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학은 죽었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등장한 서구의 근대 학문인 이른바 근대경제학은 이제 숫자더미에 파묻혀 압사했다. 물론 자본주의 근대경제학과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맑스 엥겔스의 사회주의 경제학 또한 스스로 동반자살해 버렸다. 이제는 그 무덤 자리가 어딘지조차 아무도 모르고 또 관심도 없다.
오늘날 경제학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경세제민하는 인간의 경제학이 아니다. 이미 경제학은 기계가, 거대 슈퍼컴퓨터가 조작하는 통계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믿거나 말거나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숫자일 뿐이다. 특히 미국이라는 제국의 대학에서 제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누런 피부 흰 가면’의 이른바 세계화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배운 매판경제학자들은 더 그렇다.
사실 서구의 근대경제학은 ‘무한한 욕구’를 지닌,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데만 골몰하는 이기심으로 가득찬 경제인(Homo economicus)이란 개념 위에 집을 지음으로써 처음부터 허구의 학문이었다. 수많은 수렵채취 사회와 농경사회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이기심과 함께 또한 이타심을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살아가는 무리생활의 ‘사회인’이며, 적절한 욕구, 때에 따라서는 최소한의 욕구만 갖고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근대경제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필요에 따라 ‘무한한 상품’을 팔기 위해 무한한 욕구를 지닌 경제인을 주조하고 생산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경제인들이 시장에 넘쳐남에 따라 역설이지만 경제학 자체가 혼돈 속에서 잘게 갈라지고 마침내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제학 논문들은 나날이 산더미처럼 생산된다. 그리고 곧바로 쓰레기차가 수거해 가버린다. 사람도 사라지고 없는 유령의 기계도시에서 여전히 경제학 자판기는 수많은 국가기구와 각종 대학과 각종 연구소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 단추를 누르면 형형색색의 상품이 튀어나온다. 그 기계도시의 주인은 윌리엄 블레이크란 영국 시인이 표현한 바 ‘악마의 맷돌’처럼 인간과 자연을 가루로 분쇄하며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는 리바이어던, 전지구로 퍼져간 암세포 같은 시장경제란 괴물이다.
오늘날의 도시는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기계들이 사는 도시이다. 공장과 사무실을 채우고 있는 노동자는 상품생산에 필요한 기계일 뿐이다. 시민들은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기계일 뿐이다. 도시의 길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주인이다. 도시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도시인들은 자신이 사람임을 자각한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끔찍한 교통지옥에도 도시를 탈출하는 자동차 행렬이 줄을 잇는다. 이것이 근대경제학이 추구하는 이상이었을까.
데카르트는 사람 자체를 하나의 기계로 생각했고 이는 이른바 근대 인간관의 기초로서 지금까지 서구를 지배하는 모든 과학의 주춧돌과도 같은 기본인식이었다. 줄기세포라는 생명체를 키워 그 장기를 잘라내 환자에게 이식한다는 이른바 생명공학은 이런 기계론적 인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그 발상 자체가 끔찍한 과학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근대의 경제학 또한 사회진화론을 토대로 이같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회과학이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기계인간론과 시장에 대한 맹신이 거의 신앙처럼 굳어진 ‘경제인’들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근대경제학은 그 이상을 실현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한국의 경제학 교과서는 대부분 미국 경제학 교과서를 베끼거나 모방한 것들이다. 그런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어디나 경제학의 정의가 나와 있고 또 그 정의에는 예외없이 경제학이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근대경제학이 희소한 자원에 깊은 관심을 가져본 적은 별로 없었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존 스튜어트 밀은 아예 무한한 상품을 전제로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했으니 더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다. 하긴 17세기 중반, 이미 런던의 공해문제가 심각해지자 윌리엄 페티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가 환경문제를 제기하긴 했다. 그러나 밀과 알프레드 마샬은 산업혁명 이후의 심각한 공해문제도 외부불경제로, 피구는 사회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으로 모두 보조금과 과징금 정도만 있으면 해결가능한 예외현상이라고 간주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원의 유한함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고 생산과 소비의 거의 영원한 재생산, 곧 교환가치에 관심을 집중시켰을 뿐이었다.
