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협상문제로 번뇌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 협상의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라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터져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조속한 협상타결을 천명한 당초의 결심을 재고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기는 협상이 개시되기도 전에 소위 4대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미국측에 양보해 버림으로써 정작 협상 테이블에서 써먹을 ‘카드’를 처음부터 내팽개친, 이해하기 어려운 우행(愚行)을 범하면서까지 서둘러 협상을 시작한 정부가 지금에 와서 한미FTA를 우려하는 비판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실제로, 대통령은 지난 8·15 기념행사에서 다시 한번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하여 뜻을 하나로 모아 줄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면서도, 정작 자기자신은 대화와 타협을 위한 선행조건, 즉 자신의 것과 다른 의견을 경청하려는 자세를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지금 정부나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내놓고 있는 협상의 명분, 즉 개방하면 살고, 쇄국하면 죽는다는 이분법적인 논리만 하더라도 그렇다. 대외의존도가 70%나 될 정도로 이미 과도히 개방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한국경제의 현실을 두고, 새삼스럽게 개방이냐 쇄국이냐 하는 것은 실소를 자아낼 만큼 어이없는 논리이다. 그런데도 되풀이하여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이 시점에서 한미FTA가 왜 필요한지 다수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당한 논리가 지금 정부에는 결여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주목할 것은, 오랫동안 수출 지향 경제성장만이 살길이라면서 대중을 끊임없이 설득해온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서도 현재 정부가 빠른 속도로 추진하고 있는 이 협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이 과연 무엇인지 계산해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미FTA의 필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된 정부기관 연구소의 문건에서도 인정된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협정이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과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대신에 정부는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위해서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꼭 필요하다는 추상적인 주장을 슬로건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때로는 이 협정으로 인한 경쟁을 통해서 한국의 서비스산업이 미국의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될 가능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토로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한 ‘개혁’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부적 충격요법에 의한 개혁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그 개혁은 결국 ‘구조조정’, 즉 해고, 실직, 혹은 비정규직의 항구화, 아니면 파산으로 귀결될 공산이 오히려 높다는 것이 좀더 근거있는 예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대통령이 스크린쿼터의 축소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한 영화인을 향하여 “그렇게도 자신이 없느냐”고 반문했다든지, 국회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 국민은 신의 손을 가졌기 때문에 위기를 쉽게 극복할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든지 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감의 표출이라기보다는 내심으로는 대통령 자신도 한미FTA가 다수 국민들에게 시련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이 협정이 한국사회로서는 모험이며, 혹은 심지어 도박일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 협정의 본질적 성격으로 보거나, 다른 국가들의 경험으로 보거나, 미국과의 FTA가 일단 타결, 시행된다면 그것은 극소수 상위계층을 제외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생활기반을 뿌리로부터 흔들어버리고, 장기적으로는 이 땅의 생태적 토대에 치명적인 훼손을 가할 것이라는 것은 그동안 이 문제를 깊이 천착해온 비판적인 학자, 지식인,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렇다면,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대다수 국민들의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이 협정을 왜 맺어야 하는지, 주권자인 국민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현재 제기되어 있는 비판적인 의견이나 반론들에 대해서는 성실히 대답해야 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내놓은 것은 도저히 책임있는 설명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막연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궁색한 논리, 자료조작, 기만, 그리고 무조건 정부를 믿어달라는 투의 공허한 대국민 홍보용 슬로건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려할 만한 사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부가 협상을 시작한 이유와 협상내용과 그 진전 상황에 대한 정보를 일반 국민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농민 및 노동자 단체를 포함한 이해 당사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국회의원들에게까지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생각해보면, 한미FTA의 타결 여부보다도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비밀주의가 허용되고 있다는 상황일 것이다. 이 상황은 주권자인 국민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미FTA는 일단 협정이 타결된 이후의 현실적 결과로서만이 아니라, 그 협상의 시작과 과정에서 이미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미FTA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반민중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 협정으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의 심화를 짐작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정확히 예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나, 대기업, 금융자본가, 관료, 정치가, 소수 언론기업, 소위 고급 전문직 종사자들은 대체로 한미FTA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을 포함하여 이 나라의 다수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은 속절없이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임은 거의 틀림없는 일이다. FTA가 아니라도 이미 몰락 직전에 있는 이 나라 농민들의 형편에 대해서는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 소농 혹은 가족농에게 미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책 결정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권리도 현저히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떤 식으로 될 것인지는 가령 “한국 기업들이 자유롭게 해고를 할 수 있도록 한미FTA가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된 주한미상공회의소의 한 임원의 발언에 담겨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주한 미국인 사업가의 이와 같은 말 한마디 속에는 어쩌면 국민적 여론에 아랑곳없이 한미FTA가 왜 이렇게 급박하게 추진되고 있는지 그 진정한 사연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상품과 자본의 국경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는 자유무역협정이란 본질적으로 기업과 투자자들의 무제한적인 이윤추구를 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은 오늘날 세계무역의 현실에서는 자명한 일이 되었다. 