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자살이 아닌 사랑과 평화의 소신공양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남베트남의 디엠 독재정권이 한창 극성을 부리던 1963년의 일입니다. 당시 월남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불교도였는데, 디엠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디엠은 불교의 스님들이 반정부적이라 해서 강제로 절을 폐쇄시키고 스님들을 해산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꽝둑(Thich Quang Duc) 스님을 필두로 36명의 다른 스님과 1명의 여성 재가신자가 사이공의 한 거리에서 분신을 감행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꽝둑 스님이 가부좌를 튼 채 참선하면서 소신공양(燒身供養)하는 사진이 통신사와 텔레비전을 타고 전세계에 보도되자 특히 미국과 서양인들은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미국에는 반전의 물결이 거세게 타올랐고 미국 케네디 정부는 얼마 후 월남 군부를 사주해 쿠데타로 디엠을 실각시켜버리고 아예 죽여 버립니다.
이때 디엠 정권에 저항하는 불교운동의 젊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틱낫한 스님입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꽝둑 스님이 진리의 불빛을 보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몸으로 쓴 법문을 남긴 지 7년 뒤인 1970년 11월. 극단의 거대한 반공 정신병동 사회였던 한반도의 남쪽에서 기독교 신자인 어느 젊은 노동자가 꽝둑 스님과는 다른 형태로 소신공양을 감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스물세살의 전태일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사회를 엄청난 충격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한국의 노동운동은 긴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노동운동의 지평을 중심으로 재정립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전태일의 행동에 대해 분신, 분신자살, 산화, 불꽃 등등의 용어를 씁니다. 그리고 전태일 정신은 목숨을 건 단호한 투쟁의 정신이며 완전한 거부, 완전한 부정의 사상, 근본적인 개혁과 행동의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태일의 삶과 그가 남긴 일기와 유서, 결단의 글을 다시 되새겨보면 그의 진정한 뜻은 이런 말을 훨씬 뛰어넘는, 이 모든 투쟁과 거부와 부정과 개혁을 포용하면서도 더 넓고 깊은 긍정의 그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자살을 한 것이 아니며, 단순한 저항 행위만을 한 것도 아닙니다.
전태일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겼던 글들은 그 어느 성자의 가르침과도 같은 깊은 감동의 울림을 줍니다. 그것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도 다니다 말았고 나이들어 다닌 청옥고등공민학교 학력 또한 1년밖에 되지 않는, 스물세살의 노동자가 썼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속깊은 고뇌의 결과물이자 오도송(悟道頌)입니다. 나뭇꾼 출신에 문맹이었던 육조 혜능(惠能)이 방아 찧고 장작 패면서 수행했듯이, 예수가 목수 일을 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찾았듯이, 전태일은 길거리에서 평화시장에서 그리고 삼각산의 공사판에서, 즉 삶의 밑바닥에서 노동하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전태일의 글은 우리 시대의 절창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을 뜨겁게 감싸안으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설파하는 시이자 잠언이자 말씀이자 그리고 한 소식 전하는 법문이자 화두이자 선시(禪詩)입니다. 맞춤법도 틀린 그대로 몇 구절만 다시 음미해봅시다.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뇌성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꺽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러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아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러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체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예(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년, 151-152쪽.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앞의 책, 172-173쪽.
그는 삶의 절정의 순간에 모든 사람들의 삶을 되살리기 위해 예수처럼 자신의 몸을 바쳤습니다. 생명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인간임을 선포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도 사람이라는 사실은 잠들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뇌성번개처럼 다시 일깨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세상과 부딪치게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사랑과 평화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을 북처럼 두들겼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그 본질을 깊이 살펴보면 볼수록 단순한 저항의 죽음이 아니라 속깊은 사랑과 평화, 양심과 사회정의를 위한 소신공양이었습니다.
시들어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살리는 것은 곧 사랑입니다. 자신은 굶으면서도 풀빵을 사서 굶주리고 있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모범업체를 설립해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고 노동지옥이 아니라 노동천국의 생산공동체를 만드는 꿈을 꾸는 것은 사랑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는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전태일은 바로 이런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공격하기보다 자신을 죽임으로써 현실의 참 모습을 드러내 비추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때려잡자 김일성!” 식의 부정의 구호가 아니라 “근로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긍정의 선언과 외침은 평화의 인간선언입니다. 전태일은 바로 이러한 평화의 정신으로 충만한, 결코 평화롭지 않은 평화시장의 노동자였습니다.
