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독일의 양심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되어온《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가 최근 독일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80세의 이 노작가가 최근에 출간된 회고록에서 자신이 소년시절에 히틀러의 무장친위대(Waffen-SS) 소속 병사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자, 비록 말단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나치 독일의 가장 악명높은 조직의 일원으로 복무했던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그동안 ‘과거 청산’을 누구보다 열렬히 말해온 이 작가의 ‘위선’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격앙된 나머지 귄터 그라스에게 수여된 노벨문학상이 취소되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작가의 고향인 폴란드의 한 도시의 시민들 사이에서는 여러해 전에 그에게 수여된 명예시민증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밝히는 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뒤늦은 고백으로 귄터 그라스가 전후의 독일 문단이나 사상계에 기여한 공로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8월 12일자)에 게재된 흥미로운 인터뷰 속에서 작가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나치 독일이 민족학살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말기를 보냈고, 포로수용소에서 맞은 패전, 그리고 전쟁 직후 광산노동자로서의 생활을 거치면서 차츰 진실에 눈떠 가는 고통스러운 ‘학습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선택한 작가,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그가 짊어진 가장 큰 과제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하던 나라가 어떻게 하여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국가로 떨어지고, 마침내 인류에 대한 극악무도한 범죄를 자행하게 되었는지, 그 내면적 과정을 천착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그는 군국주의적 유산의 극복을 저해하는 보수세력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전후 독일의 민주주의 재건에 헌신한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기억될 수 있는 생애를 살아왔다.
군국주의 혹은 국가주의에 대한 귄터 그라스의 강한 혐오감은 오랫동안 독일 통일에 반대해온 그의 논리에서도 볼 수 있다. 그가 통일을 반대한 것은 통일된 거대국가 독일이 또다시 국가주의에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동서독의 통일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 전체의 모든 주(州)가 각기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분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특이한 정치적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제안에는 철저한 분권주의자, 민주주의의 옹호자로서의 일관된 사상과 신념이 표명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위의 인터뷰의 한 대목에서 귄터 그라스는 특히 기억할 만한 인상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가령 독일은 완벽한 패배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에 비해서 패배를 경험해보지 못한 여타 서구 국가들은 과거 식민지 지배에 관련하여 그들이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승리했기 때문에, 과거의 죄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고, 과거로부터 뭔가를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귄터 그라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개인이나 국가를 불문하고 “이기면 바보가 된다”는 것은 진리인지도 모른다.
북한 핵실험으로 인해 극도로 긴장되었던 정세가 핵실험 3주 만에 잠시나마 다시 진정국면으로 접어든 느낌이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가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북핵문제는 잘못하면 바로 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너무나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철두철미 평화적인 방법, 즉 대화와 설득,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논리이다. “국지적인 전쟁을 각오하고라도”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이나 일본 혹은 한국 내의 보수 강경파의 논리는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일단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밑바닥 민중의 처지에서 볼 때, 결코 용납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의도, 어떠한 동기에 의해서든 미국이나 북한이 6자회담의 틀 속에서나마 일단 대화를 재개하기로 합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 대화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며칠 후에 있을 미국의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강온(强穩)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북한 혹은 북핵문제를 대하는 미국의 고압적인 자세가 달라지리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실제로 희박하다. 시간이 갈수록 이번의 대화재개에 대한 합의도 결국 진정한 문제해결을 바라는 열의가 아니라 단지 정략적인 계산에 의한 것임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한반도 주변 정세는 위기상황으로 치달을 것이고,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을 포기하고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활개를 칠 것이다. 그 결과 이미 우리의 의식과 행동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우리의 삶을 뿌리로부터 왜곡시켜온 ‘안보논리’ 혹은 군사주의적 멘탈리티의 덫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지 모른다.
