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오 지음《그래, 땅이 받아줍디까》(강, 2004년)
전희식 지음《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역사넷, 2003년)
추둘란 지음《콩깍지 사랑》(소나무, 2003년)
3년 전 이맘때 충남 홍성군 홍동읍 문당리의 환경농업교육관에 간 적이 있다. 귀농학교에 다니는 아내의 농촌 현장실습에 아이와 함께 따라 나선 것이다. 도착한 날 밤, ‘귀농 선배와의 대화’라는 것이 있었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 이미 귀농한 선배들의 체험담을 듣는 자리, 몇년 전 귀농해 수천평의 논밭농사를 짓고 있다는 귀농 선배 한분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헬렌 니어링인가 하는 여자 있잖아요.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나 집필, 취미생활 뭐 이런 식으로 살았다는 이 …. 혹시 그런 한가한 생각으로 귀농을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마을 사람에게 욕이나 얻어먹다 굶어죽기 딱 알맞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사람들이 수런거렸고 일부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팍팍한 도시생활이 힘들어, 가난하지만 한가로운 농촌생활을 꿈꾸어 왔는데, 그렇게 살면 굶어죽기 딱 알맞다니 ….
귀농 선배의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존 A. 솔트마쉬가 쓴 스코트 니어링 평전을 끝까지 읽었다. 니어링이 버몬트의 숲으로 농사를 지으러 떠나기 전까지의 활동에 평전의 대부분을 할애했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귀농 이야기를 간단하게 언급한 책이었다. 다분히 좌파 성향의 저자는 그 책에서 니어링의 사회변혁 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귀농은《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헬렌 니어링 지음, 보리)나《조화로운 삶》(헬렌 니어링·스코트 니어링 지음, 보리)에서처럼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차갑게 보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유 중의 하나는 이웃과 절연된 삶이었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워튼스쿨의 진보적인 교수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가로 힘없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 땅으로 간 그가, 정작 그 땅에 터잡고 사는 이웃들과는 모른 척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 책 때문일까. 지난해 가을 전희식의 귀농일기《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에 이어 최근 한승오의 시골편지《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를 접하며 우선 궁금했던 것은 이웃과의 관계였다. 인터넷을 통해 간간이 글을 접했던 전희식이야, ‘야마기시 공동체’나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등에 참여하며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개인적으로 더러 소문을 듣기도 한 한승오는 좀 달랐다. 책 날개에 적혀있다시피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뒤 마흔이 넘어 충남 홍성에 농사지으러 가기까지 서울에서만 산 사람이다. 이른바 최고 명문대를 나와, 직장생활과 출판사 사장을 하며 서울에서도 주로 똑똑한 이들과 어울린 사람이다. 귀농 당시 마흔 초반, 나이가 늙은 정도는 아니니 농사일이야 어떻게 익히겠지만, 이웃의 무지렁이 농사꾼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도 여느 시골사람들처럼 마을의 할머니나 아저씨, 아주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겨시는감유” 하고 마실 오게 할 수 있을까. 몸은 농촌에 있되, 말로만 농사를 짓고 마음은 도시에 있는 얼치기 농부가 된 것은 아닐까.
이런 궁금증이 잦아들게 할 만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작년 가을, 그가 농사지은 쌀을 사먹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직장 선배 한분이 “홍성에 농사지으러 간다고 했던 ‘강 출판사’ 사장 있잖아. 그 사람이 오리농법으로 쌀농사 지었단다. 한포대 사라”고 하기에 별 생각 없이 쌀을 샀는데, 집으로 배달된 쌀을 받는 순간 마음이 짠했다. 쌀포대에 매직으로 적힌 “정성스럽게 지은 쌀입니다”란 글씨 때문이었다. 햅쌀이어선지 오리농법으로 지은 쌀이어선지 맛도 빼어났다. 아, 그는 글깨나 쓰는 이들이 흔히 그렇듯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삶 운운하며 농촌에서 폼만 잡는 것이 아니라, 땀 흘리며 “정성스럽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구나. 그래, 이렇게 맛있는 쌀을 생산해냈구나. 그해 주말과 휴가를 고스란히 바쳐 농사를 지으며, 6-7월의 땡볕 아래 감자밭, 옥수수밭에서 풀과의 전쟁을 치러본 적이 있는 아내는 감동이 더한 것 같았다. 쌀농사를 지은 그 농부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더니,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이런 경험 탓인지, 그 초보 농부가 쓴 책을 보는 첫 느낌도 그가 농사지은 쌀을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책장을 넘기면 나오는 ‘낮은 땅’이란 제목의 머리말부터 그랬다.
