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를 평택에 총집결시킨다?
윤광웅 국방장관이 2004년 9월과 2005년 2월 두차례에 걸쳐 평택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군기지로 필요한 평택 땅을 뺏는 데 협조해 달라”는 내용의 이 편지 앞머리는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삶의 터전을 옮기셔야 하는 이주민들의 아픔과 그동안 기지 주변 주민들께서 감수했던 소음 등의 불편에 대해서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로 시작된다.
정부와 국회는 용산기지와 미2사단을 비롯한 주한미군기지 대부분을 받는 대가로, 평택에 공장이나 대학을 지을 수 있게 해주고, 이런저런 특혜를 준다며, ‘평택지원특별법’이라는 법도 만들었다.
그러나 국방장관의 ‘위로편지’나 ‘평택특별법’은 전혀 위로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년 남짓 평택 시민들은 국방부, 청와대 등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싸우는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도 역대 정부와 똑같고, 현 17대 국회의원들도 대부분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해왔기 때문이다.
이미 4년 전부터 용산기지나 미2사단의 평택 이전에 관한 언론 보도를 접한 평택 시민들이 불안한 마음에 대책위를 꾸려 국방부나 청와대에 사실 확인을 요청할 때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그러다 한미 두 나라 정부가 미군기지를 평택에 집결시키기로 합의한 사실이 발표된 뒤에는, 대책위의 국방장관 면담 요청을 “평택 여론은 이미 다 수렴했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물론 까닭이 있긴 하다. 평택시장과 국회의원, 시도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관변단체’들이 만든 ‘미군기지이전대책협의회’의 의견을 들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협의회의 지도부는 늘 이렇게 말해왔다. “용산 사령부는 고급 장교부대지, 미군 범죄를 자주 일으키는 부대가 아니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한미 두 나라 정부가 합의한 국책 사업이다. 그래서 용산기지는 찬성한다. 다만, 동두천, 의정부 미2사단은 미군 범죄 때문에 이미지도 나쁘고, 한반도 안보에도 안 좋아 반대한다. 2사단이 내려온다면 용산기지까지 같이 반대하겠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 2사단을 포함한 모든 미군기지가 다 평택으로 이전된다는 데도 결코 반대하지 않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이 이 점을 너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정부 안에도 평택이 ‘제2의 부안’이 되는 게 아니냐며 우려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거의 모든 정보기관들은 “제2의 부안은 어림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법에 따라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미군기지 편입 예상 지역의 토지 매입은커녕, 공청회나 토지조사, 지장물 조사 같은 것도 주민들의 극렬한 반발로 전혀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다. 2월 16일부터 국방부와 한국감정원, 토지공사, 주택공사 직원들이 진행하려는 ‘지장물 조사’를 온몸으로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주민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 하다못해 시장 바닥에 가서 물건을 살래두, 주인한테 ‘이거 팔 거냐? 얼마냐?’ 물어보구 사는 거 아닌감? 근데, 주인한테는 물어보지두 않구, 즤덜끼리 합의하구, 즤덜끼리 법 맹길구, 지랄덜 다 해놓구 나서, 주인한테는 꼴찌루 종이쪼가리 한장 딸랑 보내 갖구, 겨우 한다는 소리가 ‘돈은 줄 테니께 늬덜은 어딜 가서 살든 죽든 알아서들 해라!’ 이러구 자빠졌으니, 이게 정부여? 순 날강도늠덜이지! 법? 법 좋아하네! 아, 우리 땅 팔구 사는 법을, 우리 말은 하나두 안 들어보구, 국회의원늠덜 즤덜끼리 맹긴 게, 그게 법이여? 동네에 조사할 게 있으믄, 이장한테 말씀드리구 떳떳이 들어올 일이지, 도둑늠덜처럼 들루 산으루 뺑뺑 돌아서 숨바꼭질하듯이 몰래 겨들어 오는 게 그게 할 짓이여? 지덜두 주민덜 내쫓는 게 잘못이래는 건 다 아니께 그 모냥이겄지?”
