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의 산문집《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에는〈후지노(藤野) 선생〉이라는 자전적 에세이가 실려 있다. 루쉰이 센다이(仙臺) 의학전문학교에서 유학할 당시 스승이었던 후지노 선생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자신의 일본유학 시절을 회상하는 글이다.
청일전쟁에 패배한 뒤 국운이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가던 중국의 청년 루쉰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기세등등한 일본의 수도 동경으로 건너왔다. 그 당시의 중국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무언가 ‘힘’이 될 만한 제도나 문물을 배워가려 했던 그에게, 우쭐거리며 오만한 일본은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다, 변발을 둘둘 감은 머리 위에 학생모를 높이 쓴 우스꽝스런 차림으로, 바닥 널빤지가 쿵쿵 울리도록 댄스 연습에 먼지를 날리는 동료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느낀 서글픔과 모멸감으로 루쉰은 동경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동경도 그저 그랬다.”〈후지노 선생〉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루쉰은 ‘센다이’라는 작은 도시의 의학전문학교로 학교를 옮겨 입학한다. 거기서 그는 후지노 선생을 만난다. 그는 해부학 담당이었다. 첫시간, 산더미 같은 해부학 관련 서적들을 쌓아들고 낑낑대며 강의실로 들어온 그를 두고 몇몇 노회한 학생들이 대놓고 비웃기도 한다. 그는 어찌나 순진하고 털털한지 겨울에는 낡은 외투 한장으로 떨며 지내다가 소매치기로 오인당할 정도이다.
그런 후지노 선생이 어느날 루쉰을 불러 강의 노트를 보자고 하면서 관심을 표시한다. 이틀 뒤 되돌려 받은 노트를 보면서 루쉰은 몹시 당황한다. 그가 돌려준 강의 노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붉은 글씨로 첨삭이 되어있었고, 미처 필기하지 못한 부분은 메꾸어져 있었으며, 틀린 문법은 바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루쉰은 이미 의학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일본인 학생들의 야비한 폭력과 한심한 동료 중국인 유학생들의 몽매함이 의학 공부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중국 건설에 시급한 문제는 의학과 같은 신학문이 아님을 직감했던 것 같다.
‘약한 나라 출신의 머리 나쁜 학생일 것임에 틀림없을’ 중국인 루쉰이 낙제하지 않은 것이 의심스럽던 학생회 간부들은 루쉰의 노트를 빌려가 ‘검사’하고 나서는 문제 사전유출 의혹을 제기하며 ‘회개하라’는 내용의 익명의 편지를 보내기까지 한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이었고 전세계인들의 예상을 깨고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자기도취는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루쉰은 얼마 뒤 그 유명한 ‘환등기 사건’과 만나게 된다. 세균학 수업 시간, 어느 교수는 환등기로 세균 사진을 보여주다가 시간이 남으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전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에는 뜻밖에 러시아의 스파이로 체포된 중국인이 참수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었다. “만세!” 일본인 학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을 내질렀고, 루쉰은 침묵하는 중국인의 한사람으로 앉아 있었다. 루쉰은 결국 의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후지노 선생에게 그 뜻을 밝힌다. 선생은 안절부절못하고, 침울해한다. 루쉰이 떠나는 날, 선생은 뒷면에 ‘석별(惜別)’이라고 쓴 자신의 사진 한장을 선물한다.
후지노 선생이 루쉰에게 그토록 각별했던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의 직업적?학문적 성실성 외에도 중국이라는 나라, 혹은 중국인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연민은 루쉰을 통해 중국에 신식 의학을 전해주고픈 소망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았던 후지노 선생의 후의가 세월이 흐른 뒤에 점점 루쉰의 마음에 남는다. 그 모멸스런 기억, 자신의 삶의 행로를 결정적으로 뒤바꾼 일본 유학시절에 그저 한장의 사진으로만 남았던 한 초라한 일본인 스승의 소박한 인간애가 마음에 끝내 남은 것이다. 그는 선생의 사진을 북경의 방 동쪽 벽에 책상과 마주보게 걸어놓는다. 저녁마다 일에 지쳐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질 때면 그는 고개를 들어 스승의 사진을 바라본다. “당장에라도 느린 특유의 어조로 말을 할 듯한 그 모습을 보노라면 나는 양심이 살아나고 용기가 샘솟는다. 그러면 담배를 한대 피우고는 ‘성인군자’라는 사람들이 싫어하고 미워할 글을 다시 쓰게 된다.”