전태일은 단순한 투사가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노동자였습니다. 전태일은 단순한 노동해방의 불꽃만을 태운 게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불꽃을 피운 깨달은 이, 붓다였습니다. 전태일은 단순히 개인의 마음수련과 구원만을 추구한 구도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개혁하고자 한 사회적 예수였습니다.
전태일 정신은 무엇인가
1. 인간선언의 ‘투쟁’
전태일 정신은 맨 먼저, 그리고 거의 완벽하게 전태일의 삶을 복원시키고 그 정신을 간추려놓은 조영래를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전태일의 벼락 같은 사자후 이후에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소선을 비롯한 그 가족이 그러했고, 평화시장의 삼동친목회 벗들이 그러했고,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러했고, 1970-1980년대의 노동운동,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이후의 노동운동에 앞장선 숱한 노동자들, 민주화운동의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학생과 지식인, 종교인, 농민, 도시빈민들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조영래는 전태일이 그렇게도 소망했던 ‘대학생 친구’로서의 의무감과 부채의식을 뛰어넘어 전태일의 삶을 새롭게 조망하고 전태일 정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전태일 정신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이자 해석자였습니다.
조영래는 전태일 사상을 크게 네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전태일 사상은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둘째, 그것도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셋째, 전태일 사상은 완전한 거부, 완전한 부정의 사상이다.
넷째, 전태일 사상은 근본적인 개혁의 사상, 행동의 사상이다.
인간선언.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죽었다.
그는 말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부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한 것이라고.
그는 고발하였다. 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인간이면서도, 짐승이 아닌 인간이면서도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이 있다고. 이들은 “모든 생활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다”고.
그리하여 그는 맹세하였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그는 싸웠고 죽어갔다.
―조영래《전태일평전》돌베개, 2001년, 19-20쪽.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그는 바랐다.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횡포 아래 탐욕과 이해관계로 얽혀진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덩어리―인간을 물질화하는 ‘부한 환경’―‘생존경쟁이라는 이름의 없어도 될 악마’의 야만적인 질서, 그것이 분해되기를 그는 바랐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그 잔혹한 채찍으로부터 구출되기를 그는 너무나도 절절하게 바랐다.
―앞의 책, 281쪽.
조영래의 이같은 정리와 개념화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조영래와 마찬가지로 전태일 정신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해석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장기표 또한 조영래와 거의 비슷하게 전태일 정신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
첫째, 인간선언 곧 인간의 해방된 삶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인간해방사상이 전태일 사상의 핵심적 내용이다.
둘째, 인간이 해방되려면 사회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회개혁사상이다.
셋째,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같은 일을 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이를 실천하는 실천사상이다.
넷째, 민중주체사상이다.
다섯째, 전태일사상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사랑’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르고 개신교 내에서도 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교단들이 저마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조금씩 다르게 말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상좌부와 대중부 그리고 20부파, 소승과 대승이 다릅니다. 심지어 극단의 경우에는 예수의 가르침과 붓다의 가르침과는 백팔십도 다른 주장과 행위를 예수와 붓다의 이름으로 거침없이 저지르는 일도 역사에는 비일비재합니다. 십자군전쟁이 그러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비롯 날마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으면서도 날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미국의 부시가 그렇습니다. 모든 종교는 세속화되고 조직화되는 그 순간부터 종교의 근본정신을 배반하기 시작한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전태일의 삶과 그 사상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당연합니다. 사실 예수나 붓다와 방불하게 전태일의 삶과 정신 또한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했습니다. 진리란, 그리고 진리를 향한 구도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런 단순함과 소박함이 시대와 사람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지난 시절 암울한 무단의 군사독재체제 아래에서 노동자들이 무권리의 인간 이하 삶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조건의 투쟁밖에 없었습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태일은 이런 노동자들의 인간해방투쟁을 선도하는 등불이자 신화였습니다.