이른바 북핵문제가 난제인 진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 점에 관련하여, 지난 2월《월간중앙》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한 인터뷰(‘Korea and International Affairs’ ZNet, 2006.2.22)에서 노엄 촘스키 교수가 행한 발언은 매우 흥미로운 시사를 던져준다. 촘스키 교수는 현재 인류가 직면한 두가지 가장 큰 위협으로 핵무기와 환경위기를 들면서, “환경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내 생각에 핵무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핵 확산을 저지하고자 하는 인류사회의 염원을 존중하고, 국제조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핵 확산 문제는 간단히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이 이러한 방향과 거꾸로 가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냉전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군비증강이나 핵무장의 명분이 사실상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세계질서’ 혹은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는 이름 밑에 미국의 국방예산은 오히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증가되어왔다. 게다가, 이른바 ‘네오콘’이 주도하는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은 온 세계에 대해 ‘제국’으로 군림하겠다는 자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9?11 테러라는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자 왜 그러한 미증유의 테러가 발생했는지에 관한 성찰과 학습의 노력은 방기(放棄)하고, 미국은 오히려 이 사태를 호기(好機)로 삼아, 국제법상으로 금지되어 있는 ‘선제공격’의 권리를 천명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고, 그 결과 무고한 인명과 삶터가 무자비하게 살상, 유린되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정부는 기후변화에 대한 교토협약에 협력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인류 전체의 사활적인 운명이 걸려있는 절박한 문제에 대처하려는 문명사회의 노력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형사재판소의 설치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 생물무기협약 혹은 대인지뢰금지법 등 정의와 평화의 구조를 보다 견고히 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일관되게 무시해왔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류사회가 괴멸적인 재앙에 직면하든 말든, ‘미국적 생활방식’은 여하한 경우에도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미국의 산업과 경제활동의 축소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후변화협약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논리이다. 또한,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국제적인 공동의 노력에 합류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오히려 갈수록 끔찍한 신무기의 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게 오늘날 미국의 기본자세이다.
핵 확산 방지 문제에 있어서도 국제적인 상식과 법률, 혹은 공정성의 원칙을 무시하는 미국의 자기중심적인 자세는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이나 인도의 핵 보유에 대한 미국의 너그러운 태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북한이나 이란의 핵개발 문제에 대해서 미국이 드러내는 뿌리깊이 적대적인 태도는 심히 일관성을 잃은 자세로 비쳐지기에 충분한 것이다.
물론, 어떠한 명분으로든 누구에 의해서든 ‘악마의 무기’인 핵무기의 보유가 허용되어서 안된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세계의 경찰노릇을 자임하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설득력을 갖고, 정말 효과적인 것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미국 자신이 세계인들로부터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행동을 보여주고, 최소한 외교정책에 있어서 공정성과 일관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지금 북한이 핵무기를 실험하는 단계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로 국제법이나 조약의 위반인지는 분명치 않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국제사법재판소는 1996년에 “극단적인 환경 하에서의 자위목적, 즉 생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될 때, 한 국가의 핵무기 사용이 합법적인지 불법적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개번 매코맥《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박성준 옮김, 이카루스미디어, 2006년, 243쪽)
북핵문제를 파악하는 데 균형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기초적인 사실의 하나는 “지난 10년 이상 워싱턴에서 북한의 핵 위협이 주요 이슈가 되어왔지만, 평양에서는 미국으로부터의 핵 위협이 지난 50년간 중심적인 이슈가 되어왔다”(위의 책, 232쪽)는 점이다. 매코맥 교수의 말대로, 핵 시대에 있어서 북한이 처한 독특한 처지는 북한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오랫동안 핵 위협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왔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동안 북한은 미국의 핵 공격을 간신히 모면했고, 1953년의 휴전협정 4년 뒤에 남한에 도입되기 시작한 미국의 핵무기는 북한에 대하여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다. 1991년 이 핵무기들이 남한에서 철수된 이후에도 북한이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은 여러 형태로 지속되어왔다.