광기 그 자체였던 ‘영혼 없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이 이야기 속에는 참으로 고귀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시대적 조건과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교육의 위대한 힘을 생각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잔잔하고 또한 영원하겠지만 그러나 이제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날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과거의 이야기를 새롭게 변주한다.〈후지노 선생〉에는 루쉰과 후지노 선생의 만남, 그리고 환등기 사건과 같은 극단의 시대적 분위기가 있다면, 한국의 교육노동자인 나에게〈후지노 선생〉은 기묘한 형태로 변주되어 다가왔다.
작년 6월 23일,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날 아침이었다. 참혹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처리하는 ‘한국적 습속’ 때문인지 지금은 까마득한 세월 저편의 일로 느껴지지만, 그날 아침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런 날에도 아이들 앞에 서서 ‘수업’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퍼서 수업을 하는둥 마는둥 하며 겨우 0교시 보충수업을 끝내고 내가 담당한 도서실 문을 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전해에 내가 국어를 가르친 2학년 남자아이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열람실 컴퓨터를 부리나케 켜는 것이었다. 마우스를 쥔 오른손을 재바르게 놀리며, 연방 엔터키를 쳐대며 정신이 없던 그 아이가 불현듯 나에게 물었다. “쌤, 김선일 목짤리는 동영상이 돌고 있다던데, 그 주소 혹시 알아요?”…“몰라, 임마”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뭔가 활활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화가 나거나, 격앙된 감정에서는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 나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더듬거리며, 마치 그 녀석이 대통령 노아무개라도 되는 양, 그 전날까지 참수되지 않을 거라는 기사를 쏟아내던 언론사 기자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네가 지금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운운. 그러고 문득 그 아이의 얼굴에 마주쳤다. 그 무구한 얼굴. 녀석은 아차 싶었는지 부리나케 컴퓨터 전원을 끄더니 가벼운 목례를 하는 듯 하더니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그날 점심시간, 도서실 컴퓨터 앞에 둘러모여 “나라에서 벌써 차단했다 카더라”, “아이다, 아직 돌고 있다 카더라” 하며 웅성대는 여러 무리의 아이들이 나에 의해서 쫓겨나가곤 하였다.
그로부터 한참 지나 문득 그때 일이 생각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동영상 봤느냐고. 많은 아이들은 예의 그 무구한 얼굴로, 가끔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봤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예외없이 덧붙였다. “징그러워서 다 못 보겠던데요…”
나는 그날의 일을 잊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나이 또래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실제로, 평범한 아이들에게 김선일 씨의 참수동영상이란 그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그 많은 ‘엽기’ 동영상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김선일 씨의 죽음의 본질에 대해 전적으로 무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아이들이 그 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의 한편에 그것을 억제할 그 어떤 도덕적 관념 ― 그것은 인간적인 자존과 연관되는 일종의 균형감각일지도 모른다 ― 이 개재되지 못함이 새삼 놀라웠던 것이다. 과연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 나이들이 그 정도도 의식할 수 없는 나이일까, 이것을 인터넷에 깊이 중독된 이른바 ‘비주얼’ 세대의 정서적인 속성으로 치부해버리면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만은 떠나지 않았다.
여하튼, 그날의 그 사건은 오래 전 읽었던〈후지노 선생〉의 한 장면과 겹쳐지면서 그 반복과 변주의 기막힘으로 나를 괴롭게 했지만, 그 기억을 계속 담아 살아가는 것은 나의 정신건강에 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100년이 지난, 그 시대의 극단적인 야만 속에서 루쉰이라는 세계적인 인물과 연관되어 세상에 알려진 그 사건을 지금 현실에 갖다 대놓고 거기서 내가 비감해하는 것은 좀 가당치 않은 비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지 못할 일이 무엇이며,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익숙한’ 느낌으로 나를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교육이 뭔가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그리고 아이들의 내면세계가 심각하게 황폐해져가고 있다는 또렷한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루쉰의〈광인일기〉와 ‘식인’
이야기는 다시 루쉰에게로 돌아와,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교편을 잡기도 하다가 1911년 신해혁명 이후에는 신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틈틈이 금석탁본(金石拓本)을 수집하거나 고서 연구에 심취한다. 그러던 그가 1918년, 처녀작〈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문필가의 생애로 접어들게 된다.〈광인일기〉는 이른바 ‘박해 망상증’을 앓고 있는 한 미치광이가 남긴 일기 속의 두서없고 황당한 자기독백이 나열된 작품이다. 이 미치광이 화자는 자기 형, 가두어진 자신에게 식사를 날라주는 노비, 동네 사람들, 심지어 자신을 진맥하는 의원까지 모두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가 보고 듣는 모든 주변의 일상의 일들은 모두 자신이 곧 잡아먹힐 것이라는 공포감의 알리바이가 된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정양하라”는 의원의 권유는 살을 더 찌워 잡아먹으려는 속셈으로 해석되고, 한밤에 책을 들여다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食’자와 ‘人’자밖에 없다.