이 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체제 속에서 자본과 상품과 일부 전문가들의 이동은 자유롭지만, 노동자를 포함한 하층민들의 국경간 이동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이 체제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 하의 자유무역 질서라는 것은 다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이 자본증식의 극대화라는 목적을 위해서 세계의 어느 곳이든 자유로이 투자, 이윤을 추구할 권리를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한, 이 체제의 확대 속에서 자연자원과 사회적 약자 혹은 토착민들에 대한 이용, 수탈, 착취가 갈수록 강화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자본은 가장 임금이 싸고, 공공정책이 허술하고, 환경규제가 불철저한 지역을 겨냥하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자유로이 이동할 수 없는 토착민이나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거의 강제노동에 가까운 노역을 강요당하거나 불법이민자가 되는 수밖에 없고, 동시에 지구환경은 갈수록 생명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고 만다. 자본증식, 주주 가치의 극대화라는 논리가 절대적인 우선권을 갖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위기나 혹은 다가오는 석유생산 정점에 관련한 에너지 위기, 세계경제와 문명이 직면한 위기를 경고하는 끊임없는 목소리들도 그저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오늘날 세계경제의 지배자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다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자간이든 쌍무적이든 자유무역협정의 결과로, 확실히 수출이 늘고, 국가총생산(GNP)이 증대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국가들의 종교가 된 경제성장률에도, 또 고용증대에도 그것은 기여하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이 모든 경제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소위 자유무역과 개방정책으로 인하여 실질적으로 세계의 풀뿌리 민중의 운명이 다소나마 개선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유한 계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와 일화들만이 넘쳐날 정도로 존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지금 해마다 수만명의 농민이 자살을 하고 있고, 나프타(NAFTA) 협정 이후 멕시코에서는 농민들의 다수가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거나 미국으로 탈출, 불법이민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런 사정은 나프타 이후 사회보장 정책이 축소되고 노숙자가 크게 증가한 캐나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 자유무역협정의 성과로 흔히 일자리가 늘었다고 선전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좀더 세밀히 보면 그 대부분의 일자리는 비정규직이거나 임시직일 뿐만 아니라, 전체 인구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중산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시 물어보아야 할 것은 설혹 국가경제가 좀더 부유해졌다고 해서 풀뿌리 민중들의 생활현실의 진상이 이렇다면 그 ‘부(富)’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학자 개번 매코맥은 일찍이 ‘부강한 국가, 가난한 국민’이라는 인상적인 말로 경제대국 일본의 현실을 요약함으로써, 그 경제적 번영이 실은 ‘공허한 낙원’을 낳았을 뿐이라는 것을 통렬히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이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무역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세계의 다수 민중의 삶이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개발과 발전의 열매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자유무역체제 하의 무자비한 경쟁논리 밑에서 민중의 오랜 삶을 지탱해온 온갖 종류의 공동체적 상호부조의 관계망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어 버린다는 데에 재앙의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멕시코의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 구스타보 에스테바는 멕시코 정부 고위직에서 일하고, 멕시코대학의 교수를 지낸 경력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엘리트의 삶을 일찍 포기하고, 멕시코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오악사카(Oaxaca)주에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경제성장과 개발논리의 압력 밑에서도 아직도 대체로 오래된 관습과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토착농민들의 ‘우애와 환대에 토대를 둔 삶’을 옹호하는 데 지식인으로서의 생애 대부분을 바쳐왔다. 그는 토착농민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의 논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애와 환대의 원리임에 주목하고, 이러한 생활원리가 가령 서구근대의 핵심적인 가치 중의 하나인 관용(tolerance)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른지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관용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강자의 너그러움의 표시이다. 그것은 약자나 소수자가 강자가 지배하고 있는 기성의 질서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덕목이다. 따라서 관용은 근본적으로 불관용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비서구 세계 토착민들의 삶을 오랫동안 특징지어온 환대(hospitality)의 원리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자에게로 향하는 존경과 포옹이다. 따라서 타자는 단지 베풂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를 포옹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될 동반자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토착민들의 삶은 서구적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먼 공생공락의 삶을 성립시켜온 것이다.
