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어권 제국주의 문학사에서 조셉 콘래드는 아주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과거 유럽의 제국들이 유럽 대륙 바깥의 국가들로 문명을 실어나르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비유럽인들이나 이들의 문화를 묘사할 때, 제국이 ‘빛’이라면 식민지는 ‘어둠’이라는 식으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도식을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의 변방인 폴란드 출신의 작가로서 콘래드는 제국주의 담론의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의심한 작가로 유명하다. 비록 변방 출신이라 하더라도 종국에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문단의 주요 작가로 활동한만큼 유럽 바깥의 사회와 문화의 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억압적인 계몽주의 담론의 허구성을 사유하는 덕목을 엿볼 수 있다.
“이만큼의 상아는 정말로 이제 내 것이야. 회사가 돈을 지불하지 않았단 말야. 내 스스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모았지. 그런데 회사가 이걸 자기 거라고 우길까봐 걱정이지…내가 원하는 건 단지 정의일 뿐이야.”…그는 정의를 원했을 뿐이다, 단지 정의만을!…“두렵다! 두려워!”라는 그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암흑의 핵심》(1899년)의 끝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의 화자인 말로우가 아프리카의 벨기에 식민지, 콩고에 들어가 밀림 속 어느 곳에 주재하던 커츠라는 인물을 데리고 나오려 하지만, 말로우를 만났을 때 커츠는 이미 미쳐 있었고, 결국 “두렵다”는 말을 남긴 채 커츠는 죽어간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우리는 커츠가 진정 무엇에 미쳐 있었고,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며 죽어갔는지를 전달받지만, 막상 소설 속에서 유럽에 살고 있는 커츠의 약혼녀는 커츠의 죽음의 진실이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한다. 문명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커츠의 약혼녀에게 말로우가 차마 발설하지 못한 진실을 위의 인용문은 말해주고 있다.
《암흑의 핵심》의 맥락에서 보면, 유럽 근대문명의 핵심은 결국 상아와 같은 ‘자원’에 대한 이권 장악과 타인종에 대한 지배라는 사실이 유럽의 문명인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두려운’ 진실이다. 그러나 조셉 콘래드가 한 세기도 더 전에 전달하고자 했던 이 두려운 식민적 진실은 사실은 근대문명의 빛이 사그라들 조짐이 만연해가는 오늘 이 시점에서도 숱한 근대주의자들에게는 아직 도달되지 않은 채 역사의 법정에서 하나의 안건으로 계류중이다. 때로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의 안건으로, 때로는 국익이라는 이름의 안건으로, 때로는 심지어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라는 이름의 안건으로.
2.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근대화 정책의 빛과 독재정치의 그늘이라는 양면 속에서 요동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된 지금, 그가 이룬 경제성장의 신화 앞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지식인들조차도 그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거나 애매한 수사로 끝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일제 식민지 경험에 대한 평가 역시 친일/반일이라는 선악 개념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된다는 탈민족주의적(또는 탈식민주의적)인 담론이 최근 한국의 주류사회를 흥분시키고 있는데, 그 원동력 역시 식민지 근대화론이 갖고 있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에서부터 비롯된다. 아마도 개발과 근대화만 이루어진다면 식민지든, 독재든,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든지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길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한국에서 민족과 개인이라는 말만큼 일상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지식인의 담론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어휘도 없을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냉전 체제의 와해와 국내의 민주화 진척으로, 대표적인 저항 담론으로 인식되던 민족주의 담론과 맑스주의가 크게 위축되면서 그 자리에 개인의 존재를 중시하는 보다 자유주의적인 사고체계가 득세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구나 민족통일 프로젝트가 정권 차원에서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강한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국익우선주의 담론이 대중들 사이에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개인’을 강조하는 가치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경향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여기서 또하나의 집단 개념인 계급은 들어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
엄밀히 말해서 강한 국가와 개인의 가치가 양립한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세계화 현상에 동조해, 한국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개인의 자유와 강인한 국가에 대한 신념은 더욱 강고해지고 있다. 최근에《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재인식》)이라는 책이 나와 한국의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면에도 바로 이런 식의 자유로운 개인과 강한 국가를 동시에 염원하는 대중들의 모순적인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인식》의 저자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영훈의 권두논문은《재인식》프로젝트의 선언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영훈은 여기서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민족주의 담론 체계 내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추적한다. 