이 지리멸렬한 독백이 반복되는 속에서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이 미치광이의 언설 속에 담긴 일말의 진실에 가 닿게 된다. 이 미치광이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서려있는 ‘식인’에 대한 공포를 감지하는 것이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남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모두 의심스런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식사하며 잠을 자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것은 단지 문지방 하나,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 그만인 것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미치광이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거룩한 바보’로 천천히 자리잡는다. 그리하여 이 바보의 독백 속에 서려있는 작가 루쉰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청년기를 지나 마흔 가까운 나이에 시작한 문필 활동의 출발선에서 그는 그야말로 지리멸렬의 끝을 치닫는 중국의 현재와 과거를 통째로 상대하려 한다. 그는 미치광이의 독백 속에 언뜻 언뜻 새어나오는 환유적인 발언 속에 중국 인민들을 향한 그 자신의 사자후를 담아 터뜨린다.
너희는 마음을 고쳐야 한다. 진심으로 마음을 고쳐야 해! 이제 멀지 않아 사람을 먹는 놈들 따위는 이 세상에서 발붙일 수 없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자기자신도 결국 먹혀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리 많이 낳는다 해도 진짜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모두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이제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광인일기〉의 화자는 박해 강박증을 앓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명백히 루쉰 자신이다. 루쉰은 시대적 통찰과 과제를 담은 예언자적 일성(一聲)을 던지면서 작품을 마무리한다.
4천년 이래 항상 사람을 잡아먹어온 곳, 거기서 나도 오랜 세월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4천년 동안 사람을 잡아먹는 이력을 짊어지고 있는 나로서는, 처음에 참다운 인간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똑똑히 깨달았다. 한번도 사람을 잡아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라.
시대의 희망은 바로 ‘아이들’에 있음을 루쉰은 분명히 한다. 그가 이후로부터 꾸준히 대학 강단에 섰던 것도, 여러 편의 평론을 통해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걸고 있음을 집요하게 내비친 것도 결국은 저 환등기 사건으로부터 자각하기 시작한 시대의 모습, 곧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연유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루쉰의 비전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본다.〈광인일기〉의 미치광이의 시선에 가 닿은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것인가. 결국 우리는 익숙한, 그리고 자명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의심스런 눈초리’이며, ‘내가 먹고 싶지만 먹힐 수도 있다’는 공포가 우리의 나날의 끈질긴, 간절한 노동을 지탱한다. 그래서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아직 ‘사람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 그들을 찾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아이들을, 그들을 맡아 키우는 한국 교육의 현실을 앞에 놓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한번도 사람을 잡아먹어보지 않은 아이는 어디에 있는가.”