수십년에 걸쳐 핵 공격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정권이 자기방위의 궁극적 수단으로 핵 억지력을 개발하고자 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가공할 무기를 최초로 개발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실제로 투하한 이후, 세계의 여러 나라로 핵무기가 확산되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핵무기가 주는 위협과 거기에 대응하고자 하는 자기방위 논리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결과적으로 ‘억지력’을 갖고 있지 않은 국가 혹은 정권이 어떤 비참한 운명에 떨어지는지를 극명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부시 정부에 의해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된 북한정권이 심각한 불안감에 갇혀 궁극적인 ‘자위수단’의 개발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핵실험을 결행한 북한정권은 미국이 정권교체 혹은 체제변형을 기도하여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북한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태도를 확실히 해준다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계속해서 표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북한당국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미국, 일본, 한국 내 보수 강경파들의 입장과,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 정도로는 생존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북한당국 사이의 뿌리깊은 상호불신이 지금 당장 북핵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현실적인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애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쉬운 대답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할 것은 이러한 상호불신이 증폭된 결과로서, 북한에 대한 극단적인 압박이나 폭력적인 개입을 통해서 전쟁이 발발하거나, 북한사회―나아가서는 한반도 전체―가 혼돈상태로 빠져든다든지, 혹은 북한 핵 보유가 기정사실이 됨으로써 동아시아 전역에 걷잡을 수 없는 핵 확산 혹은 군비증강 경쟁이라는 사태가 전개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김정일 정권을 옹호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북핵문제에 잘못 대응한 결과로 전쟁이나 극심한 혼란상태가 발생하든, 아니면 동아시아 지역에서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경쟁 체제가 강화되든, 그 어느 쪽이든 결국 가혹한 시련과 희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지역의 풀뿌리 민중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미국, 일본, 한국의 지배계층, 권력 엘리트 및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전문가, 학자, 지식인들의 입장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리 척박할지라도 자기 땅에 뿌리를 박고, 이웃과 더불어 삶을 가꾸고, 새끼들을 키울 수밖에 없는 밑바닥 민중의 입장에서 사태를 보는 것이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을 되풀이하였지만, 북핵 사태라는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세계는 임박한 환경재앙에서 에너지 위기,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인간성과 문화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온갖 국면에서 수습하기 어려운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갈수록 자폐적인 이기심에 갇혀 오히려 세계평화를 어지럽히고, 인류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주범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 침략을 감행하여 석유자원을 확보해놓는다고 해서 세계전역에 걸쳐 조만간 들이닥칠 피크오일(Peak Oil) 사태나 에너지 위기상황에서 미국만이 예외적으로 자신의 반생태적이며 배타적인 생활방식을 언제까지나 향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산업과 경제활동의 위축을 우려하여 기후변화협약을 무시한다고 해서 지구온난화로 인한 전지구적인 대재앙을 미국만이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나 명백하다.
이 명백한 이치가 미국의 외교정책과 군사적 전략에도 그대로 해당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중국의 위협’이라는 가정에 입각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군사적 네트워크를 정비하고 그 기동성을 강화한다고 해서, 또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적 지위의 영구적인 유지를 위해서 이 지역에서의 평화구조의 정착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것으로써 미국이 설령 일시적인 국익의 확보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공생의 논리’를 거부하는 그러한 정책 혹은 전략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힘의 쇠퇴’에 기여할 공산이 크다.