요약하자면, 민족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수입된 개념으로 이후 일본 식민 세력의 한반도 강점에 맞서 식민 세력에 대한 대항 개념으로 탄생한, 말하자면 역사적 구성물이며, 해방 이후 좌파 이념과 착종되어 근대화라는 문명사적 세계사의 흐름 속에 형성된 한국(남한) 역사를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이념적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민족주의 역사관에 대한 대안으로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문명사로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실제로,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이며 근대의 구성물이라는 탈민족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좌/우 이념적 정파의 구분을 넘어서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재하는 민족’이라는 관념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파시즘적 광풍의 역사는 20세기 인류의 크나큰 비극이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이념은 오늘날 반성과 성찰의 대상이지 결코 지금도 유효한 철학적 자산으로 보는 데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친일잔재의 척결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이영훈 같은 극단적인 근대주의자가 ‘마녀사냥’이라는 수사를 부정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 점은 나중에 다시 논의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친일잔재라는 의제 자체를 터부시하는 태도가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라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의제를 정치적이고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존재하는 것은 또한 사실이다.)
‘친일’이라는 부역행위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행위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힘있는 자들의 폭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협조하는 약자들의 생존 기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친일세력이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라는 특정한 영토를 지배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민족 내부의 적극적인 협조자들을 가리킨다. 나아가, 친일세력은 한반도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온 집단적인 주체들의 운명과 삶의 모습을 강제적으로 변형시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획득한 부귀와 권세를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으며 한반도 주민들이 주체적인 삶을 이루는 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방해가 되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친일세력의 청산이라는 구호로써 모종의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세력 못지않게, 일제 잔재의 척결 자체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식민지 권력에 협력하여 얻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술책이므로 이 역시 정치적 또는 정략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인식》의 편집자들(이영훈, 김일영, 김철, 박지향)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탈민족주의적 인식론의 근저에는,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현대사가 근대문명의 이식이라는 문명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렇게 근대문명 우월주의라고 불러볼 만한 인식은 근대문명이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오기 이전에 존재해오던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은 문명의 담지체로서의 국가의 틀 속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국가주의의 인식으로 연결되는 양상을 아울러 보여준다.
가령, 정치학자 김일영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의 행보를 분석하면서 철저히 국가 통치의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농민적 토지 소유’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유상분배, 지주의 토지 강매 등 아쉬움이 컸던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 과정은, 김일영의 눈으로 보면, 국가의 통치권 강화 측면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즉, 연3할의 지가로 농지를 몰수한 후 5년 분할을 조건으로 한 유상분배를 결정함으로써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했으며 소농의 보수성을 활용하여 농지개혁을 정권의 든든한 안전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이승만 정권이 본격적으로 독재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던 부산 정치파동(1952년)에 대해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명백한 반민주적 친위 쿠데타였던 부산 정치파동은 김일영의 ‘다차원적’인 해석에 따르면, 야당 일부 세력의 내각제 개헌 시도와 북진통일을 고집하는 이승만 정권을 축출하려는 미국에 맞서 대한민국 국가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는 사건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해방 후 한국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한국사회는 문명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문명 요소들―이영훈의 표현에 따르면, ‘자립적 개인,’ ‘자유로운 토론,’ ‘소수의견에 대한 관용,’ ‘공적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계몽하고 국민들을 지도해줄 강한 국가가 필요했다는 것이《재인식》프로젝트의 기본 인식이다. 이영훈에 따르면 근대적 문명 요소를 어느 정도 갖춘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 과정이 마무리된 것이 우리의 경우 1987년 정도일 것이라는 것이다.