“보상도 필요없다. 이대로만 살게 해달라”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를 비롯해, 미군기지 확장 때문에 토지와 집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주민들의 반대투쟁을 보며, “혹시 보상을 더 받아내려고 저러는 거 아냐?” 하는 삐딱한 눈으로 보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많은 보상을 노리고 투쟁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보상도 필요없다. 이대로만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장,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장 등 ‘공적인 주민대표’들이 반대운동의 중심에 서자 몇 마을에서 일부 반대파가 “우리가 보상도 못 받으면 책임질 거냐?”며 따지는 일이 벌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마을에서 “좋다. 미군기지 편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감증명을 첨부해서 따로 반대조직을 만들어서 싸우자”고 선언하고, 실제 그렇게 추진하자, 두세명을 뺀 주민 전체가 인감증명을 첨부해서 반대운동에 동참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중심인 대추리에서는 “우리 동네에서두 그런 식으루 반대파를 색출해서 왕따시키자”는 일부 주민의 분노가 있었는데, 김지태 이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몇십년을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할 분들을 그렇게 왕따시키면, 어떻게 같이 살겠어요? 짜증나실지 모르지만, 그분들이 스스로 깨닫고 함께 할 때까지 꾸준히 대화하고 설득하는 것으로 하고 넘어갑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쳤다. “이장 말이 백번 맞어! 그냥 넘어가자구!”
2004년 9월 1일은 평택 미군기지 반대투쟁에서 아주 중요한 날이다. 그날은 국방부가 평택대학교에서 ‘평택지원특별법 공청회’라는 것을 편법으로 열려던 날이다. 그날 팽성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평택대 강당으로 몰려가 강력하게 항의한 끝에 공청회를 무산시켜 버렸다. 주민들은 기물을 파괴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았다. 관중석에 앉거나 일어서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집단으로 “땅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루 공청회냐? 공청회 당장 때려치워라!”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평택경찰서장이 연단에 올라가서 주민들을 가리키며 “저기 연행해! 저기두!” 하며 직접 소리질러 지시하였고, 임신부를 포함한 주민 9명이 평택경찰서로 연행됐다. 네시간 남짓 만에 결국 공청회가 무산된 것을 확인한 주민들은 경찰서로 몰려가, “연행 주민 석방하라”며 즉석 시위를 벌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누군가 양초를 잔뜩 사왔고, 경찰서 정문 앞이 촛불바다를 이루었다. 연행 주민들은 그날 밤 모두 풀려났지만, 이렇게 시작된 ‘촛불행사’는 이튿날부터 팽성읍 본정리 농협 앞으로 장소를 옮겨 지금까지 6개월 넘게 매일 저녁 이어지고 있다. 가을걷이가 바쁠 때도, 추석 날도, 크리스마스 날도, 설날도 쉬지 않았다. 주민들이 이렇게 밝힌 ‘촛불’은 지난해 말부터 평택의 시민단체들을 통해 매주 금요일 저녁 안중읍으로, 매주 월요일 저녁 평택역 광장으로 넓어져가고 있다.
“이 땅은 우리 목숨이여”
주민들은 “땅은 우리 목숨”이라고 주장한다. 이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표현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땅이 곧 목숨”임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말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자.
