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말과 글’로 넘쳐난다. 인터넷을 켜면 수없는 ‘말과 글’이 거대한 격랑으로 떠다니고, 그 홍수 같은 흐름은 실시간 단위로 물갈이된다. 하루 사이에만 수백권의 책이 쏟아진다. 텔레비전을 켜면 수십개의 채널이 동시에 돌아가고, 그 속에서 인간들은 끝없이 지껄인다. 인간이 이처럼 수다스럽게 살아야 했던 시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이 거대한 ‘말과 글의 홍수’가 잦아들고 어느 날 문득 암전이 온다면, 인간은 공포와 고독감으로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말과 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를 반영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착된 세계에 산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느낀다’.
‘황우석 사태’는 이제는 돌이켜보기조차 불쾌하지만, 여기에도 ‘말과 글’의 지배는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는 한동안 엉터리 과학자의 사기극이 폭로되는 과정을 진땀을 빼면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사태에는 “생명이란 무엇이며,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복재해 있었다. 황우석팀이 실험실에서 벌인 일들―수천개의 난자를 실험실에서 짓누르고 뽑아내고 죽이고 살리고 했던―은 최소한 내겐 2차 세계대전 당시 관동군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본질적으로 하나 다를 것 없는 행위로 보였다. 아니 그저 보편적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었다. “저것도 인간 생명인데,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인가”라고 말이다. 단언컨대, 그것은 사기꾼의 사기행각의 전모보다 훨씬더 깊고 중요한 ‘올바름’의 문제를 담은 ‘큰 세계’였던 것이다. 우리사회의 역량이 황우석의 사기행각을 밝혀내는 데에도 힘겨웠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명을 다루는 일에 대해 생명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왜 유별난 감각으로 취급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사회가 황우석 사태를 통해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저렇게 해도 되는 거구나”라는, 인간에 의한 생명조작의 용인이었다. 요컨대, 훨씬더 근원적인 ‘큰 세계’는 이 시대의 ‘말과 글’에 담기지 못함으로 인해 ‘없는 세계’가 되고 말았다.
타락한 언어가 조성한 타락한 세계의 모습이 지금 여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생각한다. 그래도 자라나는 세대는 달라야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으므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유’에 있다면, 진정한 교육은 아이들을 ‘말과 글’의 지배로부터 ‘살아있는 세계’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들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야 자신들의 지배가 유지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내가 날마다 확인하는 바, 교육현장에서 타락한 ‘말과 글’의 지배는 더욱 극악한 형태로 관철되고 있다. 그 극점에 최근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는 ‘논술 열풍’이 자리잡고 있다.
11월 중순 무렵, 수능시험이 끝나면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는 짧지만 값진 자유의 시간이 주어진다. 많은 아이들은 정보지를 뒤적거려 일자리를 찾고, 아르바이트라는 걸 시작한다. 그래서 커다란 쟁반을 들고 주방과 테이블을 숨이 차도록 오간 대가로 한 시간에 3천원을 받는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2년간 죽은 활자의 포로가 되어야 했던 아이들에게는 비록 턱없는 저임금에 열악한 노동조건이지만, 그래도 몹시 가치로운 경험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논술이 필요한 아이들은 그나마의 ‘살아있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노동의 몇백 몇천 시간어치가 든 돈가방을 싸들고 다시 강남으로 강남으로 모여든다. 이 대목에서는 정말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이 서글픈 ‘논술 열풍’을 통해 우리사회와 교육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어리둥절해 있을 많은 이들에게 현장에서 내가 겪은 논술교육의 실상이나마 전해주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이들을 ‘말과 글’의 지배를 넘어 ‘살아있는 세계’로 이끌어주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살펴보고 싶다.
‘논술교육’의 기쁨과 좌절
나는 논술과 관련된 일을 비교적 많이 해본 편이다. 교사가 되기 전, 대학원 다닐 무렵에는 첨삭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서 면접·구술고사 예상문제와 모범답안 만드는 일, 논술에 필요한 고전도서를 해설하는 일, 그리고 논술 모의고사 출제까지 근 3년간 논술과 관련된 일을 했다. 솔직히 그때는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고, 보수도 꽤 높아서 만족하며 이 일들을 했다.