《재인식》의 편집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체제는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인사인 노엄 촘스키까지도 인정할 만큼 제대로 된 ‘민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재인식》의 논리대로라면) 지금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의 강력한 국가(주의)적 영도와 계몽 덕분에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개인들로 가득하며, 사회적 소통은 자유롭고 자연스러우며 또한 소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낭랑히 울려퍼져, 그 결과로서 모든 공적인 결정과 합의사항에 대해 권위가 인정되는, 그런 사회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자. 한국사회의 개인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창의성과 존엄함을 인정받기보다는 거대한 교육, 기업 중심 체제에 순응하여 살아남기 위해 거대 체제에 철저히 의존적인 존재들로 남아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 한국을 ‘토론 공화국’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였지만, 새만금 사업, 천성산 문제, 평택 대추리?도두리의 미군기지확장 문제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회적 현안에서 지역주민들 목소리의 자유로운 소통은 요원한 일로 보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장애우 그리고 유색 혼혈인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아직 최소한도의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지역/이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가는 가운데 어떤 사회적 합의나 조정도 힘든 것처럼 보인다.
우리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앞서 ‘문명’ 질서를 확립한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조차 똘레랑스 정신을 무색하게 할 만큼 억눌린 소수인종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라 만들기’ 과정이 완성되고도 몇번의 보완 과정을 거친다 해도, 이영훈이 열거하고 있는 소위 문명 요소들은 어쩌면 근대문명 세계에서는 영원히 오지 않을 허구적이고 관념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정이 그러한데도《재인식》의 편집자들의 관심사는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지켜야 될 국가체제는 어떠한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다. 일제의 유산인 전체주의적이고 강한 국가체제가 해방과 더불어 해체된 공간에서 한반도 남쪽에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들어서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이영훈의 역사인식의 바탕에는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체제의 수호와 발전이라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 점에서 4명의 편집자들은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갖고 있음을 대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민족 문제와 계급 담론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에서 탈정치적인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영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영훈 자신의 정치적 태도는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역사가는 현실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역사가로서의 태도는 이렇듯 자기모순적이다. 역사가는 현실로부터 뒤로 물러서서 실증적인 자료만으로 말해야 된다는 실증주의 역사관 자체에 역사와 현실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환원시켜 볼 수 있다는 과학주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어 있다. 역사가가 어떤 데이터를 선택하느냐, 전체적으로 그 데이터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이냐, 역사적 과거에 대한 그의 포지션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는 이미 불가피하게 역사적 현재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이영훈은 현실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어야 된다는 자신의 발언과는 달리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사회변혁의지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역사가의 임무는 현실로부터 초연한 ‘시대의 아웃사이더’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병도를 중심으로 한 실증학파 역시 역사서술의 탈정치화를 표방하였지만, 이들의 탈정치화라는 모토는 결국 우파적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의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았음을 상기한다면,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지식인의 실증주의적 태도가 그 나름의 현실 개입의 한 방식이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이영훈에게 식민지의 역사는 결코 억압과 침탈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인 문명사와 보다 야만적인 우리의 전통 역사가 융합할 수 있는 계기일 뿐이다. 제국주의는 나쁘지만, 그것은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연상시키지만, 이영훈의 식민지 역사관과는 두가지 점에서 다르다. 하나는 이영훈에게 식민지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없다. 왜냐하면 강자의 문화는 바로 보편의 문화이기 때문에 보편의 문화를 이식시키는 식민의 역사가 나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영훈의 글에는 일제 식민통치가 좀더 길었더라면 해방 이후 한국 역사가 보다 쉽게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다른 하나는 식민의 역사를 통해서 두개의 문화가 융합된다 할 때 그 말은 보다 야만적인 약자의 문화가 보다 보편적인 강자의 문화에 동화된다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민족의 깊은 구석에는 낮은 수준의 통합으로서 야만이라 이야기될 수 있는 씨족이 웅크리고 있다.” 이영훈의 이 말은 근대 이전의 전통 문화의 야만성을 그가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중세의 소농사회를 이영훈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소농사회의 인간들이 악령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본다. 마녀, 이교도, 저주의 세계가 중세 소농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사악한 소농사회의 굴레를 벗겨주는 것이 바로 근대와 합리주의, 경험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였다고 본다.