이들과 달리 자연은 유한하며 때문에 상품생산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 근대경제학자가 있긴 있었다. 바로 아담 스미스가 그 사람이다. 아담 스미스는 한 나라의 토지와 그 생산물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결코 무한일 수 없고 한계가 있으며 이것이 모든 사람들을 부양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조업의 원료도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며 공업은 자연을 소비하고 가공함으로써 사회를 빈곤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고 가족노동을 통해 자신이 필요한 생활자료를 얻는 땅을 가는 농민이야말로 참된 주인이며 세계 속의 독립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서구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담 스미스 또한 근대 자본주의 발전이 진보라고 신봉하고 동양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미개를 비웃은 인종편견주의자이긴 했지만 말이다.
서구에서 아담 스미스처럼 자연의 유한함을 언급한 경제학자는 흔치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지구는 서구 자본주의 상품생산과 시장 확대를 위해 자연자원을 아낌없이 또 끊임없이 내주는 무한의 노예이자 식민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과 미국의 상품생산은 절정에 이르렀고 그제서야 산업생산이 가져온 자연파괴의 끔찍한 실상이 서서히 서구 근대 경제인들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인《성장의 한계》는 인구문제, 자원문제, 식량문제, 환경오염 문제를 집대성해서 서구 경제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킨 전환점 역할을 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로마클럽 보고서 또한 성장에서 균형으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구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근본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서구 자본주의 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의 의문은 이미 간디나 이반 일리치, 레이첼 카슨, 장일순 같은 비경제학자들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생태주의의 생각들은 근대경제학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기계도시의 수렁에서 자연스럽게 걸어나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함을 사람들에게 역설했다. 그리고 이런 풀뿌리 생태주의의 목소리들이야말로 지구에 필요한, 인간과 사회에 필요한 단순하고도 새로운 경제학이었다.
로마클럽 보고서는 우리나라에서는 1972년《인류의 위기》란 제목으로 값싸게 문고판으로 나왔다. 어느 재벌이 세금회피를 목적으로 만든 문화재단의 출판사업 일환이었다. 책값이 아마 1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3년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 그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이 얘기는 사실이긴 하지만 우리는 보고서 결론에 나와 있는 대로 전력을 다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해야 하며 그 과정의 환경오염과 자원, 인구 문제도 사회주의 혁명이 해결해줄 것이야. 나는 그 당시 철저한 근대주의자, 혁명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2.
한국에서 근대화, 서구화는 일종의 신앙이었다. 20세기 초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난 뒤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근본 까닭을 서구문명을 좀더 일찍 받아들이지 못한 뒤늦은 학습과 뒤늦은 모방에서 찾았다. 민족해방운동의 좌파든 우파든 서구 산업문명을 지고지선의 목표로 받아들이고 우리나라를 개명한 서구사회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 같았다. 역사는 아시아의 정체성을 벗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진보하게 되어있으며 이는 필연이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도 스스로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싹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까지 나왔겠는가.