한가지 인상 깊었던 체험은 첨삭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할 무렵에 겪은 일이다. 그때 논제가 대략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생태론적인 대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손에 들어온 첫 답안지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 학생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오래된 미래》를 심층 생태주의로 규정하고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론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었는데, 한창 입시 준비에 몰두하고 있을 수험생이 어떻게 머레이 북친과 그 당시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여사의 책을 읽었을까,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장 두장 첨삭을 계속하다가 그 감동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북친과 노르베리-호지의 입장을 논거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학원의 논술 강사가 모의고사를 앞두고 수업해 준 내용을 천편일률적으로 옮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더 읽다 보니 생태론의 기본적인 가정, 즉 현대사회의 지속불가능성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이나 이해도 없이 SF영화 같은 감각으로 황당한 가설을 늘어놓는 답도 적지 않았다. 나중에는 몹시 짜증이 났고, 이런 답안을 작성한 학생들의 지적 수준마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첨삭을 마치고 답안지를 들고 그 학원 논술실로 가서 답안지를 작성한 학생들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이들은 그 학원의 지역 분점인 강남 D학원생들로,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제일 높은 집단이며, 대부분이 이른바 ‘SKY 대학’ 이상으로 진학한다는 거였다. 상당히 놀라웠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 ‘논술교육’의 본질을 알아챌 수 있었음에도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논술 사교육 시장에서 돈을 벌어 대학원을 마친 뒤 교사가 되었다. 몇년간은 논술과 담을 쌓고 지낼 수 있었다. 대신 수업시간을 활용해 이런 시도를 해보았다.《한겨레21》지난호를 한달에 한번씩 싼 값으로 사서 반마다 네댓개의 모둠을 지어 한주에 한권씩 돌려 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트를 한권 마련해서 자신이 그 주에 받은 잡지에서 제일 인상적인 기사를 한편씩 선정해서 간단한 요약과 함께 자기 소감을 적는 것이다. 이 과제를 수행평가로 돌렸는데, 아이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했고, 나 또한 두달에 한번씩 200권 가까운 노트를 읽고 짧은 논평을 달아 되돌려주는 일이 무척 고됐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즐거웠다. 상당수 아이들에게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이미 제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던 세상에 대한 고민의 갈피를 잡아가면서 생각들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힘들었지만 무척 보람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고향의 모교로 학교를 옮겼다. 비평준화 지역인 이곳에서 학교간 경쟁은 내가 졸업한 지 십수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맹렬했다. 학교측은 내게 논술 및 면접 준비반을 지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2년 과정의 커리큘럼을 구상하고 10~12명 정도의 동아리를 꾸렸다. 매주 한번씩, 저녁 세시간 동안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전반부 1년은 자유로운 독서와 주제토론, 생활글쓰기, 일상적인 생활 나눔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후반부 1년은 논술고사를 위한 실전준비로 진행했다. 전반부 1년은 아이들이나 나나 모두 참으로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꽤 많은 책을 읽었고, 1년간 공책 한권이 다 차도록 글을 썼다.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할 말이 많고, 또한 그 말을 참고 사는지, 마음속에 꼭꼭 개켜놓은 상처와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의 뒤표지에 나오는, 고통받는 현대인들의 아홉가지 유형 중 하나를 골라 이야기하던 시간, 한명씩 돌아가며 제 삶의 현재와 현재의 고통을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어느 수업시간은 일생토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그 1년은 교사인 나에게는 감동과 격려의 시간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앎과 치유의 시간이었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고3이 된 아이들과 후반부 1년의 수업을 하면서, 각자 희망하는 대학을 겨냥한 논술고사 준비로 들어가면서부터 많은 부분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전반부와 후반부의 커다란 낙차를 조절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그러나 얼마간 조정은 가능했겠지만, 결국 여기에 논술의 딜레마와 본원적인 한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느슨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정말 눈부신 글들을 썼다. 그러나 기출 논제를 앞에 두고, 네모난 1,000자 원고지 안에 ‘나’를 철저히 배제한 채 써 내려가야 하는 논술문 앞에서 아이들은 심하게 허둥거렸다. 생활글에서 싱싱하게 살아있던 구어 감각은 객관의 문어체와 극심한 충돌을 겪었고, 그 충돌은 열여덟살, 열아홉살 아이들의 지성으로는 가다듬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아이들이 써낸 생활글들에 내가 달아주는 짧은 논평은 그래도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교류의 장이었지만, 논술문 첨삭은 그야말로 서로간의 괴로움이었다. 논제의 규격 안에 힘겹게 우겨넣은 글들은 내가 지난 1년간 파악한 그 아이의 세계 인식과 고민의 지평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고, 아이들은 빨간색 사인펜으로 이리저리 고쳐놓은 첨삭 원고지 앞에서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미안해 했다.