이영훈이 소농사회를 이토록 저주의 대상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내가 머리에 그리고 있는 문명사에서 출발점은, 그리고 언제나 다시 돌아오게 되는 마음의 고향은 분별력 있는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그 인간 개체이다.” 여기서 이영훈은 경제동물로서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본성이 마음껏 꽃피는 문명사의 방향성뿐만 아니라 그 본질(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마음의 고향’)까지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문명을 이루며 살 수 있는 필요조건이 바로 경제인간, 곧 시장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인간이 지혜의 존재(homo sapiens)가 아닌,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인데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스펙터클 문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기심은 분별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기심과 분별력이 공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인간이 그런 본성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은 근대 국가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기심이 문명의 필요조건이라면 분별력은 문명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만하다. 토마스 홉스, 헤겔 같은 이들은 이기적인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나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인간들이 만든 근대사회가 과연 ‘분별력’과 ‘이기심’의 공존을 허용하는 곳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이미 근대화된 사회의 중심부만 들여다보아서는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지 시스템은 얼마나 분별력이 있어 보이나. 가진 자의 돈의 일부를 거두어들여 없는 이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시스템은 ‘분별력 있는 이기심’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없는 자의 자존심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도시의 변두리나 농촌을 돌아보면 이영훈 식 근대예찬론이 얼마나 거짓인지 곧 알 수 있게 된다. 오늘날 황폐화된 도시의 빈민촌이나 농촌을 들여다보면 근대의 풍요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현대인들이 풍요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팍스 에코노미카. 경제적 권력을 통해서 유지되는 위태로운 평화가 그것이다. 근대 이후의 현대적 삶의 풍요는, 누군가 자기보다 약한 자들이 그야말로 평화롭게 나누어 갖고 있던 풍요로운 자원을 희소성의 명분 아래 경쟁적으로 약탈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라고 이반 일리치는 설명한 바 있다. 공유지를 비롯한 공공재, 민중문화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독버섯처럼 꽃핀 ‘문명’이 바로 근대 문명이다. 이제야 이영훈이 소농의 존재에 대해 마녀니 저주니 해가면서 증오의 말을 퍼부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소농은 기본적으로 인류의 공동 자산인 공유지를 비롯하여 물과 숲 같은 공공재의 존재 위에서만 성립하는 인간의 행동양식이다. 경제인간들이 만드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은 공공재에 대한 무상 약탈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이러한 약탈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필요했고, 그 언어가 바로 ‘마녀사냥’이었던 것이다.
한반도 남쪽 땅의 현대사를 문명사적인 흐름 속에서 해석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면 기존의 좌파 민족주의 담론이 지니고 있던 낡은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폐혜를 지적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영훈의 민족주의 비판은 문명사의 표면에 흐르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 형성되었던 냉전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좌편향이 틀렸으니 우편향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풍요로운 삶의 척박함과 불모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좌/우의 구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영훈은 루돌프 바로의 말을 인용해서 “기존의 사회주의는 낡은 생산양식 위에 건립된 전제정치”라고 비판하지만, 루돌프 바로가 누구인가. 그는, 이영훈의 지적대로 동독 공산당원이었지만, 그가 사회주의의 전제성을 비판했던 이유는 자본주의를 찬양해서가 아니라 산업문명의 근본적 폐해성에 대해 급진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 아닌가. 최대이윤을 창출해내기 위해 인간이 만든 거대기계체제의 생산성은 마침내 인간과 모든 종의 절멸 위기를 낳을 정도가 되었으니 거대기계 체제 자체를 해체해야 된다고 루돌프 바로는 믿고 있었다. 그에게는 인간의 자유와 이기심을 한껏 고양시켜 이룩한 시장경제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정의롭지 못한 야만이다.