“이 땅이 전엔 다 바다였어. 근데, 일제 때부터 주민덜이 쩨끔씩 막어서 논을 맹긴 거지. 그때 애기 업구 바다 막다가 애를 떠내려보낸 사람두 있어. 자식새끼를 잃어가맨서 맹긴 땅이니께, 증말루 땅이 목숨 아녀? 포크렌 같은 거나 있었나? 연장두 읎어서, 맨손으루 삽질, 가래질, 끙게질까지…끙게두 소가 아니라 사람이 끌었어. 그리키 힘들게 논을 맹길었어두, 농사가 될 턱이 있나? 논바닥이 원체 짜니께, 멫해 동안은 베두 안 자라더라구. 빗물 받어서 가둬 놨다 빼구, 가둬 놨다 빼구 해서, 염분을 쩨끔씩 읎애 가맨서 십년 넘게 고생했지. 그래서 쩨끔씩 소출을 보기 시작해니께, 그동안 뒷짐지구 있던 정부늠덜이 뒤늦게 나타나서 ‘이건 정부 땅이니께, 돈 내구 사라’구 하더라구. 미치구 환장허겄대. 허지만 우쩌겄어. 그리키 맹긴 땅을, 정부한테 10년두 넘게 분할 상환이라는 걸 해서 등기꺼정 냈지. 20년 정도빾이 안될껴. 고생, 고생, 말두 말어. 이 땅은 우덜이 그리키 피눈물로 옥토루 맹긴 겨. 그런데, 일제 때는 일본늠덜이 비행장을 맹긴다구 해서 강제루 쫓겨났지. 해방되니께, 미군덜이 그 일본군 기지를 뺏어서 지덜이 쓰다가 6·25가 터지니께, 기지를 엄청 크게 넓히더라구. 그때 또 쫓겨났지. 대추리는 아예 통째루 뺏겼어. 그러니께, 지금 대추리는 신대추리구 진짜 구대추리는 저기 미군기지 안에 있어. 보상은 무슨 보상? 땡전 한푼 읎었어. 딸랑 텐트 하나에, 양쌀 두어말, 그런 것두 받은 집 있구, 못 받은 집 있구 그랬지. 이쪽으루 쫓겨나서두 바다는 계속 막구, 소금기 계속 빼내구, 그리키 맹긴 옥토여. 지금은 을마나 좋아. 다른 땅버덤 소출두 훨씬 많구. 가물길 하나, 홍수 피해가 있나? 자식새끼두 길러 보믄, 어렸을 땐 맨날 똥오줌 뒤치다꺼리하구, 병원 데리구 댕기구 고생만 하잖어? 그러다 조금씩 커가맨서 재롱두 피구, 시집 장가 보낼 때쯤은, 효도두 하구 그러는 거 아녀? 땅두 자식이나 매한가지여. 자식으루 치믄 이제 겨우 효도할 만큼 큰 거지. 근데, 정부늠덜이 이 땅을 또 강제루 뺏는대는 거 아녀? 미군덜한테 꽁짜루 준다구? 옛날에 뺏긴 땅두 억울하고 분해서 미치겄는데, 어디 분통 터져 살겄어? 보상? 택두 읎는 소리! 죽으믄 죽었지, 이번엔 한평두 안 뺏겨! 이 땅은 우리 목숨이여!”
연대가 시작되다
평택 팽성 주민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하게 투쟁한 것은 아니다. 4년쯤 전, 다른 지역의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은 뒤, 평택의 시민운동단체들이 ‘미군기지 확장반대 평택대책위원회’라는 연대기구를 만들었을 때, 상임대표를 맡은 필자가 연대가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미군기지 편입 ‘추정지’ 마을 이장님들을 자주 찾아다녔다. 그런데 연대가 쉽지 않았다. 이장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농촌에 젊은 사람이 있나? 쌀두 수입한대지? 농사짓기두 점점 힘들지. 이번에 미군기지 넓힌다구 할 때, 값만 적당히 쳐 주믄 그냥 팔아버려야지, 뭐. 싸우긴 무슨 힘 있나? 정부하구 미국하구 같이 추진하는 일인데?”
하지만, 2003년 4월 27일 ‘대추리 주민의 날’ 행사에서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폐교된 지 오래된 대추초등학교 분교 운동장에서 열린 주민잔치에서 김지태 이장은 이렇게 인사했다. “우리 마을이 미군기지에 수용된다는 소식 때문에 잠이 안 옵니다. 이번이 마지막 주민잔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좀 과하다 싶게 차렸습니다. 어르신들 많이 드십시오.” 김 이장은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주민들도 그랬다. 그 행사에 축사를 부탁받은 필자는 “최대한 도와드리고 싶다. 힘내시라!”고 격려했지만 김 이장의 연설에 격려와 감동을 받은 것은 오히려 필자였다.
그날 이후 대추리 주민들은 예전의 주민들이 아니었다. 이틀 뒤인 29일 저녁 6시 평택 시내에서 열린 ‘미군기지 확장반대 촛불시위’에 주민들이 대거 참석한 것이다. 이 집회는 그동안 ‘소수 운동권들만의 집회’였다. 일부 경찰과 공무원들의 방해와 분열 공작도 있었지만, 꼭 그래서라기보다는 당사자인 주민들이 “국가안보나 그놈의 빨갱이 소리가 무서워서”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날은 팽성 주민들이 대거 참석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아주 훌륭한 ‘연대집회’가 되었다. 이 첫 연대집회에서 김지태 이장은 아주 훌륭한 비유를 들어가며, 지나가는 시민들은 물론 비를 맞으며 촛불을 밝히고 있는 ‘운동권’들을 사로잡았다.