1945년 해방이 되고 분단과 함께 남과 북은 각각 자본주의 산업화, 사회주의 산업화 정책을 채택해 급속한 경제성장과 발전 전략을 펼쳐나갔다. 서구를 모델로 서구를 번역하는 근대화 사업이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민족경제를 추구했던 북한은 지금 해마다 수많은 인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기이한 왕조 군사독재 체제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대외의존 수출경제를 추구했던 남한은 세계 십몇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풍요한 나라가 되었다. 때문에 시장경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는 남한에서는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쓰인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유럽 문명은 세계사 전체로 놓고 보면 지극히 기이하고도 해괴한 발명품이다. 짧은 시기에 이처럼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은 재앙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폴라니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시장이 지배하는 경제는 근대 이전에는 단 한번도 없었다. 교환을 통한 이윤과 이익이 인간 경제에서 그토록 중요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1973년 마왕퇴에서 발견된《노자》백서본(帛書本)과 1993년 곽점촌에서 발굴된 곽점본(郭店本)을 놓고 일단의 연구자들 가운데는 노자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 출토된 백서본은 기존 왕필본(王弼本)이《도덕경》으로 불리는 데 비해 덕경(德經)이 도경(道經) 앞에 나와《덕도경(德道經)》으로 불린다. 시기가 훨씬더 앞서는 곽점본은 기존 왕필본과 그 구성과 글자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백서본과 곽점본을 바탕으로 노자는 개인의 수양론과 국가 부정의 관점에서 잘못 읽어서는 안되며 철저히 국가와 통치자의 관점에서 쓴 것으로 다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어느 해석이 맞든 노자의 중심 주제는 강력한 국가와 국가 이전부터 존재했고 여전히 그 전통이 남아있는 소규모 자립공동체였다. 당시 이미 철제 농기구와 전쟁무기를 중심으로 수많은 기계장치들이 발명되었고 특히 묵자학파와 장자학파가 기계를 잘 만들었다. 자공과 밭에 물을 주는 농부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기계를 거부한 장자의 사상(《장자》천지편)이나 공자와 맹자의 현실 정치론은 철제 기계의 발명과 국가의 출현이라는 이같은 시대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부족공동체를 통합하여 국가가 출현하고 시장이 발달했을 뿐 아니라 화폐까지 등장했지만 동양의 농업사회는 여전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것을 강력히 억제하는 내부의 자립공동체 전통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늘 이 점을 간과한다. 동양사회는 아무리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고 생산력이 높아져도, 때때로 자연재해와 전쟁과 인구증가로 기아와 극심한 혼란이 발생해도 곧 다시 균형을 찾게 되는, 생태순환형 자립경제 체제를 수천년 동안 이어왔다.
굳이 왜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들이 어떤 곳은 잉카와 같은 국가로 나아갔음에도 다른 지역은 국가로 나아가지 않았는지 먼 데서 그 까닭을 살펴볼 필요도 없다. 우리의 삼국시대 이전 부족공동체 역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규모 자립 부족공동체 사회는 애써 국가를 만들 까닭이 없었다. 자급자족의 공동체들은 대체로 국가로 나아가는 것에 강력히 저항하는 사회의식과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농업사회는 서구의 침략이 아니라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나아갈 하등의 까닭이 없었다. 서구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본질은 철저한 침략이며 다른 자급자족 공동체의 철저한 파괴와 살육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지리상 발견 이래 서구 자본주의의 침략과 자립공동체 파괴와 원주민 살육을 조금만 생각해보라. 수천만에 이르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공동체, 호주의 태즈매니아 원주민과 에버리진, 그리고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의 역사 등등 열거하면 열거할수록 그 야수보다 더 잔인한 백인들의 만행과 참혹함에 치가 떨리고 혈압만 올라간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해외 식민지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고 강제로 노동자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때문에 땅에 결박되어 있던 농민이 아니라 땅 위에서 살고 있던 농민들은 그 땅에서 쫓겨났다. 울타리치기 운동(인클로저)을 통해 공유지에서 내쫓긴 것은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토지는 사유화되고 공동체는 마침내 파괴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역설이지만 오히려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자유무역이 식량가격을 낮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농민들에 맞서 반(反)농민운동의 보루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마지막 식민지는 여성, 몸, 시간과 가족이라고 이야기 된다. 흔히 여성운동에서 보살핌까지도 ‘돌봄노동’으로 국가가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돌봄은 상품으로 전화해서 대가를 받아야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침략과 울타리치기 운동으로 파괴된 자립공동체의 회복, 돌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 사회의 재건이 오히려 시급하며 그것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동양의 개념은 비록 사(士)의 순서가 바뀌어야 하지만 이것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농업사회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 세계를 망친 자들은 바로 상인, 시장맹신자들이다. 그들은 흙의 사람들이 아니다.
