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석 지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그린비, 2004년)
권혁범 지음 《국민으로부터의 탈퇴》(삼인, 2004년)
국민으로부터 탈퇴하는 것은 가능한가
“파병반대는 이해하겠지만, 한국국적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대이라크전 파병반대는 이해하지만, 국적까지 포기한다는 건…. 그럼 어느 나라 국적으로 할 것인가. 이라크 국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 “파병을 반대한다는 그 의지는 높이 사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국적을 포기하면서까지 파병을 반대해야 하는 건가 모르겠다. 파병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까지는 자유의사이겠지만,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한 나라의 국민이 그 나라의 국적을 포기한다는 건 너무 무책임한 주장이 아닌가.”
지금은 정치인들의 ‘깜짝 쇼’ 덕분에 우리 군대의 이라크 파병 사실을 가끔씩 확인할 뿐 일상에서는 파병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일쑤이지만, 2년 전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이 땅에서는 아주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었다. 두 청년이 이라크 파병반대를 표명하면서 한국군이 이라크에 파병된다면 국적을 포기하고 국적 포기자로서 받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겠다고 했는데, 위에서 보듯이 이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두 청년의 ‘국적 포기’ 주장은 이라크 파병이 국민국가의 틀, 나아가 그것을 보장해주는 국가간 체제 속에서 벌어지는 침략행위라는 점을 충격하는 것이었으며, 이라크 파병반대를 ‘국익’이라는 국민국가 틀 속에서의 문제제기로 축소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적 포기’ 주장은 그것의 근본적인 충격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해프닝으로서 아무런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다. ‘국민’의 상상력은 국가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국적 포기가 곧바로 다른 나라의 국적 취득으로 이어지는 현실, 특히 국적 포기가 부르주아 계급의 ‘미국국적 취득=병역 기피’를 곧바로 연상시키는 현실에서 이러한 거부반응은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글로벌화가 자본과 상품, 그리고 고급 노동자의 월경은 쉽게 인정하면서도 하층 노동자에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민족 이산(離散)을 몇차례나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국적’의 변화는 실감할 수 없는, 특수한 사람들에 국한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보듯이 국적 포기는 도피, 무책임, 비애국, 나아가 이적행위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두 청년의 주장은 ‘다국적’이나 ‘이중국적’, 혹은 ‘국적전환’이 아닌 ‘무국적’이었지만, 이들간의 차이는 인지되지 않았다. 그것은 ‘무국적’이라는 것이 실감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의 사상(事象)을 인식할 때는 그에 인접한 범주로 그것을 흡수해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인데, 글로벌화가 기존의 국민국가적 상상체계에 변형을 가한 최대한의 상상력이 ‘다국적’, ‘이중국적’, ‘국적전환’이었고, 그마저 중ㆍ하층의 사람들에게는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범위를 벗어나는 ‘무국적’은 ‘국적전환’이나 ‘다국적’, ‘이중국적’의 상상력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현 세계 체제의 ‘바깥’인 것이다.
‘무국적’을 상상할 수 있는가.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상상력이 빈곤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국민주의적 사고에 너무 얽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항상 ‘무’국적이나 ‘비’국민으로 일컬어지듯이 국민이 ‘아닌’ 것으로만 표상될 뿐 고유의 기표를 가지지 못한다. 기표를 가지지 못하는 존재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어서 그것은 항상 ‘국민’이라는 기표로부터 유추될 뿐이다. 어려운 말이 되어버렸지만, 중요한 것은 ‘국민으로부터 탈퇴’한 후의 상황이 어떠할지 누구도 알 수 없고, 따라서 이것을 현재의 ‘국민국가’를 대체할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 이후나, 근대 이후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국민국가가 억압과 착취의 체제이고, 이것이 해결할 수 없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향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문제해결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 현대 세계의 딜레마인 것이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들은 인식론적ㆍ전략적 ‘고리’를 만들어두고 있다. 이남석의 경우 이 고리는 ‘양심’과 ‘관용’이고, 권혁범의 경우는 ‘시민’, ‘개인’이다. 이 ‘고리’란 것은, 전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그러한 방향성조차 알지 못하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현재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지점에 설치하는 임시 표지판과 같은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임시 표지판인 ‘고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양심’과 ‘관용’