논은 낮은 땅이다. 심지어 산턱에 높게 자리잡고 있는 계단논조차도 낮은 땅이다. 자신을 주위보다 낮추어야 물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물보다 낮은 땅이 바로 논이다. 논은 세상에서 제일 낮은 땅이다. 그 논에 들어설 때 나는 모든 것을 벗는다. 땅을 짓밟고 다니던 두툼한 신발을 벗고, 몸을 가리던 깔끔한 옷을 벗고, 사람들에게 애써 지어보이던 얼굴을 벗는다. 나는 온전히 맨몸이 된다.
그렇게 온전히 맨몸이 되었더니, 논이 사람을 받아주었다고 했다. 발이 쑥쑥 빠질 정도로 한껏 받아들여 어루만져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마음조차 벗었으며, 마침내 “나는 논이 된다”고 썼다.
벗고 들어감 …. 이는 생전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았던 그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시골로 들어가 온전히 받아들여진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듯하다. 벗고 들어갔더니 시골은 신용도 담보도 없는 그에게 논밭을 내놓았다. 비틀비틀 뒤뚱뒤뚱 어설픈 걸음걸이로도 넘을 수 있을 만큼 논밭의 문턱은 높지 않았다. 서툴기 짝이 없으나마 삽질, 호미질, 낫질을 했더니 수확의 계절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이런 글을 담담하게 쓰는 그에게 명문대를 나와 출판사를 경영했다는 엘리트 의식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세계를 돌며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설파한 스코트 니어링과도 다르다.
뽕짝 메들리로 춤추는 관광버스를 타고 예식장에 다녀오고, 마을사람들과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춘다. 학교의 가을운동회에서 고기를 굽고 소주를 돌리다 릴레이 주자로 나서고, 연말 마을총회에서 이장 선거에도 참여한다. 이사가며 만들었던 수세식 화장실을 1년 만에 폐쇄하고 뒷간으로 가는 과정도 그렇지만, 똥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바뀌는 것은 더욱 재미있다.
“거, 똥 참 좋다!”
양계장을 청소해준 대가로 얻은 닭똥을 트럭에 실으며 하는 말에, 이제 진짜 농부가 된 그의 소망과 건강함이 담겨있다. “여보! 똥 왔어, 똥!” 하는 소리에 마당으로 뛰쳐나오는 아내도 진짜 농부의 아내답다. 하지만 알다시피 시골살이, 그것도 초보 농사꾼의 삶이 어찌 푸근함만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무값, 배추값 폭락으로 애써 길러낸 무, 배추를 갈아엎으며 농사꾼은 다 자란 자식새끼를 땅에 묻어야 하는 못난 어미의 심정이 된다. 학교 갔던 큰아이가 낯선 아이에게 얻어맞고 들어와 서럽게 울어대는 것을 대책 없이 지켜보며 “가슴 속 생채기가 덧나고 또 덧나야 하는 타향살이의 버거운 여정”을 실감하기도 한다.
이제 귀농 3년을 갓 넘긴 한승오의 시골편지가 서투른 초보 농사꾼의 일상사를 소박한 목소리로 전하는 것인데 비해 전북 완주로 귀농한 지 10년이 되어가는 전희식의 귀농일기는 보다 관심사가 넓고 목소리도 큰 편이다. 귀농하기 전 서울과 인천에서 오랫동안 사회변혁 운동에 몸담은 이답게, 귀농해서도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을 감추지 않는다. 짧은 입산수도 생활, 야마기시 공동체, 동사섭, 아바타 수련과 단식 등의 경험에서 보이듯 몸과 마음공부, 혹은 명상에도 관심을 보인다. 농부에 머물지 않고, 전주귀농학교 총동문회장, 시민행동21 운영위원,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의 사이버 단장 등을 맡아 진보를 향한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도시에서 운동을 할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 안에 등불을 밝혀 그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켜가려는”(박노해 시인) 것이다.