“30년생 소나무도 옮겨 심으면 뿌리내리고 살기 힘든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추리 주민들은 몇백년 살아온 터전을 일제 때두 빼앗겼구, 1952년에두 미군기지 확장 때문에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이제 50년, 간신히 뿌리 내리고 살 만해지니까, 우리 주민들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또 나가랍니다. 미군기지를 또 넓힌답니다. 아니, 우리 주민들이, 지들이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그런 노옙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못 나갑니다. 주민들이 좋아하실지 어떨지 모르지만,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어린 대학생들한테까지 손을 벌려서라도, 강력한 연대투쟁을 벌여서 미군기지 확장을 반드시 막아냅시다!”
이 날을 기점으로 평택의 시민운동 진영과 팽성의 주민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 뒤로 대추리 주민들이 팽성읍 전체를 돌아다니며 주민대표들을 설득한 끝에, 이장협의회, 새마을 지도자협의회, 부녀회장협의회 같은 조직들이 대거 참여하는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라는 조직을 꾸리는 데 성공했다.
‘팽성대책위’는 ‘평택대책위’와 연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2005년 2월 22일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약칭 평택범대위) 결성까지 이끌어냈다. 여기에는 민중연대, 통일연대, 참여연대, 환경련, 녹색연합, 평화여성회 등 114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평택대책위’와 ‘팽성대책위’만 외롭게 싸우던 시절은 가고, ‘매향리범대위’나 ‘여중생범대위’만큼 큰 전국 연대투쟁의 시절이 온 것이다. 이 ‘평택범대위’는 3월 5일 평택 대추리에서 ‘제1차 범국민대회’를 연 뒤, 밤에는 평택역 광장에서 대규모 촛불행사를 가질 것이다.
“평택은 지금도 미군기지 천지”
평택에는 이미 대규모 미군기지 두개가 있으며, 사격장과 CPX 훈련장, 탄약고, 통신소 따위도 딸려 있다. 군속까지 포함해 미군 1만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기도 하다. 평택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만든 일본군기지를 미군이 접수한 때부터다. 1952년에는 그 미군기지를 확장도 하고, 그보다 두배나 넓은 미군기지를 평택 북쪽 끝 송탄에 새로 만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로도 15차례나 확장을 했다. 그 바람에 지금은 미군기지가 평택 땅의 거의 5%인 459만평이나 된다.
1960년대 후반에는 쥐꼬리만한 보상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보상도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했다. 미군기지 담장 밑이나 미군 비행장 활주로 양쪽 끝, 남의 땅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2백회 정도씩 뜨고 내리는 비행기 소음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하루 5천톤씩 무단 방류하는 오폐수 냄새를 맡아야 했다. 미군 범죄에 피해를 당해도 찍소리 못했고, 짧게는 몇년, 길게는 몇십년을 고생한 끝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그런 평택에서 미군기지 반대‘투쟁’이 시작된 것은 1990년의 일이다. 그때도 일부 시민들이 ‘용산미군기지 평택이전 결사반대 시민모임’을 만들어, 반대운동을 펼쳤고, 1년 뒤에는 현지 주민들이 ‘미군기지수용 고덕서탄주민대책위’를 만들어 따로 ‘투쟁’을 했다. 중앙정부와 평택군청, 평택경찰서 등의 일부 공무원들이 벌인 온갖 협박과 방해공작을 뚫고 이 두 조직이 ‘연대’를 이루었고, 마침내 ‘용산기지 평택이전 유보’라는 정부 발표를 끌어내며 승리를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8년 가까이 지난 2001년 원주, 하남 등지의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옮기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LPP(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이 만들어졌다. 평택의 시민운동단체들은 ‘미군기지 확장반대 평택대책위’를 만들고 다시 투쟁을 시작했고, 이 투쟁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미군기지 반대운동 과정에서 미군기지 확장 예정지의 논 605평을 시민들이 한평씩 나누어 사서 공동으로 등기를 마친 뒤 ‘평화의 논’이라는 이름까지 붙여놓았고, 이것이 외국의 평화운동가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평화 기행’의 필수 코스가 되기도 했다.