그 시간 동안 내게도 수많은 번민이 찾아왔다. 전반부 1년의 수업은 결국 ‘현실’과는 동떨어진, 낭만적인 실험에 불과했던 것이었을까, 어떻게 논술을 가르쳐야 할까,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아이들은 학원의 4주 완성, 7주 완성 강의처럼 꼭꼭 씹어 입에 떠넣어 주지 못하는 내 수업에 어느덧 불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고맙게도 그런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다행히 첫해 입시 결과는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했던 논술수업이 합격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2년 과정의 논술수업을 세번 정도 돌렸다. 나는 최초의 ‘낙차’를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리고 내 몸부림은 ‘돈’과 ‘사교육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공교육 틀 안에서 일구어낼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몸이 지쳐갔다. 정규 수업과 담임 업무, 도서관 운영까지 하면서 일주일에 하루 혹은 이틀씩 늦은 밤까지 수업하고 첨삭해주는 고된 일과를 버텨나가야 했다. 결국 이런 논술교육이란 ‘지속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고, 그 마지막 세 바퀴를 다 돌린 지난 겨울 무렵 나는 ‘논술’에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몸이 힘들었지만 논술에 대한 비관적인, 그러나 뚜렷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기출 논제 하나를 임의로 골라 분석하면서 그 이야기를 조금더 해 보자.
논술고사를 통해 ‘실제로’ 측정할 수 있는 요소
아래 문항은 2003년 연세대 인문계 정시 논술 문제이다.
[문제] 이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1. 이미지는 심오한 현실을 표현한다. 아래 제시문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세가지 관점을 각각 설명하고 자신의 입장을 논하시오. (가) 미술사학자 최완수 선생의 글〈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일부이다. 겸재 정선의 탁월한 예술적 직관으로 금강산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것을 묘사한 찬탄조의 제시문이다. (나) 앙리 르페브르의 글〈현대 세계의 일상성〉의 일부이다. 스킨 광고를 분석한 글인데, 실제로는 무관한 두 요소―뜨거운 태양 아래 파도와 싸우는 강인한 남성의 사진과 스킨 광고 문구―를 결합시킴으로써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광고 전략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제시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물론 이 논제는 보는 시각에 따라 매우 우수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 논제는 제시문에 대한 독해력과 함께 ‘이미지’를 매개로 예술과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까지 연결지을 수 있는 역량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 논제는 우선 너무 어렵다. 이 논제를 풀면서 출제자가 의도한 이해력―예술과 이미지, 현대 사회와 일상성, 이미지의 왜곡과 은폐, 이미지의 프로파간다 기능 따위에 대한―을 드러낼 수 있는 수험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때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대학교수들에게 이 시험을 치르게 해도 점수는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숱한 기술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이 기술적인 문제가 현행 논술고사가 안고 있는 극히 반교육적인 본질을 잘 드러낸다.
위 논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우선 “1번 관점 ― (가)제시문”, “2번 관점 ― (나)제시문”, “3번 관점 ― (다)제시문” 이런 식으로 연결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진 아이들은 2, 3번 관점과 (나),(다)제시문을 서로 엇갈리게 연결짓기도 했다. 출제자의 의도와 다른 판단이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 채점 과정에서도 그 판단의 창의성은 충분히 고려되겠지만, 출발부터 ‘삐딱선’을 탄 학생은 그후로 몹시 괴로운 논리전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2번 관점과 3번 관점이 실제 논술 과정에서 서로 뒤섞이고, 논거가 뒤섞이고, 스스로도 ‘뭔가 잘못 짚은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인해 논술문은 시종일관 갈팡질팡한다. 말하자면, 위 논제는 제시문에 대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이해보다는 단순하면서도 도식적으로 생각하는 학생이 훨씬더 ‘편하게’ 이해하도록 돼 있다.
