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 지음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휴머니스트, 2017년)
고전의 현대적 의미를 궁구하다
한문학 전공자 강명관 교수가 최근 주목할 만한 책을 출간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을 새로운 시각과 방법론으로 연구한 책인데, 충분히 문제적이고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저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작품의 구석구석까지 정치하게 읽고 그 역사적 함의를 짚어낸 깊은 공부와 연구자로서의 성실성에 새로운 시각과 확고한 관점까지 더해져 독자가 단숨에 끝까지 읽어나가게 만든다.
사실 그동안 강 교수는 전공분야의 장편 저술뿐 아니라, 칼럼과 같은 짤막한 글들로 호평을 받아왔다. 고전이나 역사 사실을 그것이 산생된 시대에만 묶어두지 않고, 현재적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참신한 연구자와 필자로 인식되어온 것이다. 특히 차고증금(借古證今)의 방법론으로 오늘 이 시대의 문제점을 따져보고 짚어내는 글쓰기로 인해 한문학과 우리 고전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은 학자로 주목받아왔다.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과연 그런가?’이다. 그는 이 키워드를 가지고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을 회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학계의 정설이나 기존의 연구성과를 뒤집는 파격적인 주장이나 논설을 제시해왔다. 예컨대 《열녀의 탄생》이란 저서는 ‘열녀’라는 호칭이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상징 조작이라고 보고 그 실체를 파헤친 연구인데, 열녀에 대한 기존의 관념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남성 중심의 사고로 미화할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제도적 살인이라고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번의 책 역시 누구나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허생전〉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다. 작품을 보는 관점의 새로움이나 역사주의적 연구의 견실함뿐 아니라, 고전의 현대적 의미를 발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연암이 “묵은 간장도 그릇을 바꾸어 담으면 입맛이 새로워지고, 늘 보던 것도 환경이 달라지면 마음과 눈이 달라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경우라 할 만하다.
문제적 작품을 새로이 읽기
연암이 지은 〈허생전〉(연암은 ‘허생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므로, 작품의 정확한 명칭이 될 수 없지만, 연암 당대와 그 이후 ‘허생전’으로 통칭되었으므로 굳이 ‘허생전’으로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은 본래 그의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가난한 허생이 물건을 사재기하여 치부하고, 군도를 이끌고 무인도에 들어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했다는 ‘허생 고사’는 18세기 조선에 널리 유통되었으며, 이후 많은 문헌설화집에 정착되었다. 연암 역시 윤영이라는 이인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작품으로 창작했던바, 허생의 고사는 연암의 손을 빌려 더욱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곧 연암의 문제의식과 개성적 창조력에 의해 허생의 고사는 문학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연암은 20세를 전후해서 많은 전기 작품을 창작했다. 창작의 원천은 대체로 주변 인물들이나 겸인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소위 9전(傳)이 그것인데, 이들 작품은 견문한 내용을 그리 많은 시간을 끌지 않고 창작한 것들이었다. 작품 창작의 소요 시간이 짧다고 해서 문제작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허생전〉은 연암이 허생의 고사를 듣고 작품으로 창작하기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 그만큼 문제의 작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스무 살 젊은 시기에 허생의 이야기를 듣고 25년이 지난 40대 중반에 작품을 창작한 셈이니 연암이 〈허생전〉 창작에 얼마나 공력을 들였을지는 불문가지이다. 연암은 작중 주인공 허생을 통해 사상의 원숙함, 특히 진보적 사상을 은밀하게 내장하였음이 물론이다.
연암의 〈허생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고, 20세기 이후 이광수, 채만식, 오영진 등 많은 작가들이 패러디하여 소설, 희곡으로 확대재생산하기도 했다. 또한 연극이나 마당극, 뮤지컬로 꾸며지기도 하고, 청소년을 위한 동화나 위인전으로 거듭남으로써 한국인 모두가 그 내용을 아는 작품이 되었다. 〈허생전〉에 대한 학술적 연구물 역시 한우충동으로 쌓였다. 그리하여 〈허생전〉 자체는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작품이고, 더이상 연구해봐야 진전된 주제를 끌어내기 어려운 것처럼 되어 있었다.