이영훈이 다른 글에서 근대적 문명사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한 사상가로 인용한 엥겔스의 경우도 이영훈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근대주의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영훈이 엥겔스를 언급한 것은 물론 엥겔스가 사유재산과 화폐의 발생을 문명의 기원으로 봤기 때문이다. 문명과 미개의 경계는 폐쇄적이고 공동체적인 씨족사회의 해체에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엥겔스는 진정한 문명사회의 조건으로 씨족사회의 구성조건이었던 자유, 평등, 우애를 꼽았다. 엥겔스의 문명론의 결론은 맑스의《자본론》의 세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샤를르 푸리에 같은 공동체적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하는 이영훈의 사상적 토대는 아무래도 그 근본에서부터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3.
《역사비평》의 임대식은《재인식》프로젝트가 경제성장주의를 지향하는 뉴라이트와 근대 극복을 지향하는 탈근대가 기묘하게 결합하면서 탄생하였다고 최근 말한 바 있다. 이해하기 힘든 양자의 결합의 끈은 ‘탈민족’이라고 하는 양자의 공통적 지향점을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임대식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이다. 임대식의 평가를 염두에 둔 채, 이제 끝으로《재인식》편집자 중 탈근대를 대변하는 김철의 글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식민지 근대론과 근대 일반에 대한 김철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식민지 근대화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성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김철은 근대의 속성 자체에 폭력성이 있고 억압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뉴라이트적 입장을 보이는 이영훈과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김철은 식민지 근대든 다른 어떤 식의 근대이든, 지배자의 일방적인 억압은 있을 수 없고, 피지배자의 저항에 맞서, 타협과 양보를 통해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수반하여 실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타협과 절충의 과정은 식민지 시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억압적인 지배가 보다 일반적인 지배의 형태일 테니,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뜨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철의 논문,〈몰락하는 신생〉은 이태준의 단편,〈농군〉(1939년)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글이다. 김철의 글은〈농군〉의 배경인 만주를 둘러싼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많은 문헌(주로 일본측 문헌)을 활용하여〈농군〉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논증을 위하여 만만치 않은 수고를 들인 글이지만, 그 글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검증하는 것이 여기서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김철의 해석은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다. 가령,〈농민〉의 선행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기행문〈만주기행〉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의 ‘만주 유토피아니즘’을 드러내고 있는 데 비해, 일년 남짓 후에 씌어진 소설〈농민〉은 장작림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만주국 이전의 어두웠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는 김철의 해석은 너무나 임의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장작림 통치하의 만주는 어느 정도 일제와의 협력 속에서 만주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만큼, 만주국 이전의 ‘어둠’과 만주국 이후의 ‘빛’이라는 대립구조 속에 각각〈농민〉과〈만주기행〉을 배치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의문이다. (오히려 이 부분은 평론가 홍기돈의 민족주의적 해석에 더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그러나 만주로 이주해간 조선의 농민들이 일제의 식민지 경영 전략에 이용된 면이 있다는 사실에는 공감이 가는 면이 있다.
김철의〈농군〉해석의 타당성 문제를 보다 심도있게 천착하기 위해서는 소설〈농군〉의 실제 모델이었던 만보산 사건과〈농군〉의 선행 텍스트였던 기행문〈만주기행〉의 궤적을 김철이 각각 어떤 식으로 따라가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아야 한다. 1931년 만보산에 이주한 조선 농민과 선주민이었던 중국 농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으나 조선 농민의 피해를 과장되게 보도한〈조선일보〉의 기사로 인해서 국내에서는 중국인 거주자들에 대한 보복 테러가 자행되고 이에 따라 수백명의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실제 사건이 일어난 지 8년 후에 씌어진〈농군〉은 8년 전〈조선일보〉기사에서처럼 조선 농민들이 중국 경찰들에 의해 상해를 많이 입은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에〈만주기행〉에서는 실제 만보산 사건의 정황을 그대로 묘사한다. 