도발적인 표현을 쓰자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문제는 그 주체가 ‘광신적인 사이비 신자’에서 ‘건전하고 양심적인 시민’들로 바뀜으로써 표면화되었다.《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의 앞면을 장식하고 있는 여당 국회의원의 추천사가 새삼 그것을 느끼게 해준다. 병역거부 앞에 붙는 ‘양심에 따른’이라는 수사가 그것을 느끼게 해준다. ‘건전하고 양심적인 시민’들이 병역을 거부하기 전까지 ‘사이비’ 신자들의 ‘양심’은 ‘양심’이 아니라 ‘광신’이었다. 아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문제가 수면에 떠오른 지금도 역시 그러한지도 모른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구획한, 그것도 조선총독부의 분류체계를 그대로 이어온 사이비 종교의 분류는 그러한 배제를 정당화시켰다. 또한 종교학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배제에 공모했으며 언론 등의 매체들은 이러한 담론을 확대재생산했다. ‘건전한 시민’들도 또한 이러한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도 사실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병역거부는 불온한 종교에 의해 그릇된 신념을 가진 결과로 재판되었고, 이들의 판단은 독립적인 주체가 내린 판단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형벌은 병역거부에 대한 교정이 아니라, 특정 종교의 영향력으로부터 개인을 격리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정신의 교정이 주가 되었다. 몇십년 동안 매년 몇백명이나 되는 병역거부자들이 군사법정에서, 민간법정에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해왔지만, 아무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었다. ‘양심/광신’의 분류 속에서 사고하며 그러한 배제에 공모해온 우리들 대부분은 먼저 이 사실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앞에서 ‘건전하고 양심적인 시민’이라고 말했지만, 특정 기독교의 신자를 제외한 병역거부자, 그러니까 이 책에서 순서대로 말하고 있는, 절대자 이외의 종교적 신념에 의한 거부자, 철학적ㆍ사회적 신념에 의한 거부자, 특정 전쟁에 대한 거부자 또한 병역을 거부한다는, 혹은 했다는 사실 때문에 ‘건전하고 양심적인 시민’ 자격을 박탈당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저자에 따르면 국가 체계가 병역거부를 ‘거부’가 아닌 ‘기피’로 해석함으로써 그 정치적 의미를 탈각시키려 하고 있다고 하는데(42쪽), 여기에는 병역거부자를 도덕적으로 무책임하며 불순한 인간으로 낙인찍으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기피’란 ‘게으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을 고의로 회피하는 것’, 29쪽) “군대는 우리의 의식에서 하늘의 공기와 바다의 물처럼 너무나 당연하여 의문의 대상이 되지 못했”(86쪽)기에 이를 거부(기피)한 자들은, 국민으로서의 자격에 미달한 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결함이 있는 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를 벗어난 개인의 독립적인 판단(‘양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 체계와, 국가를 가로질러서 사고하고자 하는 개인 간의 대립과 충돌, 그리고 도덕성의 경쟁이 존재한다.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양심’을 둘러싼 인정투쟁이라 할 수 있다.
‘양심’의 개념과 범주, 다수의 양심과 소수의 양심 등에 관해서는 저자가 상세한 이론적 고찰을 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양심은 “사전적인 의미로 보나 법적인 의미로 보나”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형성단계부터 실천까지 어떤 것으로부터도 제한을 받거나 구속받아서는 안된다.”(157쪽) 개인에게 양심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개인마다 다른 내용을 지니기에 그것은 또한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상대성 때문에 그것이 실천될 때에는 규범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히틀러의 양심’ 같은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양심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159쪽) 여기서 소수자 양심의 인정에 딜레마가 발생한다.
양심이 개인의 내면적인 거울로 남아있을 경우에는 절대적인 자유이지만, 개인의 양심이 사회의 거울이 되어 밖으로 드러나면 상대적인 자유가 된다. 다수가 사회적으로 합의한 가치와 규범 그리고 법이 시민의 양심을 철저하게 검증하고 규제하게 된다. 결국 사회의 다수가 합의한 규범 또는 법으로, 소수의 양심을 철저하게 유린하게 된다.(163쪽)
“이런 점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가장 커다란 적은 바로 ‘양심’”(156쪽)이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저자는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저자는 양심을 개인으로 환원함으로써 병역거부의 존재의미를 부각시켰지만, 또한 그 때문에 병역거부를 억압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조금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양심’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이것이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모든 판단의 유일한 주체로서의 개인이라는 근대적 ‘양심’ 개념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 양심의 어원인 라틴어 ‘conscientia’는 ‘함께(con)’ ‘인식한다(scientia)’는 ‘타인과의 공동지(共同知)’, 그러니까 ‘공동체 내지 타인과의 관계 속의 지(知)’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인데, 고대에는 부족적 공동체와의 공동인식이었다면 중세는 교회와의 공동인식, 근대에는 신과의 단독 대면이라는 내면적 의미로 전환되었고, 그 이후는 저자가 말하는 대로 종교적 의미가 사라지고 근대적 개인으로 환원되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양심’을 보증하는 것은 공동체 혹은 신과의 공동인식이기에, 아니 양심 자체가 그것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좋은 마음[良心]’을 의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심이 완전히 내면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19세기가 되면 사태가 달라진다. 양심은 신학적 맥락을 벗어나 심리학ㆍ철학 등의 근대학문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국민국가와 은밀히 결합한다. 