또 이런 문제가 있다. 논제는 “①제시문을 바탕으로, ②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③자신의 입장을 논술하라”는 세가지 조건을 달고 있다. 내가 첨삭하면서 확인한 바, 상당수 아이들은 우선 ①번 조건, 즉 ‘제시문을 바탕으로’ 하라는 말이 제시문 안에서 예를 들라는 뜻인지, 제시문 바깥의 예를 들라는 뜻인지를 판단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출제자의 의도는 후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상당수 아이들은 전자로 이해하고 ‘제시문 안에서 놀았다’. 이 논제로 대학교수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한들 ①번 조건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논술고사 문제 유형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손쉽게 범할 수 있는 작은 실수이지만, 그 실수의 대가는 아주 무서운 것이다. 글 전체의 방향타가 어긋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②번 조건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장 활용 가능한 ‘암기된 지식’ 없이 그저 폭넓게 읽고 사색한 학생은 실제 ‘시험’ 앞에서 어떤 예를 써야 할지 몹시 막막해 한다. 제시문말고는 자신의 독서와 인생체험을 이끌어낼 아무런 참고자료도 없이, 혹은 자료를 참고할 가능성을 배제한 채, 두시간 이내에 원고지 8~9매(1,500~1,800자) 이내로 작성하라는 요구는 실은 매우 반지성적인 것이다. 요컨대 위 논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출제 의도를 파악하고 답안 작성으로 나아가는 ‘도식’을 학습해야 한다. 그리고 실전에 활용 가능한 ‘요약된 지식’들을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만 있으면 아무런 독서체험과 사고력이 없어도 최소한 중간 이상은 할 수 있지만, 그것 없이 독서와 사고력만으로 무장한 학생은 문턱에서부터 허둥거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개요 쓰기’를 생각해 보자. 논리적인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바로 이 개요 쓰기다. 개요는 인식과 표현의 중간 지대에 서 있는 발화의 뼈대이다. 그러나 비록 규격화된 논술문일지라도 그것이 ‘글’인 이상 개요 쓰기는 글쓴이의 ‘스타일’이 궁극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같은 체험을 가진 두 사람, 이를테면 박노자 교수와 소설가 박민규가 있다면 두 사람은 아마 판이한 개요를 작성할 것이다. 그러나 논술강의에서 개요 쓰기는 매우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가르쳐진다. 개인의 스타일에 대한 존중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따라서 개요는 표현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기준으로 짜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논술을 통해 개인의 창의성을 측정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완전히 그릇된 것이다.
내 판단은 이렇다. 현행 논술고사는 ‘시험을 위한 시험’이다. 논술고사를 통해 측정할 수 있는 요소는 이런 것이다. 3년 동안 내신을 관리하고 수능을 준비하면서, 논술까지 챙길 수 있는 ‘체력’,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의 습득 및 암기 정도, 단순 반복적인 훈련의 충실성, 그리고 이런 훈련과정을 효율적으로 지도해주는 ‘양질의 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부모의 경제력, 아마 이 정도가 될 것이다.
논술고사의 파행은 극히 단순한 사실에서 연유한다. 논술고사의 도입 자체가 극히 반교육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능시험이 도입된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내신-수능-대학별 고사가 대입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내신과 수능의 오랜 갈등, 사교육의 팽창과 공교육의 위축, 수능의 난이도 논란, 내신의 변별력 논란 속에서 상위권 대학은 대체로 수능과 내신을 기본 요건으로 하면서 논술 및 면접고사로 변별력을 찾게 되었다. 이 속에는 손 안대고 코 풀려는 격으로 다양한 학생 선발방식을 스스로 개발하지 않고 우수한 학생을 손쉽게 독점하려는 대학의 욕심이 깔려 있고,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을 독점한 상류층과 어떻게든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보려는 차상위계층 간의 쟁투와 상호 타협이 깔려 있다. 요컨대 논술고사는 대학입시제도를 둘러싼 제 요소, 제 세력들 간의 혈전의 역사가 잉태한 기괴한 사생아이다. 논술고사는 오직 상위 30% 이내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해(변별력을 얻기 위해) 도입된,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상위 30%의 ‘인적 자원’의 등급을 감별해내기 위한 기제일 뿐이다.
아무리 대학 입학고사라 하지만, 논술은 중등교육에서 이루어지며 중등교육의 성과를 측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논술이 중등교육으로 담아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담보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변별력’ 획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 한국교육의 현실이 이렇다. 내신에서 수능으로, 수능에서 내신으로, 이제는 논술로, 아이들이 대학입학을 위해 점령해야 할 각개전투의 고지는 계속 늘어난다. 이제 또 무슨 고지가 새로 솟아오를 것인가.
‘교양’이란 무엇인가
대학입시에서 논술이 ‘뜨기’ 시작하니, 이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논술을 시켜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방방곡곡에 독서·논술 간판을 내건 학원들이 생겨나고, 거의 모든 일간지가 논술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희한한 것은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살박이 아이가 책을 읽고 그것으로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것이 그 아이의 삶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런 맥락에서 인문 교양이란 무엇인지, 따져 묻는 사람은 잘 없다. 이 폭발적인 ‘교양 교육’의 나라에서 말이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강유원《책과 세계》(살림, 2004년) 중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교양’이란 책을 많이 읽는 것, 논리적으로 우수한 글을 쓰는 것과 별 상관이 없다. 이 시대의 우수한 교양인은 이 타락한 ‘말과 글’의 지배에 더욱 깊이 감염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살아있는 세계를 믿지 않고 ‘말과 글’을 존중하는 도착된 의식, 현실적인 쓸모밖에 볼 줄 모르는 유치한 계산속, 쓸데없는 엘리트 의식으로 양 어깨가 빵빵한 가련한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훨씬더 높다는 말이다. 교양이란, 실제적인 쓸모가 없고, 값 없이 주어져야 하며, 그 값 없음, 쓸모없음으로 제 쓸모를 찾는다. 교양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이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 되는 그 순간부터 교양은 타락한다.