이에 대해 김철은〈조선일보〉기사나〈농군〉에서 조선인 이주자들의 피해를 과장되게 묘사한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 경영 전략의 틀 속에서 조선인 이주자들은 실제로는 중국인 선주민들에 대해 가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이를 교묘히 감추기 위해 조선인 이주자들을 피해자로 묘사하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사 정신분석학적 논의의 타당성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당장 떠오르는 의문 중의 하나는, 그렇다면 왜〈만주기행〉에서는 이와 같은 가학-피학 심리상태가 드러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병적으로 뒤틀린 심리상태가 선행 텍스트인〈만주기행〉에서는 드러나지 않다가 왜 일년도 더 지난 후 소설〈농군〉에서 느닷없이 발현되었는지,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문학작품 해석의 타당성 문제는 주관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김철의 경우처럼 성실한 학자라면, 자신의 해석의 타당성을 논증하기 위해서 많은 상황자료들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해석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평자 자신이 서 있는 지점, 다시 말해,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김철의〈농군〉과〈만주기행〉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 문제 자체는 접어놓고, 그보다는 김철의 해석의 관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사물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철은 이태준의 소설을 전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전략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김철의 해석은 작가 이태준이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만주 유토피아니즘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태준이 아무리 민족의 고통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전략을 강화하는 것 이외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화가 일찍이〈농군〉에 서사적 감정이 들어있다고 높이 평가한 것은 이 작품에서 민족 주체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철의 탈식민주의적 독법은 결국 민족 주체의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 민족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것은 제국을 강화시켜준다는 것은, 다시 말해, 민족의 존재가 오히려 제국의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을 뜻한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한다. 민족과 민족문화를 콘텐츠화해서 세계화된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민족은 소위 경쟁이 필요없다는 블루오션에 던져지는 하나의 상품이며, 이것을 통해서 국가는 새로운 성장시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체론에 따르면, 해체는 단순히 없애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부재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이라는 상품은 블루오션의 끝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타고 세계화된 시장을 떠다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영애의 이미지는 홍콩에서 중국 본토로, 거기서 다시 일본으로, 그 다음에는 동남아시아로, 마침내 카이로를 거쳐 뉴욕까지 흘러간다. 탈민족화된 ‘대장금’―영어사전에도 곧 등재될 것이라는 한류(Hallyu)―의 아이콘은 이런 식으로 세계시장의 규모를 확장시킨다. 아마도 이런 탈민족 현상을 통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뉴라이트와 탈근대의 만남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태준이 민족을 바라보는 관점은 김철의 관점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김철이 민족을 지배자(제국)의 관점에서 보았다면, 이태준은 제국에 의해 식민화된 조국에서 어쩔 수 없이 쫓겨난 이주민들의 ‘헤쳐모임’을 보았던 것이다. 이태준은 봉천역에서 ‘골육감(骨肉感)’을 느끼며 바라본, ‘타국으로 끌려가는’ 젊은 여자들에게서 민족을 보았고, 식당에서 커피 심부름을 하는 러시아 백인 소녀에게서 타지에서 노동하는 민족의 처지를 떠올렸고, 그 연장선상에서 마침내 조선 이주민들이 장자워후에 힘겹게 정착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통적으로 식민지에서 농토와 일터를 빼앗긴 처지에서 비롯되는 동병상련의 정서가 이들을 묶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열린 민족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인지는 모르지만 근대의 수레바퀴에 상처입은 약한 형제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사랑과 우애의 감정은 느슨한 유대감과 끈끈한 친밀감으로 묶이는 부족들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그룹은 결코 배타적이지도 않고 강한 힘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이태준이 이국의 국경 도시에서 만난 이주자들에게서 느낀 감정이 그런 것일 것 같다. 거기에 비해 오로지 제국의 관점에서 민족의 기능에 대해 이론적으로 관찰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김철은 바로 강자의 관점 때문에 약자를 제대로 읽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국적이 없는 백계(白系) 노인(露人)의 딸들, 향수조차 품을 곳 없이 단조한 평원만 내다보고 사는 가엾은 처녀들, 그들이 가져오는 한잔 커피는 술만 못지않은 독한 낭만을 풍기었다. 그런 커피를 잔을 거듭하며 나는 내일 이민촌(移民村)을 찾아 끝없는 벌판에 외로운 그림자가 될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해보았다. (〈만주기행〉중에서)
