 교역은 먼 외국끼리 이루어졌고, 그래서 교두보로서 소수의 도시에 국한되어 있었다. 역사상 각종 각양의 시장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도시와 주변 시골 간의 일시적·국지적 교환장소였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의 시대에 국민국가는 사회 전체에 교역관계의 그물을 쳤고, 국내시장을 확립하였다. 오늘날의 개발도상국들처럼 그 무렵의 신생국가들은 경제원칙들이 온 나라를 지배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 그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국민경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전에는 ‘경제’라는 말은 군주의 ‘가정경제’에 적용되었으나 이제는 온 나라가 하나의 ‘정치경제’로 탈바꿈되었다. 스미스는 시장법칙에 지배를 받는 사회의 이론가가 되었던 것이다.
경제의 대안들?
사회가 하나의 정치경제로 탈바꿈되는 데는, 물론,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오랜 동안의 투쟁이 있었다. 사람들이 상업적 정신에 쉽게 감염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기왕에 가지고 있었던 노동이나 재산에 대한 관념, 윤리관이나 시간감각에 대하여 상업적 정신은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상인은 아직 기업가가 아니었고, 토지는 매매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경쟁은 나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자(利子)놀이는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임금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가장자리에 살고 있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토지와 삼림과 곡물과 돈과 노동자 자신들이 과연 상품으로 취급될 수 있는지, 또 어느 정도까지 그것이 가능한지에 관한 격렬한 논란으로 점철되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와 비슷한 급격한 변화들이 경제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은 제3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일어났다. 자급자족의 전통이 옆으로 밀려나고, 지역내 교환관계가 해체되고, 집단적 소유형태가 깨어지고, 생존경제가 제거되었다. 오랫동안 국제 개발정책은 도처에서 임금노동자와 소비자들로 된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전문가들은 ‘생산요인들’의 자유로운 동원을 방해하는 ‘개발에 대한 장애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각 나라를 면밀히 검토하였다. 전통사회를 매끄럽게 움직이는 정치경제권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어떤 대가나 어떤 희생도 치루어야 했다.
그리하여 의심할 바 없이 기적들이 나타났고, 커다란 파도가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을 휩쓸었다. 역사는 엄청난 비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재난이 박두했음이 이제 점점더 분명해지고 있다. 경제가 마침내 전세계적인 지배를 성취한 바로 그 순간에 사회적 혼란과 환경파괴가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경제의 지배는 그 위협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사회들은 궁지에 몰려 있다. 이 경제라는 괴물에 항복할 수도 없지만, 그 괴물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가 지배력을 장악하는 동안, 그것은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그렇게 위험스럽지 않은 여러 대안들을 말살해왔던 것이다.
끊임없는 재산축적을 위한 지옥 같은 과정에 갇혀 포로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너그럽게 살수 있는 경제제도를 다시 만드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도전에 응답할 수 있는 창조적 힘은 제3세계에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든, 제3세계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서구적 경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삶의 방식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하는 세 편의 글은《개발개념의 고고학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집필된 7편의 연속적인 에세이 중에서 고른 것인데, 출전은 New Internationalist 제232호(1992년 6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