‘식인’의 교육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사람을 잡아먹게끔’ 맹렬하게 가르쳐 키워 세상에 내놓은 것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인 국수주의자 안호상이 제시한 ‘홍익인간’이라는 교육이념은 지금도 건재하지만, 이것이 수십년 세월 동안 의심받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아무도 그 이념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성인 이후의 삶이란 12년간의 초?중등 교육이 제 몸에 퍼뜨린 독 ― 이기심, 질투심, 열등감 ― 과 싸우기 위해 뒤늦은 사춘기로 접어들거나, 아니면 그 독을 온몸에 더욱 퍼뜨려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 시대의 교육을 통해서는 열일곱의 나이에 인류의 미래가 농업에 있음을 직감하고 농민들을 위한 야학을 열고 계모임과 독서회, 농민 생산자 협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농민들을 위한 교과서《농민독본》을 저술한 윤봉길 의사(1908-1932)와 같은 인물을 영원히 길러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열여덟의 나이에 일제의 법정에서 일본 법률로 일본인에게 재판받는 것이 부당함을 논변한 유관순 열사(1902-1920)와 같은 치열하고도 조숙한 정신 또한 길러낼 수 없을 것이다. 윤봉길, 유관순과 같은 강파른 시대의 영웅적인 인물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교육은 17-18세 무렵이면 사람살이의 이치를 알고 살림살이의 기초를 터득함으로써 자립적인 성인의 삶을 살아가게 했던 저 전통사회의 교육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살이의 이치가 되건, 살림의 기본이 되건 지금 우리 교육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스무살이 아니라 서른살이 넘어도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부모 세대의 영향력에 철저히 기생하는 ‘어른 아이’들만 끝없이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현실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며, 최소한 100년을 더듬어갈 수 있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조선땅을 밟았던 외국인들이 혀를 내둘렀던 한국인들의 유별난 교육열은 기실 교육을 통해 자기 자식을 ‘사람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볼 수 없었다. 그것은 교육의 장에 펼쳐진 지위 경쟁의 앞자리에 올라타, 군림하는 지위에 올라주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삶을 지배해온 논리는 노동하는 삶에 대한 철저한 수탈과 모멸스런 비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망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내면화한 복종적인 신민(臣民), 즉 바보스러운 영혼 없는 인간을 길러냄으로써 영속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하는 국가,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 그리고 자기 자식이 땀 흘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 이 3자가 결탁하여 이 형편없는 교육체제는 성립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지난 50년 세월 동안 한국사회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경제성장이라는 가치로 단일화되어 있었고, 대안적인 삶의 출구는 원천봉쇄되어 있었다. 우리사회 구성원들에게 좋은 삶이란 ‘겨우’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업 얻어서 그럭저럭 사는 것에 불과했고, 이것을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그 너머를 응시할 상상력은 허용되지 않았다. 교육은 ‘공개적 지위 경쟁의 장’으로 이 닫힌 사회가 베풀어준 유일한 출구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학생’들은 이 경쟁의 장에서 다만 극기와 절제의 전사였고, ‘누군가를 잡아먹어야 자기가 사는’ 이 야만적인 논리를 내면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 교육에는 몇가지 특이한 현상들이 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내가 사는 밀양 인근의 어느 고등학교는 한때 기피학교로 여겨지다가, 아이들의 사생활을 완전히 몰수하는 것을 그 학교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함으로써 명문으로 떠올랐다. 대개의 한국 고등학교는 반교육적이면 반교육적일수록 인정받는다. 교육행정관청이 부과한 최소한의 기준도 무시하고 반칙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축제, 동아리 활동, 방과후 자기주도적 예체능 교습 따위를 허용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교육활동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학교는 ‘열심히 하는 학교’로 인정받는다.
서울의 몇몇 사립대학이 부자와 특권층들이 몰려 사는 지역 학생들을 ‘대놓고’ 우대하여 선발해가는 것을 두고서도, 그들이 ‘명문대학’이므로 할 수 있는, 다른 ‘비명문대학’들은 흉내낼 수 없는 특권적 행동으로 인정해 주기도 한다.