말하자면 19세기 이후 양심을 보증하는 것은 공동체와 신을 대신한 ‘국가’이고 양심을 형성하는 공동인식의 파트너도 ‘국민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형식상으로는 무엇으로부터도 분리된 개인의 ‘양심’이지만, 실질상으로는 ‘(국민국가적) 양심’이라는 개념의 계보학이 필요한 이유는 ‘양심’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 판단으로 환원시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양심 뒤에 가려진 은밀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는 국민국가를 빛 속으로 꺼내 무력화시키고, 그것 이외에도 양심을 보증하는, 그러니까 ‘~과 함께 인식하다’에서 ‘~’에 해당하는 공동체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음을 인식하고 인정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일부러 ‘국민’이라는 말을 피하고 ‘시민’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국가와는 다르게 존재하는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상정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저자에게 있어 국가는 시민사회와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저자가 상정하는 시민사회나 시민이 국가나 국민의 경계를 가로지르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병역거부를 탈국민의 흐름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관용’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에서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관용’은 고무줄처럼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헌법에 대한 해석은 다수의 자의적 해석에 의해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국민국가는 구조적으로 근본주의와 총동원체제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사회적 타자들을 비국민으로 억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왜 저자는 국민국가를 가로지르는 비전론, 반전론의 적극적인 전망 속에 병역거부를 위치짓지 못하는가. 왜 저자는 병역거부가 국민국가의 병역의무보다 더 신성한 ‘인간’의 의무임을 주장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저자의 눈길이 그쪽으로 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효율성 극대화의 전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막 제기되기 시작한 병역거부 문제를 계기로 한발만 더 내딛자는 조심스러움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그가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시표지판인 ‘양심’과 ‘관용’이라는 ‘고리’ 저쪽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국가로 흡수될 수 있다는 역설도 발생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주민’, ‘시민’, ‘개인’
권혁범은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회운동에 개입하려는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하철 문짝 옆에 붙어있는 국가정보원의 홍보물 가운데, 여러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는데 오직 한 사람만 외롭게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사진이 있다.《당대비평》에 실린 ‘붉은 악마’에 대한 분석(〈월드컵 ‘국민축제’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대한민국’〉)을 읽으면서 그가 꼭 그 사진에 나오는 ‘간첩’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국민으로부터의 탈퇴》를 읽으면서 더욱더 그런 느낌은 강해졌는데, ‘촛불시위’에 대한 분석에서는 그러한 ‘독립적 지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잘 드러나 있다. ‘독립적 지성’이란 국민국가를 비롯한 집단주의가 만들어낸 공동지(共同知)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지적 태도를 의미하는데, 저자에게 그것은 “이성의 근원적 성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이성이 갖는 해방의 기능”(197쪽)을 확신하는 데에서 나온다. 저자는 인류적 보편성인 ‘개인 해방’을 최종적인 비판적 정당성으로 삼고, 서구적 보편성인 ‘개인주의’를 중간 기착점, 나의 표현으로 하자면, 임시표지판, 즉 ‘고리’로 삼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한다.
저자의 비판적인 분석은 먼저 ‘국가주의’에 의해 과잉 규정되고 있는 한국사회로 향한다. 저자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민혁명적 가치의 확산 없이 발생하였으며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 없이 발전”한 한국의 “제3세계”적 “국가주의”(20쪽)는 “유교적인 집단?관계 중심 문화의 전근대적 반개인주의 토양”(21쪽)과 결합해서 초월적인 위치를 획득한다. 이러한 “국민국가적 정체성의 전근대성”(42쪽)은 “일본군국주의 파시즘의 식민지적 유형”이라 할 수 있는 “식민지적 근대성”(44쪽)과 결합하여 더욱 강고해진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 분석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국가주의 비판은 당연히 ‘서구적 근대’를 그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한 서구적 근대성은 한편으로는 한국사회가 체화하지 못한, 따라서 당분간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가치체계”(51쪽)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한국사회에 “자생적인 시민사회”나 “사회계약의 주체”(33쪽)를 요구하게 될 터인데,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시민사회의 형성’과 ‘개인주의의 확산’이다. 저자가 시민운동의 국가중심적 사고를 비판하고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것(〈시민운동, 무엇이 필요한가〉)도 이러한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까지가 임시표지판인 ‘서구적 보편성’에서 바라본 것인데, 이것의 비판 대상은 한국사회의 ‘전근대성’과 ‘식민지적 근대성’, 그러니까 한국 국가주의의 ‘과잉성’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번째는 한국사회에서 ‘전근대성’, ‘식민지적 근대성’, ‘근대성’을 따로 떼어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전근대성’이나 ‘식민지적 근대성’은 ‘근대성’ 자체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물리적 결합이라기보다 화학적 결합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서 전근대적 유산이나 식민지 유제는 그 자체가 근대적으로 분절되었기 때문에 그것만을 따로 떼어서 비판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국사’, ‘국문학’, ‘국어’라는 개념은 식민지 유제이지만,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역사학ㆍ문학ㆍ언어학이 성립되면서 국민국가의 역사, 국민국가의 문학, 국민국가의 언어로 편제되는 과정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국가”의 “초월성”(27쪽)은 이미 내재되어 있다.