성호 이익(李瀷)은〈논전화(論錢貨)〉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밭을 갈아서 먹고 베를 짜서 입으면 족한데 어찌 반드시 곡식을 내어 먼 지방의 산물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반드시 바꾸고야 마는 자는 사치에 힘쓰는 자이다…만일 전화의 유통을 막으면 비록 사치에 마음이 있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며 필경은 검소한 풍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유익하다…중국의 물자를 유통시키는 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옷이든 물건이든 골동품이든 한 사람이 이를 얻어서 쓰면 없는 자는 부끄러워하고 보는 자 역시 부러워한다. 만약 중국과 교역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죽는다는 것인가…우리나라에 8도가 있는데 옛날에는 각각 나라를 세웠으며 각 나라의 물자가 반드시 모두 유통은 안됐을 터이니 당시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았던가…《문헌통고》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용전(用錢)이 불편하다 하였다…그런데 돈을 쓰게 된 다음부터는 재물을 탐내고 거두기를 마음대로 하여 부익부하게 되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는가.
―이익〈논전화(論錢貨)〉,《성호잡저(星湖雜著)》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은 수만냥을 중국에 수출하고 대신 약재와 주단을 수입하였다.(박제가〈은〉,《북학의》) 성호의 주장은 자급자족의 농업사회에서 너무도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생각이었다. 나아가 성호는 토지의 빈익빈 부익부를 타파하기 위해 농민 한 가족에게 최소한의 일정한 토지를 주고 이것은 영구히 사고팔고 하지 못하게끔 하는 균전론, 한전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때문에 조선시대 실학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근대의 학문으로 자본주의 서구화의 시각으로만 뭉뚱그려 해석하던 것 또한 전면 재검토, 재조명해야 한다. 실학과 개화파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실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하는 조선 후기 개화파의 다수는 변법자강에서 더 나아가 전변(全變), 곧 모조리 서구로 바꾸자는 데로 나아갔고 결국 친일파로 변신했다. 갑신정변의 김옥균은 일본의 보호를 받다 암살당했다. 개화란 용어 자체부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아우프클레룽(Aufklrung), 인라이튼먼트(enlightenment)란 서구의 용어를 번역해 만든 용어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침략과 살육의 서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스스로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다. 압축성장이란 말이 뜻하고 있듯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냈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뼈를 깎아 코를 서양인들처럼 오똑 세우고 쌍꺼풀로 성형수술하는 인조인간들이 거리에 넘쳐나듯 그야말로 어이없고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서구의 생태주의자들 가운데도 여전히 인종편견주의가 짙게 깔린 서구중심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지역마다 서로 다른 종다양성의 자연에 뿌리박은 진정한 생태주의의 사고가 아니다. 나아가 서구의 생태주의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앵무새처럼 되뇌는 아시아의 일부 생태주의론자 또한 자신의 대지에 뿌리박은 풀뿌리 인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근대 초기에는 동도서기론이나 양무론, 변법자강론처럼 그래도 주체의식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피부색깔도 하얗게 탈색시켰을 정도로 주체의식이란 온데간데 없다. 시시때때로 민족주의가 분출하지만 그것도 일본과 중국, 나아가 일부이긴 하지만 미국에 대해서이지 서양 자체에 대해서는 극도로 내면화된 열등의식에 휩싸여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한중일 3국이 공히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아니 21세기에는 서구를 넘어 더 부강한 나라가 된다고, 동아시아의 세상이 되리라고 꿈꾸고 있다. 생산력 발전과 진보의 경제란 사실상 단시간에 지구자원과 에너지를 남김없이 착취해서 쓰레기로 쌓아두는 초토화 경제이며 동아시아가 서구를 능가하는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구가 하나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중국과학원의 한 학자가 에베레스트 산맥의 3분의 1이 철광석이라고 발표했다. 사실일 경우 중국은 곧 이 철광석 개발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였다. 데카르트는 얼마나 위대한 기계인가. 노자 장자나 묵자 대신 경제성장과 수출에 목을 매는 수십억 중국인들을 만들어 내다니. 지구온난화로 에베레스트 빙하가 녹고 있는 판에, 아니 갈수록 눈에 확연히 들어오고 있는 중국의 사막화 현상과 지하수 고갈 현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시아의 산업문명과 시장경제는 이미 그 정점에 도달해 있다.