환대라는 토착민들의 생활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서 에스테바는 이 마을에 가령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마을사람들의 대응방식을 묘사한다. 일단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마을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큰 나무 같은 곳에 결박하여” 일단 격리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를 징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인을 저질렀으므로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어” 혹시 자살이나 자해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고는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서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한다. 결론은 대체로 징벌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를 범한 결과로 위축될 대로 위축된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다시 마을생활 속으로 자연스럽게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쪽으로 난다. 그 결과 얼마동안 마을에서 떨어져 살게 한 다음에 돌아와서 자기가 죽인 사람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근대 문명사회의 사법적 정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오늘날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오래된 삶의 흔적을 가차없이 지워버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대책없는 어리석음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어떤 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이며, 후진사회인지 다시 근원적으로 물어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멕시코 토착농민들의 이러한 우애와 환대의 문화도 조만간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렇다는 것은 특히 나프타 이후 미국으로부터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값싼 옥수수 때문에 멕시코 농민들의 옥수수 농사 기반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옥수수 농사는 전통적으로 멕시코 농민사회의 생존과 문화의 핵심적 요소였다. 그 농사가 망하면 농민문화의 소중한 전통도, 농민들의 상부상조와 공생공락의 기반인 삶터도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전쟁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유무역이라는 그럴듯한 논리 밑에서 오늘의 세계경제는 이렇게 민중의 자립적, 자치적 생활의 근거 자체를 유린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한미FTA는 기왕의 다른 다자간 혹은 쌍무적 자유무역협정의 연장에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외없는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는 가차없는 ‘포괄성’으로 인해서 한국의 사회와 문화와 제도와 관습에 미칠 충격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것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오늘날 세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지배에 저항하여 인간다운 삶의 양식을 회복하고자 하는 여러 다양한 시도들이 한미FTA라는 새로이 추가된 폭력에 의해서 속절없이 꺾여질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전망이다.
따지고 보면, 미국문화를 규범으로 삼고, 미국적 생활방식을 선망한 나머지 미국과의 경제통합이 우리의 살길일지도 모른다고 맹목적으로 믿도록 세뇌되어온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대중적 환상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실로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미국을 모델로 하는 근대화론과 성장논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적 문화, 생활방식은 세계평화와도, 민주주의와도, 지구의 건강과도 양립할 수 없는 본질적으로 낭비와 수탈을 구조화하고 있는 체제,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 범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 세계는 전쟁과 빈부격차,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위기로 크나큰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아마도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미국은 최강국으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자폐적인 이기주의에 갇혀 끊임없이 약자를 괴롭히고,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어지럽히고, 지구의 생태적 지속성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재 세계의 수많은 불행과 재앙은 이러한 미국의 ‘왜소화’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와 같은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으로 한미FTA가 결정되어서는 안된다. 이라크 전쟁은 간단히 말하여 미국에 의한 침략전쟁이며, 따라서 이라크 사람들의―나아가서 나머지 세계의 사람들 모두의―눈에 비친 한국군은 자기들을 도와주려고 온 군대가 아니라 침략자의 동반자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어떤 레토릭, 어떤 합리화로도 변경되지 않는다.
경제학자 우석훈 씨는《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한미FTA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학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할지를 논의하는 가운데서 결정되어야 할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은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시급한 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근본조건이 어디까지나 연대와 협력의 인간관계에 있지, 결코 자본의 논리에 대한 충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좀더 윤리적이고, 좀더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