한미 두 나라 정부는 2007년, 늦어도 2008년 말까지 평택에 349만평의 미군기지를 확장하겠다고 한다. 계획이 성공하면 평택 땅의 10% 정도가 미군기지로 될 것이다. 하지만 “평택은 지금도 미군기지 천지다. 더이상은 한평도 안된다”는 주민들과 시민운동단체의 강력한 연대투쟁 때문에 정부는 이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주한미군기지 평택 이전 끝나면 한반도와 동북아 전쟁 불보듯”
평택 사람들의 투쟁을 “지역이기주의 아니냐?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미군기지가 없어지는 건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 그래도 좋은 거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는 것은 다음 세가지 차원에서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첫째, 권력과 재력과 학력과 좋은 직장과 언론까지 다 가진 서울 사람들의 지역이기주의는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의 지역이기주의만 매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강자의 범죄행위이다.
둘째, 서울에서 미군기지가 사라지면, ‘중앙 언론’이라 불리는 ‘사실상의 서울 언론’들이 주한미군 문제를 외면할 것이고, 그러면 국민도 덩달아 외면할 것이고, 결국 현행 법에서만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 속에서도 미군의 영구 주둔이 굳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에, 미군의 영구 주둔을 부추기는 범죄행위이다.
셋째, 주한미군의 평택 총집결은 한반도와 동북아 전쟁 발발 가능성을 한층 고조시키는 범죄 행위이다.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집결시킨 뒤 미국이 하려는 일이, 북한을 선제공격하여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한미군의 활동 반경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동북아 지역을 신속하게 넘나들며, 중국과 대만의 분쟁에 개입하는 등 동북아 전쟁 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군이 서울에 영구 주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군을 현 위치에 둔 상태에서보다는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밖인 평택으로 빼돌린 뒤에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은 너무 뻔한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남과 북은 통일을 못하겠으면 최소한 ‘수교’라도 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전쟁에 의한, 전쟁을 위한 나라’ 미국이 북침을 통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태에서, 남북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군인들이 일으키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원수들이 일으키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도 그렇다. 게다가 미국이 일으키는 거의 모든 전쟁은 미국의 국익에조차 손해가 나는 전쟁이다. 미국이 이라크 침략 때문에 잃은 미국인의 생명에 대한 값은 제쳐두고 순수하게 들어간 돈만 따져봐도 그렇다. 미국이 지금까지 이라크 침략에 쏟아부은 돈이 1천억달러이다. 이 침략이 언제 끝날지 몰라 구체적인 예측을 할 수는 없지만, 올해 8백억달러의 예산이 잡혀 있다. 물론 이 돈은 모두 일반 국민의 세금이다. 하지만, 이라크 침략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일반 국민이 아니다. 무기 판매와 전리품 챙기기, 전후복구사업 같은 것으로 떼돈을 버는 헬리버튼과 벡텔 같은 회사들이다. 체니 현 부통령이 회장으로 있던 헬리버튼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기도 전에 전후복구사업권을 수의계약으로 따낸 회사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다. 그때 미국 기업가들은 적국 독일의 히틀러한테 전쟁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그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부시 현 대통령의 할아버지 부시다.
이런 사실은 미 해군제독 출신 스메들리 버틀러의 양심선언에도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해군 생활의 대부분이 ‘대기업과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의 고위 폭력단원’ 생활이었다고 고백했다. 멕시코 침공은 ‘미국 석유 회사의 이익’, 하이티와 쿠바 침공은 ‘내셔널 시티은행의 이익’, 니카라과 침공은 ‘국제 금융회사인 브라운 브라더스의 이익’, 도미니카 침공은 ‘미국 설탕회사의 이익’, 온두라스 침공은 ‘미국의 과일회사의 이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그 기간 동안 나는 거물급 사기꾼이었다. 나는 명예와 훈장, 칭찬을 받았다. 알 카포네가 우리한테 무언가 배운 것 같은데, 그는 기껏해야 3개 도시를 누볐을 뿐이지만, 우리 해군은 3개 대륙을 누볐다.” 국익이 아니라, 모두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뒷돈을 댄 회사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동원됐다는 것이다.
미국의 무기회사들과 그들의 정치자금을 받아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 민족 전체가 미국이 평택에서 일으키려는 한반도와 동북아 전쟁의 희생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은 평택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평화유랑단의 단원들과 아예 대추리로 이사를 온 문정현 신부와 함께,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www.antigizi.or.kr)와 함께, 제2의 부안투쟁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