때문에 1970년 이후 20세기 후반기 내내 30년 동안 ‘투쟁’이란 말이 언제나 ‘전태일’이라는 보통명사 바로 뒤에 이어졌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투쟁이란 말이 다른 모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용어 가운데 최전선의 말로 언제나 제일 앞에 서 있었던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해마다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면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여 가열차게 투쟁하자라는 구호를 맨 먼저 외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30년 동안 전태일 정신의 핵심은 인간선언의 ‘투쟁’이었습니다.
2. 사랑과 평화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세상이 변함에 따라 각 시대의 과제와 의제 또한 전혀 다르게 변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사고의 변화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제 전태일 정신의 핵심은 달리 해석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군사독재체제의 시기가 아닙니다. 지금은 지난 시절 놀라운 압축 경제성장과 마찬가지로 경이로운 압축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아닙니다. 아이엠에프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와 의제는 분명히 변했습니다. 성장과 발전과 진보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는 이제 근본에서부터 한계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투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전제가 되는 근본정신을 이제 우리는 다시 성찰해야만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서 전태일 정신은 사랑입니다. 전태일의 ‘투쟁’ 이전에 전태일의 ‘사랑’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 ‘나의 나인 너’에 대해 나도 어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전태일이 실천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픔을 함께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전태일은 극심한 가난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한끼 밥을 해결하기 위해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구걸 등등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가출해서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굶주림을 겪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할 당시에도 그는 이제 겨우 굶주림은 면하게 된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삶의 밑바닥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전태일이었지만 그러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루 열서너시간씩 일하는 열두서너살 어린 시다들, 타이밍이나 주사를 맞으면서 전혀 잠도 못 자고 꼬박 3일씩 철야작업을 강요당하는 여성노동자들, 일하다가 울컥 미싱 앞에 각혈을 하는 어느 여공을 보면서, 그렇게 일한 하루의 대가가 고작 커피 한잔값도 안되는 현실을 보면서, 전태일은 다름아닌 인간 지옥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전태일은 점심을 굶는 어린 시다들에게 1원짜리 풀빵을 사주기 위해 자신의 버스비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 6가에서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통행금지를 어기면서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는 단지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미싱사에서 임금이 훨씬 적은 재단보조 일을 시작했습니다.
재단사가 되어서도 전태일은 미싱사나 시다들이 아픔을 호소하면 약국이나 병원에 데려가고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고통을 도저히 인간으로서 외면할 수가 없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몸을 던져 그들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전태일은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자신이 청소를 대신해준 것이 빌미가 되어 업주로부터 해고되고 맙니다. 기업주의 눈에는 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70만원짜리 미싱 한대보다도 못한 돈벌이 부품에 지나지 않음을, 기업주의 주판알 앞에서는 그 정도로 최소한의 온정과 베풂도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전태일은 뼈저리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0년 전태일은 모범업체 설립계획서를 작성합니다. 그는 그 이전부터 근로기준법을 지키면서도 충분히 공장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고는 자신이 직접 평화시장에서 제품업체를 만들 꿈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들 중에도 나의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가진 것 중에는 사회에 내어놓을 것이라고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즉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활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에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이 사업을 꼭 이루고야 말 결심 아래 행하는 두번째 방법이다.
―전태일《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년, 156쪽.
전태일은 자신의 한쪽 눈을 팔아 그 돈으로 근로기준법을 지키면서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는 그런 모범업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범업체를 본받는 수많은 업체가 생겨나기를 꿈꾸었습니다. 매일매일 전쟁터인 평화시장을 그야말로 평화로운 삶의 터전으로 만들고자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전태일은 이런 자신을 던지는 사랑과 평화의 정신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전태일은 이웃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고 도대체 왜 현실이 이러해야 하는지 사회의 잘못된 구조와 병리에 대해 나름대로 천착해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3. 성찰과 각성
전태일은 결코 자신을 무의미한 일상의 톱니바퀴 부속품으로 놔두지 않았습니다. “육신은 일하면서도” 누가 일하는지도 모르는 소외된 노동을 하면서도 “나는 인생의 명학(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그리고 이 세상을 늘 성찰했습니다. 그리고 늘 공부와 자기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태극(泰極)이라고 일기에 적어놓을 만큼 자신의 삶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극진히 열성을 다해 살고자 했고 또 실제 그렇게 살았습니다.