이태준이 봉천에서 신경으로 이동하는 중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어느 식당에서의 풍경이다. 낯선 곳에서 방황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은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에게 투사되고, 이러한 연민의 감정은, 다시, 피부색은 다르지만 이국의 국경 도시에서 노동하는 타민족 여성에게 투사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외로운 그림자―이민촌―백계 노인의 딸). 그러나 이 대목에서 김철은 이태준이 ‘독한 낭만을 향수하’며 러시아의 소녀를 볼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김철이 겪는 이러한 해석의 어려움은 오늘날 제국에서 수입되어 들어온 각종 포스트주의 이론의 추상적 세계에서 구체적 역사를 보려는 데에서 생기는 괴리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태준 기행의 종착지인 장자워후의 조선인 이주농민들과 선주민인 만주 ‘토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김철은 조선인 이주농민들이 만주 토민들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 자체가 제국주의적이며 실제로 가해자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일제의 만주국 경영 전략 차원에서 조선인들의 만주 이주 정책이 실시되었다고 볼 때 크게 보아 김철의 말은 맞을 것으로 판단된다. 토민들은 논농사도 지을 줄 모르고, 사는 집 모양도 신통치 않고, 농산물을 내다팔 줄도 모른다고 말하는 조선 이주농민들의 태도에서 김철은 조선 농민들의 제국주의적 이념을 읽어낸다. 유학시절 옆집에 사는 중국 유학생들에 대해 시끄럽고 목욕도 덜 하는 것 같고 요리할 때마다 기름 냄새 난다고 흉보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나는 제국주의자였는가? 그래도 당시 중국 친구들이 참 많았는데, 그래도 나는 제국주의자였는가? 그냥 문화적 차이에 대해 제대로 소통할 기회를 아직 갖지 못해서 그랬다고 말하면 안되는 걸까?
김철의 주장 중 가장 귀기울일 만한 대목은 조선인들이 중국 농민들을 ‘토민’이라고 불렀는데 그 ‘토민’이라는 용어야말로 그들을 야만인 취급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아이누족에 대한 호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만주의 중국인들을 토민이라고 불렀고 이런 호칭 속에는 제국주의자의 시선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경상도 문둥이’라는 말은 때로 욕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상황 변화에 따라, 애칭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군대 출동은 별문제로 하고 만일 그 토민들이 살생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토민들의 몽둥이에라도 희생자가 없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만보산 사건 중 토민들이 보여준 태도에 대해 조선 이주농민이 이태준에게 전해준 내용이다. 적어도 만주 토민이 무지몽매한 야만인이 아니라 평화애호가라는 점을 조선 이주농민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토민이라는 호칭 속에 만주 농민을 낮춰보는 태도가 들어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조선 이주민들의 제국주의적 자세를 입증하는 절대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보산 사건은 새로 들어온 이주민과 원래 살고 있던 선주민들 사이의 갈등이며, 정착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생각된다.〈만주기행〉이 씌어질 당시, 조선 이주민들은 만주인들의 땅을 소작하지만 배는 곯지 않으며 만주인들과 이미 어울려 살고 있는 상황인데도, 이를 놓고, 나중에 들어온 조선 농민들을 가해자로 규정하는 김철의 시각이야말로 분리와 지배를 일삼는 제국주의자의 시선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든다.
백 일(울산과학대 교수)은 진보적인 일간지 지면에서《재인식》에 대하여 새로운 ‘해방 전후사의 인식’ 운동이 곧 탄생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목표는 마지막 남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종식일 것이라는 말도 아울러 했다. 그의 말은 2%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대결하는 과거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딱 한방이면 냉전 이데올로기 자체는 종식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제한적인 개인의 자유와 강한 민족에 대한 이념의 종식은 ‘새로운〈인식〉운동’의 질적인 새로움에 달려 있다. 그 새로움은 근대의 경계에 대한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지금 한 세기 전 콘래드가 보여주었던 근대성의 폭력과 탐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사적 비전에 대한 상상력을 요청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