내가 사는 밀양도 예외는 아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통용되는 ‘인재관’은 참으로 독특하다. 무엇보다 ‘인재’란 그 지역 출신이지만 거기에 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지역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지역사회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가능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어떤 면에서는 지역사회를 착취할 가능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훌륭한 인재로 여기는 것이다. 가령, 며칠 전 이곳 밀양의 지역신문은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도청 테이프’의 등장인물로서, 권력 핵심부에 ‘떡값’을 제공한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모 재벌의 2인자를 새삼 ‘지역 출신 인재’로 크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경제성장과 민주화―욕망의 시스템
한국인들은 모두 학교교육의 불행한 자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학교교육을 둘러싼 이 모든 관행들은 지금껏 빈곤과 독재라는 ‘한국적 상황’의 산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풍요와 정치적 민주화가 우리사회의 폐쇄성을 누그러뜨리고 다층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면 학교교육의 파행이 누그러뜨려질 것을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지금 한국인들이 향유하는 의사표현의 자유와 민주적 역동성은 놀랄 만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지워진 짐은 더욱 무거워지며, 교육의 장에서 횡행하는 ‘식인’의 논리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경제성장과 민주화, 지난 50년 동안 한국사회가 이루어낸 이 커다란 변화 앞에서도 그러나 우리 교육의 미래를 이토록 암담하게 느끼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나는 내가 직접 몸으로 겪어 아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려 한다. 1980년대에 중?고교시절을 보낸 나는 10여년 뒤 같은 공간에서―나의 근무지는 나의 모교이다―교사로 살아가므로 이것은 비교적 실제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의 부모는 대개 가난했고, 그들 또한 꽉 막힌 사회체제 속에서 고단한 나날을 살아갔을 것이다. 우리들 또한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학교생활은 참으로 힘들었다. 학교 안에서는 구타가 만연했고, 교사 자신이 필시 군대시절 당해보았거나 시켜보았음에 분명한 잔인한 체벌이 공공연했다. 한 교실에 60명씩 밀어넣은 콩나물시루 같은 학급에서 우리들 개별 존재의 개성이나 인격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반교육적이고 속물적인 논리가 우리의 숨통을 옥죄었던 것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학교 이후의 시간은 전적으로 우리들의 것이었다. 좀더 어릴 무렵에는 부모의 심부름을 하지 않을 때라면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공을 차거나, 숨이 차도록 뛰어놀 수 있었다. 학원 수강이란 대도시 학생들의 전유물이었고 내가 살고 있던 그 당시의 밀양은 극소수 부잣집 아이들이나 과외를 받았을 뿐 변변한 학원도 없었다. 물론 0교시 보충수업도 없었고, 야간자율학습과 방학중 보충수업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고등학생이었던 내 친구들 중에는 학교가 끝나면 집안의 일꾼으로 돌아가 경운기를 몰거나 철가방을 들고 자장면 배달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시내로 유학을 나온 시골 출신 친구들은 자취방에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배우기도 했다. 더러, 답답할 때면 자전거를 타고 밤이 깊도록 시내를, 인근 논밭길을 헤매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방안에서 뒹굴기도 했다. 결코 교육적으로 긍정적인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 시절의 경험은 돌이켜보았을 때 학교교육에서 뒤처진 많은 아이들에게도 매우 ‘인간적인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아이들의 방황과 노동에는 무언가 스스로와 정직하게 대면케하는 자기성찰의 힘이 있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친구’와 ‘골방’, 그리고 온전히 스스로에게만 열려 있는 ‘무위(無爲)의 시간’이다. 흔히 교육의 중요한 하위 요소로 인정하는 학습, 노동, 사색은 ‘친구’와 ‘골방’, 그리고 ‘무위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구성하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구성되는 비율이 한 존재의 정신적 외양을 결정한다.
나의 성장기에 학교 바깥에 그나마 열려 있었던 이러한 인간적 성숙의 가능성, ‘친구’와 ‘골방’, 그리고 ‘무위의 시간’은 이제 완전히 박탈당하고 말았다. 경제성장이 낳은 물적 풍요의 상당한 잉여 부분은 이른바 ‘사교육’이라는 시장에 투여되었다. 대여섯살 무렵부터 아이들은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기 시작하여 대학 입학 직전까지 그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학습에서 앞서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두가 추구한 ‘부분적 합리성’은 곧 ‘총체적 비합리성’을 낳았다. 조금더 빨리 이동하기 위해 앞다투어 구입한 자가용이 결국 자동차로 꽉 막힌 도로를 낳은 것처럼, 앞서가기 위해 사교육에 아이를 맡겼는데 모두가 이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결국 아무도 그 목적을 이루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사교육이란 한국 부모들의 커다란 ‘두통거리’로 남았다.