그렇다면, 교양이란 대체 뭘까. 언젠가 월간《우리교육》을 읽다가 미국에서 노숙자, 부랑자들을 위한 ‘클레멘트 코스’라는 인문교육 과정을 창안한 사회운동가 얼 쇼리스를 소개한 글을 읽고 작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노숙자들과 플라톤을 읽으며 인생의 의미를 토론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자존감과 ‘생의 의지’로 노숙자들과 부랑자들은 다시 일어서게 된다. 얼 쇼리스를 통해 보듯 교양은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소외받은 존재에게 더욱 긴요한 것이다. 그러나 꼭 플라톤을 읽히는 것만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가져 오지 않는 아이들이 태반이라는 실업계 아이들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교정의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끼워넣거나 거기에 시를 적어 코팅해서 갖게 하는 것도 탁월한 교양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교양이란 “인간의 자존감, 인간성, 자기 존재의 조화로움에 대한 심미적인 감각”과 깊이 연관된 덕목이다.
논술은 ‘보편 인문 교양 교육’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논술은 딱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논술의 중요성이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일기 쓰기가 가지는 의미의 1/10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터넷으로 논술강좌를 들은 한 아이와 대화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사 선생님이, 토론도 그렇고 논술도 그렇고, 중간 지대는 없고 오직 찬/반 두개밖에 없으니깐,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르더라도 일단 어느 한 입장을 정해서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 ‘공격’해야 하는 거라고, 어떤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왜’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 답변을 갖춰 놓지 못하면 결국 지고 마는 거라고….” 그 아이는 논술과 토론이 몹시 두렵고 공포마저 느껴지는데, 아마도 강사 선생님이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교양은 ‘관용’이며 ‘좋은 언어’이다. 아이들의 영혼은 너그럽고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만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다. 진정한 앎이란 ‘좋은 언어’가 구성하는 것이다. 논술 따위가 결코 교양교육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바로 타락한 교육의 징표인 것은 그 발상과 형식 모두가 ‘불관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불관용의 공기 속에서 ‘좋은 언어’는 자라날 수 없다. 논술은 지금껏 우리 교육을 질식으로 이끌어온 억압의 기제들이 이제는 ‘인문교양’의 옷을 갈아입고 등장한, ‘새로운 적’일 뿐이다.
‘좋은 언어’와 관용의 정신
이제 단순하게 정리해 보자. 문제는 ‘말과 글’이 아니라, 이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자신’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바로 양심적인 인간이다.
교양인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보는 것보다는 읽는 게 좋고, 읽는 것보다는 대화가 좋고, 대화보다는 침묵이 좋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좋은 교양교육은, 아이들이 자유롭고 너그러운 공기 속에서 힘껏 ‘노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을 만나고,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대면할 때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한다.
학교란 그저 ‘세속적 보편교회’(라이머)일 뿐이다. 이 교회의 집사이자, ‘한국의 학교’라는 감옥의 간수에 불과한 내가 그나마 아이들의 교양을 위해 해온 일이란 아이들과 꾸준히 일기를 써온 것이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한 나는 아이들에게 일기쓰기를 가르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뜻있는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정도이다. 교실 한켠에 마련한 작은 학급문고, 독서공책에 달아주는 정성스런 답글, 따뜻한 대화, 명상, 학년 말의 문집 만들기, 상위 10%와 하위 10%에게 차별 없이 베풀었던 이 가르침의 길을 지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불관용과 통제가 인이 박힌 이 교육현장에서 자유롭고 너그러운 공기를 위해 안팎으로 투쟁하는 길이다.
신동엽의〈좋은 언어〉라는 시가 있다. 신동엽 시인은 서른아홉의 청년으로 죽었지만, 돌이켜보았을 때 그는 선지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은 신동엽 시인이 유고로 남긴 그 시의 일부이다.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신동엽〈좋은 언어〉(《사상계》1970년 4월) 부분
이 더할 수 없이 수다스러운 세계에서, 언어의 타락이 꼭대기까지 차오른 세계에서, 우리 또한 수없이 ‘말과 글’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남은 것은 없고 우리의 내면은 공허하기만 하다. 지금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갈급한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