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온세계를 뒤덮고 말았다. 그리고 세계는 이제 바야흐로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특히 에너지원인 석유고갈로 붕괴 직전에 직면해 있다. 이런 위기의식은 손톱만큼도 없는 게 한국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외의존율이 80%를 넘는 마당에 무엇을 더 개방할 것이 있다고 그들은 살길은 개방이라며 한미 FTA를 서둘러 체결하려고 한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연을 어떻게 더 망가뜨릴 수 있는지 국토의 균형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전국에 골프장을 짓고 경부운하를 만들고 또 박정희가 부활하고 방방골골 포크레인이 굉음을 울리고 시멘트가 넘쳐난다. 이미 한국인들은 관료고 정치인이고 대중들이고 모두가 데카르트 중독자들이고 모두가 눈먼 기계인간이 되어 버렸다.
3.
박현채(朴玄埰)라는 사람이 있었다.
1934년에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시대 국민학교 다닐 때 독서회에서 이미《자본론》을 읽은, 말하자면 천재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일찍이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질서정연한 파업행렬을 보고는 평생을 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광주서중으로 진학했다. 해방후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을 자신의 신념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박현채는 지리산에 입산, 소년전사 빨치산이 된다. 이때의 기록을 그는 죽기 직전에 회고록으로 남겨두었다.(《박현채 전집》1권) 그것은 체 게바라의 일기와는 또다른 울림을 사람들에게 던져준다.
조정래의《태백산맥》은 박현채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완성될 수 없었다고 작가 자신이 고백하고 있다.(고 박현채 10주기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 엮음《아! 박현채》2006년)《태백산맥》에 나오는 소년 빨치산 문화부 중대장 조원제는 다름 아닌 조정래가 그린 박현채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박현채는 광주에서는 더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전주고에 편입해서 1955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극도로 몸조심을 하면서도 대학원생으로서 1959년 한국농업경제연구회 연구원 모집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다시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농업경제연구회는 농림부 차관 출신 주석균을 중심으로 비판 성향의 농업경제학자들이 설립한 연구단체로서 그 뒤 한국에서 새로운 농업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정윤형, 안병직, 이대근 등의 후배들과 세미나를 함께 하면서 정치경제학 정착에 힘을 쏟기도 했다.
농업에서의 협업을 통한 자립경제와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주장하는 그의 민족경제론과 자립경제론은 1961년에 그가 쓴 석사학위 논문인〈자본주의와 소농경제〉에서 이미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1960년대 초에 당시 협업농을 실천하고 있던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협업농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실험을 실천하기도 했다.
4·19혁명 당시와 군사쿠데타 이전까지 짧았던 민주주의의 폭발 시기에도 자신의 전력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사회운동 조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1964년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면서 박현채는 구속되었다. 그는 이때 무죄로 석방되었다가 수괴로 낙인찍힌 도예종 은닉혐의로 다시 법정구속되었다. 이후 그는 기나긴 시간강사 보따리 생활과 그의 평생의 업인 왕성한 저술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박현채는 맑스 경제학을 단순 번역하는 강단 사회주의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 땅의 현실에 맞는, 이 땅의 민중들 삶을 개선하는 경제체제를 모색하는 실천가였다. 그는 또한 어떻게 그런 경제체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 실현가능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한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시선은 늘 땅에 뿌리박고 사는 농민들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민중경제론, 민족경제론, 자립경제론의 줄기찬 주창자였다. 그런 문제의식을 모아 1978년에 낸《민족경제론》은 민주화운동에서는 불모지에 가까웠던 강력한 대안의 경제이론이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1971년 대통령 선거 직전 나온 김대중 후보의《대중경제론 100문 100답》은 박현채를 중심으로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민족경제론과 자립경제론의 시각에서 현실에 맞게 고쳐 쓴 것이었다. 비록 1990년대 김대중의 경제론은 1970년대 대중경제론과는 전혀 다른 신자유주의 대중파산 경제론으로 변질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을 제기한 것도 박현채의 이런 현실주의 인식 때문이었다. 당시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내부에서 맑스와 레닌의 저서가 광범위하게 읽히고 또 일종의 교조주의 비슷한 경향이 발생하는 것을 일정하게 제어하고자 그는 한국의 현실 체제가 무엇인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이른바 ‘비판적 지지’ 입장을 택했던 박현채는 1989년에는 뒤늦게 조선대 교수로 취임하고 민족경제론과 자립경제론의 체계화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구소련과 동구,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고, 이윽고 1990년 초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박현채는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극도의 피로 증세를 보이다가 쓰러졌고, 마침내 1995년 민중의 경제학자 박현채는 수많은 민중들이 태어나고 죽은 이 땅으로 다시 돌아갔다.