구한말 우의정을 지낸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평안감사가 되었을 때, 판서를 지낸 동생 박선수가 조부의 문집 《연암집》을 간행하자고 했는데, 박규수는 〈허생전〉과 〈호질문〉이 평소 유림의 나무람과 헐뜯음을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간행을 거절했다고 한다. 곧 〈허생전〉은 보수 유림들 사이에 말썽을 일으켜온 글이었던 셈이다. 손자조차 문집 간행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던 〈허생전〉이었으니, 도대체 〈허생전〉이 왜 유림들에게 배척되었던가? 〈허생전〉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평가는 이것을 여하히 읽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시대와 텍스트에 천착한 방법론
저자 강명관 교수는 기왕의 학계에서 읽어내지 못한 부분을 새로이 읽어내려 했다. 기왕의 학계가 〈허생전〉 연구를 통해 밝혀낸 성과, 그 주제는 화이론과 북벌론에 대한 비판, 북학사상 주장, 농업이 아닌 상업과 무역에 대한 지지, 사족의 경제적 무능에 대한 비판, 벌열권력에 대한 비판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허생전〉의 주제를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작품에서 자본주의적 근대를 읽어내려는 잘못된 독법이라고 강 교수는 비판하면서, 작품이 산생된 사회경제적 배경과 연암의 고뇌에 찬 창의성을 고려하여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연암을 실학파 혹은 북학파라는 범주 속에서 보는 시각을 내려놓고, 또 조선 후기를 근대로의 이행기로 보는 시각이나 거기서 자본주의적 맹아를 찾으려는 섣부른 시도를 접고, 그야말로 작품 자체를 동시대의 맥락 속에서 충실히 읽을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책은 출발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 중의 하나는 기존 연구성과의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함께 작품에서 읽어내야 할 진정한 주제를 동시대의 맥락 속에서 찾아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사회적·경제적·문화적 현상을 탐색할 수 있는 광범위한 자료, 즉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료와 각종 문집, 한문 단편, 문헌설화집 등 문학작품은 물론 최근 사학계의 연구성과까지 꼼꼼하게 참조함으로써 작품의 실체를 읽어내고 있다.
예컨대 상평통보와 은의 유통에 관한 역사적 사실, 화폐경제의 발달에 의한 사회경제사적 변화, 소작농의 몰락과 유민으로의 전락, 그리하여 끝내 군도가 되었던 조선 후기의 실상, 군도의 집단적 저항과 해방 공간을 찾아 헤매는 민중의 저항, 지배층인 사족들의 탐욕과 타락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그 함의를 찾고 있는 게 그것이다. 이는 〈허생전〉에 관련해서 기왕의 학계가 드러낸 약점에 대한 보완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의 역사논문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이 부분은 〈허생전〉을 옳게 읽으려는 문제의식의 결과임은 물론이다. 기실 저서의 이 부분만 읽어도 조선 후기 사회변동사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연구에 2년 이상이 소요되었다는 저자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고, 또 얼마나 공력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추가할 미덕은 저서의 부제에 ‘허생 강독’이라 썼듯이, 텍스트를 처음부터 축조적으로 읽어가면서 충실한 해설을 가하는 그 서술방식이다. 논지 전개를 위해 작품의 앞뒤를 임의로 재단하여 인용하는 논문 작성의 관행에서 탈피하여 “〈옥갑야화〉와 〈허생〉을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이해를 돕는 자료를 붙이고 나의 생각을 말하는” 식의 글쓰기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을 때와 같은 흥미를 줄 뿐 아니라, 작품을 미처 읽지 못한 독자에게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 〈허생전〉은 그것이 실려 있는 〈옥갑야화〉 전체와 관련해서 유기적으로 읽지 않으면 그 실체를 온전히 포착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이런 방법론을 통해 결국 저자는 〈허생전〉에서 무엇을 읽어내었는가? 작품에서 허생이 군도와 함께 들어갔던 무인도(‘허생의 섬’), 그곳은 바로 연암의 아나키즘이 실현된 이상적 공간, 민중의 해방구라는 것이 저자의 핵심적 주장이다. 책의 제목(‘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은 기실 이 책의 3장, 곧 〈허생전〉의 전반부에 대한 분석에 붙인 소제목이기도 하다.
아니키즘을 추론케 하는 근거는
저자는 무엇을 근거로, ‘허생의 섬’이 연암의 아나키즘이 실현된 공간이며 연암은 어떤 생각에서 그런 아나키 사회를 작품에서 제시했다고 주장하는가?
아나키란 지배의 부재, 곧 평등한 관계를 의미하고, 아나키즘은 정치·경제·사회적인 면에서의 하이어라키(계급제도 혹은 위계질서)가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사상이다. 국가는 그러한 계급제의 최고의 형태이므로, 아나키스트는 국가를 부정하는, 곧 국가(정부) 없는 사회를 지향하면서 체제의 밖으로 탈출하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허생의 섬’은 체제 밖의 공간이며, 그 섬은 일체의 지배가 없는 사회이다. 또한 섬에서는 그런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원천(화폐, 지식)이 근원적으로 차단된다.
