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테레사 수녀가 쓴 시이다. 이 시를 접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대부분 깊은 수긍과 동의의 뜻을, 침묵과 눈빛과 미소로 나타내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 시 속에 분명히 어떤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조직론’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이기도 하고, 진정한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작’과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시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聖人)조차 무슨 대단한 능력과 수단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 분도 한 번에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고, 한 번에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고, 한 번에 오직 한 사람을 껴안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이루어놓은 일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어쩌면 우리도, 지금 단지 시작함으로써, 그리고 한 번에 한 사람씩 손을 잡음으로써,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새만금 간척공사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12월 중순이면 나올 것이다. 농업기반공사를 비롯한 공사 추진 세력들은 법원의 판결과는 무관하게 방조제 전진공사를 강행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불과 2.7킬로미터 남은 방조제가 막히면, 갯벌의 숨통은 완전히 끊기게 된다. 갯벌과 운명을 함께해온 계화도 등 연안 주민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몇 주 전부터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미군기지 이전 및 확장이 추진되고 있는 평택 팽성읍의 농민들은 오늘도 촛불을 켜고 추수가 끝난 황새울 들판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미군의 입장만을 대변해온 한국 국방부의 강행의지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쌀협상 비준안을 이번 정기국회 안에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보수정치권의 움직임에 저항하는 전국의 농민들은 각 지역 도청, 군청 등의 청사 앞에 쌀 가마니를 쌓으며 삭발을 하고 혈서를 쓰고 있다. ‘농민 대항쟁’이 선언되었고 전농 같은 농민단체들은 이미 ‘정권 퇴진 투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12월로 예정되어 있는 홍콩 WTO 각료회담에 대한 투쟁과 아울러, ‘세계화’에 저항해온 한국의 농민들에게 이번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거친 바람과 맞부딪쳐야 하는 힘겨운 계절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전체 노동자 수의 절반을 넘어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억압과 차별에 맞서, 무엇보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순천에 있는 현대하이스코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생존권 투쟁이 최근 극적인 타결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이번 크레인 점거투쟁의 원인이 되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담한 삶의 조건과 부당한 노동현실은 사실 어느 한두군데 사업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녹색평론 창간 14주년을 맞는 이번 호를 편집하는 최근 몇주 동안, 위에서 거칠게 열거한 ‘긴박한 현안’들에 관한 소식들이 우리들에게 속속 전해져왔다. 합법을 가장한 사상 유례 없는 풀뿌리에 대한 폭거였던 방폐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 환경공동조사가 진행중인 천성산,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수돗물불소화를 전국으로 확산?강제화하려는 구강보건법 개악 움직임, 11월 17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부자들의 잔치판’ 아펙 회의에 저항하는 풀뿌리 민중들의 분노와 투쟁 같은 더 많은 이슈들은 위에서 채 언급하지도 못했다.
아무튼 그동안 녹색평론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다루었던,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중차대한 이슈들이, 지금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어 우리사회를 삼켜버릴 기세로 몰아치고 있다. 이 거대하고 난폭한 소용돌이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지난 14년의 궤적 속에서 녹색평론은 이러한 ‘풀뿌리의 자립과 자치에 대한 전쟁’에 맞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발언하고 싸워왔던가.
이러한 고민은 분명 고통스러운 것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실제로 감당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자괴감은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바로 그 순간, “한 번에 한 사람씩” 바라보고, 사랑하고, 껴안으라는 테레사 수녀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본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는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독자들께 이야기를 건네고,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그동안 힘겹게 이루어온 ‘정신적 공동체’를 또 한걸음 더 다져나가는 수밖에 달리 무슨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저 검은 절망의 광풍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는 사람들끼리 다시 한번 등을 토닥이고, 한없이 더딘 일 같지만 한 사람 한 사람씩 우리의 ‘공동체’로 새로운 동지들을 조직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얼마전 새만금 갯벌을 지키고 있는 ‘그레’의 식구들이 손수 가꾼 고구마를 한 상자 담아 녹색평론 편집실로 보내왔다. “4공구를 터라”라는 갯벌 생명들과 연안 어민들의 절규가 적힌 소박한 걸개그림과 함께. 그리고 또 며칠 전에는 평택에서 주민들과 함께 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평화바람’ 식구들이 갓 추수해 찧은 황새울의 햅쌀을 인편으로 보내왔다.
이 계화도 고구마와 황새울의 햅쌀은 친구가 친구에게 보내온 선물이다. 친구가 보내온 선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우정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잡혀가기 전날 밤, 제자와 친구들에게 빵을 떼어서 나누어 주었다. 그 빵은 그의 살이었고, 우리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분명한 징표이자 선물이었다.
이제 그 선물을 받은 우리는, 또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독자 여러분께 그 선물을 나누어 드리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우정의 메시지이지만, 또 한편 기도와 투쟁에 대한 간절한 호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