박현채는 생태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1972년〈서울경제신문〉에 “경제발전과 공해”라는 제목으로 무려 13회에 걸쳐 연재를 했을 정도로 일찍이 경제성장이 자연에 미칠 재앙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다.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났을 때는 석유뿐만 아니라 전세계 천연자원의 실태에 관한 글도 여러 편을 썼다.
자원이용 능력의 개발과 인구증가에 따라 경제활동의 규모는 확대되고 그 귀결은 재생산 불가능한 자원의 탕진을 가져오고 있으며, 이를 대체하는 대체물의 개발은 전후의 신합성 물질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생산과정에서 공해를 낳고 그 폐기과정에서 곤란한 처리문제를 제기하는 등 또다른 공해를 낳고 있다.
―“경제발전과 공해 3”,〈서울경제신문〉 1972년 12월 8일(《박현채 전집》6권)
경제성장이 오늘날의 급격한 템포로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1차적으로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은 경제성장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이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일본경제의 고도성장이 초래한 공해의 일반화 그리고 자원제약은 일본경제가 갖는 구조의 반영이다…자원적 기초 없는 경제구조나 자국 부존자원에 알맞지 않는 생활양식의 모방은 지속적인 것으로 될 수 없다.
―〈공해와 고도성장과 국토와 자원위기〉,《일본연구》일본연구사, 1974년 3월(《박현채 전집》6권)
민족경제의 최종적 귀착점, 그 이상형은 자립경제이다. 그것은 종국점인 민족경제의 실현이 자기영토 안에서 자력에 의한 상대적 자급자족 체계의 실현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경제는 원초적으로 자립경제를 자기의 존립양식으로 해왔다. 이것은 경제의 존재양식이 본래적으로 폐쇄적인 상대적 자급자족 체계로 되고 외부로부터의 보완은 비경제적인 약탈 이상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립경제론과 민족경제론〉,《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돌베개, 1989년(《박현채 전집》1권)
박현채는 공해문제에 대한 글에서 공해문제의 해결책으로 플로우(Flow:당시 극단의 반공주의 정신병동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이란 말을 쓰지 못하고 이런 표현으로 애매하게 사용했다)의 사회화, 토지사유권 제한과 과학기술의 사회관리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석에서는 공해문제 또한 사회주의 혁명이 해결해주리라는 강한 확신을 피력하였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다시 박현채를 읽고 박현채를 재조명하게 만드는 까닭은 그의 자립경제론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그는 농업의 자립을 중심으로 놓는 경제체제를, 그리고 그 위에 내포적 공업화 전략으로 중소기업과 소비재생산 공업, 생산재생산 공업이 피라미드를 이루는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강조했다. 맑스 경제학을 신봉했으면서도 경제의 식민지화가 가져오는 불구의 위험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앞서 경고등을 켠 이가 다름 아닌 그였다. 박현채의 시선은 늘 이 땅과 자연과 농민들에게 가 있었으며 이 점이 바로 맑스와 박현채를 확연히 구분되게 하는 표시등이다.