두번째는 근대적 주체와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서구적 개인은 국민적 주체 이외에 자율적 주체로서 형성되고, 비서구의 경우에는 개인이 국민적 주체로서만 성립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는 그 자체가 ‘주체(subject)’이자 ‘신민(subject)’이고, 국가적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내면화’함으로써만 주체로 형성될 수 있다고 한다면, 국민적 주체 이외에 어떤 주체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지점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과 포스트 구조주의가 갈리는 지점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서구의 경우에도 ‘자율적인 주체(개인)’는 이념형으로서만 존재하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가로부터 벗어난 자율적인 시민사회에 대한 요구도 국민국가적 틀에 의해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 탈국가적=탈근대적인 흐름 속에서 분출되는 것이지, 근대성 속에 내장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에서 근대의 시민사회는 국가에 종속적이었다. ‘개인=시민=국민’이 바로 근대의 주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서구에서의 인종차별이야말로 서구적 개인의 예외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한국사회에서 곡해되고 과소평가되어 온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이야말로 국가 중심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한 방안이 될 것”(35쪽)이라고 말할 때도, 이것이 서구적 개인주의도 아닌, 비서구적 개인주의도 아닌 새로운 탈근대적 개인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한국사회에서 경제적ㆍ정치사회적 권리의 회복”을 위해서는 안이하게 서구적 보편성에 기대어 “서구적 개인주의”(35쪽)를 회복하기보다도 “탈근대의 문화적 주체”(57쪽)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생산과 소비를 문화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환경 간의 진화적 균형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작업은 근대성의 본질적 성격과 맞닿아 있”고 “근대성”의 “완성을 지향하는 세계관이 결국은 국민국가적 정체성에 토대한 국민의 문화를 강화함으로써 다양한 개체들의 다양한 자아실현과 ‘차이’의 공존을 방해하는 획일주의적 경향을 재생산한다”(58쪽)고 보는 저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근대성은 한편으로는 한국사회가 체화하지 못한, 따라서 당분간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가치체계”(51쪽)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지적하듯이 “근대를 아직도 우리가 기필코 도달해야 할 이상, 따라잡아야 할 목표로 보거나 혹은 근대의 완성 다음에 근대의 문제를 얘기해도 늦지 않다는 식의 발상”(60쪽)에 무의식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인류적 보편성(개인 해방)이라는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내가 유독 그의 손가락 끝(서구적 보편성ㆍ개인주의)만 침소봉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진보 남성은 여성주의에게 말 걸고 있는가〉나〈‘차이’에 대해 생각하며〉는 그가 말하는 ‘개인 해방’이, 얼마나 큰 자기성찰을 동반해야 가능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서구적 보편성을 매개로 해서야만 개인 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저자의 인식은, 차이를 차이로서 인정할 때 자기모순에 빠져버리는 서구이성이 행하는 오만한 자기합리화의 덫에 빠지기 쉽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의 명분이 ‘자유의 확산’이었음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은 외부로부터 ‘자유’가 주어질 때가 아니라, 자신의 방식에 의해서 스스로 행할 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혁신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서구의 오만한 시선에 불과하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거쳐야만, 서구적 개인주의를 거쳐야만 개인 해방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도 저자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나 동양을, 중심부와 주변부를 포괄하는 보편성에 대한 탐구 없이 우리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 어떤 소통의 원리를 제시할 수 있을까?”(195쪽) 그러한 보편성은 “고정되거나 본질주의적 시공간에 고착된 종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분화 발전하는”(196쪽) 것이지 “차이들을 흡수하는 단일적 거대이론이 아”(196쪽)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착된 거짓 보편성에 흡수되지 않는 다양한 차이의 논리(생태주의, 페미니즘 등)를 생산함으로써 ‘중심-주변’, ‘서구-비서구’의 이분법을 무화시키고, 또한 그러한 차이를 보편으로 성급하게 고정시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차이를 모두 개인이나 가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국민국가적ㆍ비자본주의적ㆍ비가족적 공동체(소집단, 소비조합, 생산조합, 연구공동체, 동네 모임, 시민사회 등등)의 형성을 통해 서로 겹쳐지고 갈라지는 여러 층위의 차이를 생산함으로써 보편이 고정될 수 없도록 끊임없이 분자단위의 운동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저자의 손가락 끝에서 벗어나 그가 가리키는 ‘개인 해방’에 한발자국 더 다가서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