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태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상황에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소위 첨단과학 연구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국가적인 영웅이 되어왔던 한 연구팀과 그 책임자의 가증스러운 사기행각 그 자체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것도 없지만, 이들의 가면이 벗겨지고, 속임수와 거짓이 우여곡절 끝에 폭로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들이 인간으로서 겪지 않으면 안되는 수치와 모멸감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소한도의 인간다운 양식과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꼈을 ‘만행’은 매일같이 되풀이되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거의 한달 이상에 걸쳐서 우리는 날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소위 핵치환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여성의 신체 가장 내밀한 부분에서 억지로 끄집어낸 난자가 이리저리 찢기고, 유린·공격당하는 기괴하고도 역겨운 장면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왔다.
히로시마 이후 일관되게 ‘죽음의 과학’으로 질주해온 현대과학 연구의 근본경향에 대해 깊이 우려하면서 생애의 말년을 우울과 외로움 속에서 지냈던 생화학자 에르빈 샤르가프의 말대로, 오늘날 이미 우리는 인간으로서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아마도 대다수 한국인들이 아쉬워하고 있는 것은 모처럼 세계 일등을 하고 있다고 여겼던 어떤 과학적 성과가 한 연구팀의 ‘인위적 실수’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일 뿐, 그 이상은 아닐지 모른다. 그리하여 난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막대한 국가적 이익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되었던 연구가 실은 허위이며, 조작이었음이 판명되고 난 뒤의 단순한 허탈감이 가장 지배적인 감정일지 모른다.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의 생명과학 혹은 과학공동체는 건재하다느니, 이번 일을 거울삼는다면 조만간 다시 한국의 과학이 세계 제일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무성한 것은 그러한 허탈감의 반영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반성이니 성찰이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지만, 요컨대 “진실보다는 국익이 우선”이라는 터무니없는 발언이 공공연히 통하는 풍토와 ‘국민적 정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리라고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황우석의 배아복제 연구가 결국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애초에 조작된 논문이나마 가능하여 세계적인 과학전문지의 표지 논문으로 게재되고, 거기에 온 나라가 흥분했던 것은 결국 다른 나라보다도 훨씬더 자유롭게 연구를 위한 기본재료, 즉 난자를 풍부히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라의 위신을 높여주기는커녕 도리어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그러한 근본적인 윤리문제의 논의를 용납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니, 이 사회는 본질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조성될 ‘여유’가 없는 정신적 불모(不毛)의 사회인지 모른다.
자본주의 근대체제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이후, 식민지, 해방, 분단, 전쟁, 빈곤, 군사독재, 산업화, 민주화투쟁이라는 험한 역정을 겪어오는 과정에서,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고도 경제성장에 의한 얼마간의 달콤한 열매를 누리는 과정에서, 오늘날 한국사회는 근거가 불확실한 대로 어떤 종류의 자신감(혹은 열등감)에 차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소위 식자들 가운데는 ‘붉은 악마’로 표상되는 집단적 에너지의 폭발적인 발현에서 ‘민족적 웅비(雄飛)’의 가능성을 운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더 많고, 더 높고, 더 빠른 것에 대한 욕망이 끓어 넘치면서 시도 때도 없이 ‘국익’이 말해지고,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활개를 치는 이런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타락시키고, 미래를 어둡게 하는 원흉이 된다는 것을 우리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철저히 인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도착한 이후 20여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디오 논쟁’은 이른바 ‘국익’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만행에 직결되는 개념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될 수 있다. 당시 스페인 왕실의 신대륙에 대한 정책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이 ‘인디오 논쟁’의 핵심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즉 인디오의 ‘인간성’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즉, 인디오를 서구 백인과 똑같이 하느님의 아들, 딸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노예와 황금을 가져다줄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이 신세계의 원주민의 인간됨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아메리카 땅과 그 원주민에 대한 거리낌 없는 학살과 착취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힘에 의한 약자의 지배와 착취가 세계적인 규모에서 체계화되기 시작하고 있던 ‘대항해 시대’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디오의 ‘인간성’은 부정되기 쉬웠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라스-카사스라는 가톨릭 사제(司祭)의 목소리였다. 그는 시대의 대세에 맞서서 “인디오는 신앙을 배척하는 존재도 아니며, 또 타인의 물건을 차지하거나 빼앗는 사람들도 아니다. 