전태일은 지독한 가난과 서러움 속에서도, 극도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일기를 쓰고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니고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고 일이나 하라고 강요하자 오직 고학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가출까지 하였습니다.
전태일은 꼭 필요한 바지와 곤로까지 팔아 중고등 통신강의록을 살 만큼 배움에 굶주려 있었지만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삶과 이 사회를 알고자 했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생각했고, “생존경쟁이라는 없어도 될 악마”가 왜 “이 어린 동심에게 너무나 가혹한 매질”을 해대는 것인지, 이 사회가 도대체 왜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고자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전태일은 그 어떤 사회과학 이론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이 사회가 부조리하고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한 개인이 지극히 성실히 일하고 잘못이 없는데도 인간 이하의 한계 생활 속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속한 사회가 무엇인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중대한 징표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사회구성원들의 양심과 정의감의 발현을 요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과 정의감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과 가족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만으로 평화와 정의의 사회가 되지는 않습니다. 무리생활을 선택한 호모사피엔스에게는 서로 다른 문화마다 서로 다른 사회정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여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행위가 나쁜 일이라는 기본 전제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 전제는, 양심과 사회정의에 대한 근본감정만큼은 사회를 유지시키는 데 꼭 필요한 본능으로서 어느 사회에서든지 구성원들에게 필수덕목으로서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류학 보고서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 현실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양심대로, 정의감을 꺾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태일은 이런 사람들의 근본마음인 양심과 정의감을 조금도 꺾지 않고 살고자 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강렬하고도 새롭게 일깨웠습니다.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양심과 사회정의에 전혀 어긋남을 일깨웠습니다. 나아가 경제성장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게끔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날의 일상과 현실의 무게에 파묻혀 잠들어 있던 일반 사람들의 양심과 정의감을 새롭게 깨워 일어나게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과 어린 여성노동자, 그리고 친우들, 나아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하나의 생명체임을 역설합니다. 전태일은 잠들어 있는 소중한 ‘나’를 흔들어 깨워 이 지상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즐기고 누려야 한다고, 다른 소중한 ‘나’와 더불어 함께 강렬하게 살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 전체의 일부인 나 등등의 표현은 바로 이런 연결과 소통을 깨달은 그야말로 전태일의 용어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각혈을 자신의 각혈로 느끼고 진심으로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개인 차원을 넘어선, 확대된 개인의 성찰과 각성은 그만큼 치열한 단순함과 뜨거운 순수함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다른 사람들의 자아를 살아나게 했던 것입니다.
4. 실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무리 고매한 사상이나 의지, 계획도 실천이 되지 않는다면 헛된 몽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태일 또한 수많은 생각을 하고 희망을 계획하고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은 늘 어떻게 이같은 뜻을 펼칠 것인지,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전태일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전태일은 옳다고 생각한 바를 어떠한 계산도 없이 순수하게 그대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개인의 출세를 포기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예와도 같은 잘못된 억압과 착취, 사회 비리와 부정의를 고치고자 했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개인 차원의 동정과 시혜를 벗어나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전태일은 자신과 같은 재단사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발벗고 나서 친목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함께 공부하면서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실태를 조사합니다. ‘바보회’ 활동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해고를 당하면서부터 전태일은 아예 노동운동을 표방하고 ‘삼동친목회’를 조직하는 한편 이제는 공개리에 서울시청과 노동청, 신문사, 방송국 등에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실태를 진정합니다. 이로써 처음으로 신문을 통해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실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전태일은 늘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평화시장 여성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지옥 같은 비인간의 생활 참상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누구나 분노하고 누구나 개선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무법천지의 평화시장 현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말도 안되는 현실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전태일은 진정을 해도 소용이 없으면 시위를 조직해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고, 노동청이나 경찰, 사업주들의 높은 벽을 만나면 그 벽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의 철벽이 너무나도 높고 두껍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현실을 과감하게 뛰어넘어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조직하고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현재를 초월해 미래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실천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전태일의 고난 자체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목표는 아닙니다. 