책은 부록을 포함해 모두 다섯 마당으로 이뤄져 있다. ‘쌀농사 자식농사’로 된 책의 첫째 마당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실상사 작은학교’로 간 딸과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교육 이야기다.
그동안 새들이가 학교 가기 싫다고 울면서 하소연하기가 몇번인지 모른다. 어제만 해도 일어나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학교 안 가면 안되느냐고 물어 왔었다.
“(선생님이) 성락이를 얼마나 많이 때리는지 몰라요. 때리는 이유요? 이유야 뻔하죠. 숙제를 안했거나 떠들거나. 근데 제 얘기는요. 유독 성락이만 집중적으로 때린다는 거예요. 만만하니까 그럴 거예요. 우리반 애들은 전부 다 성락이를 좋아하거든요. 결손 가정인데요, 그래도 얼마나 재밌고 웃기는지 몰라요.”
농촌에 살아도, 30년 전과 다름없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며 가슴이 콱 막혀야 하는 현실은 이 땅의 여느 학부모와 다르지 않다.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장면도 도시 아이와 꼭 같다. 하지만 그는 한숨만 쉬며 주저앉아 있지 않는다. 교장과 교사를 만나 항의하기도 하고 일일교사로 아이의 교육에 참여하며 교육현장의 변화를 꾀한다. 그렇다고 수십년간 굳어져온 권위적인 학교풍토가 학부모의 항의 몇번에 바뀔 리 없다. 학교교육에 절망한 그는 결국 인근 전주 시내에 허다한 중학교를 마다하고, 멀리 실상사 대안학교로 아이를 보낸다.
둘째 마당 이하는 주로 농사 이야기다. 무슨 일이든지 10년쯤 하면 일가를 이루게 되는 법이지만, 농사는 그렇지도 않은 것인가. 그는 처음 시골 갔을 때나 지금이나 초보 농사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농사도 영락없는 초보 귀농인의 그것이다. 밭에다 고추, 옥수수, 땅콩, 감자, 고구마, 들깨, 메주콩, 콩나물콩, 가지, 방울토마토, 호박, 생강, 당근, 참외 등 온갖 작물을 심어대는 것부터가 그렇다. 효소를 만들고, 땡감으로 천연염색을 한 천으로 옷을 지어입거나,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 농법에 집착하거나, 고추를 햇볕에 내다말리는 것도 귀농한 초보 농사꾼이 아니면 별로 하지 않는 것들이다. 노력에 비해 돈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귀농 10년은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그는 직접 청국장을 만들어 먹으며, 황토집을 짓기까지 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내 손으로 짓는 황토집’이란 제목의 부록을 싣고, 직접 집지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와 서까래를 얹고, 드디어 기와까지 얹은 집 앞에서 사진을 찍은 가족의 얼굴에는 자기의 손으로 집을 지어본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하다. 단식과 태극팔단금, 틱낫한 스님의 명상수련 따위에 참여하며, 그동안 혹사했던 몸과 마음을 모시는 것도 귀농한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책을 관통하는 것은 역시 농민처럼 힘이 없는 이들이 ‘하늘이고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그의 바람과 활동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여하고, ‘우리밀 살리기’에 뛰어든다. 농사를 짓는 그가 사이버 상에서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을 만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의 관심사는 농사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어서 서해교전, 남북이산가족 상봉, 대통령 선거 등에서도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농민이 하늘이고 주인되는 세상은 멀기만 하고, 어머니는 농부가 된 그가 아직도 못마땅하다.
2년 전. 귀농 6년 만에 직접 집을 한채 지었을 때 초청을 해도 안 오시고, 명절 때마다 서울 큰집에 가면 내가 늘 우리집에 내려가 며칠 쉬시라고 해도 손사래를 치던 (어머니). … 내가 시골로 가서 농사짓겠다고 하니까 … 대뜸 목이 잠기시던 어머니다.