아이들은 어떻게 변한 것인가. 이제 아이들에게 ‘친구’란 학원에서 만나 같이 학원차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존재가 되었다. 아이들이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시간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시간을 거의 장악한 이 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은 하나의 대상물, ‘객체’가 되었고, 말하자면 ‘교육 시스템’의 우리에 갇혀 최적화된 환경이 제공해주는 ‘교육 서비스’를 오물오물 받아먹기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학교에서 독서과제를 내주면 학원강사가 대신 읽고 친절하게 요약된 자료로 안내해 주며, 학교에서 서술형 논제를 미리 내주면 또 학원강사가 인터넷과 서적을 뒤져서 모범답안을 작성하여 제시해준다. 어느 사교육의 공간을 가든, 학원강사든, 과외선생이든, 태권도 사범이든, ‘자격증을 가진 어른’들이 아이들을 안내한다. 이제 아이들이 관여하는 모든 시간과 요소를 세세하게 프로그래밍화하여 체계적으로 구성하지 않으면 교육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일과 관련하여 엄청난 오해와 왜곡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제 교육의 장(場)은 변인들을 조작하여 프로그래밍화한, 이를테면 파블로프가 개를 가두어놓은 실험상자 같은 것이 되었다. 골방에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어설픈 인생상담은 점점 비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교육받은 ‘전문 상담사’가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진행하는 ‘상담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서서히 대체해가고 있다. 체험학습―‘체험’도 ‘학습’하는 것인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전문 지도자가 아이들의 ‘체험’을 안내하고 조직화한다. 그리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전문적인 ‘평생교육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공적 영역이건 사적 영역이건, 수없는 교육기관을 전전하며 끝없이 무언가를 배운다. 그러나, 진정 어떤 ‘만남’과 ‘배움’이 그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땀과 숨결의 나눔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그 많은 무정형?비정형의 시공간에서 ‘선물’처럼 찾아와 한 존재를 정신적으로 두들겨 키웠던 ‘만남’과 ‘배움’의 의미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이제 한국에서 교육은 3차산업, ‘서비스업’의 일종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군부대에서 받곤 하는 이른바 ‘극기체험 훈련’―‘극기체험’을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장면을 볼 때마다 심한 뒤틀림을 느낀다. 군복을 갖춰 입은 해사한 여학생, 남학생들이 고무 보트를 머리에 이고 마치 ‘군인처럼’ 바닷가로 뛰어드는 장면은 과연 얼마나 변태적인 것인가. “잘 할 수 있습니까?” 군인 아저씨는 거만하게 묻는다. 흙탕으로 범벅이 된 안경잡이 여학생은,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열씸히 하겠슴다”를 복창한다. 모든 것을 다 박탈해 놓고, 대체 무엇을 잘 하라는 말인가.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 더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인가.
민주주의의 진전은 교육제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일반 서민 대중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그래서 교육부장관의 교체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입시제도는 계속 바뀌어왔다. 그러나 한국 입시제도 개선의 역사란 하나를 잡기 위해 무언가를 내리치면 다른 곳에서 무엇 하나가 볼록 튀어나오는 두더쥐잡기 게임에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두더쥐잡기 게임은 늘 한 마리의 두더쥐만 볼록 튀어오르지만, 우리 교육의 장에서는 무언가가 계속 쌓여갈 뿐이어서 이 게임이 계속될수록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자꾸만 늘어났다. 봉사체험을 위해 도입된 봉사활동 인증제는 (그 취지와 무관하게도) 아이들을 방학중 관공서 청소꾼으로 내몰았다. 한두번의 지필고사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반교육적이라 하여 일상적인 활동을 평가에 반영하기 위해 수행평가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제 중?고교생들은 (그 취지와 무관하게도) 숙제더미에 파묻혀 밤잠을 설친다. 물론 봉사활동과 수행평가가 교육적으로 활용되는 드문 예가 있긴 하지만, 이 상식적인 행위를 위해 치러야 하는 교사와 학생의 수고는 참으로 비상식적인 것이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지만, 그 어떤 교육적 방안이건 ‘한국적 상황’이라는 특별한 필터를 통과하고 나면 반교육적인 골칫덩이가 되고 만다.
대입제도를 보자. 학력고사라는 단 하루의 시험으로 끝장내는 것이 비교육적이라 하여 대입 선발의 잣대를 다양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교내신, 수능시험에다 대학별 고사(논술?면접고사)까지 도입되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수능시험과 대학별 고사가 강조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수능과 대학별 고사 준비하느라 학교수업을 등한시하고 학교가 ‘여관-숙박업소’처럼 변해갔다. 그래서 2008학년도 대입제도는 고교내신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내신―수능시험―대학별 고사(논술?면접)를 모두 준비하고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고교내신을 절대평가로 매겨왔더니 ‘내신 부풀리기’ 현상이 만연하였고, 대학은 ‘변별력’이 없다고 고교내신을 무시하자 이를 상대평가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생겨난 문제점은 익히 알려진 바다. 단적으로, 시험기간 친구에게 공책을 빌려주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예비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이 지옥 같은 나날을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친구들과의 우정, 나뿐만 아니라 이 많은 친구들도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는 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우정’마저도 원천적으로 파괴하는 극단의 야만 속으로 모든 아이들을 밀어넣고 있는 것이다.