맑스는 1853년〈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보낸 일련의 기고문을 통해 영국의 인도정책을 분석하면서 인도의 촌락공동체가 갖고 있는 자급자족의 부동성을 깨뜨리는 것은 사회발전과 진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맑스의 식민지론은 식민지 수탈의 야만성을 고발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식민지가 근대화된다는 명제로 유명하다. 그의 이런 식민지 근대화론은〈공산당선언〉에서 밝힌 바 부르주아지가 세계시장을 개척함으로써 농민을 농촌생활의 무지로부터 구해냈다고 하는 언명처럼 역사유물론, 역사발전 단계론에 확고한 뿌리를 두고 있다. 맑스는 애초부터 자립경제와 농업을 낙후한 미개 경제로 인식한, 유럽에 살고 있는 서구 백인 산업주의자였다. 뉴라이트를 표방하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안병직, 이영훈 등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사실상 맑스를 추종하는, 몸은 한반도에 있으되 정신은 서구나 일본에 가 있는 사이비 좌파 맑스주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박현채는 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이 땅에서 자란, 이 땅의 민중들의 삶에 뿌리를 둔 경제학을 하고자 했다. 사실《박현채 전집》을 발간하면서 극소수를 제외하고 지난날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자립경제론을 지지했던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의 백팔십도 달라진 인식을 확인하는 과정은 배반의 현실에 대한 고통스런 확인 과정이기도 했다. 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낡은 자립적 민족경제론을 붙들고 있을 까닭이 무엇이냐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당당하다 못해 윤기가 너무 흘러넘쳤다. 그들에게 식량과 에너지 위기, 기후변화의 위기를 얘기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박현채 전집》을 내야 할 당위와 의무가 생겼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때 우연히 읽게 된 리처드 보일의〈자급의 지혜〉란 짧은 글은 많은 위안과 시사를 주었다. 리처드 보일은 70년 전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쓴 글, 곧〈국가의 자급자족〉을 들추어냈다. 이 글은 무제한의 성장과 대중소비사회를 출현시킨, 이른바 케인즈경제학을 창시한 사람이 쓴 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케인즈의 전혀 다른 측면과 생각을 전하고 있다.
지금 반세계화 진영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는 케인즈의 유일한 구절은 이렇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간의 경제적인 얼크러짐을 최대화하려는 이들보다는 최소화하려는 이들에게 공감한다. 사상, 지식, 예술, 환대, 여행―이런 것은 그 본성상 국제적이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편의적으로 가능한 경우에는 재화는 모두 국내에서 자급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융은 기본적으로 국가적이어야 한다.”…“한 나라가 농업을 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여유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그는 그 강연에서 말했다. “예술이나 발명, 농업이나 전통을 자급해내지 못하는 나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이다.”
4.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자본주의 기업들과 그들의 돈을 받고 논문을 쓰는 이른바 전문가들은 석유고갈과 자원고갈,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사람들에게 ‘양치기 소년’이라고 비난한다. 아직 석유는 수백년 쓸 정도로 많이 남아있으며 철과 기타 광석도 심해와 지구 곳곳의 오지에 풍부하게 남아있다는 얘기다. 기후변화도 오히려 농업생산에는 축복이라고 강변한다.
인광석 수출로 자급자족의 낙원이 파괴되고 만 나우루 섬의 실화는 지구의 미래를 이미 경험한 이스터 섬의 현대판 우화이다.(칼 맥대니얼·존 고디 지음, 이섬민 옮김《낙원을 팝니다》여름언덕, 2006년) 우리는 이 실화를 경청해야만 한다. 불편한 진실을 불편하다고 비판하고 외면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의 풍요는 다른 나라 인민들을 착취한 핏자국 넘치는 풍요이며 사실은 말기에 이른 극심한 부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원고갈과 함께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지속불가능한 풍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경제학은 복잡하고 어렵다는, 그리고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단순할수록 진리에 더 가깝다. 경제학은 단순할수록 인민에게 더 좋다. 식량과 에너지를 자립하지 못하는 사회는 석유공급 축소나 국제 식량가격 폭등이라도 생기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폭풍 속에 휩싸이고 만다. 이것은 상식이며 바로 이런 상식의 경제학이 민중의 경제학이다. 자립경제는 다름 아닌 아주 단순명쾌한 우리사회 인민들의 원칙이다. 북한 인민의 대량 아사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남한의 미래인 것이다.
전통 농업사회에서 노동은 삶의 일부였고 땅은 자연의 일부였다. 삶과 자연은 분리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분리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명백히 기괴하고도 결코 행복한 현실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원시부족에서 보이는 호혜와 재분배, 몇십년 전 우리의 농촌에서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나눔과 베풂이 복원되는 새로운 농업공동체는 그러므로 시장경제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삶과 자연의 결합이다. 그것이 혁명이건 전환이건 말이다.