붓다는 무수한 고행을 하던 어느날 그같은 육체의 학대와 고행이 삶의 진리를 깨닫는 길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중도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신문팔이 껌팔이를 거쳐 평화시장의 미싱사와 재단사로서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예노동 생활을 했던 전태일의 삶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태일을 따라 현실의 이 어처구니없는 비리와 모순에 항거해서 분신을 감행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전태일을 따른다면 우리는 먼저 전태일의 사랑을 우리 스스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전태일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1970년 전태일의 통절한 인간선언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노동조합은 조합원 수만 하더라도 160만이 넘는 거대한 대군으로 성장했습니다. 조합비만 한해 천억 단위이고 전임자 수도 만여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한국 노동운동은 위기를 넘어 해체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기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한국 노동운동은 어느새 성장과 진보의 패러다임에 중독돼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하지 못하는 축소 지향의 보수주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말로는 진보를 내세우면서도 진보와 어울리지 않는 각종 비리가 연이어 터져나오고 대의제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비만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00년 12월부터 시작된 한국통신 계약직 안내원들의 투쟁에 대해 한국통신 정규직 노조는 철저히 외면해버렸습니다. 2003년 10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 씨가 분신하는 사건에 이어 2004년 2월에는 현대중공업의 하청 노동자 박일수 씨가 또 분신을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최남선, 김춘봉, 김태환, 류기혁, 김동윤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줄을 이어 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에 대한 정규직 노동조합의 대응은 같은 동료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의 체온을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차가운 적대감까지 표시할 정도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해마다 전태일 정신 계승하여 무엇무엇을 하자라는 말 대신에 진실로 한국의 노동운동이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면 전태일처럼 비정규직 노동자, 연소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투쟁의 최우선에 놓는다고, 비정규직 문제가 곧 정규직 문제라고,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한다고 천명하고 구호만 외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어렵더라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베푸는 사랑이 전태일 정신입니다.
왜 사회개혁을 위한 조직들이 넘쳐나는데 본질적인 변화의 기운은 조직되지 않는가. 이토록 많은 환경운동 조직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왜 여전히 개발과 파괴의 광란에 대한 경종은 몇몇 종교인들의 극한의 자기희생만으로 메아리쳐야 하는가. 방방곡곡 모든 학교에 양심적인 교사들의 조직이 활동하고 있건만, 왜 우리의 아이들은 그 조직이 건설되던 15년 전보다 더욱더 커다란 육체적 정신적 학대 속에서 생기를 잃어가는가. 우리 오른편의 전태일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이 느낄 연민과 사랑’에 있다고, 미디어의 귀를 빌리지 말고, 시스템에 의탁하기 이전에,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연민과 사랑의 기운에 집중하라고, 당신 한사람으로도 이 세상을 넉넉히 떠받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전태일이 다시 이 땅에 살아온다면, 아니 다르게 표현하여, 우리 오른편의 전태일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전태일은 죽어가는 ‘농업’의 문제를 고민하며 스스로 똥짐을 지는 농부가 되거나, 자신이 처했던 것과 너무나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시민권을 유린당하는 장애인들의 벗이 되었을 것이다.
―이계삼〈다시 생각하는 전태일〉,《녹색평론》2004년 9-10월호.
그렇습니다. 문제는 단순합니다. 결국 전태일처럼 당신 자신이 느끼는 연민과 사랑의 정신이 문제입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정신을 거론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심각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일부 언론이나 자본가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일부 대기업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그들의 임금은 비정규직과 비교해서 그렇지, 노동시간을 고려하면 전혀 고임금도 아닙니다. 문제는 임금수준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의 정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훨씬더 어려운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사랑의 정신이 없는 노동운동은 껍데기의 조직이기주의만 남는 썩어가는 노동운동일 뿐입니다. 산별노조의 건설을 외치면서 지금 당장 왜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함께하지 않는지, 비정규직의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을 왜 우선시하지 않는지 심각하게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전혀 전태일을 따르는 사랑의 노동운동이 아닙니다. 진보와 성장의 결과가 결국은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성찰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전혀 사랑의 노동운동이 아닙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무기를 만들고, 건강과 환경을 말하면서 화학물질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핵의 위험성과 기후변화를 걱정하면서 에너지를 마구 과소비하는 노동과 삶의 방식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전혀 사랑과 평화의 노동운동이 아닙니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생명을 비롯한 지상의 생태계를 갉아먹고 있는 자살노동이라는 사실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전혀 사랑과 평화의 노동운동이 아닙니다.