논술?면접고사는 또 어떠한가. 소설책 한권 제대로 읽어볼 여유조차 박탈해 놓고선 아이들에게 인류 보편의 화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상한’ 과제들과 씨름하게 만든다. 자갈밭에 볍시를 뿌려놓고 벼농사를 짓겠다는 꼴이다. 결국, 천정부지로 치솟은 고액의 학원 수강료와 과외비, 학습지를 통한 첨삭 프로그램 등 ‘돈’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이 대학별 고사는 단언컨대 (취지와 무관하게도) 부모의 경제력과 학생의 체력을 측정하는 기제가 되고 말 것이다.
삶의 연륜이 풍부한 성인들이라도 이 고달픈 나날들 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갖고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아이들은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자폐적인 놀이―컴퓨터 게임, 휴대폰, 판타지 소설―에 더욱 강렬하게 밀착하게 된다. 이제 아이들에게 컴퓨터와 휴대폰은 기계가 아니라 신체의 연장, 곧 제2의 육체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내면세계는 심각하게 황폐화되었다. 내가 국어교사로서 아이들에게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지금 아이들이 서정시를 쓰거나 서정시를 향유하는 능력이 눈에 띄게 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년에 한두차례, 아이들이 직접 쓴 시를 받아 평가할 기회가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나는 몹시 참담하다. 아이들이 자연을 묘사하는 것에 완전히 무력하다는 점, 힘들면 힘든 대로 피폐하면 피폐한 대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언어를 거의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마다 확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서 쫓겨나 ‘한국 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으로 유폐되어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가는 이 시대의 아이들. 그들이 서정시를 쓰지 못하고, 서정시의 언어를 ‘닭살스럽게’ 느끼는 것은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국의 교육제도는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외양의 혁신을 더해간다. 이제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반영하는 교육제도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제도 변화가 계속될수록 교육은 더욱 나빠져만 간다. 제도 변화에 작용하는 것은 다수 대중의 힘인데, 어찌하여 교육은 나아지지 않는가. 그것은 ‘아이들을 사람답게 키워내는 것’보다는 ‘내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는 데 유리한 방식’으로 제도 개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교육적 견지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우리 아이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룩한 경제성장이란 물질적 탐욕을 위함이었고, 민주화는 공익이 아닌 사익, 개개인 각자의 이기심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고자 하는 흐름으로 귀결되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가 구축한 것은 결국 ‘욕망의 시스템’이다.
‘진정한 배움’을 위한 저항
따라서 한국에서 교육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땅에서 교육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체제의 한 하위 영역이 아니라 바로 ‘욕망의 시스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이 거대한 욕망의 바다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섬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제도로서의 교육을 신뢰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제도의 개혁이 교육을 교육답게 세워주리라는 믿음이 없다. 이 총체적인 욕망을 어떻게 제도로써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교육개혁을 지향하는 교육노동운동조직, 시민사회단체들은 끝없이 국가를 향해 ‘교육공공성’의 입장에서 대입제도를 개선하고, 대학 서열화를 해소함으로써 학벌사회를 개혁할 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중산층의 요구일 뿐이다. 중산층은 이 교육체제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모두 장악한 상류층과의 지위 경쟁이 좀더 공정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결국 이들에게 교육은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진정으로 교육공공성을 추구한다면, 입시제도가 어떻게 바뀌어가든 학벌사회가 어떻게 되어가든 아무 상관없는 곳에 방치된, 그리고 점점더 늘어가는 빈곤층 아이들, 가족해체를 겪은 아이들을 보듬어주기 위한 고민과 노력은 왜 기울이지 않는가. 지금 처치곤란한 공교육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실업교육에 활력을 불어넣을 방안은 왜 모색하지 않는가. 빈곤, 가족해체, 농업의 죽음, 농촌해체와 같은 한국사회의 심각한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고민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입시제도의 손질에 집중하는 교육공공성이란 결국 중산층들의 계층 방어논리일 뿐이다. 따라서 현재 교육운동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이 모든 노력들은 다만 이 체제를 부분적으로 손질함으로써 진정한 ‘배움’과는 하등 상관없는, ‘인적자원’의 등급을 감별하기 위해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이 반교육적 체제, 욕망의 시스템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익숙한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가.” 너무나 자명해서일까, 이제 이 땅에서는 교육의 본질에 대해 묻지 않는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온전한 ‘사람의 정신’이란 어떤 것일까.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운명, 그러나 이 땅에 생명붙이로 빚어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보다 힘없고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 아름다움의 신비에 대한 찬탄. 이러한 정신은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길러지는가. 나는 인간 정신이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그리고 ‘힘없음’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진정한 교육은 바로 이 조건에서만 이루어지며, 이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정신이야말로 교육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지금 이 땅에서 ‘가난’과 ‘결핍’ 그리고 ‘힘없음’을 긍정하는, 그리하여 ‘진정한 배움’을 추구하는 교육기관은 존재하는가? 안타깝지만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다만, 깜빡거리는 불빛처럼 야학과 공부방, 지역교육센터들만이 드문드문 살아남았다. 이제 우리 교육은 새삼스럽게도 이 야학과 공부방, 그리고 지역사회교육센터를 이끌고 있는 헌신적인 활동가들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교육의 본질에 대하여, 그리고 ‘진정한 배움’에 대하여….