어떤 사회건 그 구성원이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사회는 없었다. 그러나 풍요를 구가하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바뀌자마자 이런 끔찍한 일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굶어죽는 사람은 지금껏 계속 이어지고 있다.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 재해로 드러난 미국의 빈곤층 수는 자그마치 3천7백만명에 이른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의 사용이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고 급기야 이제는 인간도 비정한 모르모트 기계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총환자가 문제가 되는 시점에 이미 도달해 있다. 도시는 이미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거대한 병원으로 변질되고 있는 중이다. 기계들이 녹슬고 있는 셈이다.
서구 근대인들은 서구 이외의 모든 사회를 야만과 미개 사회로 취급했다. 특히 ‘원시사회’는 무문자와 생계경제가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생계경제란 그야말로 근근이 겨우 먹고살 식량을 확보하는 사회, 구성원 전부가 늘 굶주림에 노출되어 있고 사소한 가뭄이나 자연재해에도 기아에 시달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아와 끊임없이 투쟁하는 그런 사회라고 서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대중들에게 선전했다. 그것은 히틀러나 부시 같은 빅브라더의 거짓 선전이었다.
실제 수많은 민족지 조사연구 결과 고대사회, 원시사회는 최초의 풍요사회였다. 그들 원시인들은 하루에 서너시간만 일하고도 먹고 남는, 연간 필요소비량 이상의 잉여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발달시켰다. 원시사회는 생계경제가 아니라 풍요의 잉여경제였다. 그것도 잉여를 끔찍한 대규모 전쟁이나 쓰레기로 낭비하는 현대 산업문명과는 달리 잉여를 이웃 공동체와 서로 나누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최적의 생태순환형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초기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농민들, 전세계 대다수 인민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침략 아래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절박하게 자립경제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자식들을 굶겨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농업사회, 자립과 자치의 농업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자립경제의 핵심은 식량과 에너지의 자립, 시장경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소농 중심의 자치공동체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다.
자립경제란 힘을 동원한 투쟁으로 쟁취하는 그런 종류의 제도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립경제는 깨어있는 자유인들의 풀뿌리 직접행동으로만, 진정한 민주주의의 직접 실천으로만 가능한 경제이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플러그를 뽑는 직접행동, 무엇보다도 자신의 식량을 자신이 농사짓는 일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농민이 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지금은 농민이 ‘멸종 직전’이기에 먼저 깨어있는 사람들부터 농민으로 전환하는 일이야말로 자립경제와 자치공동체 복원의 지름길인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영화〈매트릭스〉를 보고 나서 하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적어둔 말이 있다. 매트릭스를 지키는 스미스 요원이 모피어스를 취조하면서 한 말이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연구한 게 있는데, 너희 종을 분류하면서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지. 인간은 순수한 포유류가 아니었어.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데, 너희 인간들은 그렇지가 않아. 너희들은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자원을 소모해버리고는 생존을 위해 또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지구상에 너희와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유기체가 있어. 그게 뭔지 알고 있나? 바로 바이러스지. 인간은 질병이야. 지구의 암세포지. 너희 인간은 전염병이고 우리는 치료제지.
오래 전 어느 책을 보면서 인간을 암세포에 비유한 글을 보고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반드시 지구의 암세포만은 아니다. 이런 사고조차 사실은 서구 산업문명의 인간관에서 비롯된, 사람을 숫자로 파악하고 하찮은 기계로 폄하하는 끔찍한 사고이다. 전통 농업사회에서 사람은 자연의 균형자였으며 실제로 수많은 농업공동체들은 사람 하나하나를 귀한 존재로 여기고 그렇게 대해 왔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밤, 나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시골동네에 켜 있는 가로등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 차디찬 공기를 허파 속에 넣고 한참을 걸어서 깜깜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제서야 비로소 별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아마도 우리는 스스로 산업문명의 불을 끄고 어둠의 나락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삶의 심연을 비로소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자립경제로의 전환이 시작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