최근 영국신문〈가디언〉(11월 2일자)이 발표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미국정부의 도덕적 위신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여론조사에 의하면, 지금 세계여론의 압도적인 다수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는 이란도, 북한도 아닌 미국정부이다. 세계의 다수 대중에 의해서 공포나 증오의 대상이 되거나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을 뿐인 ‘제국’이 오래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미국이 자기자신의 건국의 이상에 반하여, 세계의 약자들의 자립적·자주적인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라틴아메리카를 위시하여, 아시아·아프리카에서 민중의 해방투쟁에 제동을 걸고 미국이 개입해온 사례는 열거할 필요도 없지만, 이러한 개입의 역사에서 유럽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목할 것은 특히 양차 대전 사이 유럽에서의 파시즘의 대두라는 사태에 대하여 미국이 보여준 반응이다. 파시즘의 대두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걱정거리였지만, 그러나 미국의 정부·기업·엘리트들은 파시즘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과도한 민주주의와 좌익세력과 노동운동”을 꺾어놓는 강력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솔리니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아낌없이 이루어졌고, 히틀러에 대해서도 그가 “미국이나 영국의 국익을 지나칠 정도로 심각하게 침해하는 직접 공격을 개시할 때까지” 실질적인 지원이 계속되었다.(노엄 촘스키《패권인가, 생존인가》황의방 옮김, 까치, 2004년, 86쪽)
그러나 역시 미국의 국가적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게 된 것은 2차대전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기왕의 열강들이었던 유럽 국가들과 일본이 이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상처투성이가 된 상황에서 미국은 사실상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서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기면 바보가 된다”는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국은 지금까지 자신이 저질러왔던 온갖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자기가 제일이라는 자만심과 선민의식에 갇혀 ‘미국식 문명과 생활방식’을 세계에 좀더 적극적으로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반 일리치의 신랄한 표현을 빌려 말하면, 미국의 권력 엘리트들은 다른 국민들에게 “폭탄을 퍼부어서라도 자신이 주는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강박적 소명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지 모른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725개가 넘는 기지(基地)를 보유하는 막강한 군사대국으로서 미국의 영향력은 실로 압도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군사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미국의 산업경제는 구조적으로 극히 취약하며, 지금 미국인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운 소비생활이라는 것도 과잉생산과 빈부격차, 자원고갈, 환경오염에 의해 나날이 불안해지는 세계경제와 함께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고 이미 여러 원천에서 경고가 나오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미국경제가 무너지면 세계의 나머지 지역, 특히 미국경제와 긴밀히 연동되어 움직이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경제도 괴멸적인 타격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세계의 현실은 갈수록 공생하지 않으면 공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신호와 징후들이 증가하고 있다. 인간역사에 있어서 ‘공생의 논리’가 지금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적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제국’의 위신과 패권적 전략도, 자기방위 수단으로서의 핵무장의 선택도 무모하고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미증유의 환경재앙 앞에서 인간이 언제까지나 배타적인 자기 확대의 욕망에 갇혀 있는 한 조만간 대파국은 불가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타적인 자기 확대의 욕망은 군국주의와 전쟁을 배태하는 근원적인 심리적 토대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화 경제의 메커니즘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 경제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직면한 환경재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메커니즘을 멈추거나 방향을 전환시키려는 노력 없이 환경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환경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 촘스키 교수는 이 문제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매우 래디컬한 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전쟁의 논리나 환경파괴의 논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찍이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퇴임시에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군산복합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상 오늘날 국방산업과 군대의 존재 그 자체는 미국경제에서든 세계경제에서든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건이 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경제 시스템을 넘어서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은 환경위기와 동시에 전쟁이나 군국주의에 맞서 싸울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뿐인 지구’의 관점에서 볼 때, 무분별한 환경파괴와 오염을 초래하는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듯이, 전쟁 혹은 테러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배타적인 욕망을 키우는 어떠한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논리도 결국 공멸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환상’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전(反戰)-평화운동은 진정한 환경운동이 그렇듯이, ‘현실주의’에 맞서 싸우는 ‘이상주의적’ 운동이 아니라, 경제성장 논리=국가주의적 안보논리가 내포하고 있는 극히 비현실적인 ‘낭만적 환상’에 맞서 싸우는 현실주의자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핵실험으로 빚어진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데 이 시점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미국정부를 비롯하여,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 내 권력 엘리트들의 태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좀더 덕(德)의 실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간청해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생의 논리’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반전-평화운동을 더욱 강화?확대하고, 나아가 ‘민중의 평화로운 삶’을 파괴하는 온갖 형태의 군산복합체의 지배논리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을 조직하는 일일 것이다. 전쟁을 저지하고, 평화를 옹호하는 길은 결국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우리의 삶과 삶터를 지키는 운동에 헌신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