추둘란의 수필집《콩깍지 사랑》은 같은 시골 이야기이면서도 남자들이 경험한 시골살이를 적은 한승오나 전희식의 책과 여러가지로 다르다. 지난해까지 충남 홍성군 문당리의 환경농업교육관에서 살았던 그는, 충남 서산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서산에서 신접살림을 차릴 때까지만 해도 현재 30-40대 서울 사람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1969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올라와 대학과 대학원에서 농학, 영문학, 우리나라 현대소설 등을 공부한다. 한동안 편집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도 일하며, ‘녹색연합’에서 펴내는《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일을 도운 것을 인연으로 그곳에 글을 싣기도 한다.
결혼 전 차린 민속주점을 건물주의 부도로 몇푼 건지지도 못한 채 정리하고, 그것만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교사가 되려고 했던 남편이 다시 시골에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태어난 아이가 다운증후군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다운증후군에 대해 산부인과 의사에게서 제일 먼저 들은 이야기는 아이가 스무살 이상은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잘못된 정보임을 나중에 다운센터에 물어보고 나서야 알았지만, 어쨌거나 아이가 장애아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이었는데,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산부인과에서 퇴원한 그날부터 아이는 황달을 심하게 앓아 천안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그는 산후조리원 좁은 방에서 하늘을 원망한다.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가 큰 욕심을 낸 것도 아니요,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은데, 이렇게 불행을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떡하라구요. 누구는 서른아홉에 늦둥이를 낳아도 비장애아인데, 저는 그보다 더 젊습니다. 왜 하필 저인가요.
울며 몸부림치던 이들이 남편의 교사 되기를 포기하고 홍성의 환경농업교육관 사무국장으로 가게 된 것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깨끗하고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자고 한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그르지 않았다. 좋은 환경에다 덤으로 좋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도시 사람과 달리 시골 사람들, 특히 할머니들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데도 할 수 있는 것들을 눈여겨보며 함께 좋아해주었다.
그는 다운증후군으로 인한 정신지체 아이를 키우며 놀랍고 괴롭고 두려웠지만, 아이로 인해 얻은 것은 그보다 훨씬더 많다고 고백한다. 소중한 친구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가족간의 화목도 얻었다. 장애인에 대해, 세상과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삶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절망을 안고 온 줄 알았던 아이가 사실은 희망과 축복을 안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세상에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자신의 가정에 보내주신 것에 감사하고, 세상에 다운증후군 아이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저자는 책에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쁘게만 자라는 아이 이야기를 축으로, 자기 가족을 마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속 깊은 사랑을 나눠주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시간이야 조금 늦어져도 지 맘대로 사람을 기다려주는 시골버스 이야기도 담겨있고, 꼬깃꼬깃 모은 용돈으로 동네사람들에게 차례대로 식사 대접을 한 뒤, 장례 준비까지 다 해놓고 세상을 떠난 여든여덟 고운 할머니 이야기도 나온다. 초등학교 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준 보육원 아이나 고교 2학년 때 싸운 어린 안내양을 뒤늦게 떠올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해 하며 아파하는 모습에서 그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읽힌다.
어쩌면 좀더 성공해 넓은 집을 마련하고 새 자동차를 사고, 주말이나 휴가 때면 여행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알고 살 수도 있었던 그는 이제, 환경농업교육관에서 나와 남편과 농사를 지으며 그전과는 전혀 다른 소망을 품고 산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위해 대안학교를 만드는 것도 이들의 소망 중 하나다. 누구나 그렇듯, “눈에 콩깍지가 씌어” 남편을 사랑하게 되고, 또 “눈에 콩깍지가 씌어” 세상의 모든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천사로 보게 되었다는 그는 바라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눈에 씌어있는 그 콩깍지가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그 콩깍지는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시골이 지닌 힘이 그의 눈에 콩깍지를 씌우고 굳건하게 하고 새로운 소망을 주었듯이, 그가 시골에 머무는 한 시골의 힘은 그의 눈에서 콩깍지가 절대 벗겨지지 않게 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