비정규직과 함께하지 않으면 결국은 공멸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러면 단호한 결단과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와 함께 ‘또다른 나’도 살 수 있는 상생의 진전과 변화가 있다는 것을 전태일은 웅변으로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경제문제 계산기’가 되어 양심과 사회정의에는 질끈 눈을 감고 오로지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해 월급봉투의 크기만을 헤아리는 것은 노예노동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러면 단호히 이런 삶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태일 정신의 계승입니다.
사랑이 없는 투쟁은 공허합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투쟁은 강퍅하기만 합니다. 양심과 사회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투쟁은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런 투쟁은 아무리 전략전술을 따지고 동원인원수를 내세워 위력을 과시해도 결국에는 패배하고야 마는 하지하(下之下)의 투쟁입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오늘까지도 이런 구태의연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먼저 우리는 전태일 정신을 협소한 노동자, 또는 노동운동의 울타리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전태일의 노동운동을 협소한 임금인상투쟁의 울타리에서 해방시켜 사랑과 우애가 넘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창조의 운동으로 복원시켜야 합니다.
모든 노동자는 노동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사람입니다. 문명의 발생 이전이나 이후나 사람은 일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자연 속에서 풍부한 삶을 살고 누리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더구나 오늘날 인간의 노동력이 완전히 기계부품으로 전락해버린 자본주의의 노예노동은 노동자의 운명이 전혀 아닙니다. 때문에 전태일은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절규를 토해냈던 것이며 이제 우리는 노동자는 노동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선언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노동운동의 구성원들이 해결해야 할 무수한 과제가 있으며, 사실 이제는 이런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의 개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식량문제, 에너지문제, 부동산 투기의 해결과 같은 주거문제의 해결, 교육문제, 의료문제, 교통문제 등등, 임금인상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사회구조의 개혁이야말로 노동운동의 일차 과제라는 당연한 사실이 아이엠에프 이후에는 더욱 뚜렷해졌기 때문입니다.
전태일은 오늘 우리에게 ‘청년의 노동운동’이 되라고 말합니다. 노동운동은 겸손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심각한 자기반성과 통절한 인간선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태일이 사랑과 양심과 사회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과감히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갔듯 오늘의 노동운동 또한 더 낮은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아예 희미해져버린 한국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 또한 다시 자신을 돌아볼 성찰의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극소수가 모여 낡은 정치구호를 외치거나, 토익점수를 높이고 취업준비와 고시준비에 매달리거나, 과연 그것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고 풍부하게 하는 것인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사랑과 평화의 삶인지, 무엇이 노예의 삶이고 무엇이 깨어있는 삶인지, 도전과 창의가 사라진 회색의 대학에서 과감히 녹색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나날입니다. 갈수록 빈부격차는 양극화되고 있고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에 몇 사람인지 모릅니다. 노동자와 자연을 착취해야만 하는 경제성장과 발전 패러다임도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습니다. 화석에너지는 고갈되어 가고 기후변화와 함께 악몽의 에너지전쟁, 식량전쟁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1970년으로부터 벌써 35년이 지났건만 오히려 그때보다 더 우리사회는 무감각하고 살벌한 비인간의 사회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역사는 바로 오늘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과제가 무엇이며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가늠하는 생생한 현실인식입니다. 오늘의 삶과 사회를 직시하고 내일의 변화와 대안을 찾기 위한 항해의 나침반이자 지도입니다. 역사는 기억을 뛰어넘는 성찰이며, 지난날을 오늘의 눈으로 다시 보는 동시에 오늘을 재인식하는 진리 탐구의 망원경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우리사회는 어디로 가야 되는지, 전태일의 거울이 너무나 절실한 때입니다. 전태일의 투쟁에 앞선 전태일의 사랑과 평화가 더욱더 절실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