더욱이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야콥의 제자들과 같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의 우리들의 조상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있다. 아니, 그 점에서는 인디오 쪽이 우리들의 조상보다도 훨씬 뛰어나며, 우리들 이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적합한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인디오의 인권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목소리는 외로운 목소리일 수밖에 없었고, 그는 수많은 동료들,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편집증 환자’, ‘정신이상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익’을 해치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말하자면, 세계 제패를 통해서 무한한 부와 권력을 꿈꾸고 있던 당대의 스페인 국민들에게 라스-카사스는 “진실이라는 것 때문에 국익을 우습게 여기는” ‘공공의 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되돌아볼 때, 아메리카 토착민의 ‘인간성’ 여부를 놓고 벌어진 16세기의 이 논쟁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자의 인간성 자체를 무시하는 정신적 습벽은 ‘대항해 시대’에 본격화하여 이후 제국주의 시대를 통해 훨씬더 강화되어 근대적 세계의 핵심적인 생존의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1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개화기 이래, 한국인들이 열심히 적응하려고 해온 근대세계의 질서란 근본적으로,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대로,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타자의 불행이 전제되어야 할 것”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는 ‘어둠의 체제’였다. 따지고 보면, ‘국익’이란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과 그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개념인지도 모른다. 국민국가란 본질적으로 다소간 제국주의적 요소를 자신의 내재적인 특질로 하고 있는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결합하여 전개되어온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는 바깥으로든 안으로든 자연세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식민주의적 지배, 억압, 착취를 계속하지 않고는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체제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근대국가가 배태하는 ‘국익’이란 어디까지나 경쟁과 배제의 원리에 기초한 생존전략이지, 결코 국민국가의 틀 이전 혹은 바깥에서 상호부조와 공생공락의 원리에 따라 살아온 민중의 자치?자립적 삶의 원리를 장려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과학적 조작, 허위, 속임수 그 자체는 한국사회 고유의 현상이 아니다. 오늘날 과학적 속임수는 갈수록 전문화되고, 거대화하고, 상업화하는 현대과학 연구의 구조적인 특성에 비추어 허다히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다. 미국에 한정하더라도 2003-2004년에 걸쳐 과학적 발견을 조작한 사례가 50%나 증가하였고, 2004년 한해 동안 과학적 사기 혐의 때문에 연방기관에 보고된 연구는 270건이 넘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양심적인 연구를 발표함으로써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박해받는 과학자들도 드물게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1998년에 유전자조작 식품의 유해성을 입증한 연구를 발표했던 영국 과학자 아파드 푸스타이 박사의 경우일 것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정부와 기업 소속 과학자들에 의해 쏟아지는 비난과 오명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과학 연구를 둘러싼 환경의 실상이다.
더욱이 오늘날 생명공학을 비롯한 이른바 첨단과학 연구는 그것이 과연 인류의 장래에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 모르는 매우 불확실한 ‘도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기후변화나 수많은 환경문제를 포함한 현재 인류사회가 직면한 난제들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지만, 실은 이 대부분의 문제들이 본래 근대적 과학기술로 해서 생겨난 문제들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문제의 원인을 가지고 문제의 답을 찾겠다는 어리석음을 지금 우리는 범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사회가 유독 이런 어리석음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과학기술이 원래 서양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들 대다수가 거의 예외 없이 갖고 있는 서양 혹은 서양적인 것에 대한 깊은 콤플렉스는 이른바 한국사회의 ‘발전’의 동력이 되어왔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날이 심화되는 우리의 삶과 정신의 빈곤화와 황폐화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세계화와 개방화라는 이름으로 이토록 광적으로, 철저하게 민중의 자립적?자치적 생존의 토대를 파괴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황우석 사태를 둘러싼 온갖 희비극의 근원에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근원에서 망가뜨리고 있는 온갖 모순과 어리석음과 탐욕이 자리잡고 있음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수천년 동안 민중생활의 안정적인 기반이 되어왔던 농사(農事)와 농촌 공동체를 방기하고,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현실적 가능성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소위 첨단과학 기술의 발전에 한 사회 전체의 운명을 거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 나라 권력 엘리트들의 끝도 없는 무지와 무책임이다. 황우석 사태는 표면적으로 조만간 일단락되겠지만, 그러나 그 사태의 근원에 가로놓인 좀더 심층적인 요인들은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악몽으로 남아있을 공산이 크다. [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