강 교수는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과 관련된 자료를 예리하게 읽고, 작품 안에서 허생이 보여주는 몇 가지 특이한 행동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예컨대 허생이 나가사키(長崎)에서 벌어들인 거금의 절반을 바닷속으로 던져 수장시킴으로써 사적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자 경제권력의 대명사인 화폐를 폐기한 것, 자신을 포함해서 문자를 아는 사람을 섬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의 도구인 문자지식의 지배를 종식시키고자 한 것, 오가는 사람이 없도록 이동 수단인 배를 불살라 섬을 고립시킴으로써 소농 중심의 자급자족의 삶을 도모하려 한 것, 그리고 연장자에게 식사 차례를 양보하는 행동 이외의 일체의 허례허식을 배제한 것 등이 모두 아나키사회에 대한 연암의 동경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편 연암은 왜 이러한 ‘섬’을 꿈꾸었는가? 그에 대한 해명을 강 교수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찾는다. 작품의 전반부는 ‘허생의 섬’을 구현하기까지의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허생이 사족체제가 작동하는 현실에 돌아와서 벌어진 이야기이다. 후반부의 핵심은 북벌론 비판에 있다. 허생이 이완에게 제시한 세 가지 논리, 소위 시사삼난(時事三難)은 북벌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지적·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북벌의 실현 불가능성 및 그 허구성에만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족은 어떠한 기득권도 내려놓지 않으려 하고, 국가는 민중의 삶을 위해 어떠한 제도적 개혁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는 절망적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이 사족의 해체 없이는, 나아가 국가를 없애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연암이 판단하고, 따라서 그 대안으로 국가 없는(지배 없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나키즘은 체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불온한 사상이고, 또한 고루한 사족에게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기도 하다. 이 불온함을 감추고 쏟아질 비방이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연암은 의도적으로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채택하여, 예컨대 허생의 이야기를 주고받은 장소로 옥갑이라는 불명확한 지명을 사용한다든지 허생의 이야기를 제보한 윤영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모호하게 흐려 놓기도 하는 등, 문학적 책략을 사용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추론한 것은 작품에 내장된 은밀함, 곧 아나키즘이라는 불온성을 읽어내기 위해서이다.
결국 강 교수에 의하면, 〈허생전〉에서 연암의 아나키즘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중요하고 정확한 독법이다. 이는 작품의 강조점이 전반부에 있고, 후반부는 전반부의 내용을 끌어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보는 관점에 따른 독법이다. 작품의 전·후반부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는 작품의 진정한 주제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 지점은 필자와 의견이 갈라지는 부분이다. 필자는 〈옥갑야화〉의 주제가 기본적으로 북벌론 비판에 있다고 본다. 곧 후반부에 강조점을 찍는다. 이 점은 여기에서 논증을 피하지만, 다만 북벌론보다 국가체제라는 근원적인 문제까지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강 교수의 견해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관계적 공간’에서 이상사회를 꿈꾸며
사실 〈허생전〉에서 아나키즘의 단초를 보는 시각은 강 교수 이전에도 있었으므로, 〈허생전〉과 연암의 아나키즘의 관계는 새삼스러운 문제제기는 아니다. 20세기 초에 연암의 〈허생전〉을 패러디한 이광수 역시 연암에게서 아나키즘을 읽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가 재창조한 허생이라는 인물이 공산주의적 혁명사상을 농후하게 드러낸다는 이유로 일제가 이를 금서로 지정한 사실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강 교수는 관련 사료의 광범위한 인용과 면밀한 연구를 통해 연암의 아나키즘을 입증하고, 그것이 현재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유의미하게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찾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강 교수는 저서 마지막 부분에서 “(오늘 우리에게) 허생의 섬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자문하면서 ‘허생의 섬’(인간 해방의 공간)은 “찾아가야 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이곳에서 만들어내야 할 관계적 공간”이라고 답한다. 근대 이후 발달한 과학기술로 국가는 인간을 더욱 억압·감시하고 있으므로 ‘허생의 섬’과 같은 유토피아적 세계는 이제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따라서 제한적이나마 아나키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관계적 공간’이라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빈부의 양극화, 지구환경의 파괴, 인간 존엄성의 상실 등 심각한 위기적 현실에서 우리가 자본주의체제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는 절실한 문제의식에서 〈허생전〉의 현재적 의미를 읽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허생이 떠난 섬에서 2,000명의 남녀는 과연 지배 없는 이상사회를 이루고 살았을까? 혹시 얼마 있지 않아 힘이 지배하는 사회, 약육강식의 동물적 세계로 변질되지 않았을까? 중국의 속담에 “하루의 무정부 상태보다는 100일의 폭정이 더 낫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무지배의 이상적 세계를 실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맥없이 주저앉아만 있을 것인가?
도연명은 〈도화원기〉라는 글에서 전쟁이 없고 행복의 조건이 완벽히 구비된 무릉도원을 설정했다. 그러나 무릉도원을 발견한 어부는 그곳을 나오며 다시 찾아갈 수 있도록 표시를 해놓았지만 결국 다시 찾지 못하였고, 은자 유자기라는 인물이 그곳을 찾다가 병들어 죽었다. 도연명이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설정한 것은,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세계는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로 그런 메시지를 이 책의 저자도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