‘사람을 만드는 일’과 관련하여 이 시대는 유사 이래 최악의 조건에 놓여 있다. 이러한 때에 나에게 참다운 교육이란 이 형편없는 체제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1980년대 후반, 그 결성 당시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전교조가 지금 9만이 넘는 조합원을 자랑하는 한국 최대의 단일 노조가 되었지만, 실상 현실 속에서는 무력한 것은 이 욕망의 시스템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한 영역으로 남아 제도적인 손질에 치중하는 세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후반, 공교육 체제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이른바 대안교육운동 또한 지금은 태동 당시의 그 변혁적 열기가 사그라들었고, 서서히 공교육의 보족물로만 자리매김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 교육은 스스로를 자기갱신할 수 있는 균형추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마치 브레이크 풀린 자동차처럼 갈짓자의 질주만을 계속하고 있다.
전면적인 불복종과 저항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아이들이 이 교육체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배움이란 부정과 저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이 ‘미친 놀음’을 부정하고, 저항으로 분출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마지 않는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가르침 또한 불복종과 저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 교육은 그 시점을 유예할 수 있는 상황의 임계점을 이미 훌쩍 넘어버렸다. 올해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 한달여 사이에만 열한명의 아이가 성적을 비관하여, 이 세상을 저주하면서 자살했다.
바라건대, 이 꿈같은 나날들 속에서 우리들이 기적처럼 깨달아 이 욕망의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칠 수 있기를, 그 작은 몸부림들이 모이고 모여 전면적인 불복종과 저항의 운동이 불지펴질 수 있기를.
바라건대, 부모와 교사가 제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똑바로 쳐다보고, 그 순간 다가오는 죄의식과 책임감으로 각성할 수 있기를. 만약, 진정한 배움의 자리를 꿈꾸는 자라면, 점점 늘어만가는 가난한 아이들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누구도 보듬어주려 하지 않았던 그들을 품어 안아 주기를….
마지막으로 나의 후배인 한 교사가 문학수업 시간에 발굴한 어느 여고생의 시를 옮겨적는다. 이 시는 이 영혼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아이들의 내면의 그림이다. 이 시를 읽으며 어른된 우리들 마음 속에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생겨나기를 바랄 뿐이다.
인생은 하루뿐
나는 오늘도 내 자신의 한계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절제하고 견디려 노력한다
그러다 한순간 방심하면 모든 노력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나는 오늘도 시간에 쫓기며 피로한 몸을
등지고 하얀 종이에 글씨와 숫자를 채워 나간다
지금은 힘들지라도 미래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시간을 쪼개어 공부한다
나는 오늘도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의자에
앉아 칠판과 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다 눈길을 돌리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펜을 놀리는 아이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더욱더 불안해진다
18세 꽃다운 나이라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똑같은 나날을 반복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경쟁하며 살아간다
나는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것을
다 포기한다
나는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과목과
똑같은 일과로 하루를 마친다
아직까지 나의 인생은 단 하루뿐이었다
매일 똑같은 나날뿐이었으니까
나는 아마 졸업하기 전까지
나에겐 단 하루뿐이다
매일 똑같은 나날뿐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